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읽는 서양사 5 : 현대편 - 제국주의에서 세계화까지 사료로 읽는 서양사 5
노경덕 지음 / 책과함께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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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읽는 서양사 5 현대편 서평: 기존의 서양사 책과는 비교적 다른 접근을 한 흥미진진한 서양사 책

2022년 중반이었던 것 같다. 소련사 전공자이자 내 페친이기도 한 노경덕 선생이 서양사 책을 집필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이 아마 작년 6~7월이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우연히 아는 사람을 통해 받게 된 노경덕 선생의 강연 글인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그 진실과 왜곡‘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글을 읽으며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소련에 대한 편견을 많이 깰 수 있었다.

작년에 신간을 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간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진진한 구성과 내용이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은 작년 생일 때 지인이 생일선물로 받았지만, 읽게 된 것은 10개월이 지나서였다. 무튼 책을 읽게 됐고,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책의 내용은 과거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부터 냉전의 종식까지를 다루고 있다. 각 시대 및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관련 사료들을 ‘자료‘ 형식으로 모아놓았으며, 참고문헌을 각 주제마다 표기해놨다. 그래서 관련 파트가 어떠한 참고문헌을 인용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흥미로운 내용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냉전을 다룬 파트에서 반식민주의 운동에 관한 내용은 시중에 나와있는 서양사 통사에서는 많이 다루지 않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책은 분명히 다루고 있으며, 당시 탈식민주의 운동에서 소위 제3세계로 불리는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도 제법 솔직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나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루뭄바와 친미 독재자 모부투에 대한 얘기는 이 책을 통해 좀 더 상세하게 알게 됐다. 사실 그 전까지는 이름만 들어본 정도였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되니 상당히 슬펐다. 그 외에도 베트남 전쟁에 대해 미국이 탈식민주의에 반하는 행위로서 언급 및 다뤄진 것도 솔직히 많이 공감했다.

소련관련 부분이야 저자의 본 전공이니 당연히 읽어볼만한 내용들이 많다. 이 책 또한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이 파시즘의 위협속에서 단행한 대숙청이 분명한 한계 및 과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냉전기 서방세계가 선전하던 대규모의 묻지마 집단 살인은 아니었음을 역설한다. 소련 시대 산업화나 이후 나타난 한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에서 소련이 공세가 아닌 방어적 입장인 사실도 분명히 언급한다. 매우 흥미롭게도 흐루쇼프 시대에 대해서도 소위 관료주의가 더 대두한 배경을 언급했는데,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의 서양사 책들에서 찾기 힘들기에 정말 좋았다.

그리고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부분에서도 승리의 주역은 영미 연합군이 아닌 소련군이었던 것도 강조한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서구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세운 업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도 보인다. 대표적으로 반러감정이 강한 폴란드나 발트3국 그리고 서유럽 국가들이 그런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투입된 독일군 사단이 200~300개가 넘는 반면, 북아프리카에 영국군에 맞서 투입된 독일군 사단이 4~5개 정도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스탈린이 강력히 요구했던 이른바 제2전선도 1944년 6월 5일이 되서야 열렸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소련은 규모면에서 3년 동안 사실상 혼자서 독일군을 상대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체는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해보자면, 영국과 미국이 아닌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소련 민중과 소련군이다.

책 마지막 파트인 냉전 종식도 상당히 읽어볼만 했다. 소위 소련의 군사적 침공 사례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사실은 소련 지도부가 가급적으로 피하려 했고, 명분이 아프가니스탄 좌파정권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냉전 말기 동유럽에서 발생한 반정부 시위에 대해서도 단순히 서구가 선전하는 자유를 위한 시위로만 해석하지 않은 점과 이후 나타난 한계 때문에 공산당이 다시 지지받게 된 것을 언급한 것도 다른 책들에선 발견하기 힘든 부분이다.

전반적으로 많은 공부가 된 책이다. 책에 인용된 자료들 또한 빠짐없이 읽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읽지 않았던 자료들을 통해 또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냉전 파트에서 매카시즘 관련 자료나 반공목사 빌리 그레이엄의 발언등을 읽으면서, 한국의 극우 태극기들과 비슷한 맥락과 주장이 담겨 있는 사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즉, 한국 극우들이 주장하는 맥락을 책에 자료를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책이 제공해줬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제국주의와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파트에서 서구의 아프리카 침탈을 다룬 내용과 지도를 보면서 진지하게 느낀 것이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그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절대 지지및 지원하지 않는 이유 말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정부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사회에게 ˝대포 주세요! 미사일 주세요! 전투기 주세요! 장갑차 주세요! 탱크 주세요!˝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며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을 아프리카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황당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소위 자유민주주의 국가 서방은 자신들을 잔혹하게 지배한 압재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프리카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지도 않은 것이며 아무런 효과없는 대러제재에도 동참하지 않은 것이다. 젤렌스키가 말하는 자유세계 같은 용어가 아프리카에겐 위선 그 자체일 수 있다. 즉 이런 맥락을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흥미진진한 서양사 책을 읽었다. 자료로 인용된 내용들도 대체로 좋았고, 나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이들의 생각 또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극체제와 다극체제의 대립,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팔레스타인 분쟁 속에서 서양사를 생각해볼 기회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책이 나름 제공해줬다. 그것 또한 좋았다. 국내에 나온 서양사 책들 중에 제법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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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뿐 아니라 중남미 국가들도 우크라이나 지원에 회의적인 편입니다. 왜냐하면, 중남미 국가들에게도 서방(특히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은 자신들을 악랄하게 탄압하고 지배한 압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전자의 두 국가는 과거 영토 지배 및 원주민 대량학살, 후자의 한 국가는 반민주적 독재정권 후원)
 

