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우전쟁은 9월인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이번 전쟁을 보며 확실히 느낀 것이 있다. 비록 러시아가 자본주의 국가이고, 여러 문제점을 가진 나라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지만, 미국이라는 국가가 얼마나 위선적인 언론 플레이를 할 수 있는지 말이다.


미국은 과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무자비한 침략전쟁을 자행했다. 이 나라에서 대략 100만 명의 인명을 학살했다. 이라크 전쟁의 경우 수도 바그다드에 대규모 폭격을 퍼부었고, 그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폭탄을 투하했다. 과거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시절 무차별 폭격이 보여주듯이, 미국이 벌인 중동전쟁은 민간인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그런 미국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빌미를 들어, "러시아를 전범국가로 규탄한다."는 위선을 보였다. 그러고 나서 경제제재를 자행했다. 물론 러시아는 산유국이기 때문에 경제적 타격이 크지 못했다. 이는 미국이 쿠바나 북한, 이란, 베네수엘라에 한 짓과는 상당히 대조됐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의 생활수준을 소련시대로 하락시키겠다."는 아주 멍청한 소리를 대놓고 했다. 정작 바이든은 소련 시절 그 나라 민중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전혀 보지 못하는 무지함을 보여줬다. 1960년대 초 기준으로 매일같이 고기식단을 먹고, 각종 복지와 휴가가 보장되었으며, 의료와 교육이 무상이었던 사회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까 그런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이든의 이런 망언은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식의 발언을 대놓고 하는 미국의 오만이다. 그런 발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턴 우즈 체제를 통해 달러로 세계패권을 지배하는 미국이 자신들의 그 패권을 어떻게 악용했는지는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당장 이라크의 후세인 정부가 걸프전쟁 이후 미국의 제재로 125만 명이 의도적으로 학살당했다. 순전히 미국과 UN의 경제제재로 말이다. 이런 학살에 대해 당시 미국의 국무장과 매를린 울부라이트는 '가치있는 희생'이라고 미화했다. 이런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 미국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에 대해 미국이 규탄할 자격이 있을까? 나는 전혀 없다고 본다.

 

한마디로 미국은 "지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하면 민주주의고 정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폭격하면 범죄고 민간인 피해다. 전쟁 초기 러시아가 키예프까지 건드리는 일을 벌였지만, 미국의 바그다드 폭격을 다루는 서방언론의 태도와 러시아의 키예프 폭격을 다루는 서방언론의 태도는 분명 달랐다.

 

물론 키예프에도 폭탄이 투하되어 시민들이 잠시 공포에 떨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폭격의 수준이 몇 발 정도가 일부 지역에 오폭으로 떨어진 수준이었지, 미국이 바그다드를 폭격하는 수준은 절대로 아니었다. 한마디로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과거 키예프를 아비규환으로 묘사했던 서방 언론들은 현재 키예프에는 폭탄한발도 안떨어진다는 사실과 시민들이 잘만 일상생활을 구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정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당연히 이런점에서 서구의 위선이 너무나 잘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군의 진격은 초기부터 동부에 집중됐다. 동부는 과거부터도 친러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있던 곳으로 정체성도 러시아에 가까웠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들을 설득하고, 자치와 민족성을 보호하는 정책을 전혀하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돈바스 인민 공화국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탄생했고, 이들은 우크라이나 정부에 맞서 싸웠다. 이는 마치 베트남 전쟁 때 독재적이고 학살을 자행하는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에 맞서 민중이 봉기하여 베트콩을 창설하고, 국가 내의 국가를 만든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아조프 연대 같은 네오나치 성향의 민병대 조직을 이용하여 이들을 탄압했고, 결과적으로 네오나치 병력을 정규군화 했다. 우크라이나에는 각종 네오나치 조직들이 즐비했다. 아이다르 대대, 크라켄 대대, 프라비 색토르, 스보보다 등 무수히 많은 네오나치 조직들이 있었고, 이들은 유대인과 폴란드인 그리고 러시아인을 대량학살한 나치협력자 스테판 반데라를 우크라이나의 민족영웅으로 찬양했다.


