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43-Plus My Lais of the South Korean Mercenaries
(이 글은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의 저서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워싱턴과 제3세계 파시즘)』에 나오는 내용의 번역본을 수정한 것입니다. 원문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얘기하지만, 1980년대 국내 번역본은 한국군을 동맹군 혹은 용병이라 번역을 했더군요. 그래서 수정해서 올려봤습니다.)
한국군은 1965년 존슨 행정부와의 협정에 의하여 남베트남에 도착해서 1973년까지 주둔했었다.(각주 59) 1965년과 1966년의 뉴스 보도는 미국의 동맹군인 한국군을 ‘용맹’하고 ‘강력하다’고 표현했지만, 1970년 1월에는 그들의 강력함이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의도적인 살상에 기반한 것임이 일반인들에게 폭로됐다.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마을에서 무조건 1/10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각주 60)
하지만 1972년이 될 때까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규모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당연히 이것 역시도 언론에서는 별 관심이 없을 테지만 그 살상은 ‘조직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각주 61) 베트남어를 하는 두 명의 퀘이커 교도인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는 5년 동안 한국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작전지역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벌였다. 그들의 조사결과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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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남베트남인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임대군인(rented soldiers)’인 한국군은 미라이 학살과 규모면에서 비슷한 일련의 학살을 자행했다. 100여 명 정도가 죽은 각각 별개로 나눠진 12건의 학살사건이 존스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한국군은 이밖에도 20~30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은 수십 건의 또 다른 학살을 자행했으며, 그 밖에 헤아릴 수도 없는 각각 별개의 살인, 강도, 강간, 고문, 그리고 토지 및 민간인 개인이 소유한 재산의 파과 및 방화를 저질렀다. 한국군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의 숫자는 총 수천 명 단위에 이르는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 존스는 이들 ‘연합군’에게 ‘평정된’ 지역 중 임무지역만을 조사했던 것이었다.
(b) 이러한 한국군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징집연령에 해당되는 남자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가담하거나 사이공 정부에 소집되었고 또는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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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이러한 대량학살은 부분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부분적이라는 것은 한국군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서, 또는 그러한 기습 공격에 대한 경고로서 행해졌다는 것이다.(각주 62) 요컨대 한국군이 장악한 전 지역의 민간인들은 그들에게 잡힌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지뢰가 폭발한다든지 해서 한국군 중에 사망자가 생기는 경우 이들이 빈번이 가장 가까운 마을을 습격하여 20명 혹은 120명에 달하는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 정책은 나치 독일의 정책화 비슷했지만, 남한의 민간인 포로학살은 나치가 2차 세계대전 도중 서유럽에서 자행한 학살들에 비하면, 보다 전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었다.
(d) 이러한 대향학살은 오랜기간 동안 심지어 1972년까지도 행해졌으며 미군당국도 이를 알고 있었다.(각주 63) 미국 관리들이 이런 형태의 ‘평정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보였다거나 혹은 이와 같이 빈번하고도 지속적인 만행에 대하여 어떤 징계조치가 취해졌다는 증거는 전혀없다. 사실상 한국군의 고의적인 민간인 학살은 미국에게 용인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미군 당국자는 이를 호의적으로 보기도 했었다는 신뢰할만한 근거도 있다. 콜롬비아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의 프랭크 볼드윈(Frank Baldwin)은 한국군의 그러한 방침은 “수년 동안 미국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보고했다. 미국 관리들이 볼드윈에게 때로는 유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보통은 찬사와 함께 그러한 볼드윈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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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미 국방부는 한국군의 지속적인 남베트남 주둔을 유지하기 위해 1973년 회계연도 예산을 1억 3,400만 달러로 요구하면서(1965~1973년간의 총액은 17억 6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의회에서 한국군이 남베트남의 중요한 지역을 지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관리들이 말하는 오웰주의적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군이 남베트남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안전(각주 65)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닉슨과 웨스트모어랜드 및 평정계획 자체도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다.(각주 66)
이러한 형태의 평정작전을 스락했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되었듯이 미군 및 미군의 각국 연합군-비단 한국군뿐만 아니라(각주 67)-이 모두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행위를 즐겼다는 것은 그 같은 만행과 학살이 미군의 노력과 임무에 ‘부합하는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러한 행위는 가난하고 실질적으로는 무방비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완강히 협조를 거부하는 이민족을 평정한다는 과업에 없어서는 안 될 사항이었다.
