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after 4,000 years of struggling against nature and foreign invaders and the last 25 years, prior to the revolution, of struggle against French colonialism. I don’t think that the people of Vietnam are about to compromise in any way, shape, or form about the freedom and independence of their country, and I think Richard Nixon would do well to read Vietnamese history, particularly their poetry, written by Ho Chi Minh.(베트남 인민은 4천년 동안 자연과 외국 침략자들을 상대로 줄기차게 싸워왔습니다. 프랑스와 식민투쟁에서도 이겼습니다. 베트남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스스로 쟁취해나갈 것입니다. 리차드 닉슨이 베트남 역사와 베트남의 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호치민이 쓴 시를 잘 읽어 음미했으면 합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1972년 북베트남을 방문한 반전운동가이자 여배우인 제인 폰다(Jane Fonda)가 했던 연설이다. 베트남 전쟁이 사실상 미국의 패배로 끝나가던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를 목표로 함과 동시에 이미 베트남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이미 구정 공세를 통해 미국 내에서 격해진 반전운동은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도록 만들었고, 미녀배우로 유명했던 제인 폰다 또한 그 중 일부였다.

 

반전운동이 격해지는 과정에서 반전 시위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또 다른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현재도 국부로 평가받고 있는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다. 반전운동 시위대들 중에는 적잖은 이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 당시 미국에 맞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호치민이라는 인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1971년 펜타곤 직원인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미국의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세상에 폭로하면서 그 전쟁의 추악함은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의 민중과 대중적인 독립운동 조직은 호치민과 그가 조직한 베트민(Viet Minh) 뿐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을 방해하기 위해 부도덕한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적으로 규정되었던 호치민은 베트남의 상징과도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1890519일 응에안 성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반프랑스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1911년 베트남을 떠나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경험을 쌓았다. 1919년 그는 베르사유 회담 당시 베트남 인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호소하기 위해 파리 베르사유 궁전까지 가서 이를 청원했던 인물이었다. 이후 레닌의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되었으며, 모스크바로가서 코민테른 요원으로 훈련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 중국에 가서 활동하며 1930년 홍콩에서 현재의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던 인물이다. 그는 30년간의 해외생활을 보냈고, 30년 동안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 맞서 독립은 쟁취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는 국제정세를 읽고 이를 잘 이용하는 실용적이고 탁월한 지도자였으며, 무엇보다 30년 동안의 해외생활을 했던 인물이었기에, 1949년 스탈린을 만나러 소련을 방문한 것이 첫 해외방문이었던 마오쩌둥하고도 확연한 차이가 있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빌려서 읽게 된 세계 지도자 열전 시리즈 중 하나인 호치민에서는 그가 미국에 있을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데,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호치민은 주로 주방 요리사나 식당의 심부름꾼 노릇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가 받은 인상은, 미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서로 다른 계급들이 향유하는 자유의 정도가 각자의 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출처: 호치민 p.31

 

194130년 만에 베트남에 돌아온 호치민은 자신의 해외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베트남을 침략한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며 무장투쟁에 나섰는데, 그 조직이 바로 베트남 독립 동맹 즉 줄여서 베트민이었다. 당시 호치민은 중월 국경지대인 까오방의 한 동굴에서 혁명투쟁을 시작했는데, 책에 나온 그 내용은 상당히 감동적이면서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곳의 밤은 지독히 추웠다. 너무나 추워 잠조차 들 수 없는 밤이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장작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에 웅크리고 앉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혁명의 과정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호치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는 또한 자기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고자 인근의 산봉우리를 카를 마르크스 산정이라 이름 붙이고, 근처의 개울을 레닌 시냇물이라 명명했다.”