네오나치 정규부대는 최소 사단급 이상이며, 이들은 탱크와 장갑차를 운용할 정도로 사실상 우크라이나의 주력부대를 맡았으며, 또 맡고 있다. 이런 나라가 우크라이나이며, 네오나치즘을 분명히 현존하는 문제다. 그러나 이 전쟁이 시작되자, 동정여론에 휩싸인 나머지, 아조프 부대의 영상물들을 대대적으로 국내언론이 활용하는 파렴치함을 보였다. 나는 이 점이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를 까는 것에 반대하여, 러시아의 용병그룹인 바그너 그룹을 언급한다. 바그너 그룹의 경우 대표 개인이 나치 신봉자인 것은 사실이나 본질은 그저 용병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나치즘을 부정하는데 반해 우크라이나는 국가 차원에서 나치즘을 옹호하고 나치 부역자를 국부로 숭배하며, 나치 상징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고, 네오나치 무장 조직을 정부 조직에 편입하고 특정 민족에 대한 악질적인 탄압을 수년간 계속해 왔다. 이 둘을 동일시하거나, 러시아 나치 운운을 말 그대로 억지가 가득한 양비론이다.

 

최근에 러시아가 잠시 밀린 부분에 대해 국내 언론들은 보도하기 바쁘다. 지금까지 러시아가 꾸준히 동부로 진격하여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한 점에 대해선 제대로 언급 및 보도조차 하지 않다가, 우크라이나군의 반자이 돌격식 진격에는 왜 이리 집중하는 걸까? 정작 체코와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에서는 싫더라도 가스를 위해서 러시아와 협력해야한다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지만, 왜 이런 점에는 주목하지 않는걸까?


이번 전쟁을 통해 젤렌스키가 상당히 미화되었지만, 그 정권이 아주 비민주적인 행태를 부리는 사실은 전혀 보도가 되지 않고 있다. 젤렌스키 정부가 전쟁을 빌미로 공산당을 포함 진보정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지만, 이걸 비판하는 보도는 없었다. 젤렌스키 정부가 노동개악을 해서 우크라이나 노동법을 19세기 자본주의로 되돌리려 하지만, 이걸 보도한 국내 언론은 없었다. 우크라이나에 감정이입한 결과가 바로 이런 편향된 국내의 언론보도다.

 

현재 러시아의 물가가 안정되고 있는 반면, 서방의 물가는 휘청거리고 있다. 당장 국내의 석유값만 하더라도 현실정치적인 측면에서 러시아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이 전쟁을 통해 그저 우크라이나에 감정이입하는 이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추악하고 악랄한 현실을 봐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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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우크라이나의 추악한 현실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우크라이나의 악랄하고 추악한 현실(네오나치 사상 추종, 반소련 반공주의, 사회주의 탄압, 노동법 개악)에 대해 보도하는 국내 언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Mariupol 산부인과 병원의 가짜 공습 테러후 러시아 잔인함을 선전하며 전세계 미디어의 모든 표지에 등장했던 산모 Mariana 가 해방된 마리우폴 지역의 91일 학교 첫날 아이들에게 러시아 색깔 풍선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인터뷰 중:

 

폭격으로 파괴된 마리우폴 병원을 잔해 속에 남겨둔 사진이 화제가 된 임산부 Marianna Podgurskaya는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군대가 병원 건물을 막사로 만들고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비디오를 촬영하는 데 사용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

 

Mariana에 따르면 공습은 없었고 참석한 사람들 중 누구도 비행기 소음은 듣지 못했고 포탄 폭발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우크라이나군이 산부인과 병원을 자신들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출산 중인 여성들의 음식도 빼앗았다고 확인했다.

 

우크라이나 군대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들이 와서 음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임산부용이라고 했는데 다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우리 5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더 요리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언급한 또 다른 중요한 세부 사항은 폭발 직후 산부인과 병원 문 앞에 있던 기자(유명한 우크라이나 선전가 Yevhen Maloletka)였습니다. Mariana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촬영되었다고 말했습니다.”

