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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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독립운동사중에 의열투쟁사를 주제로 했던 영화 암살이 천만관객을 돌파했었다. 영화 암살이 흥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약산 김원봉이다. 영화 암살이 흥행한 뒤로부터 대중적으로 김원봉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보통사람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가 하면 안중근, 김구, 유관순, 윤봉길, 안창호, 이봉창 정도다. 그런 일반인들이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을 보면서 매우 놀랐던 것 같다. 그리고 몇몇 이들중엔 왜 김원봉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졌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일제시기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역사에서 잊혀졌던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 그는 누구일까?

 

1.김원봉 일대기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1916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김원봉은 중국으로 망명했고 1919년 이회영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받은 뒤 그해 11월 21살의 나이로 의열단을 만들었다. 1920,30년대 의열단은 주로 사보타주, 요인암살등을 통해 수많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열단이 주도했던 사건 중에는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던 나석주 의거도 있었고 그러한 투쟁방식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1926년 김원봉은 장제스가 만든 황포군관학교에서 유학했고 1930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다. 1932년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웠고 1938년에는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 중일전쟁 시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에 맞서 수많은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2년까지 수많은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치르던 김원봉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조선의용대 병사들도 광복군국내탈환작전에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빨리 항복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해방 이후 김원봉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귀국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합류하였다. 1947년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괴한들로 부터 테러를 당하는 일이 적잖게 일어났다. 그때문에 김원봉도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그러던 중 당시 수도 경찰청장인 장택상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을 이용하여 그를 체포한 뒤 고문했다. 악질 중에 가장 악질인 노덕술에게 고문받은 김원봉은 그 모욕을 견디지 못하여 몇일동안 울었고 결국 1948년 월북했다. 1948년 9월 북한정부가 수립됐고 김원봉은 국가검열위원장에 올랐다. 이 밖에도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다. 1953년 박헌영 체포로 시작된 남로당 탄압과 1956년 김일성 일인독재체제에 반대하여 연안파 소련파들이 일으켰던 8월 종파사건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은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1958년 부위원장을 사임했다. 1958년 11월 그는 북한에서 죽었다.

 

2.의열투쟁과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무차별 테러.

 

1919년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1920,30년대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상대로 수많은 의열투쟁을 전개했었다.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김원봉이 전개한 의열투쟁이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을 상대로 전개했던 의거를 무차별 테러라고 주장한다. 일본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들에게 적극협력하는 앞잡이들을 죽였기 때문에 독립투사들의 의거를 테러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테러와 의거를 구분하지 못한 관점일 뿐이다. 일단 김원봉의 이끌던 의열단의 공약 10조와 그들이 선정한 "제거해야할 대상 7가지"가 어떤 것인지 보자.

 

의열단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3.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4.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5.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9. 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제거해야할 대상

  1. 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2.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3. 대만총독부 총독과 대만총독부 고관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이렇듯 의열단이 만든 "공약 10조"와 그들이 선정한 "제거해야할 대상"은 어디까지나 일본제국주의자, 친일파, 일본제국주의를 이롭게 하는 기업과 정치단체 그리고 일제 경찰 군인에 한해서 였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은 조선인 일본인 할 거 없이 민간인들을 타겟으로 테러를 일삼지 않았다. 즉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나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민간인 테러를 일으키고 현재 중동지역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탄테러와 무차별 살상을 일삼고 있는 IS하고는 엄연히 다른 단체였다. 이런 구분없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투사들의 거사를 무차별 테러라 칭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관점이다.

 

3. 김원봉은 과연 북한정권에 의해 죽은 것일까?

 

해방후 김원봉은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월북했다. 월북한 이후 김원봉은 북한에서 고위직을 거쳤고 1953년 북한에서 불어온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숙청시기 살아남았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이 주도한 연안파 소련파 숙청시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에서 해임되었지만 1956년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1958년 김원봉은 자신이 있던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김원봉의 행적은 1958년 이후 알려진게 없다. 그래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김원봉이 1958년에 사망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김원봉이 과연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일각에서는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 자살설, 총살설 등을 주장한다.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길 1958년 북한 고위직에서 내려온 이후 그가 죽었을거라 예상하고 있고 북한정권이 종파주의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혐의를 뒤집어 씌어 죽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김원봉이 과연 어떻게 죽었고, 북한정권에 의해 간첩혐의를 받고 죽었는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이 부분은 역사학자들이 진상규명을 해야할 것이다.