 

출처: 호치민 p.65

 

호치민은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맞서 싸웠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다시 침략한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는 온갖 화력과 병력을 동원하여 베트민을 공격했지만, 호치민과 그를 따르는 위대한 명장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은 게릴라전으로 맞서 싸웠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에서 프랑스군의 최정예 병력 11,721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결국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제네바 회담 이후 남베트남에 들어선 국가는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고, 1949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내세웠던 바오다이 황제(Bao Dai)의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을 계승한 나라였다. 단순히 바오다이 황제에서 그가 수상으로 내세웠던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 대통령이 되었을 뿐이고, 프랑스 대신 미국이 그 나라를 지원했을 뿐이었다. 책 또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결국 베트남 전쟁의 명분에서 당연히 호치민과 공산당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그러한 점에서 베트남 전쟁 또한 호치민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책에는 베트남의 역사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의 분석이 인용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실상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3개월 전에 이미 두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북부의 공산주의 세력과 남부의 프랑스 세력이 그러했다. 이후의 대립 투쟁은 궁극적으로 거기에 기초하여 전개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처: 호치민 p.90

 

즉 미국이 치른 베트남 전쟁 또한 이런 맥락이 존재하는 것이며, 호치민이나 북베트남 공산당 그리고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outh Vietnam)은 프랑스에 이어 미국에 빌붙은 민족반역자들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의 명백한 본질이다. 심지어 이 책은 미국에서 열전 시리즈로 만들어 진 것이며, 미국인의 시각에서 보아도 베트남 전쟁 자체가 결과적으로 명분이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에게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수백만이나 되는 베트남인들을 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기에, 당연히 지금까지도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엄밀히 따지자면, 어린 시절 읽게 되는 위인전에서 벗어나 인물의 생애를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 중 하나다. 물론 미국에서 출판된 책이기에, 다소 미국 편향적인 시각이 투영되어 있다. 이번에 읽은 호치민의 경우에도 현재는 과장으로 드러난 토지개혁 10만 처형설이 그대로 언급되긴 하지만, 내용 자체는 대체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됐다. 물론 북베트남 정권의 토지개혁은 호치민 스스로가 강도높은 자아비판을 했고, 여러 연구와 베트남측 문서가 공개되면서 희생자 수치가 10만 명이 아닌 3,000명에서 15,000명사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 책이 나온 연도가 냉전이 끝나던 1990년이라는 점과 다소 미국 우파적 시각에서 서술된 점을 고려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호치민은 한 평생을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항일, 항불 그리고 항미투쟁을 전개한 구국의 80년 생애를 보냈으며,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196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을 계승한 공산당 정치인들과 민중은 6년간의 항전끝에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했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투쟁적 생애가 베트남 인민들로 하여금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책 마지막 구절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다.

 

호치민은 살아생전 전쟁의 끝맺음을 보지 못했다. 196993,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여하튼 그는 두 대륙에 걸쳐서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킨 셈이다. 그는 1966년의 라디오 대담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자신의 전 생애를 조국의 자유화에 바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해방정국은 한국 현대사의 시작점을 알리는 시대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 한반도는 북쪽 지역에는 소련군이 남쪽 지역에는 미군이 들어와 38선을 기점으로 사실상 남북 분단됐다. 물론 이 시점까지만 해도 남과 북이 왕래할 수 있는 길은 있었으나, 1948년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러한 길까지 막혔고,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이어졌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입성한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48년에 수립됐다.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됐고, 북한하고는 다른 이른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른바 자유주의 국가(물론 자유주의 국가도 아니지만)가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정부수립 과정과는 달리 남한에서는 이대올로기적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었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김두한과 같은 우익깡패 조직들이나 족청 그리고 서북청년단 같은 이들이 무차별 테러리즘을 선보였다. 독소전쟁 초기 소련을 침공했던 히틀러 파시스트 군대 중 그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은 무차별적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폭력을 휘둘렀는데, 그런 역할을 바로 서북청년단이나 이범석의 족청 그리고 김두한의 우익깡패조직들이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이승만의 주된 지지층은 한민당과 같은 지주계급으로 친일적 성향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정국 초기 가장 먼저 움직인 세력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였다.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에 걸쳐 활동을 하며 해방 정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9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면서, 이른바 맥아더 포고령이 한반도 이남 전역에서 실행이 되었는데, 이는 미국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써 들어온 것을 뜻했다. 당시 미군정의 포고령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따라서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운형이 선포한 인공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어느것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를 이용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설 부역한 경찰을 찾아내 다시 경찰로 활동하게 해 경찰 간부 대부분을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워졌으며,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이나 하판락 그리고 간도 특설대 대장이던 백선엽 등이 미군정에 빌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진우가 창설한 극우익성향의 한민당 또한 미군정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에 이른다.