[ Marianna Vyšemirskaja 텔래그램 에서,

 

국제앰네스티(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음)의 보고서에 대한 논의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캔들은 너무나 널리 퍼졌고, 그 뒤를 이어 국제앰네스티 우크라이나 사무소 책임자인 Oksana Pokalchuk이 해고되었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국제앰네스티는 최근 학교와 병원을 포함한 민간 부지에 우크라이나 군 기지를 배치한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정부의 주요 불만은 보고서의 내용이 아니라 이 정보가 공개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습니다.

 

내 경험상 마리우폴의 사회 기반 시설을 점거하는 우크라이나 군대를 직접 목격하면서 국제앰네스티의 결론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Azov 기지(Azov 또는 AFU -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우크라이나 군인이 주둔했다는 사실)가 있다고 알려진 주산기 센터(1번 산부인과 병원)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만실 여성을 위한 최고의 시설을 갖춘 의료시설이었습니다. 제가 출산하러 간 제3병원의 구역에는 우크라이나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정확히 우리 건물이 아니라 건물 건너편에 있는 종양 병동입니다. 이는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 협약의 규칙과 직접적으로 모순됩니다.

 

불행히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무도 점령된 건물 근처에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마리우폴의 경우도 그랬지만 우크라이나의 다른 도시들도 민간인의 이익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크라이나 당국이 존경받는 국제기구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공격적으로 비판하고 우크라이나의 적으로 만들며 많은 증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점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프로파간다에 악용 당했지만 이제는 여러 매체와 인터뷰 하며 오히려 진실을 알리고 있다. 이렇게 진실이 드러나도 여전히 왜곡하고 날조하는 기더기 앵무새들, 모든건 러시아 소행 프로파간다 라고 러시아에게 협박을 받아 거짓 증언 한다고 굳게 믿는 반공아메바가 천지다.

 

나도 처음에는 위기배우로 오해했었고 블러그 개인 사진까지 널리 퍼졌었는데 아직도 많은 오해와 위협을 당하는 듯하다. 그 난리와 공포 속에 아이를 출산하고 힘든 시간 보내고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고맙고 미안하다.

 

https://www.facebook.com/angie.kim.779/posts/pfbid0Ds8bGpEhuJghireU9RfLRW7UhcMyDv9oZC6aha2yYi9cxWUj6119xNmReQ2gyJ8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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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사실을 다루는 국내 언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러시아 탓하고.....
 

나는 이들이 하는 소리 99.9%는 개소리고 구라며, 새빨간 거짓말이라 생각한다. 국정원에서 써주는 연극 대본을 앵무새처럼 읆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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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친일반민족언론의 대명사 조선일보(조센닛뽀)와 TV조선(테레비조센), 동아일보(도아닛뽀)와 채널A(챤네루A)는 극우 탈북자들의 주장을 여과 없이, 사실확인도 없이 보도하는 ‘반민족 기레기언론‘의 대명사죠.
 

194810월에 발발한 여순항쟁(YeosuSuncheon Uprising)은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대학살이었다. 여순사건의 원인은 1948년 제주 4.3항쟁이었으므로,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보내질 예정이었던 병력이 진압을 거부하고 봉기를 단행하면서 시작됐다. 남로당을 중심으로 봉기했던 여순항쟁은 결과적으로 이승만과 미군정의 잔혹한 진압으로 종결됐고, 최소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2000년대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발견된 희생자의 시신은 총 3,384구로 실제 희생자보다 일부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여순항쟁은 제주 4.3 항쟁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반란사건이나 공산주의 폭동으로 규정되어 왔다. , 이 사건이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폭압적인 폭력과 억압적인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봉기한 항쟁이었다는 사실관계는 손쉽게 무시당해왔던 것이다. 여순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한 이승만은 당연히 이 사건을 공산주의의 폭동이나 반란으로 규정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여순사건에 대한 교과서의 정의는 이와같은 이승만식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교육은 수십 년간 국정제도로 운영되어 왔다. 학살극의 당사자인 이승만은 당연히 국정교과서를 발행했으며, 비록 교과서에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적으로 여순항쟁을 공산주의 반란으로 규정했다. 1960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물러서자, 당시 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여,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1961516일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로 군부정권이 들어섰고, 이들 또한 국정 교육을 단행했다. 특히나 197210월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는 1974년 신학기부터 주체적 민족사관에 투철한 국정교과서를 내놓았다고 말했으며, 역사교육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한 역사교육의 내용으로 진행됐다.


