1945815일 추축국의 마지막 세력인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당시 중국은 1937년 길게는 1931년부터 일본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차 국공내전에서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던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중일전쟁을 시점으로 세력 확장과 군사력의 증대를 이루어 냈다. 1940년 말에는 팔로군 40만 명, 신사군 10만 명으로 총병력 50만 대군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당건설도 급진적으로 진행하여 19374만 명이었던 당원이 1940년에는 8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45년에는 거의 120만 명의 대군을 마오쩌둥이 이끌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주의 이론과 민족주의적 호소에 따라 세력을 결집시켰던 공산당의 능력도 있었다. 이점에서 중국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민심을 잡지 못한 점, 특히 민중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자국의 봉건 세력과 부르주아지들을 대변하였다는 점에서 민중이 공산당과 마오쩌둥에게 더 많은 지지를 보낸 점도 있었다. 따라서 국민당이 정규전에서 전투를 많이 치르더라도 전략적으로 공산당이 민중의 지지를 더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했지만, 중국 대륙의 상황은 위태로웠다. 루스벨트 사후 미국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초기에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화해시키는 노선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은 1941년 국민당이 주도한 신사군 사건으로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19459월 충칭에서 협상을 가지고 축배를 들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중국으로 와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며 공산당과 회담하는 정책을 펼쳤었다. 194511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군인인 조지 C. 마셜 장군(George C. Marshall)을 중국 주재 대통령 특사를 임명하여 장제스에게 공산당과의 화해 및 중재하도록 했다. 조지 마셜 장군은 194512월 중순 양당 대표 모두가 중재를 받아들이게 했는데, 이 세 가지 목표에는 내전 중지, 정치협상회의 개최 및 연합정부 수립 논의 그리고 국공 양당의 군대를 하나의 국가 군대로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들은 1945년 말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19451114일 미국 전함을 타고 산해관으로 이동한 국민당 군대는 공산당군을 공격했고, 미군이 중국 본토에 상륙하기도 했었다. 당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민심을 사로잡아서 세력을 확장하여 120만이라는 대군을 만들었지만, 군사력에 있어서 국민당의 군대는 430만으로 공산당 보다 군대가 최소 3.5배나 더 많았다. 1946년 당시만 보더라도 그러했다.

 

양측의 대립은 1946년 만주에서 깊어졌다. 19458월 소련군은 만주 지역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그 지역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19464월 소련군이 철수를 했는데, 소련군이 철군한 지역을 중국 공산당이 그대로 접수해나갔다. 이것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서로에 대한 불신도 깊어졌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7월 국민당 정부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구 공산당의 거점지역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군사적 공격을 감행했다. 2차 국공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양측의 대립이 나타난 근본적인 이유는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가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이 너무나도 달랐다는 것이다. 전쟁 초기 전세는 중국 국민당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병력은 점차 늘어났다. 그 이유는 바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너무 부패하고 폭압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장제스 정권은 공개 처형과 비밀경찰로 유지되던 일당 독재 국가였다. 또한 국민당 정부에서의 대책없는 화폐 남발로 인플레이션은 극에 달했고, 물가 상승률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민중 대다수를 이루고 있던 농민들의 토지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따라서 제2차 국공내전에서 압도적인 병력숫자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세력을 더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장제스 정권의 태생적인 부정부패가 주원인이었다.

 

1948년에 들어서면서 제2차 국공내전은 중국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국민당에게는 최대의 지원국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해 연합했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19463월 영국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에서 철의장막 연설을 하면서 냉전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미국의 반공주의자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Truman)19473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언하면서 냉전은 더 심화되었다.

 

해리 트루먼이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에 따르면 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미국이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목적의식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행위였다. 이런 논리에 따라 해리 트루먼은 이른바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우익 세력들을 지원했다. 물론 그 우익세력은 반민중세력이었고, 이들은 제주4.3항쟁에서의 친이승만세력처럼 무차별 방화와 학살을 저질렀다. 즉 그런 행위의 정당화가 바로 트루먼 독트린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공산당과 내전중인 장제스의 국민당을 지원했다. 194710월 미국은 국민당에게 2,77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해줬다. 1947년 말 장제스는 미국에 4년간 15억 달러를 원조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에 트루먼은 194821857,000만 달러를 지급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었다. 미국은 장제스 정권에게 막대한 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부패한 장제스 군대에게 20억 달러나 원조했으며,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와 장비로 전투를 전개했다. 미국제 탱크와 항공기, 대포로 무장했음에도 1948년의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는 공산당에게 패배하고 있었다.