 

미군정이 실행된 지 1달 뒤인 19451016일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이승만이 귀국했는데, 사실 이승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시점부터 태평양 전쟁 총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강력한 반소반공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더글라스 맥아더로 하여금 그를 존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덕분에 이승만은 해방 후 일본 도쿄에서 미군정사령관인 하지를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지원을 받아 미군 C-47 항공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한민당 측에선 그를 환영하는 환영식을 아주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미군정과 한민당 그리고 친일경찰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놓고 회담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모스크바삼상회의였다. 여기서 소련은 한반도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고, 미국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지만, 이런 사실은 반대로 왜곡되어 국내에 보도되었다. 그 결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소련의 입장(조선의 즉시 독립)을 지지했던 박헌영 측의 조선 공산당은 매국노로 몰리고, 이에 덩달아 이승만과 김구는 연합하여 반탁운동을 벌였다. 이후에 신탁통치 정정보도가 있었지만 반탁운동은 친일파민족반역자들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고, 이 반탁시위는 사실상 해방 정국의 한 면을 장식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는데,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전라도 정읍에 내려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해야 한다.”는 분단론적인 발언을 했으나, 이는 역으로 미군정의 반발을 사서, 여운형과 김규식이 국내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게 됐다. 좌우합작운동은 남한내의 좌우갈등을 극복하고, 한반도에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전개되었으나, 결국 이승만 지지파들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폭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가진 민중들은 조선 공산당과 더불어 항쟁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이었다. 대구 10.1 항쟁은 미군정이 탱크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고, 적잖은 사람들이 미국과 이승만 지지세력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됐다. 이 시기 남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는데, 이러한 목소리를 막은 것은 결국 미국이었고, 미국은 친일파들을 이용하여 민중을 적으로 만들어 놓았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는 과정에서 이승만에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이 바로 19473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된 것이다. 당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국가 그리스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력간의 내전이 일어났는데, 이 내전의 성격은 서방의 지원을 받았던 이들이 과거 나치 협력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민중항쟁적인 성격이 아주 강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그리스에 고문단과 군사원조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승만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무엇보다 트루먼 독트린은 반공정책이었고, 이승만이 추구하는 것과 일치했다. 따라서 미군정은 이승만을 보다 더 지원하게 된 것이다.

 

1947년부터 확실한 지원을 받게 된 이승만은 여운형 암살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박차를 가했고, 미군정은 유엔에게 한국의 단독정부 수립 선거를 진행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광란의 학살극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미 10만 명 가까이나 되는 민간인이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해방 이후 미국과 이승만의 정책은 폭력적이고 반민중적이었으며 제국주의적이었고 광란의 대학살극이자 유혈극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Why? People : 케네디 Why? 인물탐구학습만화
박민정 지음, 이두원 그림, 윤재웅 감수 / 예림당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에 대해 제법 관심이 생겨 Why 시리즈에서 출간한 어린이 위인전을 읽었다. 물론 케네디에 대해 알기 위해선 푸른숲 출판사에서 출간한 케네디 평전 I,II권을 읽는게 맞지만, 그냥 입문하는 차원에서 읽어보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은 인물이다. 비록 그는 2년이라는 아주 짧은 재임 기간을 가진 대통령이지만, 그가 추구했던 뉴프론티어 정신은 현재 미국인들에게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지금이야 코로나 바이러스로 항로가 차단되어 가기 힘들지만, 뉴욕의 국제공항 이름이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다. 나 또한 3년전 미국여행을 여기서 시작하여 1달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처럼 케네디는 현재 미국에서도 인기가 많다.

우선 이 책에 대해 얘기하자면, 뭐 전형적인 스트레오타입의 위인전이라 할 수 있다. 성실함, 독서를 좋아하고 꾸준함, 배려심 깊음, 도전적 인물 그리고 공부잘하고 똑똑한 인물 등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그려지는 위인전이니 솔직히 전형적이다 못해 다소 지겨운 레파토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위인전이니 당연히 부정적인 행적은 언급이 안되거나 각색되어 표시되는데, 특히 케네디에 대한 위인전은 그것이 더더욱 많이 느껴졌다.