여순항쟁이 교과서에 처음 언급된 것은 박정희 유신정권 체제하의 제3차 교육과정 때부터였다. 1976년에 발행된 국사 교과서에는 제주 폭동과 여순 반란을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남한 공산주의자들을 사주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서술했다. 1979년 박정희가 암살당한 이후,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제4차 교육과정을 거치며 두 사건에 대한 서술의 양을 늘렸다. 당시 교과서에 나온 여순사건은 사회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사주 아래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켰다.”고 나온 점에서 박정희 정부 당시 교과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 시절과는 달리, “공산주의자들이 관공서를 습격하고 경찰과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식의 서술이 추가됐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기 이 두 사건은 폭동과 반란으로 표현됐지만, 노태우 정권 하에서 단행된 제5차 교육과정에서는 제주도의 경우 4.3 사건으로 표기되었지만, 여순은 이전과 똑같이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표현됐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개정된 제6차 교육과정의 교과서에서는 제주도 4.3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폭동으로 보는 것은 여전했지만,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까지도 희생되었다고 하며 처음으로 민간인 희생을 언급했다. 하지만 여순의 경우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가진 반란으로 표기됐다.


김대중 정권 들어서 시행된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제주 4.3과 여순에 대해 사건이라 표기했으며, 제주 4.3의 경우 진압과정에서의 무고한 인명피해가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반면 여순사건에 대해선 제주도 4.3 사건의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 일대를점령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이 시점까지도 여순에 대해선 제주 4.3과는 달리 본질적인 문제를 교과서에서 꺼내지 않은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 나온 교과서에서도 여순에 대해선 여수 주둔 부대 내 좌익세력이 일으킨 반란이나 봉기로 표현하는 교과서들이 제법 많았다.

 

지금도 여순사건의 본질적인 문제는 교과서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이 여순사건이 미군정의 폭압적 통치와 잔혹한 학살에 반대하여 자주적인 통일정부와 반외세 정부를 달성하고자 했다는 점은 항상 거세당해 있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러한 교과서적 서술이 한 사건의 본질적인 부분을 얼마나 각색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민의 땀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중의 피를 요구했다. 그 유혈의 역사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부정적 역사를 미래를 위한 긍정적 지양분으로 바꿀 수 업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교과서에서는 여순항쟁의 본질이 언급되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선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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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만 지나면 코로나 격리해제가 풀립니다. 격리가 끝날 생각을 하니 기쁘네요. 1주일 격리가 정말 기네요. 여러분들도 코로나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어제 전반부를 리뷰를 다른 때보다 길게 했지만, 이어서 4부 후반부를 올리겠습니다.

(Resolve 전반부에 나오는 인트로 영상)

 

(오마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연설을 하는 존슨 대통령)

 

전반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물자와 인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1966년 존슨 대통령은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우리 모두가 전쟁을 끝나기를 바라고 있고, 군대가 집으로 귀국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연설을 했다. 그러면서 평화가 오기를 바란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지도부들은 더 많은 병력을 어떻게 하면, 베트남에 보낼지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만약 존슨이 평화를 원했다면, 호치민의 말대로 즉각적으로 군대를 철군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66년까지 57,000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고 주장한 미 육군의 통계)

 

(존슨에게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침공을 주장하는 미군 장성)

 

(롤링썬더 작전으로 파괴되고 있는 북베트남의 시설들)

 

당시 미군 자체 추정으로는 1966년 중반까지 최소 57,000명 이상의 적군을 죽인 것으로 계산했다. 이 숫자는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전사한 미군의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군 사령부는 존슨에게 미군 부대가 남베트남에서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지대를 넘어 공식적인 군사작전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권고했지만, 존슨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중국과 소련을 군사적으로 깊이 개입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신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작전의 목표를 더 확장했다. 이에 따라 수도 하노이와 항구도시인 하이퐁에 무수히 많은 폭탄이 투하됐다.