 

1949년부터 중국 공산당은 통일을 위한 최종적인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미 국민당 정부는 19489월부터 19491월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략 150만 명이나 되는 병력 손실이 있었다. 1949420일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역사적인 양자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국민당정부의 심장인 난징과 상하이로 진격했다. 1949424일 난징이 함락되고, 527일에는 상하이가 점령되었다. 이렇게 국공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은 194910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현재의 중국이 건국되었다.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패배했다. 1949년은 미국에게 있어 참으로 충격적인 해였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원자폭탄을 개발한 미국은 불과 4년 뒤 자신의 적국인 소련이 기존의 원자폭탄보다 더 강한 수소폭탄을 개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9101일에는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 이러자 미국에서는 극단적인 이데올로기가 표출되었다. 바로 매카시즘이다. 아무튼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내전의 승리자는 공산당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던 장제스는 무능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하며, 그가 이끄는 국민당의 패배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2차 세계대전 말기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준비했던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자 일본 본토에 군대를 주둔하게 되었다. 즉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장군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지휘하는 총사령부(GHQ)가 발족되었다. 미국의 일본 점령은 직접적인 군정 통치가 아닌, 기존 일본 정부의 행정기구를 활용하는 간접 통치 형태를 보였다.

 

더글라스 맥아더 휘하의 연합국 총사령부는 19459월 이래 강도 높은 전후 개혁을 추진했다. 우선적으로 군수 생산의 전면 중지, 일본 제국의 육해군 해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체포 등과 같은 군사적 무장해제 조치가 단행되었다. 이리하여 시데하라 내각이 성립했는데, 이 내각은 5대 개혁지령을 실행하여, 인간선언, 공직추방, 전쟁포기에 관한 기초적 발안을 만들었고, 극동국제군사재판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당시 맥아더는 일본 주둔 GHQ의 총책임자로써 개혁구상이 있었는데, 일본의 정치 행정적 개조, 비군사화, 경제적 비무장화, 배상 방침, 재정금융 방침 등이 그의 개혁구상이었다. 헌법의 자유주의화를 추진했고, 부인참정권을 부여했으며, 심지어 노동조합 결정을 장려했다. 일본 제국 시기 있던 비밀경찰과 치안유지법, 특고경찰 등을 폐지했고, 정치범들을 석방했으며, 교육제도도 개혁했다. 또한 일본 내의 정당 결성도 촉진 시켜 1948년엔 사회당 내각이 성립하도록 만들기도 했었다. 즉 맥아더는 이런 간접통치를 통해서 제국주의 일본은 소위 자유민주주의 일본으로 바꾸고 싶어 했던 것이다.

 

특히나 맥아더가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라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그가 단행한 전후개혁에서 노동조합을 장려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긴 했지만, 그가 보기에도 당시 일본은 굉장히 군국적이었기에, 그러한 군국주의적인 요소를 희석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장려했다. 그러나 전후 초기 GHQ가 했던 개혁은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우선적으로 맥아더측에서 했던 개혁이 간접통치에 기반한 것이었기에 전쟁전의 관료제가 되살아나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전범들과 마찬가지로 적잖은 책임이 있는 히로히토 천황을 절대로 처벌하지 않았다. 또한 극동군사재판도 독일에서 실행되던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달리 많은 전범들이 풀려나고 사면받기도 했다. 특히나 731 부대를 창설하여 온갖 반인륜적 악행을 저질렀던 총 책임자 이시이 시로같은 이들이 처벌받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한건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고 처벌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그가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믿음을 일본사람들에게 주었다는 것은 나름 긍정적인 의의가 있다.