각주
(각주 59) 1965년 1월 9일 대략 2,000명이 한국군이 파병됐다. 1965년 4월 20일의 호놀룰루 회담은 그 숫자를 7,250명으로 증가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이때는 바로 남베트남에 북베트남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처음으로 주의를 끈 때였다. 1965년 6월까지도 국방부는 아직 그런 군대가 남베트남 내에 혹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문헌은 Chomsky, For Reasons of State, p.122를 보라. 한국군은 1967년 2월의 캄보디아 마을 습격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Chomsky, At War With Asia, p.122를 보라.
(각주 60) Robert M. Smith, “Vietnam Killings Laid to Koreans,” New York Times (10 January 1970).
(각주 61) 뉴욕타임즈지의 크레이그 휘트니(Craig Whitney)는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로부터 한국군의 학살행위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받았는데 그는 베트남에서의 동맹군의 장래 역할에 초점을 맞춘 한 기사의 끝부분에다 그들이 본 사실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그 기사의 첫 머리에서 휘트니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군은 중부 해안의 방어가 빈약한 지역에 군사적 방패(휘트니는 누구를 위한 방패인가는 말하고 있지 않다)를 제공하고 있었다.” “Korean Troops End Vietnam Combat Role,” New York Times (9 November 1972).
(각주 62)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대부분 그들의 행동이 당시 진행되고 있던 어떠한 군사작전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닥치는 대로 벌인 학살이었다.
(각주 63) 랜드연구소의 “Viet Cong Motivation and Morale Study (1966년)”는 한국군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상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이 자료는 기밀처리되어 유포가 억제됐다. American Report (28 July 1972)를 보라.
(각주 64) Letter in the New York Times, (25 January) 1970).
(각주 65) ‘안전’이란 미국의 공식 대변인들이 일관되게 베트남에 적용한 또 하나의 오웰주의이며 비슷한 방식으로 이 왕국 전역에 적용되었다. 베트남에 관한 경우 그 말은 사이공의 미국 종속정권이 위협당하지 않는 상태의 지배를 의미했다. 만일 사이공 측이 순전히 무력과 폭력으로 지배를 한다고 하더라도-비록 이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 부락과 주민은 ‘안전’한 것이었다. 만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무력 없이 지배를 한다 하더라도 그 부락과 주민들은 ‘불안전’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53년 6월의 한 국가정보 추산은 “베트남 주민에게 안전을 제공”할 수 없었던 프랑스의 무능력을 우울하게 논하고 있는데, 그들 주민은 게릴라에게 프랑스연합군이 와 있음을 경고해 줌으로써, 게릴라들이 방어를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베트민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프랑스로 하여금 베트남 주민들에게 베트민으로부터의 안전을 제공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The Pentagon Papers, Gravel ed., v. I, p. 396.
(각주 66) 자세한 건 “‘Pacification’ by Calculated Frightfulness: The Testimony of Diane and Michael Jones on the Massacres of South Vietnamese Civilians by South Korean Mercenary Troops,” Pacification Monograph Number 2; edited with an Introduction by Edward S. Herman, Philadelphia, 1973을 보라.
(각주 67) 이와 같은 문제는 호주군이 전개한 평정작전에서도 나타났다. 알렉스 카레이(Alex Carey)의 “Australian Atrocities in Vietnam,” Sydney, N.S.W., 1968을 보라.
출처: Noam Chomsky·Edward Herman,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 (The Political Economy of Human Rights - Volume I)』, Haymarket Books, 2014, p.365~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