(참전용사 바오닌, 그는 1969년부터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하여,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북베트남으로 돌아갔다.)

 

(참전용사 호후우란, 그 또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구정 공세 당시 북베트남군으로 후에 전투에 참가했었다.)

 

이러한 폭격행위는 북베트남을 협상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함이라고 이들은 주장했지만, 이 과정에서 생기는 민간인 피해가 어떤 것인지는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폭격을 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마을과 도시에 폭탄이 투하됐고,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아래에 있는 <전쟁의 슬픔>의 저자인 바오닌(Bao Ninh)과 북베트남군 참전용사인 호후우란(Ho Huu Lan)의 다큐멘터리 인터뷰 내용을 보도록 하자.

(폐허가 된 북베트남의 한 마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집은 파괴됐죠. 학교는 시골로 소개되었습니다. 생활은 뒤죽박죽이 되고요. 당시 전 14살이었어요. 겁이 나지는 않았지만, 무척 화가 났습니다.”

 

종종 폭탄이 시장과 학교에 터져서, 수많은 어린이와 아이들이 죽었죠. 북베트남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 식구들을 포함해서요. 그러니까 뒤에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려면, 전선에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대공포를 발사하는 북베트남군 병사들, 북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대공무기를 토대로 수많은 미군 항공기를 격추하기도 했다.)

 

(대공포에 격추당한 미군 전투기)

 

물론 북베트남의 대공 방어망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으로 촘촘했고, 미군 항공기들도 많이 격추됐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맥나마라를 포함한 미국 지도부는 중국과 소련의 물자지원을 막기위해, 중국 국경지대 근처까지 폭격을 하고자 했고, 북베트남 주변 해역에 기뢰를 설치하여, 중국과 소련의 수송선을 막고 싶어 했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은 북베트남에게 지속적으로 물자를 지원했다. 북베트남 대공포나 미사일에 의해 적잖은 미군 항공기들이 격추되었는데,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최소 수천 대의 항공기가 격추됐다. 이에 따라서 북베트남군의 포로로 붙잡히는 조종사들도 늘어났는데, 포로로 잡힌 이들은 분노한 하노이 시민들을 보게 됐다.

(북베트남군의 호위를 받으며 하노이를 시가행진하는 미군 조종사들)

 

(미군 조종사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베트남 민간인,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고통을 겪었다.)

 

물론 이들이 포로생활 도중 겪은 고통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들의 고통에 대해 조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인간적으로야 동정할 수 있지만, 우선 이들이 폭격으로 죽은 북베트남인들 입장도 같이 봐야할 것이다. 최소 수십만 명의 북베트남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했고, 북베트남 민간인이 겪는 고통은 너무나도 컸다. 북베트남군은 미군 포로 51명을 대리고, 하노이에서 시가행진을 하게 했는데, 당국은 성난 주민들이 분노를 막는데 급급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 당시 포로로 붙잡힌 알버트 알버레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군중들이 흥분했었죠. 메가폰을 든 사람이, 절 쳐다보더니 군중에게 소리쳤죠. “알버레즈, 이 개같은 새끼!” 사람들이 몰려들어 병이나 신발 같은 걸 던졌습니다. 하자만 간수들이 분노한 사람들을 밀어내느라 정말 힘겨워했죠.”

