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만 지나면 코로나 격리해제가 풀립니다. 격리가 끝날 생각을 하니 기쁘네요. 1주일 격리가 정말 기네요. 여러분들도 코로나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어제 전반부를 리뷰를 다른 때보다 길게 했지만, 이어서 4부 후반부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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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olve 전반부에 나오는 인트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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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연설을 하는 존슨 대통령)
전반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물자와 인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1966년 존슨 대통령은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우리 모두가 전쟁을 끝나기를 바라고 있고, 군대가 집으로 귀국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연설을 했다. 그러면서 평화가 오기를 바란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지도부들은 더 많은 병력을 어떻게 하면, 베트남에 보낼지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만약 존슨이 평화를 원했다면, 호치민의 말대로 즉각적으로 군대를 철군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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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까지 57,000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고 주장한 미 육군의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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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에게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침공을 주장하는 미군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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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썬더 작전으로 파괴되고 있는 북베트남의 시설들)
당시 미군 자체 추정으로는 1966년 중반까지 최소 57,000명 이상의 적군을 죽인 것으로 계산했다. 이 숫자는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전사한 미군의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군 사령부는 존슨에게 미군 부대가 남베트남에서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지대를 넘어 공식적인 군사작전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권고했지만, 존슨은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중국과 소련을 군사적으로 깊이 개입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신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작전의 목표를 더 확장했다. 이에 따라 수도 하노이와 항구도시인 하이퐁에 무수히 많은 폭탄이 투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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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바오닌, 그는 1969년부터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하여,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북베트남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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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호후우란, 그 또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구정 공세 당시 북베트남군으로 후에 전투에 참가했었다.)
이러한 폭격행위는 북베트남을 협상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함이라고 이들은 주장했지만, 이 과정에서 생기는 민간인 피해가 어떤 것인지는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폭격을 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마을과 도시에 폭탄이 투하됐고,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아래에 있는 <전쟁의 슬픔>의 저자인 바오닌(Bao Ninh)과 북베트남군 참전용사인 호후우란(Ho Huu Lan)의 다큐멘터리 인터뷰 내용을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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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북베트남의 한 마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집은 파괴됐죠. 학교는 시골로 소개되었습니다. 생활은 뒤죽박죽이 되고요. 당시 전 14살이었어요. 겁이 나지는 않았지만, 무척 화가 났습니다.”
“종종 폭탄이 시장과 학교에 터져서, 수많은 어린이와 아이들이 죽었죠. 북베트남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 식구들을 포함해서요. 그러니까 뒤에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려면, 전선에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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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포를 발사하는 북베트남군 병사들, 북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대공무기를 토대로 수많은 미군 항공기를 격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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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포에 격추당한 미군 전투기)
물론 북베트남의 대공 방어망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으로 촘촘했고, 미군 항공기들도 많이 격추됐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맥나마라를 포함한 미국 지도부는 중국과 소련의 물자지원을 막기위해, 중국 국경지대 근처까지 폭격을 하고자 했고, 북베트남 주변 해역에 기뢰를 설치하여, 중국과 소련의 수송선을 막고 싶어 했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은 북베트남에게 지속적으로 물자를 지원했다. 북베트남 대공포나 미사일에 의해 적잖은 미군 항공기들이 격추되었는데,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최소 수천 대의 항공기가 격추됐다. 이에 따라서 북베트남군의 포로로 붙잡히는 조종사들도 늘어났는데, 포로로 잡힌 이들은 분노한 하노이 시민들을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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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군의 호위를 받으며 하노이를 시가행진하는 미군 조종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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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조종사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베트남 민간인,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고통을 겪었다.)