1935년 8월 2일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이른바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표명한 테제가 채택됐다. 당시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뜻하는 테제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디미트로프 테제(Dimitrov Thesis)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는 누구일까? 오늘은 디미트로프의 생애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사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1882년 6월 18일 불가리아의 서부에 위치한 코바체프시(Kovachevtsi)에서 태어났다. 디미트로프는 8남매 중 첫째였으며, 그의 부모는 오스만 제국의 마케도니아 출신의 이주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의 장인이었으며, 공장 노동자 출신이기도 했다. 디미트로프가 첫 정치활동에 참여한 것은 19세가 되던 1902년이었다. 불가리아의 수도이던 소피아에서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했으며, 당시 디미트로프는 인쇄식자공이었다. 그리고 그는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했으며, 1904년부터 1923년까지 불가리아 노동조합연맹의 서기장을 지냈다.


전반적인 유럽 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가리아의 사회주의 운동도 불가리아 당국의 탄압을 받았는데, 디미트로프 또한 1911년에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 시기 유럽의 전황은 모로코 위기와 발칸 위기를 통해 점차 고조되고 있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흥미롭게도 디미트로프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 불가리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18년 체포될 때까지 불가리아의 제1차 세계대전 및 새로운 전쟁 공채 발행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디미트로프는 1919년에 석방되었으며, 1917년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를 방문하고자 했다. 그가 처음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문한 것은 1921년이 되어서였다. 1922년 12월 디미트로프는 공산주의자 국제무역연맹인 프로핀테른의 관리직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17년 볼셰비키가 주도한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1919년에 코민테른이 창설되었으며, 불가리아 사회노동당 또한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당명이 교체되었으며, 이들은 불가리아 군부에 맞선 투쟁을 지속했다. 1923년 6월 불가리아의 알렉산드르 스탐볼리스키 총리가 쿠데타로 암살당하자 불가리아의 공산주의자들은 쿠데타의 주역 알렉산드르 찬코프 총리에 반대하는 봉기를 조직했다. 디미트로프 또한 혁명 활동가로서 탄압에 맞선 저항을 지도했으며, 저항이 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나자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했다. 디미트로프를 포함한 불가리아 공산당 지도부는 군부 당국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궁극적으로 소련으로 망명했다.


이후 디미트로프는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며, 1929년까지 소련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소련에서 망명생활을 한 디미트로프는 활동 지역을 독일로 옮겼으며, 거기서 히틀러의 나치당에 맞서 독일 공산당을 이끄는 반파시즘 활동을 했다. 그러나 독일은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이는 역으로 히틀러와 같은 나치 극우들이 정권을 잡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33년 1월 독일의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으며, 나치는 보다 노골적으로 테러와 폭력을 반대파들에게 사용하게 됐다.


1933년 2월 27일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국회의사당(Reichstag)이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주의자 마리뉘스 판데르뤼버(Marinus van der Lubbe)에 의해 불에 탄 사건이 발생했다. 국회의사당이 불타자 나치는 광분했고, 방화범인 판데르뤼버가 단독범행을 재판에서 주장했음에도 이를 빌미로 독일 공산당을 포함한 나치 반대파를 탄압하는 명분으로 사건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디미트로프 또한 체포되었으며,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디미트로프는 당시 법원과 검찰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관련 재판은 3개월 가까이 지속되었으며, 1933년 12월 13일 변론단계에 들어가 검사총장의 논고, 변호인의 변론에 뒤이어 12월 16일에 디미트로프가 최종 진술했다. 당시 나치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독일 사법부는 주범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를 제외한 모든 ‘공범’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며, 이에 따라 석방되었다.


이후 디미트로프는 1934년 2월 27일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갔으며, 이오시프 스탈린 또한 그를 격려 및 환영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통해, 디미트로프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는데, 여기서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에 있어 코민테른의 임무”라는 이름으로 사건에 대한 보고를 했다. 또한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에 맞서, 부르주아 및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들과도 연합할 수 있는 인민전선을 조직해야 함을 역설했다. 궁극적으로 디미트로프의 주장이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되었으며, 이후 인민전선 혹은 통일전선은 디미트로프 테제로 불리게 됐다. 당시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기도 했다.


“파시즘, 그것은 근로대중에 대한 자본의 잔인무도한 공세다.

파시즘, 그것은 방자한 배외주의와 침략전쟁이다.

파시즘, 그것은 광란하는 반동과 반혁명이다!

파시즘, 그것은 노동자계급과 전 근로자의 가장 흉악한 적이다!”


상당히 뛰어난 분석이다. 파시즘에 대한 디미트로프의 분석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그리고 군국주의 일본의 사례를 보자면, 그가 내린 정의에 부합하기까지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을 구성하는 세 나라는 자본에 충실했고, 침략전쟁을 추구했으며, 반혁명적이었고, 진보적인 노동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따라서 탁월한 분석이라 할 수 있겠다. 디미트로프의 노선이 공식적으로 활용된 첫 무대는 바로 1936년에 발생한 스페인 내전이었으며, 당시 스페인에선 파시스트 프랑코 세력에 맞서 미국, 영국, 소련 등이 민주 진영을 지원했다. 비록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의 승리로 끝났기에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중일전쟁 당시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국공합작에 따른 반일항쟁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소련의 연합은 디미트로프 테제가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서 유효했음을 역사적으로 입증했다.