(파괴된 곳을 다시 재건하는 북베트남 민간인)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북베트남의 건물)

 

알버레즈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적어도 북베트남 당국은 이들을 살려놓았다. 최소한의 인권을 지켰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폭격이 강화되자, 이를 복구하려는 북베트남인들의 의지 또한 굳건했다.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발생한 피해를 복구하고자, 밤낮 할 것 없이 일했고, 다리가 파괴되면 그 다리를 다시 복구했고, 폭탄으로 구멍이 생기면 그걸 메웠다. 아래에 있는 내용은 당시 북베트남의 슬로건이다.

 

적이 파괴하면 고치고, 적이 또 파괴하면 또 고친다.”

(로버트 맥나마라와 크레이그 맥나마라, 아들 크레이그 맥나마라는 베트남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PBS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크레이그 맥나마라)

 

로버트 맥나마라는 당시 전쟁을 지속했지만, 놀랍게도 맥나마라의 아들은 이 전쟁에 대해 회의적으로 접근하며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로버트 맥나마라의 아들인 크레이그 맥나마라(Craig McNamara)는 당시, 뉴햄프셔주 콩코드에 있는 세인트 폴 학교의 학생이었다. 이 학교에서도 전쟁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베트남 관련 자료를 물었다가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했다고 한다. 맥나마라의 아들 크레이그 맥나마라는 이후 1969년 스탠포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미 해병대로 복무하던 당시 빌 에어하트의 사진)

 

(미군 탱크)

 

당시 맥나마라와 존슨 그리고 웨스트모어랜드는 하나같이, 베트남에서 상황이 진전되고 있다고 국민들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따라서 미국인들 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논리로 베트남을 판단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대학 시험에 합격했으나, 미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빌 에어하트는 1966년에서 1967년에 베트남에 파병됐다. 아래는 빌 에어하트(Bill Ehrhart)가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한 인터뷰인데, 당시 미국인들의 생각을 단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전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이기는 편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은지지 않으니까요. 1812년 미영전쟁을 몰랐죠. 그 전쟁이 무승부에 가까웠지만요. 또 남북전쟁에서는 미국의 절반이 패배했죠. 한국전쟁에서는 전반전은 이기고, 후반전은 졌죠. 하지만 전 미국이지지 않는다고 배웠거든요.”

 

물론 빌 에어하트가 베트남에 와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자각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한편 미국 본토에서는 1966년부터 1967년 사이,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이 점차 형성되고 있었다. 흑인인권운동을 주도했던 미국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또한, 이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반전운동에 참가했다. 미국에서 사랑받던 유명한 소아과 의사인 벤저민 스포크(Benjamin Spock) 박사도 이 전쟁에 반대했다.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아기와 어린이 보호>라는 책은 미국에서 수백만 명의 부모가 읽었을 정도였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벤저민 스포크 박사, 그는 1967년 미국 좌파잡지인 램파트에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으로 최소 25만 명 이상의 남베트남 어린이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벤저민 스포크 박사가 쓴 베트남 관련 글에 실린 네이팜탄 피해자의 사진)

 

(어린이 25만 명 사망 100만 명 부상이라는 팻말이 보이는 반전 시위)

 

(뉴욕 샌트럴 파크에서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하며 연설을 하는 마틴 루터 킹)

 

그러나 그런 그가 1967년 초 미국 좌파 잡지인 램파트지에 네이팜탄이 남베트남의 어린이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썼다. 벤저민 스포크에 따르면, 1967년 초 기준으로 남베트남에서 미군의 투하한 네이팜 폭탄으로 최소 100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피해를 보았으며, 이 중 25만 명의 어린이가 사망하고, 75만 명 이상이 어린이가 부상당했다. 대략 50만 명이 모였던 뉴욕 샌트럴 파크에서의 반전시위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폭격을 멈추십시오! 국가의 명예를 지킵시다. 폭격을 멈추고, 전쟁을 멈추십시오!! 미국인과 베트남인의 생명을 구합시다! 평화협정을 위한 첫발을 바로 내디딥시다! 폭격을 멈추십시오!!”