 

더 나아가 1947년 일본에서 지방자치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 경찰법과 민법개정이 이루어졌다. 그 시기 일본에선 경제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으로 재벌 해체와 독점 금지 심지어 농지 개혁과 노동 개혁까지 시행되었다. 어떤 면에선 자유주의적이지 못하고 일정부분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들어간 이 조치는 어디까지나 군국주의의 영구 배제를 위한 경제의 비군사화가 맥아더와 미국의 점령정책 목표였다. 1947년에 제정된 교육 기본법은 군국주의 교육을 부정하고 민주주의 이념과 기회균등의 교육을 표방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도 미소냉전이 격화되면서 점차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특히나 1949년 스탈린의 핵개발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통일은 맥아더와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을 반공진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50년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전후 개혁 초기에 보였던 조치들은 완벽히 수포가 되게 되었고, 맥아더는 일본은 미제 무기를 생산하는 전쟁기지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일본 공산당과 같은 진보 정당들을 탄압하게 되었고, 일본 자위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가경찰 예비대를 창설했다. 이는 확연히 전후 초기에 했던 것과는 다른 조치였다. 특히나 1952년 미국과 일본이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인하여 일본은 전후 초기 일본의 모습을 벗어 던졌고, 한국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전후복구와 더불어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며, 1954년에는 자위대를 창설하여 적잖은 군대까지 보유하게 된다.

 

일본의 전후 개혁에 대해 다시 정리하자면 전후 초기에는 소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겠다던 맥아더와 미국의 바람에 따라 탈군국주의화에 기반한 개혁들이 진행되었다면, 1949년 냉전이 격화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떻게 보자면 정치 체제만 소위 다당제 민주주의를 유지한 과거의 일본으로 흘러갔다. 이는 미소 냉전이라는 혼란과 긴장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동아시아적 문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9603.15 부정선거를 통해 장기집권을 계획했던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공화국이 무너진 이후 대한민국에는 장면 내각과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되며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4.19 혁명의 불씨는 제1공화국 몰락 이후 이승만 정권 시기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장면 내각 또한 이들과 노동운동에 대한 대응은 강경한 처지였다. 당시 한국은 매우 가난했다. 1공화국 시기 이승만을 포함한 친일 지배계급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한국의 경제는 휘청거렸고, 지금당장이라도 북한에 흡수 되도 무리가 아닐 지경이었다.

 

그러던 1년 뒤인 1961516일 한국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5.16 쿠데타였다. 516일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장교 250명과 사병 3,500명은 한강에 진입하여 새벽 3시에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2시간 뒤인 새벽 5시에 첫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밝히는 한편 6개항의 혁명공약을 선포했다. 5.16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와 그 반란세력은 다음과 같은 공약을 선포했다.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 또 다시 강력한 반공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이었다. 5.16 쿠데타로 한국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이 새로운 정권에 관심을 가진 두 나라가 있었다. 바로 북한과 미국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한국의 적국이었던 북한의 경우 박정희가 과거 남로당에 있었던 경력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물론 5.16 쿠데타 이후 새 정권이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엔 수도 평양에서 반미집회를 가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북한의 김일성은 박정희 친형 박상희의 절친 이었던 황태성을 밀사로 내려 보내기도 했다.

 