디미트로프의 조국인 불가리아는 1930년대부터 친파시즘적 경향을 보이다가, 1941년 독소전 발발 이후엔 나치에 협력하는 국가가 되었다. 당시 불가리아는 나치와 함께 반소·반공투쟁을 전개했으며, 함께 군사적인 방어선도 구축했다. 그러나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쿠르스크 전투를 기점으로 나치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소련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불가리아는 1944년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다. 당연히 디미트로프는 전쟁이 끝난 이후 해방된 불가리아로 돌아왔다. 추방당한지 22년 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1942년 7월 디미트로프는 조국전선 강령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보자.


“보리스 국왕정부의 반인민적인 정책은 절체절명의 민족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오늘날 불가리아는 사실상 히틀러의 속국이 되고 불가리아 인민은 독일 제국주의자의 노예가 되었다. 히틀러의 광기어린 세계지배 계획이 반드시 실패할 운명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배신적 정책을 수행하는 것은 곧 불가리아 인민을 의식적으로 파멸로 내몰아 민족적 독립을 잃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중략.....) 우리 국민에게 긴요한 위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국전 선의 구국정책을 단호하고 일관되게 실행할 힘을 갖춘 진정한 국민적 정부를 한시바삐 수립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국전선은 현재의 배신적 · 반인민적 친히틀러 정권을 타도하고 불가리아 국민의 진정한 정부를 세우는 일을 당면 투쟁목표로 한다. 또한 이 정부는 전 불가리아 인민의 의지와 지지를 바탕으로 대(大)국민의회의 소집을 위한 조건을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의회가 앞으로의 불가리아의 통치형태를 정하고, 우리 조국의 자유, 독립, 번영에 필요한 헌법상, 물질상의 보장을 확립해 낼 것이다.”


1946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불가리아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인민민주주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와 동시에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정권과 루마니아의 사회주의 정권과도 협상을 시도했다. 다만 디미트로프와 티토가 협상하기도 했던 남슬라브 연맹 창설은 스탈린이 반대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인근 국가인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하고도 협상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일설에 따르면 디미트로프는 호자에게 “엔버 호자 동무 이 곳을 보십시오! 당을 깨끗하게 유지하도록 합시다! 혁명적이고 프롤레타리아트 적이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지도자가 된 이후부터 그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는데, 소련 모스크바에서 병을 치료받던 중인 1949년 7월 2일에 사망했다. 이후 그의 시신은 엠버밍 처리되어 레닌처럼 소피아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박물관에 조성된 영묘에 안장되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디미트로프의 시신은 화장됐고, 영묘 또한 1999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여론조사 결과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시민의 2/3이 철거를 반대했다고 한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이른바 인민전선 노선을 만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사회주의 혁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민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했고, 대체로 인민전선 노선에 입각한 진보적 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이는 사회주의 진영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디미트로프가 발표한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은 분명히 고찰할 가치가 있으며, 현재 윤석열에 맞선 투쟁이 격해지는 시점에서 우리가 어떠한 노선을 추구해야하는지, 그 광명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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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 미국에 미련을 버린 북한과 공포의 균형에 대하여
정욱식 지음 / 서해문집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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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박근혜 시절 억울한 여론몰이로 강제추방 당했던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의 저자인 신은미 씨가 한 말이다. 운동권에 처음 발을 들여놓던 시기 나는 이 말을 크게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소위 우리가 아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너무 과장되고 각색되며 최소한의 사실조차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점에서 보자면 한국 일반인들이 아는 북한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한국은 윤석열 당선을 통해 다시 한번 자칭 보수세력(물론 나는 이들을 극우 꼴통들이라 생각한다.)이 다시 집권하게 됐다.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 위태롭던 한반도 평화는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더욱 악화 일로다. 거기다 20222월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현재 심화 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서방세력과 비서방세력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 이런 과정에서 윤석열 정권은 한··일 동맹을 통한 집단서방세력의 편에 전적으로 서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현실상 한미동맹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반대하는 주장이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제문제는 냉철해야 한다. 한국의 이익에 미국이 해가 된다면 당연히 반대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우리에겐 항상 부족하다.

 