우선 그의 가족에 대한 얘기가 그렇다. 위인전에선 성실한 리더십의 지도자형 생애를 각색하기 위해 케네디의 9남매 부모님이 엄청나게 자상하고 헌신적으로만 그려진다. 물론 똑똑한 케네디의 남매들에게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전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왔듯이, 이는 로즈마리 케네디의 이야기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케네디의 아버지는 그의 여동생 로즈마리 케네디를 지적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그리고 그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가두어 버렸다. 심지어 가문의 수치로 여겨 학교도 안보냈고,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1940년대 전두엽 절제술을 했다가 그나마 갖고 있던 지능과 언어능력을 모두 상실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계의 길을 걸었던 케네디를 위해 가족은 로즈마리를 정신병원에 보냈고,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로즈마리는 2005년 1월에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에서 0.1%도 언급되지 않으며, 여동생을 표현한 그림은 나와도 자세히 소개되지 않는다.

케네디의 아내 재클린 케네디에 대한 각색도 너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재클린 케네디는 화려한 미모와는 달리, 사치행각이 어마무시한 인물이었다. 그녀의 사치행각은 태생적으로 부유한 집안인 케네디마저도 경악을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서도 아주 상세히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이 위인전에선 화려한 패션감각과 문화예술의 확산으로 각색되어 나온다.

마지막으로 더 비판할 것을 뽑자면, 어린시절에 대한 필요이상의 내용 할애와 반공주의 미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이 위인전은 필요이상의 어린시절 내용을 할애했다. 그냥 책의 절반이상이 어린시절 내용이다. 물론 위인전이니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각색되어 많이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케네디의 중요한 내용은 그가 정치를 하던 시절과 대통령이 된 시절이다. 대통령때 했던 행적과 정치인 당시 그의 내용은 너무 축약된 느낌이다. 즉 찬양하는 책을 만드려면 그의 정치행적을 보다 강화해야 했는데, 이 책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공주의에 대한 지적은 여기서 언급하자면, 그의 실책과 과오가 은근슬쩍 덮어진다. 대표적으로 쿠바 침공과 미사일 위기에 대한 내용이다. 1961년 피그스만 침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침략행위였다. 책에서 정상적인 집단으로 규정되는 쿠바 망명자들은 바티스타 정권 시기 미국에 부역하여 인민을 착취하던 압제자들이었다. 이들이 쿠바 혁명 이후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자, 이들은 미국으로 도망쳐 CIA로부터 훈련을 받아 쿠바 전복을 위해 준비했었다.

케네디의 전임인 아이젠 하워는 실제로 쿠바 사회주의 정권 전복 훈련을 실행했고, 실제로 시도할 계획이었다. 이는 케네디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그 또한 미국의 자유주의를 숭배했고,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실질적인 군사적 위협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 보여줬다.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한건, 카스트로의 도움 요청도 있었지만 미국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겨냥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위인전에선 이런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여러 인물들에 대해 위인전을 쓰는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인전에 나온 인물들이 과연 실질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지는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되는 작업이다. 나 자신은 사회주의자이지만, 한국에서 백범 김구나 안창호 혹은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김영옥과 같은 우익 계열 인물이 위인전이나 평전이 나오는거 자체엔 반대하지 않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위인이라고 생각할지에 대한 문제는 별개라 생각한다.

즉 그러한 입장에서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나 닉슨, 레이건, 클린턴, 부시 그리고 오바마와 같은 인물을 평가한다면, 나는 이들이 매우 잘못된 인물이고 비판받아 마땅한 제국주의자들이라 생각하며, 따라서 위인전에 등장하기에 너무나도 부끄러운 인물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비판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책에서 미화되는 케네디의 정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케네디는 미국 민주당 계열에게 부강한 미국과 약자를 위한 미국을 꿈꿨던 걸로 극찬받지만, 대외정책에 있어선 침략자였고 범죄자였다 생각한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쿠바의 사태가 그렇고, 책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베트남 개입이 그렇다.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반민중적인 친미정권인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하다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온갖 반인륜적 전쟁범죄가 베트남 민중들을 대상으로 자행됐다.