물론 이들이 포로생활 도중 겪은 고통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들의 고통에 대해 조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인간적으로야 동정할 수 있지만, 우선 이들이 폭격으로 죽은 북베트남인들 입장도 같이 봐야할 것이다. 최소 수십만 명의 북베트남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했고, 북베트남 민간인이 겪는 고통은 너무나도 컸다. 북베트남군은 미군 포로 51명을 대리고, 하노이에서 시가행진을 하게 했는데, 당국은 성난 주민들이 분노를 막는데 급급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 당시 포로로 붙잡힌 알버트 알버레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군중들이 흥분했었죠. 메가폰을 든 사람이, 절 쳐다보더니 군중에게 소리쳤죠. “알버레즈, 이 개같은 새끼!” 사람들이 몰려들어 병이나 신발 같은 걸 던졌습니다. 하자만 간수들이 분노한 사람들을 밀어내느라 정말 힘겨워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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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곳을 다시 재건하는 북베트남 민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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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북베트남의 건물)
알버레즈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적어도 북베트남 당국은 이들을 살려놓았다. 최소한의 인권을 지켰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폭격이 강화되자, 이를 복구하려는 북베트남인들의 의지 또한 굳건했다.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발생한 피해를 복구하고자, 밤낮 할 것 없이 일했고, 다리가 파괴되면 그 다리를 다시 복구했고, 폭탄으로 구멍이 생기면 그걸 메웠다. 아래에 있는 내용은 당시 북베트남의 슬로건이다.
“적이 파괴하면 고치고, 적이 또 파괴하면 또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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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맥나마라와 크레이그 맥나마라, 아들 크레이그 맥나마라는 베트남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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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S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크레이그 맥나마라)
로버트 맥나마라는 당시 전쟁을 지속했지만, 놀랍게도 맥나마라의 아들은 이 전쟁에 대해 회의적으로 접근하며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로버트 맥나마라의 아들인 크레이그 맥나마라(Craig McNamara)는 당시, 뉴햄프셔주 콩코드에 있는 세인트 폴 학교의 학생이었다. 이 학교에서도 전쟁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베트남 관련 자료를 물었다가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했다고 한다. 맥나마라의 아들 크레이그 맥나마라는 이후 1969년 스탠포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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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로 복무하던 당시 빌 에어하트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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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탱크)
당시 맥나마라와 존슨 그리고 웨스트모어랜드는 하나같이, 베트남에서 상황이 진전되고 있다고 국민들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따라서 미국인들 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논리로 베트남을 판단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대학 시험에 합격했으나, 미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빌 에어하트는 1966년에서 1967년에 베트남에 파병됐다. 아래는 빌 에어하트(Bill Ehrhart)가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한 인터뷰인데, 당시 미국인들의 생각을 단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전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이기는 편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은지지 않으니까요. 1812년 미영전쟁을 몰랐죠. 그 전쟁이 무승부에 가까웠지만요. 또 남북전쟁에서는 미국의 절반이 패배했죠. 한국전쟁에서는 전반전은 이기고, 후반전은 졌죠. 하지만 전 미국이지지 않는다고 배웠거든요.”
물론 빌 에어하트가 베트남에 와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자각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한편 미국 본토에서는 1966년부터 1967년 사이,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이 점차 형성되고 있었다. 흑인인권운동을 주도했던 미국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또한, 이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반전운동에 참가했다. 미국에서 사랑받던 유명한 소아과 의사인 벤저민 스포크(Benjamin Spock) 박사도 이 전쟁에 반대했다.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아기와 어린이 보호>라는 책은 미국에서 수백만 명의 부모가 읽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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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벤저민 스포크 박사, 그는 1967년 미국 좌파잡지인 램파트에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으로 최소 25만 명 이상의 남베트남 어린이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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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스포크 박사가 쓴 베트남 관련 글에 실린 네이팜탄 피해자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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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25만 명 사망 100만 명 부상이라는 팻말이 보이는 반전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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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샌트럴 파크에서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전개하며 연설을 하는 마틴 루터 킹)
그러나 그런 그가 1967년 초 미국 좌파 잡지인 램파트지에 네이팜탄이 남베트남의 어린이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썼다. 벤저민 스포크에 따르면, 1967년 초 기준으로 남베트남에서 미군의 투하한 네이팜 폭탄으로 최소 100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피해를 보았으며, 이 중 25만 명의 어린이가 사망하고, 75만 명 이상이 어린이가 부상당했다. 대략 50만 명이 모였던 뉴욕 샌트럴 파크에서의 반전시위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폭격을 멈추십시오! 국가의 명예를 지킵시다. 폭격을 멈추고, 전쟁을 멈추십시오!! 미국인과 베트남인의 생명을 구합시다! 평화협정을 위한 첫발을 바로 내디딥시다! 폭격을 멈추십시오!!”