윤석열 정권 들어서 이러한 문제가 더욱 심화됐지만, 사실 자칭 진보 정권(난 민주당도 우익 정권이라 생각한다.)인 문재인 정권도 기본적으로 한미동맹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권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국방비를 투자하여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했으며, 역으로 문재인 정권이 강조하던 남북관계 개선은 실패했다. 냉철하게 판단해보자면, 문재인 정부가 가장 성공시킨 정책은 한미동맹과 국방력 강화고, 가장 실패한 정책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다. 물론 문재인 정부 또한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분명히 했다. 그런 노력을 개인적으로 나쁘게 보지는 않으며, 그 당시 나 또한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접근 방식이 잘못되었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한이 요구하는 한미연합훈련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 이를 수행했고 일방적으로 북한에게 핵을 포기하면 이런 것을 들어줄께라는 태도로 임했다. 거기다 미국은 2019년 하노이 회담이 있기 5일 전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관 습격 사건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은 소위 북한인권운동을 전개한다는 자유조선이라는 단체가 주도했는데, 남 나라 대사관에 가서 대사관 직원들을 총칼로 위협하고 거기 있는 노트북과 USB를 탈취해간 사건이다. 거기다 자유조선 측에서 이 자료를 미국 FBI에게 넘겼다는 사실에서 미국이 무고하다는 말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북한이 다소 과격 내지는 강경하게 상대방 측을 비난하는 것과 미사일 발사나 열병식을 통해 군사적인 대응을 하는 것에는 바로 이러한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항상 우리나라나 미국 주류 언론의 보도는 이런 사실은 생략하고 북한의 도발만 강조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나 미국은 지난 회담에서 이와 같은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우리 사회 또한 우리가 관계를 개선하면 북한이 일방적으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겠지.”와 같은 나이브한 태도로 임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 이러한 태도와 대응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정욱식 선생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북한이 온다는 여러모로 읽어볼 가치가 높은 명저다.

 

앞서 언급한 우리들의 나이브하고 안일한 태도 그리고 미국의 태도에는 도데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 바로 북한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점과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코로나 초기부터 올해까지 뉴스에서 보도했던 북한의 식량난 혹은 제2의 고난의 행군과 같은 보도들을 생각해보자. 이런 기사들을 보면, 주장하는 것이 항상 일관됐다. 북한은 굶고 있고, 아사자가 속출하며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기에 망할 것이라는 식의 주장들이 바로 그렇다. 이런 뉴스의 보도대로라면, 북한은 100번은 망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김정은 정권 들어서는 인프라 발전도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식량 난의 출처도 문제다.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어왔다는 가장 큰 근거는 한국 농촌진흥청과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추정치다. 국내 언론이 자주 인용하는 농촌 진흥청 추정치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2년 북한의 식량 생산량은 451만 톤, 482만 톤, 455만 톤, 464만 톤, 440만 톤, 469만 톤, 451만 톤이다. 국제기구인 FAO의 추정치도 이와 비슷하며, 이를 근거로 북한이 매년 100만 톤 안팎의 식량이 부족하다는 보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20217월 유엔에 제출한 <VNR> 보고서를 보면, 북한이 자체적으로 추계한 곡물 생산량은 농촌 진흥청과 FAO보다 많다.

 

2016년부터 2020년 생산량을 보면, 585만 톤, 550만 톤, 485만 톤, 665만 톤, 552만 톤이다. 2022215일자 북한의 조선신보2021년의 곡물 생산량을 550만 톤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의 통계 작성 역량의 부족을 감안하더라도 유엔에 제출한 <VNR> 보고서는 엄연한 1차 자료다. , 한국 정부와 서구 언론들은 이 자료를 감안하지 않는다. 반면 동국대 DMZ평화센터의 김일환 연구위원은 FAO 추정치의 허점을 지적했다. FAO2016년부터 개인텃밭에서의 생산량을, 2018년 이후에는 경사지에서의 생산량을 통계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개인텃밭과 경사지에서의 생산을 독려한다. FAO는 수확 후 손실량을 201675만 톤에서 2021년에는 100만 톤으로 올려 잡았는데, 이에 대해서 김일환 연구위원은 북한이 영농기계화, 운반능력, 도정 및 보관 시설을 꾸준히 개선해온 점을 들며 손실분이 감소하고 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분석했다.

 

물론 북한이 식량이 부족하지 않다거나 식량난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제2의 고난의 행군이나 대량의 아사자 속출 같은 보도는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거기다 김정은 시대 들어서 먹거리의 다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도 외면받고 있다. 2019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탈북자 설문조사에 따르면, 북한에서 고기 섭취를 얼마나 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46.6%일주일에 한 두 번’. 15.5%거의 매일 먹었다고 답했다. 탈북자들이 북한이 취약계층이라고 평가받는 점을 감안해서 보더라도, 북한 사람들이 아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정책 면에서도 북한은 축산 시설의 신축과 현대화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으며, 수산물과 그 가공품의 섭취량도 증가했다. 북한 무역수지의 효자 노릇을 하던 수산물이 2017년 유엔 안보리 제재로 수출길이 막히자, 북한 당국은 수산물을 내수용으로 돌리는 한편, 젓갈 등 가공식품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채소, 과일, 기호식품 생산도 마찬가지며, 먹을거리 다변화는 과거 현저히 높았던 곡물 의존도를 점차 낮추고 있다. 따라서 식량난 운운하는 일각의 뉴스는 이러한 사실들을 철저히 외면한 비약이 만들어낸 참사다.

 

이처럼 북한을 단순히 사람이 굶어 죽는 국가로 판단하는 것은 30년 전 고난의 행군 시절 당시의 인식이 만들어낸 나이브한 오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 김정일 시대의 북한 상황과 김정은 시대의 북한 상황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과거 김정일 시대에는 1990년대 위기 속에서 외부의 지원을 받으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김정은 시대는 더욱더 자력갱생을 강조하며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으려는 모습도 포착된다. 거기다 북한은 핵무장에 성공했다. 재래식 전력에서 남한 군사력에게 밀린다 해도, 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쉽게 무시당할 수 없다. 북한의 ICBM은 충분히 미국 본토를 타격할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전쟁 시 미국을 공격하면 북한도 상상을 초월할 보복을 받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핵을 먼저 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은 핵을 가지고 있고, 핵 우위에서 당연히 남한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것에 대해 우려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 내에서도 자체 핵 개발 얘기가 나오는데, 남한의 기술력이 있지만, 미국이 허용해줄 리 만무하다는 점에서 실현 불가능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북제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미국과 한국이 가하는 대북제재가 효과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 또한 현실 외면이다.