 

4. 김원봉은 과연 공산주의자였을까?

 

뉴라이트를 비롯한 수구계열에서는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빨갱이라 매도한다. 2015년 영화 암살이 떳을때도 수구세력들은 김원봉을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매도했다. 단순히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이런 관점은 박정희식 반공주의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라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근거도 매우 부족하고 매우 편향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일단 김원봉은 1920,30년대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1940년대에는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애초에 의열단 자체가 아나키즘적인 성향이 강했고 약간의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없다고는 할 순 없지만 기본 이념은 아나키즘이었다. 일각에서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인데 솔직하게 얘기해서 김원봉은 월북 할 수 밖에 없었다. 해방 후 악질친일경찰로 알려진 노덕술이 그를 고문했다. 그런 악질 친일매국노에게 고문당한 김원봉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월북 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해방 후 여운형이 괴한들에게 무차별 테러를 당했듯이 김원봉도 괴한으로 부터의 테러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실제로 괴한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몇번 있었다. 즉 김원봉이 월북한 이유는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닌 괴한으로 부터의 위협과 친일경찰 노덕술의 고문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철저한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매도하는 수구세력의 관점은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5. 글을 마치며

 

김원봉은 남북모두에게 잊혀진 독립운동가다. 한국에서는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를 가지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못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1인체제가 강화된 이후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저자 김삼웅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2007년 평양에 갔을때 애국렬사릉에서 가이드에게 김원봉에 대해 물어봤는데 가이드가 김원봉을 몰랐다고 한다. 오랜세월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인물이 된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한국에서 다시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은 2015년 영화 암살이 개봉하면서 부터였다. 그로부터 1년뒤인 2016년 의열단을 다룬 영화 밀정이 개봉했고 요즘 대한민국에선 전반적으로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 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를 비롯한 수구적폐세력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매도하기 급급하다. 최근 경남 밀양에 의열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참 좋은 일이다. 앞으로 김원봉 선생님이 더 재조명 받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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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22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NamGiKim님께서는 한국 근현대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신듯 합니다^^:) 앞으로도 의미있는 독서 좋은 리뷰 기대해 봅니다 !

NamGiKim 2018-04-22 15:40   좋아요 1 | URL
사실 제 전공이 역사입니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있어요. 현재는 휴학생입니다. 내년에 복학하면 3학년이고요. 우리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와 민주화운동사를 보면 잊혀진 인물들이 매우 많은것 같아요. 그런 분들이 우리 역사에서 재조명 받기를 매우 바랍니다. 특히 여운형 선생이나 조봉암 선생님 같은 분들 말입니다. 무튼 감사합니다.^-^
 
히틀러 - 혼돈의 시대가 낳은 위험한 영웅 아이세움 역사 인물 12
브렌다 하우겐 지음, 이남석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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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절대로 영웅이 아니다. 그는 세계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유대인 혐오증때문에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과 기관총 사격장으로 몰아 학살한 희대의 악마다. 물론 그가 악마가 되기까지는 1차세계대전의 경험과 1차대전 이후의 막장을 달리던 독일상황이 한몫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에게 영웅 칭호를 붙힌다는거 자체가 해서는 안될 짓이다. 이 책이 히틀러를 찬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책을 읽어봤기에 잘 안다. 책 자체는 히틀러에 대해 가볍게 읽기는 괜찮다. 그러나 잘못된건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점수를 높게 주지 않는 것이다.

2018년 4월20일인 오늘은 히틀러의 129번째 생일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히틀러는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서 나치독일의 지도자가 됐다. 요즘 6.13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보니 투표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2012년 대한민국 민중은 잘못된 선택을 해서 그사람 때문에 최악의 상황까지 갔었다.