물론 아직까지도 베트남 전쟁을 찬성하는 여론도 결코 작지 않았다. 찬성하는 이들은 반전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빨갱이는 미국으로 꺼져라!”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미국의 애국주의를 내세웠고, 전쟁을 지속하는 미국 정부는 이들과 비슷한 논리로 반전운동에 대해 친소·친공 딱지를 붙이고자 하였으며, 실제로 이들 사이에 스파이를 침투시키며, 도청 및 감시를 하기도 했다. 필요에 따라선 경찰력을 동원해 반전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베트남 전쟁 초기부터 반전운동을 했던 빌 지머맨(Bill Zimmerman) 교수는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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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반전운동가에게 분노를 보이는 전쟁 찬성집회자, 보면 퀴어와 게이, 징병 회피자 그리고 공산주의와 마오쩌둥 그리고 호치민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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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공산주의자는 죽은 공산주의자 밖에 없다는 한 반공주의자의 시위)
“이 시기 전쟁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이 말을 즐겨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무조건 옳다!”, “빨갱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낮다!”등이었죠. 이런 발언들이 우리에게는 비정상적이었어요. 우린 국가가 하는 일은 옳든 그르든 긍정해야 하는 국가에선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는 옳은 행동은 하고, 그른 행동은 안하는 나라에요. 이 나라가 그렇게 안 한다면 당연히 바로 잡아야죠. 그러니까 애국이란 개념이 달랐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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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위치한 닥토, 1967년 10월에 미군과 북베트남군간의 큰 교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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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베트남군의 기습을 받은 미군)
1967년 남베트남에서는 미군과 베트콩 사이의 치열한 교전이 반복됐다. 그해 6월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닥토(Dak To) 근처에서 북베트남군과 미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졌는데, 미군이 패배했다. 당시 북베트남군과 교전을 벌였던 미군부대는 101 공수부대로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의 부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이, 북베트남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중대원 137명 중 76명이 전사했다. 중대 하나가 북베트남군에 의해 사실상 전멸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시 미군들은 북베트남군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미군 참전용사는 북베트남군의 시체를 찾지 못한 이유가 시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아래는 참전용사 멧 해리슨(Matt Harrison)의 인터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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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지원을 요청하며 북베트남군에 맞서 교전을 벌이는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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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부상당한 미군)
“우린 북베트남군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고, 우리가 못 찾은 건, 시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어요. 1967년 6월 22일 피해는 참혹했죠. 우리 리더들은 173 공수 소총 중대 하나가 북베트남군에 의해 전멸됐음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신과 대중을 속여야 했죠. 우리가 당한 것만큼, 혹독한 피해를 우리도 북베트남군에게 가했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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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실제로 당시 미군은 6월 22일 닥토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의 패배를 가리기 위해, 북베트남군 475명을 죽였다는 지극히 과장된 보고를 했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전과보고를 적잖게 과장했고, 민간인 피해를 지극히 축소했으며, 숫자 조작을 빈번히 했다. 이러한 가정은 바디 카운트라는 비상식적인 방식과 거짓말을 전제로 한 보고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조작된 자료와 숫자를 가지고 미국은 전쟁을 벌였지만,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번 시리즈에서 이러한 거짓과 위선을 제법 낱낱이 보여준 것이 좋았다. 1967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거짓을 숨기려 했지만, 현실 도피였을 뿐이었다. 1968년 원숭이의 해(Years of Monkey)가 다가오고 있었다.
4화 후반부 리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는 5화를 리뷰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