 

북한은 대북제재를 받으면서도 핵을 만들었고, 지금도 사회가 굴러가고 있다. 거기다 중국과 러시아가 대북제재에 적극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2022년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북한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관계는 미국에 맞서 보다 강화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올해 7월 러시아의 쇼이구 국방장관이 평양을 방문했다는 사실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일극체제냐 다극체제냐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과거 1990년대 당시 북한의 상황으로 보는 것 또한 이제는 낡은 생각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개혁개방을 원한다고 판단하는 것도 과거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북한은 1990년대 그 어렵던 시기에도 개혁개방을 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버텨오고 있다.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현실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 사람들도 물질적으로 남한이 자신들 보다 잘산다는 거 안다. 그리고 남한 드라마 보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가 경쟁하는 사회라는 점 그리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무상주택을 하지 않는 점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동유럽 사회의 자본주의화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안보며, 체제 전복당한 리비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철저히 외면한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에 근거하여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북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거나 과거의 생각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닌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남북정책과 한반도 국제 정세 파악 방식도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우리는 북한에 대해 큰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다. 물론 북한 사회가 문제가 전혀 없다고 말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북한을 알기 위해선, 현실을 인정하고 단순히 편견만 가지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북한은 70년이 넘게 미국과 적대하고 있으며, 그러한 현실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국은 1970년 기준으로 이미 수백개의 핵탄두를 한반도 인근에 배치한 적이 있으며, 1960년대에는 일본 오키나와에 무려 1,200개의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북한은 1968년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고,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상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다. 1970년대 후반 기준으로 미국은 한반도에 최소 4만 명 이상의 지상군과 700개 이상의 핵탄두 그리고 항공모함의 지원을 받는 해공군을 배치하고 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점도 우리 사회가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023년 들어 한반도 정세 관련한 책을 읽은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여러모로 많은 공부가 됐다. 또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2020년대 코로나 위기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까지 해서, 세계가 바뀌고 있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집단서방 중심의 일극체제에서 이에 대항하고 있는 세력들의 다극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초기에 대러제재를 가했지만, 러시아의 경제가 안정화되는 반면, 서구가 휘청거리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따라서 남북관계를 보는 관점도 1980년대 후반 자칭 동유럽 민주화 흐름이나 1990년대 북한 고난의 행군 시절의 관점으로 한반도 정세와 북한을 파악해서는 안된다는 것, 이것이 정욱식 선생의 책이 주는 훌륭한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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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2023-11-12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 글쓴이가 쓰신 북한에 대한 접근방식에 대한 재고 검토가 필요하다는 부분은 저도 동감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과격한 행동을 자칫 그들을 이해 못한 우리의 잘못으로 넘어가는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글쓴이의 생각이 그런건지 혹 제가 오해하고 있는지 모르나 북한 연평도 포격 사건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인해 죽어간 이들 또 피해를 입었는데도 복구하지 못하고 거기에 대북전단삐라 살포를 트집잡아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시킨 행위는 도저히 정상적인 국가와 지도자의 행위라 볼 수 없습니다 그깟 삐라에 휘둘리는 나라체제라면 솔직히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 구성도 못하는 테러단체라는걸 증명해주는꼴이죠 또 김정은 김여정은 한미연합훈련을 트집잡으나 실상은 중국 뒤에 서서 중국 앞잡이 노릇하면서 그들의 무기를 받아먹으며 군사력을 크게 늘리는 북한을 보면 이중잣대란 말이 생각납니다 거기에 중국이 시진핑이 등극하고 문재인 정권이 친중정권으로 중국에 숙이는 약한 모습을 보이니 즉각 동북공정을 강하게 미는 행위를 보며 대한민국 국민들은 쓸데없는 힘을 써야 하는데 정작 북한 김정은은 거기에 말한마디 한 거 없지요 중국에게 말못하고 경제적 노예를 자처하고 있는 상태이고 인민들은 탈북을 하거나 이젠 체제에 질려있으니 내부결속을 위해 온갖 패악질을 하는데 이거에 대한 비판이 없는것은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한국 미국 비판뿐 아니라 북한에 대한 시선을 재검토하되 왜 그러한지를 또 그들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으면 결국 무의미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NamGiKim 2023-11-12 23:50   좋아요 0 | URL
일단 긴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천안함이나 연평도의 경우 상당히 민감힐 주제죠. 다만 천안함의 경우 제 개인적 의견을 얘기하자면, 북한이 했다고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다소 음모론적으로 들릴 수는 있으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고 봅니다. 연평도도 안타까운 사건이며, 당연히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죠. 이 책 또한 북한이 한반도 정세를 자극하는 일을 한다고 언급을 안하는건 아닙니다. 단 그 부분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게 책의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거죠. 물론 북한이 다소 과격하게 나온다는 점에는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과연 우리가 무결한지는 되돌아봐야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평화무드에서 한미군사연합훈련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면, 안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때 했죠. 이 부분은 육군 예비역 준장 출신이신 한설 장군도 언급을 했습니다. 북한을 중국에 종속적인 위치에 보는 것도 다소 사실관계에 벗어난 점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북한이 중국이나 소련에 지원을 초기에 많이 받은건 사실이지만, 중소분쟁 당시 소련에 비판적인 모습이나 중국 문혁에 대해 비판적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고, 핵 무장의 경우 중국이 찬성하는게 절대 아님에도 중국 입장 생각 안하고 핵을 만들었죠. 단 북한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관계를 돈독히할 대상이 전략전술적으로 중국ㆍ러시아랑 하는게 최선이니 입장 안맞아도 협력 노선을 현재 견지하는 것이죠. 저 또한 북한을 맹목적으로 칭송하고 찬양하는건 위험하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해 다른 접근을 해야한다 보는건, 상대방에 대한 증오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보기 때문입니다. 아 참고로 이 책도 언급하는거지만, 문재인 정권이 가장 못지킨 공약이 남북관계 개선이고, 가장 잘지킨 공약이 국방력 강화와 한미동맹 강화라합니다. 그래서 전 문재인 정부가 친미정부였다 봅니다. 무튼 긴 댓글 감사합니다. 생각은 달라도 이런 건설적인 댓글은 나쁘지 않네요.
 