 

물론 아직까지도 베트남 전쟁을 찬성하는 여론도 결코 작지 않았다. 찬성하는 이들은 반전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빨갱이는 미국으로 꺼져라!”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미국의 애국주의를 내세웠고, 전쟁을 지속하는 미국 정부는 이들과 비슷한 논리로 반전운동에 대해 친소·친공 딱지를 붙이고자 하였으며, 실제로 이들 사이에 스파이를 침투시키며, 도청 및 감시를 하기도 했다. 필요에 따라선 경찰력을 동원해 반전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베트남 전쟁 초기부터 반전운동을 했던 빌 지머맨(Bill Zimmerman) 교수는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겼다.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가에게 분노를 보이는 전쟁 찬성집회자, 보면 퀴어와 게이, 징병 회피자 그리고 공산주의와 마오쩌둥 그리고 호치민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착한 공산주의자는 죽은 공산주의자 밖에 없다는 한 반공주의자의 시위)

 

이 시기 전쟁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이 말을 즐겨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무조건 옳다!”, “빨갱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낮다!”등이었죠. 이런 발언들이 우리에게는 비정상적이었어요. 우린 국가가 하는 일은 옳든 그르든 긍정해야 하는 국가에선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는 옳은 행동은 하고, 그른 행동은 안하는 나라에요. 이 나라가 그렇게 안 한다면 당연히 바로 잡아야죠. 그러니까 애국이란 개념이 달랐던 거죠.”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위치한 닥토, 196710월에 미군과 북베트남군간의 큰 교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북베트남군의 기습을 받은 미군)

 

1967년 남베트남에서는 미군과 베트콩 사이의 치열한 교전이 반복됐다. 그해 6월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닥토(Dak To) 근처에서 북베트남군과 미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는데, 미군이 패배했다. 당시 북베트남군과 교전을 벌였던 미군부대는 101 공수부대로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의 부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이, 북베트남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중대원 137명 중 76명이 전사했다. 중대 하나가 북베트남군에 의해 사실상 전멸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시 미군들은 북베트남군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미군 참전용사는 북베트남군의 시체를 찾지 못한 이유가 시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아래는 참전용사 멧 해리슨(Matt Harrison)의 인터뷰 내용이다.

(항공지원을 요청하며 북베트남군에 맞서 교전을 벌이는 미군)

 

(전투에서 부상당한 미군)

 

우린 북베트남군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고, 우리가 못 찾은 건, 시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어요. 1967622일 피해는 참혹했죠. 우리 리더들은 173 공수 소총 중대 하나가 북베트남군에 의해 전멸됐음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신과 대중을 속여야 했죠. 우리가 당한 것만큼, 혹독한 피해를 우리도 북베트남군에게 가했다고 말이죠.”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실제로 당시 미군은 622일 닥토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의 패배를 가리기 위해, 북베트남군 475명을 죽였다는 지극히 과장된 보고를 했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전과보고를 적잖게 과장했고, 민간인 피해를 지극히 축소했으며, 숫자 조작을 빈번히 했다. 이러한 가정은 바디 카운트라는 비상식적인 방식과 거짓말을 전제로 한 보고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조작된 자료와 숫자를 가지고 미국은 전쟁을 벌였지만,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번 시리즈에서 이러한 거짓과 위선을 제법 낱낱이 보여준 것이 좋았다. 1967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거짓을 숨기려 했지만, 현실 도피였을 뿐이었다. 1968년 원숭이의 해(Years of Monkey)가 다가오고 있었다.

 

4화 후반부 리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는 5화를 리뷰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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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9-10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패배를 인정할 수 없어 또 거짓말을 하고…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일까요. 네이팜탄은 너무 참혹해서 가슴이 아픕니다.

추석 연휴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세요!!

NamGiKim 2022-09-10 21:13   좋아요 1 | URL
네이팜탄과 무차별 폭격. 이런 학살적인 만행이 얼마나 많은 민간인에게 피해를 줬는지 미국이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네 꼬마요정님도 즐거운 추석 연휴 잘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