박상희의 친구였던 황태성은 일제시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조선 공산당과 남로당에서 활동했고, 여운형이 창설한 조선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에서도 활동했던 사회주의자였다. 1946년 대구 10.1 항쟁 이후 월북한 황태성은 1961년 박정희를 만나기 위해 밀사로 남한에 파견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의 남하는 간첩행위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목적은 박정희를 설득하여 최소한 남북연방제에 대한 합의를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를 간첩죄로 몰아 1963년 형장의 이슬로 보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건 그를 밀사로 보낼 때 김일성의 신임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확실한 건 박정희가 이렇게 손쉽게 자신의 친형의 친구를 사형시킬 것을 북한이 예상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또한 한국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아이젠 하워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미국 역사에 있어 20세기의 뉴프론티어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우수한 성적과 더불어 인기가 많았던 케네디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라는 논문으로 명성을 끌었던 인물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PT-보트 부대의 해군으로 참전했던 그는 전역 이후 미국 정치에 발을 담갔던 케네디는 1960년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매카시즘 열풍을 전후로 해서 반공주의를 표방했다면, F. 케네디는 매카시즘이 많이 완화된 상태에서 미국 대통령으로써 반공주의를 추구했다. 케네디가 대통령이던 시절은 비록 매카시즘의 광풍은 사라졌지만, 미국의 반공주의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미국인들로부터 지지를 받던 시기였다. 1961년 소련의 흐루쇼프는 베를린에 장벽을 설치했고, 2년 전인 1959년 미국의 옆 나라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이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1년 뒤인 1962년에는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라 하여 전 세계가 제3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또한 베트남에서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들이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혁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속에서 존 F. 케네디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반공주의적 정책을 추진했다. 즉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는 존 F. 케네디가 반공정책을 추진하는 과정 속에서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거기다 5.16 한 달 전에는 소련에서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탄생시켰고,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 피그스만 침공은 대실패로 끝난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케네디의 반공주의는 열이 올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실제로 존 F.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을 전면화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반공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에서 전략촌 소개나 네이팜 폭탄 투하 그리고 고엽제 살포와 같은 전쟁범죄행위를 실행에 옮겼었다.

 

19614월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포착한 미국 CIA516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물론 미국은 5.16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했던 일중 하나에는 미국으로부터 정권의 승인을 받는 것이 있었다. CIA를 통해 한국의 상황과 박정희의 이력을 파악하고 있던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를 의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박정희가 해방 이후 남로당에 가입했던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에게 있어서 케네디 대통령을 자신의 편으로 설득시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19611111일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박정희는 1114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백악관에서 1시간 20분 동안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신의 반공관을 증명하고자 했다. 케네디 또한 이러한 점들을 이용해서 한국을 반공의 보루로 만들고 싶은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며 전형적인 친미반공적인 면모를 자발적으로 입증해주었다. 당시 박정희의 방미길에 동행했던 리영희 기자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정희가 케네디와 회담할 때 보인 비굴한 태도에서 실망감을 더하게 되었다. 케네디의 오만방자한 태도도 꼴보기 싫었지만, 박정희의 비굴한 태도는 목불인견이었다. 박정희는 금색 도금 테두리의 짙은 색안경을 끼고 빳빳한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끔 다리를 반듯이 모으기도 하고 꼬기도 하고 그랬다. 마치 군주 앞에 홀로 불려나온 신하처럼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는 미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동북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에서 한미, 한일 관계의 마지막 꼭짓점을 마무리 짓는 중요한 인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케네디는 박정희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겠다 자진한 점을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이것은 박정희가 미국이 만든 아시아의 반공주의 전략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얘기를 역으로 얘기하자면, 박정희는 미제국주의자 존 F. 케네디가 추진하던 베트남에서의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동참할 의지를 표명한 것이며, 미제국주의의 동아시아 반공전략에 적극 협력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케네디가 그를 지지한 것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 전략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지, 세간에서 얘기하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탁월한 외교력따위의 것이 절대로 아니다.

 

참고문헌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창작과비평사, 1999

 

박정희 평전, 전인권, 이학사, 2006

 

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 김삼웅, 가람기획, 2010

 

박정희 평전, 김삼웅, 앤길, 2017

마르크스주의로 본 한국 현대사, 한규한, 책갈피, 201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박진홍 2023-06-02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붉은광장이나 내용에 리영희기자.. 이사람은 철저히 공산주의시점에서 글을썼다. 빨갱이색끼

NamGiKim 2023-06-16 23:01   좋아요 0 | URL
ㅇㅇㅇ 빨갱이 맞음.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세계 고통받고 있는 현재 2021년은 21세기의 시작을 알린 9.11 테러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20주년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거나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20019월에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21년인 현재까지도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다.

 

코로나 1차 유행이 있던 20202월 전쟁을 하고 있던 미군측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측과 이른바 도하합의를 성사시켰고, 올해인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전 미군을 철수시키기로 했다. 2020년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던 미군은 대략 12,000명이었는데, 철수를 진행하고 있는 현재는 대략 3,500명이 남아 있다.