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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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저작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ean War)>이 완역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20231월 내가 베트남 하노이에 막 도착했을 때쯤이었다. 늦은 시간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나는 스마트폰을 보며 데이터를 켰고, 아는 페친으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그 친구가 보낸 카톡은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2023년에 완역될 예정이라는 한 국내기사였다.

 

사실 나는 의심하고 있었던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980년대 그 암울했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일월서각에서 이른바 해적판으로 <한국전쟁의 기원> 1권만 번역했는데, 2권은 거의 30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워낙 유명한 학자의 저서이고 나와도 절대로 안 팔릴 일이 없는데 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번역되지 않았던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브루스 커밍스의 책은 2023년인 올해 완역됐고, 5월에 출판됐다. 일월서각 출판사의 해적판이 1986년에 나왔으니, 이 책의 완역된 것은 첫 번째 시리즈가 나온지 27년이 지나서인 것이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이 책이 빨리 완역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3월 대학원 석사 2학기가 시작될 쯤에도 항상 알라딘을 통해, 이 책의 출판 근황을 수시로 모니터링 했다. 그러던 4월에서 5월 쯤 알라딘에서 후원받는 것을 확인했고, 나는 거리낌 없이 큰 돈을 후원했다. 후원한 이후 5월 말쯤 신간이 내 집에 도착했다. 나는 정말 기뻤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쉬웠다. 왜 이제야 완역된 것일까?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이 책을 읽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올해 7월 나는 국내 통일운동 단체인 AOK를 통해,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됐다. 거기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통일운동 단체서 활동하는 이들을 많이 만났고, 728(미국 시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커밍스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커밍스 강연에 만족했고, 그를 직접 만나 악수 및 질문을 할 기회가 있었으며, 신간에 저자의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펼친 건 인천에서 뉴욕으로 향하던 도중 비행기 안에서였다. 인천에서 뉴욕까지 14시간이나 걸리니, 일부러 책을 읽었다. 물론 비행기 특성상 독서를 편하게 하지는 못하니 많이 읽지는 못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책을 다시 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을 방문해야 했기에 조금 밖에 못 읽었다. 따라서 이 책을 본격적으로 정독해가며 읽게 된 것은 9월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사실 1권이야 해적판을 통해, 몇몇 부분을 수업 발제를 하면서 읽기도 했고, 반공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참고를 여러 번 했지만, 완독을 하고 나니 많은 것들을 배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올해 출간한 버전이 보다 읽기에는 편했고, 더 잘 읽혔다. 책은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 형성 과정을 다루고 있다. 특히나 일제가 패망한 이후 여운형의 건준과 인민위원회 체제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커밍스는 많은 부분을 집중하고 분량을 할애했다.

 

1980년대 시절 해적판으로 나온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를 읽었던 운동권 학생들은 당시 리영희 교수가 말했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했다. 박정희 시절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으며, 정치사회적으로 극도의 억압성을 보였던 한국 사회에서 해방 정국 과정을 반공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보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며 사실상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북한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과 혐오감 그리고 극단적인 타자화가 일상화된 이 사회의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커밍스를 읽고 경험하게 되는 충격이란 이루 헤아릴 수 가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커밍스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해방 이후 미군정의 형성과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반민중성이다. 또한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보기 위해 일제 식민지 시절의 상황과 1930년대 만주에서 벌어진 토벌과 반토벌의 역사에도 집중했다. 1930년대 일제의 중국 침략 당시, 일본은 자신들에게 협력하는 친일파들을 동원하여 독립운동가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고, 당시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독립군들은 이에 대항했다. 커밍스는 1930년대와 1940년대 당시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친일파들이 1945년 이후 미군정과 결탁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주류가 되었다고 봤다. 반면에 이들에 맞서 싸웠던 독립군들은 1945년 소련의 지원 아래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형성했으며,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하여 주류가 되었다고 커밍스는 해석했다.

 

따라서 쉽게 정리하자면, 1930년대 당시 독립군을 토벌했던 친일파들이 모인 것이 대한민국 정부였고,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및 독립운동을 한 세력이 모인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라는 것이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친일파들의 토벌에 맞서 싸웠던 인물은 이후 북한의 초대 지도자가 되는 김일성과 그의 혁명 동지들인 김책, 최용건, 강건, 최현 등이었다. 반면에 당시 친일을 했던 백선엽이나 김석원을 포함한 친일 군인들은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군 요직을 차지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브루스 커밍스가 주목한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이었던 것이다.

