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수십만 명의 병력과 수백 척의 함대를 동원하여 그리스를 침공했다. 당시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연합은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웠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최정예부대와 함께 천연의 요새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웠다. 최정예부대 300명은 왕 레오니다스를 포함하여 모두 전사했고,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에 진입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제독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해군은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 대함대에 반격하여 승리했다. 다음해인 기원전 479년 스파르타와 아테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을 플라타이아이에서 격파함으로써,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많은 지역 세력들이 그리스군에 합류했었다.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당시 그리스는 동지중해 지역을 완전히 지배했는데,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가장 부강한 세력이 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두 동맹이 탄생함에 따라 서로 대결하는 체제로 돌입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만들어졌고, 스파르타를 중심으로는 펠로포네소스 동맹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정치적으로도 달랐으며, 군사적으로도 달랐다. 아테네는 해군을 스파르타는 육군에 주로 의존했다. 이들이 충돌하며 결국 일어난 전쟁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크게 3단계로 나뉘는데, 1단계(기원전 431~421)는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의 아테네 침공으로 시작되었고, 양측은 10년 동안이나 소모전을 치르고도 아무런 결과가 없이 종결됐다. 2단계(기원전 421~415)는 양측이 휴전을 맺고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3단계(기원전 415~404)에서 아테네가 시칠리아의 내전에 개입하고 원정군을 보냄으로써 다시 큰 전쟁으로 확대됐다. 시칠리아 원정에서 아테네의 해군은 큰 타격을 입고 원정에 실패했다. 그 이후 스파르타는 수 차례에 걸쳐 아테네를 침공했는데,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을 전멸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사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함대를 강화하고, 육전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곳곳에서 아테네 군을 제압했 이에 따라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패배했다.

 

결국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항복했고,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을 파괴하도록 강요당했으며, 함대를 스파르타에 인도함으로써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다. 아테네는 수비를 위한 12척의 배만 남기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에서는 스파르타가 중심적 역할을 했으나 그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스파르타에 패한 아테네 해상 동맹은 스파르타의 독단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페르시아가 중간에 끼어 이들을 더욱 이간질시켰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은 수십 년에 걸친 혼전을 시작하게 됐으며, 동시에 엄청난 국력의 소모를 겪었다. 그 대신 북쪽에서 마케도니아가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으며, 마케도니아는 전 그리스를 통일했다.

 

사실 북쪽의 마케도니아는 과거 그리스 전성기 시절 야만인으로 취급받았었지만, 이후 그리스 전역을 장악했다. 이 마케도니아가 바로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본 인물인, 알렉산더 대왕을 탄생시킨 나라였고, 이후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가 정복전쟁을 하게 됨에 따라 영토를 팽창하기에 이른다.

 

참고문헌

 

<단숨에 읽는 세계사>, 역사연구모임, 2009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김희보, 2010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20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943년 하바로프스크 야영지에서 찍은 제88특별여단 대원들의 사진, 사진에는 북한의 지도자가 되는 김일성도 있다.)

 

1937년 보천보 전투와 간삼봉 전투 이후 김일성은 일본군 부대의 대대적인 추격을 받았다. 1940년 3월 이른바 홍기하 전투(훙치허 전투)에서 대략 120명 이상의 일본군을 섬멸한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그 이후에도 일본군의 끊임없는 추격을 받았다결국 김일성을 포함한 항일연군의 지휘부는 병력을 이끌고 소련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지도자였던 웨이정민(위증민)은 1940년 7월 모스크바 중앙에 서한을 보내 부상자와 연장자를 소련 영내로 보내고 남은 대원은 소부대로 나누어 식량공작에 투입하겠다는 새로운 방침을 보고했다즉 이에 따라서 김일성 또한 부대를 이끌고 소련 영내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1958년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을 기념하여 김일성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1941년경 항일무장투쟁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투쟁방침을 고쳤습니다한편으로는 혁명의 전도를 예견하고 소련 일대에서 많은 간부를 양성하였으며다른 편으로는 역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대부대 활동을 소부대 활동으로 변경하고 지하투쟁을 강화하였습니다.”

 

1940년 10월 김일성의 부대는 소그룹으로 나누어 국경을 건넜다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1940년 7월 기준으로 김일성이 이끌던 부대의 규모는 대략 340명 정도였다고 한다최소 300명 이상이라는 점에서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40년 10월 23일 만주의 훈춘을 떠나 김일성은 소련으로 들어갔다당시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들어간 이들 중에는 조선인 대원 전문섭강위룡최인덕이두익 그리고 김일성의 부인인 김정숙 등이 있었다.

