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은 한국 현대사의 시작점을 알리는 시대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 한반도는 북쪽 지역에는 소련군이 남쪽 지역에는 미군이 들어와 38선을 기점으로 사실상 남북 분단됐다. 물론 이 시점까지만 해도 남과 북이 왕래할 수 있는 길은 있었으나, 1948년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러한 길까지 막혔고,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이어졌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입성한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48년에 수립됐다.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됐고, 북한하고는 다른 이른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른바 자유주의 국가(물론 자유주의 국가도 아니지만)가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정부수립 과정과는 달리 남한에서는 이대올로기적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었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김두한과 같은 우익깡패 조직들이나 족청 그리고 서북청년단 같은 이들이 무차별 테러리즘을 선보였다. 독소전쟁 초기 소련을 침공했던 히틀러 파시스트 군대 중 그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은 무차별적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폭력을 휘둘렀는데, 그런 역할을 바로 서북청년단이나 이범석의 족청 그리고 김두한의 우익깡패조직들이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이승만의 주된 지지층은 한민당과 같은 지주계급으로 친일적 성향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정국 초기 가장 먼저 움직인 세력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였다.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에 걸쳐 활동을 하며 해방 정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9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면서, 이른바 맥아더 포고령이 한반도 이남 전역에서 실행이 되었는데, 이는 미국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써 들어온 것을 뜻했다. 당시 미군정의 포고령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따라서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운형이 선포한 인공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어느것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를 이용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설 부역한 경찰을 찾아내 다시 경찰로 활동하게 해 경찰 간부 대부분을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워졌으며,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이나 하판락 그리고 간도 특설대 대장이던 백선엽 등이 미군정에 빌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진우가 창설한 극우익성향의 한민당 또한 미군정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에 이른다.

 

미군정이 실행된 지 1달 뒤인 19451016일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이승만이 귀국했는데, 사실 이승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시점부터 태평양 전쟁 총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강력한 반소반공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더글라스 맥아더로 하여금 그를 존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덕분에 이승만은 해방 후 일본 도쿄에서 미군정사령관인 하지를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지원을 받아 미군 C-47 항공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한민당 측에선 그를 환영하는 환영식을 아주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미군정과 한민당 그리고 친일경찰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놓고 회담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모스크바삼상회의였다. 여기서 소련은 한반도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고, 미국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지만, 이런 사실은 반대로 왜곡되어 국내에 보도되었다. 그 결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소련의 입장(조선의 즉시 독립)을 지지했던 박헌영 측의 조선 공산당은 매국노로 몰리고, 이에 덩달아 이승만과 김구는 연합하여 반탁운동을 벌였다. 이후에 신탁통치 정정보도가 있었지만 반탁운동은 친일파민족반역자들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고, 이 반탁시위는 사실상 해방 정국의 한 면을 장식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는데,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전라도 정읍에 내려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해야 한다.”는 분단론적인 발언을 했으나, 이는 역으로 미군정의 반발을 사서, 여운형과 김규식이 국내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게 됐다. 좌우합작운동은 남한내의 좌우갈등을 극복하고, 한반도에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전개되었으나, 결국 이승만 지지파들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폭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가진 민중들은 조선 공산당과 더불어 항쟁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이었다. 대구 10.1 항쟁은 미군정이 탱크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고, 적잖은 사람들이 미국과 이승만 지지세력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됐다. 이 시기 남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는데, 이러한 목소리를 막은 것은 결국 미국이었고, 미국은 친일파들을 이용하여 민중을 적으로 만들어 놓았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는 과정에서 이승만에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이 바로 19473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된 것이다. 당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국가 그리스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력간의 내전이 일어났는데, 이 내전의 성격은 서방의 지원을 받았던 이들이 과거 나치 협력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민중항쟁적인 성격이 아주 강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그리스에 고문단과 군사원조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승만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무엇보다 트루먼 독트린은 반공정책이었고, 이승만이 추구하는 것과 일치했다. 따라서 미군정은 이승만을 보다 더 지원하게 된 것이다.

 

1947년부터 확실한 지원을 받게 된 이승만은 여운형 암살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박차를 가했고, 미군정은 유엔에게 한국의 단독정부 수립 선거를 진행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광란의 학살극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미 10만 명 가까이나 되는 민간인이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해방 이후 미국과 이승만의 정책은 폭력적이고 반민중적이었으며 제국주의적이었고 광란의 대학살극이자 유혈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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