 

커밍스는 해방 이후 미군정이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결탁했으며, 특히나 대중들의 원망을 산 친일경찰들을 제한없이 채용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미군정은 초기부터 그 당시 민중들이 원하던 방향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갔으며, 이것이 정치 문제와 심각한 경제문제로 이어지며 민중들이 저항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1946101일에 시작된 대구에서의 민중봉기는 미군정의 잘못된 정치경제적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대응하는 미군정의 태도는 무자비한 폭력과 진압이었으며, 커밍스는 미군정이 민생을 해결하기 보단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구실로 이런 폭력을 옹호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커밍스는 소련의 북한 점령과 군정 체제에 대해 미군정과는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린다. 물론 커밍스가 보기에 소련군은 초기 약탈과 아녀자 강간을 자행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을 했으며, 비교적 조선인들이 자주적으로 이끄는 단체의 활동을 보장하고, 이들의 국가 건설 사업을 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들이 가장 싫어하는 친일 경찰들을 주요 요직과 자리에서 철저히 배제시켰으며, 인민을 위한 새로운 경찰을 만들기 위해, 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래 한국전쟁의 기원에 나오는 내용을 보자.

 

경찰과 군사 부문의 발전도 1946년 초에 전개된 중앙집권화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다. 일제가 패망할 때 북한의 여러 조직에 있던 지역적 분포는 치안 유지를 맡은 기관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 기관은 치안대(남한과 같다)나 보안대·적위대·민위대 등이다. 일제강점기에 경찰로 근무한 한국인은 외딴 지역에서만 계속 재직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은 쫓겨났다. 새로운 지방경찰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었다. 미국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일반 경찰에 임명됐다”. 각 지방에서 치안 유지를 맡은 단체도 정치적 색채를 띠었다. 이를테면 함경북도 민위대는 최용건을 비롯해 만주에서 돌아온 인물이 이끌엇으며, 평안남도에서 이른바 적위대는 현준혁·김창일·장시우 등이 지휘했다.”(한국전쟁의 기원 1 p.519)

 

“19464월 말 중앙은 전국적 보안대 조직 내부에 적절한 지휘 계통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경찰 권력은 아래에서 중앙으로 이동했지만, 일부 권력은 여전히 지방에 남아 있었다. 이 시점에서 북한의 경찰력은 모든 15,600명으로 도마다 2,300~2,600명 정도였다(예외적으로 평안북도는 3,900, 강원도는 1,560명이었다). 적절한 인원을 배정한 것은 중앙이지만, 각 도의 실질적인 임명과 배치는 해당 인민위원회가 맡았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의 경찰과는 정반대로 주민의 호응을 얻고 지방에 뿌리내린 경찰이 나타났다. 비판적 태도를 보인 미국의 공식 자료조차 이런 성취를 인정했다. “새로운 경찰은 (다수가 여성인데) 자기 업무에 경험을 쌓았다. 그들은 대중에 기반을 갖고 있으며 사람들의 존경과 협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나중에 한국전쟁 때 체포돼 심문받은 면의 파출소장은 "일제강점기의 경찰의 관행에서 완전히 벗어난 정직하고 박식하며 자부심과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고문과 강압에 따른 심문은 법률로 금지됐다. 그런 방법은 때로 사용됐지만대부분 상세한 질문과 재교육으로 대체됐다. 이처럼 북한 경찰은 "일제의 폭정 고문에 따른 자백의 상징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한국전쟁의 기원 1 p.521)

 

이와 같은 커밍스의 책의 내용을 근거해서 보았을 때, 분명히 북한은 친일파 청산의 노력을 상당 부분 보였으며, 실제로 민중들이 가장 싫어하는 악질적인 친일 경찰들을 숙청했다. 그 점에서 커밍스는 북한이 남한 보다 민족적 정통성 측면에서 정통성이 있다고 해석했다. 아마도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해보지 못했거나, 주로 우익들의 시각에서만 본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상당 부분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북한의 경우 친일파를 숙청하는 작업을 거쳤고, 이 점에서 남한 보다 훨씬 철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법적으로 친일 때문에 처벌받은 친일파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 이점에서 북한은 분명히 민족적 양심을 지켰다.

 

사실 북한의 친일파 숙청이나 미군정의 반민중적 친일세력 등용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한국과 북한의 근현대사가 상당히 비교됐던 것 같다. 비록 북한이 현재는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민족적 차원에서 보았을 땐 남한이 훨씬 더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군정 시기 등용된 경찰의 대략 85%가 친일 경찰이었다는 사실과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독립운동가 출신의 인물 최능진이 결국 쫓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암울하기까지 하다.

 

1980년대 일월서각 해적판을 읽었던 학생들이 상당부분 NL이 된 이유에는 바로 이러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근현대사의 진실은 당연히 남한이 북한보다 정통성이 부재한 국가로 보이도록 유도했다. 거기다 전두환 시기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현존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가고 고문당하며 연행되는 현실은 충분히 학생들을 급진화할 만한 배경이었다.