당시 그분을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미친짓을 하던 모 정당은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반성치 않으면서 뻔뻔스럽게도 현 정부를 색깔론으로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지방선거에서 어떻게든 자신들의 표를 얻기 위해 별짓 다하고 있다. 1933년 독일국민들이 히틀러를 뽑아 암흑의 터널로 갔던 경험이 잊지 않은가? 그러니 투표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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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다른만화 시리즈 1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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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13일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시리아 공습을 승인했다. 다음날 14일 미국은 시리아를 공습했고 양심 있는 사람들은 이 사태를 걱정하고 있다. 자국우월주의와 군사 만능주의에 빠진 도널드 트럼프 정권은 결국 시리아 사태에 개입했고 거기서 제국주의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과거에도 미국은 항상 그랬다.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선언으로 건국된 미국은 건국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수많은 남의나라 전쟁에 개입했으며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미국은 강대국으로 자랄 수 있었고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미국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유럽에서 크게 성장한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를 통해서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미국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를 통해서 수많은 하층계급의 노동자들과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그런 착취와 억압을 통해 성장한 미국은 수많은 나라를 침략했고 백인들이 오기 전부터 살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까지 했다. 이렇게 성장한 미국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세계최강대국이 되었고 냉전시기 소련과 경쟁했다. 소련과 경쟁하던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의 통일 선거를 막고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의 친미 군사독재정권을 지원했듯이, 니카라과를 비롯한 남미의 수많은 군사독재정권을 지원하여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를 억압했다.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는 이와 같은 미국의 만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미국의 민간인 학살과 만행을 보니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 그래도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그나마 신사적이지라는 인식이 나에게는 알게 모르게 존재했지만 그런 생각마저도 깨진 것 같다. 무튼 지금까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미제국주의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좋은 책이다.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를 읽고나니 현재 미국이 시리아에서 제국주의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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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여운형 - 잃어버린 巨星의 재조명
여연구 지음, 신준영 엮음 / 김영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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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매우 존경하게 된 시점은 2015년이다. 서울 1945애서 신구 할아버지가 연기한 몽양 여운형은 매우 카리스마 넘치고 멋진 인물이었다. 드라마 38화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은 좌익 3당(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합당하기 위해 둘째 연구와 셋째 원구를 김일성에게 보내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 주인공 최운혁(류수영 역)은 처음에는 말렸지만 '몽양의 조국애와 좌우연합 통일 정신'에 감탄하여 결국은 이에 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몽양 여운형이 최운혁을 설득시키는 장면은 매우 명장면이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자면 당시 감동하며 본 드라마 서울 1945 덕분에 당시 북으로 간 딸 여연구 여사와 여원구 여사가 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유튜브에서 여운형 선생을 다룬 다큐를 보게됐고 그 다큐에선 여원구 여사의 살아생전의 모습이 나왔었다. 2002년 우이동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원구 여사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눈물이 나왔고 이는 결국 여연구 여사가 쓴 책 '나의 아버지 여운형'을 읽게 된 계기가 되었다.

 

책의 내용을 얘기하자면 딸 여연구가 본 아버지 여운형의 모습과 정치인 여운형의 모습을 담았다. 어린시절 아버지하고 있었던 일화를 비롯하여 개인사적인 이야기가 적잖게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쓰인 책들이 그렇듯이 사실이 아닌 내용들도 너무 많았다. 예를 들면 1940년 여운형이 일본 천황에게 조선독립을 설파한다던지, 김일성이 축지법을 쓴다든지 혹은 빅헌영이 미제 간첩이었다던지 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건 이 책이 북한에서 쓰였다는 점을 염두해둘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책이 북한에서 쓰여 사실이 아닌 내용들도 적잖게 존재하지만 북한에서 자신의 아버지 여운형에 대한 자료를 모와 한권의 책을 쓴 여연구 여사의 노고는 매우 칭찬해주고 싶다. 한국에서 쓴 여운형 선생 관련 서적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북한 사람들이 접하는 여운형에 대해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것이다.