 

미군 500명 이상이 전사했던 2010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숫자가 11만 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현재는 많이 철수한 시점이다. 2의 베트남 전쟁이라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은 과거 존F.케네디와 린든B.존슨 그리고 리처드 닉슨이 밟았던 절차를 거의 그대로 밟아온 것 같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상황은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 전쟁에서 추진했던 닉슨 독트린과 비슷하다.

 

1968년 구정 공세 시기 남베트남 주둔 미군은 549,000명을 넘겼는데 1973년 파리 평화회담 이후 남베트남에는 아주 극소수의 고문단만 남았던 역사를 생각하면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과거 베트남 전쟁의 상황과 소름끼칠정도로 닮은 부분이 있다.

 

1973년 파리 평화 협정 이후 완벽히 철수한 이후 2년 뒤에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는데, 올해 미군이 완벽히 철수하고 현재 미국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권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분명히 올해 안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완벽히 철수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완벽히 철수하면,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그랬듯이 약간의 미군고문단이 대사관을 중심으로 남을 것이다.

 

미군 정규군이 철수하면 탈레반 측은 자신들이 확보한 거점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현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을 상대로 전투에 총 공격에 나설 것이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군벌 집합체에 소수민족의 통합도 안된 상태다. 거기다 이들의 부정부패는 과거 남베트남의 친미관료들 못지 않다. 어쨌든 탈레반은 총공격에 나서 아프가니스탄을 단기간에 접수할 것이다. 즉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제2의 베트남 전쟁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북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탈레반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민족해방을 싸웠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을지는 몰라도 북베트남이나 베트콩의 경우 남녀평등과 부의 불평등 해소, 식민주의 타도 그리고 사회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라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반미 반공이다. 또한 희잡을 쓰지 않은 여성의 얼굴에 염산을 뿌릴정도로 전근대적인 이들이다.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 분명히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조치들이 취해질 것이다. 또한 관념적이기 짝이 없는 종교적인 교리를 인민들에게 강요하고 전근대적인 가치들을 사회영역에 뿌리내릴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탈레반을 지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경쟁에서 일어난 침략전쟁이라는 점을 절대로 잊어선 안된다. 그리고 이들이 과거에 주장했던 아프가니스탄의 무슬림 여성들 해방이나 민주주의 전파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지를 알아야 하며, 이런 점에서 역시 미국을 지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그런 누구를 지지해야 하느냐?"와 같은 질문 말이다. 구체적인 대안이 없는 건 맞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탈레반이나 미국을 지지하는건 좌파들이 해서는 안 될 짓이다. 물론 미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이들의 투쟁을 방어하고 옹호해야한다. 그러나 이것이 탈레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동맹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답은 중동지역에 남아있는 잔존좌파들을 지지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빈약한 대답이다.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에선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2010년의 킬 팀 사건이나 2013년의 칸다하르 학살 그리고 그외에 미군 폭격으로 인한 아프간 민간인 학살 등에 있어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의 폭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제국주의적 전쟁범죄들은 비판받아야 한다. 어쨌든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평화의 길이 열리는 것 같다. 이들이 더 이상 전쟁으로 고통받지 말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이석기 전 의원님의 누님이신 이경진 선생님을 뵙고 왔습니다. 청와대에서 국가 보안법 1인 시위 할때 저에게 ˝뜻있는 청년이라며˝ 밥을 사주셨던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던 어제 아침부터 슬펐습니다.

그리고 고인에 대한 인사를 들이고 추모제를 함께하는 과정에서 장례차 감옥에서 나온 이석기 전 의원님 직접 보았습니다. 8년째 감옥에 계신 이석기 의원님을 직접 볼 수 있어서 기쁘기도 했지만 흰머리를 보니 순간 감옥에서 고생한게 떠올라 슬프기도 했습니다.

저는 2019년부터 국가보안법 철폐 시위와 이석기 의원 석방 집회를 참여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이분들의 뜻을 받들어 1948년 여순항쟁에서 이승만 파시스트 도당과 미제가 이 분단조국에 만들어낸 파쇼헌법 국가 보안법을 철폐하기 위해 전진할 겁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Redman 2021-03-21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겨울호랑이 2021-03-22 0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