이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구금했으며, 조금이라도 자신의 정치견해와 맞지 않으면 탄압했다. 1963년 사이공에서 한 승려의 분신자살은 그 체제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한 체제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책에선 전혀 언급되지 않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도 사실 케네디의 작품이었다. 일제시기에는 친일 해방 이후 남로당 경력이 있던 박정희의 경력을 알았던 케네디는 그를 의심했지만, 박정희의 신하적 충성을 보고 한국을 반공주의 국가의 보루로 만들었다. 그 악랄한 박정희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 결과 한국은 극단적 반공주의라는 후유증에서 못벗어난 사회가 되어 버렸으며, 공산주의의 ‘공‘자와 사회주의의 ‘사‘자만 나와도 탄압과 검열이 들어가는 매카시즘 국가가 되고 말았다.

이제 케네디에 대해 결론 내릴 차례다. 이러한 사실관계를 생각해보았을때, 전쟁범죄자이자 반공주의자인 케네디는 아이들에게 위인으로서 존경받기에는 너무나도 낯부끄러운 인물이다. 이 책은 그런 인물을 리더십이나 근면성실 그리고 인재인 정치인 및 대통령으로 미화한 책이다. 그렇다고 미화를 하면서 인물을 제대로 다룬 것도 아니라 부족한점도 많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때, 이 책은 그냥 입문서로도 부족한 삼류위인전일 뿐이다. 뉘른베르크법이 적용된다면 전범으로서 재판에 서야할 인물 미화는 그만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90년대 동구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는 냉전의 종식을 의미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래로 미국과 소련의 대립체제였던 냉전은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거나 자본주의적 대안을 받아들이면서 사라졌는데, 이는 현실 사회주의권 중 하나였던 북한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북한은 온갖 자연재해와 UN의 경제제재 그리고 김일성의 사망을 거치면서 경제가 매우 열악해졌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다.

 

1990년대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300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통계 및 연구결과에 따르면 아사자의 수치는 43만 명이라고 한다.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 사후 아들 김정일이 북한의 권력을 계승한 이후인 1999년에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명칭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명칭으로 북한의 초대 지도자인 김일성이 항일투쟁 과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항일 유격대를 이끌었던 김일성은 1938년과 1939년 대략 1년간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으며 행진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현재 우리가 아는 북한의 김일성은 일본의 만주침략이 시작되던 시점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 항일투사의 삶을 걸었던 인물이다. 김일성은 1932년 봄에 자신의 첫 번째 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고 한다. 서대숙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시기 김일성은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수백 명의 한인 빨치산들이 1937년과 1940년 사이에 만주 및 북한에서 있었던 일본군과의 수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바 있다.”라고 서술했다. 또한 역사학자 한홍구도 김일성이 매우 명성이 높은 항일투사였으며, 1930년대 시기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이 국내에서 명성을 떨친 것은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해인 1937년 이른바 보천보 전투를 감행하면서 부터였다. 물론 보천보 전투 그 자체는 김일성 본인이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 표현했듯이, 전투성과로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 어려운 시기에 국내로 진격하여 유격전을 전개한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던 전투였다. 이 소식은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 크게 보도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김일성은 항일투사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194510월 소련군정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지원을 받아 평양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김일성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 이유는 전설적인 인물 김일성이 너무나도 젊었기 때문이었다. 즉 이 시점에서만 보더라도 김일성은 분명히 전설적인 항일영웅으로써 명성을 떨쳤던 것이다.

 

1937년 보천보 전투를 치른 이후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은 간삼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중일전쟁 개전 이후인 1938년 일본군이 이들에 대한 토벌을 강화하면서 김일성과 그의 항일 유격대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37~38년 동북항일연군은 동만주와 남만주 그리고 북만주 각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당시 동북항일연구의 규모는 1,850명이었는데,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이들 중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억압과 회유에 못 이겨 전향서를 쓰기도 했다. 이처럼 중일전쟁 개전 초기는 김일성과 항일 유격대에 있어 아주 힘든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김일성 휘하의 항일 유격대가 얼마나 열심히 항일투쟁을 했는지 짐작을 해볼 만하다.