 

여운형 선생은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에 조선의 자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신 위대한 정치 지도자다. 그는 미국에도 소련에도 자본주의에도 사회주의에도 치우쳐지지 않은 균형있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몽양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승만 정권부터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대한민국은 반공국가였기 때문이다. 요즘 정권이 교체되어 다시 남북관계가 좋아지고있다. 이제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재조명 받을 때다. 앞으로 몽양 여운형 선생님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재조명 받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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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고통과 통일전망의 역사 - 통일로 향하는 분단시대의 근현대사 이야기
강만길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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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18년은 남북한의 각 정부가 수립된지 70주년이다. 남북한의 다른 정부가 수립된 지 70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 한반도는 통일되지 못했고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박근혜 정권이 무너지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점차 남북관계가 좋아지고 평화의 씨앗이 나오는것 같지만 아직 갈길은 멀다. 남북관계를 개선을 위한 문재인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네이버 뉴스의 댓글창은 분단을 이용해 먹는 반북반공주의자들의 댓글로 도배되어 있고 현대통령을 종북으로 간주하는 세력들은 쉼없이 색깔론으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물어 뜯고 있다.

 

최근 영화 강철비를 봤었다. 영화 주제는 북한 쿠데타이지만 분단이라는 비극 그 자체에 초점을 둔 매우 훌륭한 영화였다. 강철비에 나온 주인공이 한 말이 있다. "분단국가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의 의하여 더 고통받는다"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가 말해주듯이 우리 역사에서 분단을 정치적으로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더 고통 받았다.

 

사실 한반도 분단 역사의 기원은 단순히 1945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와 38선을 그으면서 부터가 아니다. 책에 따르면 그 기원의 시작은 1592년 임진왜란부터 시작한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 명나라가 조선반도를 할지하려 했던것 부터가 분단역사의 시작이다.  한반도는 임진왜란시기부터 분단에 놓일 위기에 있었고 그로부터 300년 뒤인 1800년대 후반 조선반도는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로 부터 분단에 놓일 위협이 있었다. 즉 조선반도는 강대국들의 이익에 따라 분단될 위협에 놓여 있었다는 얘기다.

 

분단을 단순히 해방 이후 부터보지 않고 기원을 조선시대부터 본 저자 강만길 선생님의 관점이 매우 새로웠고 책을 통해서 분단이란 단순히 남북한의 문제가 아닌 강대국들의 이익다툼과 대립문제도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난 통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있어서 저자의 생각과는 다르다. 저자 강만길 선생님의 경우 어느 한 체제에 의한 흡수통일은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흡수통일이 아니면 방법은 연방제 통일인데 연방제 통일의 경우 말만 통일이지 사실상 완벽한 통일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얘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연방제 통일 그 자체를 나쁘게 보는건 아니다,) 따라서 난 연방제 통일 보단 1990년 독일 통일과 같은 대한민국 체제의 흡수통일을 해야한다고 본다. 물론 어느 한 체제로 인한 흡수통일은 분명 부작용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김정은 체제로 흡수통일 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중요한 문제는 독일통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 체제로 흡수통일을 하고 난 뒤 나타날 부작용과 정치적 갈등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문제를 어떻게 최소화하고 수습하느냐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비록 통일 방법론에 있어서 나와 저자 강만길 선생의 관점은 갈리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은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알아야할 역사를 담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요즘 남북관계가 점차 좋아지고 있다. 올해 북한은 평창올림픽에 참가했고 남측공연단을 초청해 평양에서 공연할 수 있게 협력해 주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북괴와 김정은의 정치적 전략이라 비방한다. 일각에서 뭐라하든 난 상관없다. 분명한 사실은 일각에서 주장하는 반북 반공정책은 지난 70년간 남북관계에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를 주지못했다. 요즘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느끼고 있다가 이 책이 생각나서 서평을 남겼다. 문재인 정부는 이번 남북협상과 교류 협력을 통해서 작게는 개성공단 재개 및 금강산 재개를 이뤄내고 크게는 남북통일의 초석을 깔아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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