 

김일성을 포함한 동북항일연군 부대가 소련으로 피신하던 시기는 이들에게 있어서 정말 암울한 시기였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김일성이 일본군에게 추격당하던 시기 나치 독일은 영국을 제외한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을 점령했으며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을 포함한 영국의 도시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다김일성이 상대하고 있던 일본 제국은 중일전쟁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났고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접수한 상태였다거기다 1년 뒤 일본은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했다이처럼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암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북항일연군도 큰 타격을 입었다이른바 고난의 행군 과정에서 많은 혁명 동지들이 전사했고김일성 부대가 소련을 떠난 뒤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제3방면군 총지휘자인 진한장이 일본군에게 사살당했고1로군에 있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이자 김산의 친구이며 의열단 대원이었던 오성륜도 일본군에게 투항했다안타깝게도 오성륜은 이후 변절하기까지 했다또한 앞에서 서술한 웨이정민도 밀영 속에서 사망했다.

(제88특별여단의 깃발, 러시아어 글자가 들어가 있는게 인상적이다.)

 

소련에 도착한 김일성과 그를 포함한 동북항일연군은 소련군에게 취조를 받고이른바 1941년 초의 하바로프스크회의를 거쳐 두 개의 야영에 배치됐다현재 우수리스크 근처에 B야영(당시는 우수리스크가 스탈린의 심복인 보로실로프의 이름을 땀.)과 하바로프스크 북동쪽 70km 지점에 있는 아무르 강가의 비야츠코 마을에 A야영(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라고 일본 관헌자료에 나옴)이 만들어졌다당시 김일성이 들어간 곳은 B야영이며 대략 몇 백 명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이렇게 만주에 정착한 이들은 단순히 소련에서만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일부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남아있는 독립군 잔존세력을 도왔다다만 1941년 일본과 소련의 중립조약이 체결되면서그러한 활동은 매우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와다 하루끼가 쓴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 따르면 1942년에 와서도 이 소부대들은 야영을 출발하여 정찰과 전단살포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당시 부대의 정예 대원이던 조상지는 1942년 2월 일본군과의 전투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

 

19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이 체결됐지만, 1941년에 들어서 동북항일연군에게도 변화가 생기는 일이 나타났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고그해 12월에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비록 소련은 이 시점까지 이들이 만주로 다시 돌아가 활동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을 이들을 활용하고자 했다. 1942년 6월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게 대패하고 난 뒤소련은 항일유격대원들에게 훈련을 실시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실제로 이들을 소련의 붉은 군대에 편입시켰다그것이 바로 제88특별여단이다.

(1945년 가을 북한에 입성하고 나서 찍은 김일성과 소련군 지휘관들의 사진)

 

88특별여단은 1942년 8월 1일 창설됐다88특별여단 소련 붉은군대(Soviet Red Army)의 일원으로 러시아어로는 제88특별저격여단(88 Otdel'naya Strelkovaya Brigada)이라는 명칭이 부여됐다여기서는 이 글에서는 그냥 줄여서 제88특별여단이라고 부르겠다이 부대에는 중국인과 몽고인 그리고 조선인과 러시아 소수민족인 나나이족이 같이 근무했으며동북항일연군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김일성 또한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다88특별여단의 병력은 초기에 1,500명 정도로 이 중 항일연군 인사는 1,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88특별여단의 군사훈련은 소련 극동군의 보병훈련대강을 기초로 소련장교의 지도에 의해 행해졌으며총검술·실탄사격·전술진공·방수훈련·행군연습·동계 야외 노영훈련·낙하산강하훈련 등이 이루어졌다겨울에는 스키여름에는 수영 연습도 이루어졌다전세가 막바지로 달하던 1944년에는 소련군 장교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으며항일연군 내부의 지휘관이 훈련을 지휘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최소 1,500명 이상이나 되는 제88특별여단에는 항일연군 병사가 다수를 차지했으나이 중 조선인은 최소 120명에서 많게는 40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 당시 조선 사람들은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하며 환영했다.) 