 

이와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토벌작전도 날이 갈수록 혹독해졌다. 일제는 집단부락을 건설하여 유격대를 민중들로부터 격리시켰고, 끈질긴 추격 작전으로 유격대원을 고전하게 만들었다. 특히 영하 수십도로 내려가는 겨울이 되면서 투쟁은 더 힘들어졌다. 193812월부터 다음해인 19393월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의 대규모 동계 토벌작전을 피해 힘겨운 행군을 계속해야 했는데, 이 과정이 바로 고난의 행군인 것이다. 대략 100여 일간 계속된 행군 속에서 김일성 부대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는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추격을 피하며 전투를 치렀다. 적잖은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궁극적으로 김일성 부대는 창바이현 북대정자에 이르러 일본군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쳤다.

 

와다 하루끼가 집필한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이 고난의 행군에는 다수의 소년대원들도 참가했다고 한다. 즉 김일성의 경호대원 가운데는 소년대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 소년대원과 김일성 사이에는 매우 굳건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며, 부족한 식량을 서로 나눠먹었다는 회상이 많다고 한다. 이때의 경호대원이나 소년대원으로는 10대였던 리을설, 리두익, 김철만, 전문섭, 김익현, 조명선, 오재원, 리종산 그리고 리오송 등이 있다. 이들이 바로 북한 정치에서 만주빨치산파로 남은 사람들이다. 즉 북한 정권 초기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이들은 김일성이 항일투쟁 과정에서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이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910월부터 19413월까지 관동군과 만주군 그리고 경찰대로 구성된 75,000명의 병력을 동원한 토벌작전을 수행했는데, 여기에는 김일성의 부대를 토벌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북한의 김일성이 1930년대 만주에서 얼마나 가열차게 항일투쟁을 전개했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김일성이 전설적인 항일영웅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근거가 마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추격을 피해 김일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 소련으로 넘어가 88특별여단에 배속되었지만, 당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김일성의 항일전력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다.

 

참고문헌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일월서각, 1986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와다 하루끼, 이종석(), 창비, 1992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끼, 남기정(), 창비, 2014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은 5.18 광주민주항쟁 41주년입니다. 우리는 광주에게 참으로 많은 빛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과 반공주의적 폭력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이들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1980년 5월 18일 대규모의 공수부대와 군사병력을 투입했던 전두환 일당은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었고 수백 수천명을 죽거나 다치게 했습니다. 자국민에게 곤봉을 휘두르고 착검한 M-16 소총으로 찔러죽였으며, 총탄도 난사했었습니다.

1980년 광주의 비극은 단순히 일회성 사건이 아닙니다. 해방 이후 이승만과 미국이 저질러온 대구 10.1 항쟁과 제주 4.3 항쟁, 여순민중항쟁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 수십만을 무차별 학살한 국민보도연맹 학살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역사가 반복된 것입니다.

특히나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80년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는 베트남 전쟁에서 훈련된 지휘관들이었고 병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았을때, 광주의 비극은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의 살인적이고 파괴적인 군사작전과 분명히 밀접해있습니다.

오늘만큼은 이 광주민주항쟁의 투사들을 잊지 맙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초란공 2021-05-18 15: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유족들을 포함하여 후손들이 앞으로 해야할 일이 참 많이 남아있다고 느끼는 날입니다.

NamGiKim 2021-05-24 00:15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테레사 2021-05-18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 속의 청년은 어찌되었을까요? ㅜㅜㅜㅜ

NamGiKim 2021-05-24 00:15   좋아요 0 | URL
살아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순국하셨을지도 모르죠. 아무튼 마음이 아프죠.

행인96 2021-05-23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어떻게 갈수록 광주항쟁을 왜곡하고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들과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사람들과 그 주장들을 믿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것 같아 머리가 아픕니다.. 이 사람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NamGiKim 2021-05-24 00:14   좋아요 1 | URL
그 북한군 개입을 운운하는 지 모씨의 정신병자 같은 소리는 자세히 생각해보면 국민을 바보천치로 아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