최성춘의 <연변인민항일투쟁사>에 따르면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은 소련과 만주를 왔다갔다하며 항일투쟁을 이어나간 것으로 확인된다. 1942년 5월 12일에는 박덕산소부대가, 5월 29일에는 안길소부대가 그리고 7월 17일 시세영소부대가 연변으로 돌아왔으며활동을 전개했다고 한다이들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적정찰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갔으며소부대의 이런 활동은 1945년 봄까지 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88특별여단이 독자적으로 대일전에 참전했다는 확실한 문서는 없으나이들 중 일부는 소련군에 편입되어 붉은 군대로 대일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은 소련 문서와 주보중(항일연군 지휘간부)의 회고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이들 중 일부는 소련의 붉은 군대 대원으로서 1945년 소련의 대일전에 참전했다또 이들 중 일부는 한반도 북부로 진격했으며이른바 해방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45년 10월 연단에 선 젊은 독립운동가 김일성, 당시 많은 이들이 김일성의 존재를 노장이라 생각했으나 너무나 젊은 인물이어서 한편으로는 근거없는 '가짜설'이 유포되기도 했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한국의 민중봉기>에서 김일성도 호치민처럼 연합국의 편에서 싸웠다.”고 주장했다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주장에 따르면, 1944년 11월 일본의 한 경찰 보고서를 보면 김일성은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됐으며, “국경지대에서 미국 공군의 공습과 조율하여 철도를 파괴하기 위해 조선-만주 국경을 따라 주요 지점에 정보원을 파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래도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이른바 인민전선에 따른 반파시즘연합전선 차원에서의 행동일 것이다베트남의 지도자이자 국부인 호치민(Ho Chi Minh) 또한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는 미국 OSS와 접촉하여 베트민을 훈련시키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김일성을 포함한 사회주의 계열 항일무장독립군들은 많은 이들이 친일을 선택할 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그리고 이들은 이후 1948년에 설립되는 북한 정부의 핵심이 됐다브루스 커밍스의 말대로 김일성과 김책최현최용건 그리고 그 외의 200여 명의 핵심 지도자들은 만주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면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었다현재 북한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항일무장투쟁에서 찾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와다 하루끼이종석().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창비, 1992

 

최성춘연변인민 항일투쟁사연변대학, 1999

 

김효순간도특설대서해문집, 2014

 

박찬승한국독립운동사역사와비평사, 2014

 

와다 하루끼남기정().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창비, 2014

 

조지 카치아피카스원영수(). 한국의 민중봉기오월의봄, 2015

 

브루스 커밍스조행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20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릭 홉스봄 평전 - 역사 속의 삶, 역사가 된 삶
리처드 J. 에번스 지음, 박원용.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꼭 읽어야할 필독서가 한권 더 생겼네요. 홉스봄 선생의 <극단의 시대> 여러모로 감명깊게 읽었었는데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플 시험도 제재받는 러시아와 벨라루스

3월 13일부터는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은 토플 시험도 제대로 치를 수 없게 됐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합니다. 한국도 대북재재할때는(표면적으로) 인도적 교류를 막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미국의 러시아 경제제재는 인도적 차원의 교류도 제재하는 야만성을 보이는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으로 들어가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

오늘 드디어 터닝 포인트 4화를 봤다. 1화부터 3화까지 다큐멘터리가 사실상 미국이 겪은 9.11 테러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4화부터는 본격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전쟁 초기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지지했던 반면, 알카에다와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에는 입장이 갈렸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미국이 동원한 것이 바로 여론조작이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들은 명분없는 전쟁임을 알고 있었지만, ˝사담 후세인이 신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언론을 통해 대사기극을 벌였다. 이런 사기극이 바로 이라크 전쟁이었다. 미국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이라크 몇몇 곳에 신무기가 있다고 전쟁전에 주장했지만, 이라크 침공 결과 그곳에는 신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침공한 이후 모든 면에서 명분이 없었음이 드러났고, 미국은 4,500명 이상의 병사를 잃었으며, 수십만의 이라크인이 미국의 침공으로 사망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 독재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미국이 한 것은 상황악화였고, 2008년 대선에 출마한 오바마 후보는 이라크 철군을 주장했다.

대선 시기 오바마는 이라크 철군을 주장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옳은 전쟁‘으로 포장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또한 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수렁에 빠지게 됐지만, 미국은 올바른 명분이 있다며 이 전쟁을 포장했다.

여기서 이 다큐멘터리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명분이 없었음을 드러내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들을 통해 보여준다. 전투 현장에 배치됐던 한 병사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고 증언한다. 결국 자신들이 그 나라를 돕기는 커녕 폭격으로 파괴했음을 시인한다.

이번 화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의 실책을 제법 여과없이 드러냈다. 물론 몇몇 점들은 미국의 입장에서 부각된 측면이 있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법 객관적으로 중동사태를 분석했다고 본다.

이제 이 다큐멘터리도 마지막화만 보면 된다. 다음에는 마지막화인 5화 리뷰를 올릴 예정이고, 마지막으로 다큐멘터리 총평을 올릴 예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