 

사실 나는 커밍스의 과감한 역사적 분석이 상당부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현재 남북한의 경제격차는 많이 나지만 북한은 친일파를 숙청한 반면 남한의 친일파들은 기업가 혹은 자본가로 탈바꿈했으며, 군과 행정 그리고 정치 요직을 차지했다. 1990년대 이전 남한 엘리트의 90% 이상이 부역자 혹은 부역자 가족에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가 떳떳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아주 정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신냉전의 구도로 대한민국을 끌고 가려는 윤 정권 하에서 이걸 실행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커밍스의 책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커밍스의 대표저작을 한글 완역본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영광이고 기쁨이다. 그러나 몇몇 번역 부분에선 상당 부분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대구 10.1 항쟁에 대해 설명하는데, 봉기를 일으킨 시민에 대해 폭도라고 칭하거나 봉기를 폭동으로 칭해서 부정적인 늬양스를 주는 것은 상당부분 불편했다. 아니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시위군중 혹은 봉기라 번역한 해적판이 더 적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선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굳이 한국인이라고 다 써야하는 지 의문이 들었다. 식민지 시기나 해방 정국 시기에는 그냥 조선인이라고 표현하면 되고, 소련군정기 북한의 경우 북한인이라고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이 점에서 몇몇 표현들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정말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만약 이 책을 읽으려는 이가 내 주변에 있다면 나는 이 책을 적극 권할 것이다. 조만간 2-12-2권을 꼭 읽을 예정이다. 2권에 대한 서평은 다음에 작성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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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백제인 2023-09-17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때 펴낸 그 책은 오자 띄어쓰기 탈자 투성이로 기억합니다.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지자체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내용과 수준이 빌려 볼 단계가 아니어서 전자 책으로 샀습니다.

NamGiKim 2023-09-17 21:49   좋아요 0 | URL
완독할만힐 가치가 높은 책이죠.

공동체주의자 2023-11-14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포함해서 다른 글들도 잘 읽고 갑니다. 추천 글과 서평을 쓰신 것을 보니 자연스럽게 소장하며 읽고 싶어져서 바로 두 권 구매했네요. 곧 나머지 한 권도 구입하려고 합니다.

이 책이 1980년대 초반에 나온 책인데 이제야 완역된 것이다 보니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최신 연구 성과까지 반영하지 못한 점도 고려해야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어째서 6.25전쟁을 연구하는 후속 연구자들이 브루스 커밍스의 학문적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반드시 인정하고 넘어가는지 대충만 읽어봐도 저절로 수긍이 갑니다.

1990년대 중반에 비밀 해제된 구소련 문서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를 반영한 박명림 교수님이나 정병준 교수님의 저서도 함께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6.25전쟁의 ‘발발‘에 있어서는 몰라도 그 ‘기원‘에 있어서는 미국의 비밀문서 등 사료에 밀착해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시했다고 봅니다. 1945년 8.15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적 상황을 최대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조망하면서 어째서 해방의 기쁨이 전쟁의 비극으로 흘러갔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커밍스가 이 책을 쓸 당시 6.25전쟁의 ‘발발‘과 관련해서는 북침설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일축했으면서도 남침이 아닌 남침유도설에 더 가능성이 있다고 봤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커밍스의 주장의 핵심이 남침유도설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 것 역시나 당사자 입장에서 억울할 만한 일이 아닌가 싶네요. 커밍스의 주장은 6.25전쟁의 ‘발발‘ 그 자체보다 ‘기원‘에 집중하자는 것에 가까워 보이는데 말이지요. ‘누가 먼저 총을 쐈느냐‘도 중요하게 다룰 수 있지만, 그보다도 ‘어쩌다가 이제 막 해방된 조국에서 동족끼리 갈라져 총을 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느냐‘를 중요하게 다루겠다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6.25전쟁 연구에 있어서 갖는 의미는 여전히 크고, 또한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무려 ‘현대의 고전‘이라고 칭하며 완역본을 출간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저 역시나 생각합니다.

좋은 책을 추천해주시고 서평도 써주셔서 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소개 받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글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서재에 올라온 글들의 내용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입장이 다르기는 합니다.

제가 기존의 질서,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틀 안에서의 점진적이고 온건한 개혁을 해 나가는 것에 지지를 보낸다면,

선생님께서는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급진적인 변혁을 갈망하는 편에 가까워 보입니다.

제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제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에 기대를 건다면,

선생님께서는 사회주의를 통해서 평등한 세상을 실현할 날을 꿈꾸고 계십니다.

제가 아무리 신냉전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중국, 러시아와 완전히 척을 지지는 않기를 바라고, 유라시아 대륙과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를 상대로 외교 지평을 넓히기를 바라지만, 그러면서도 한미동맹을 고려하여 미국, 유럽연합, 호주, 캐나다, 일본 등 서방 진영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노선에 가깝다면,

선생님께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의 어두운 면을 거침없이 비판하면서 제3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을 높이 평가하시는 듯합니다.

제가 공동체의 전통과 관습,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문화적 보수주의자라면,

선생님께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개성,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회문화적 자유주의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제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지하면서도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의 인본주의적 가치, 혹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전통 도덕철학인 유학/유교, 그마저도 아니면 매킨타이어나 샌델 류의 공동체주의 철학에 상당히 우호적이라면,

선생님께서는 과연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시는 분답게 무신론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독립운동사를 기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주의자라는 점에서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한, 그 남북통일이 급진적 비평화통일(무력통일)이나 급진적 평화통일(급격한 흡수통일)이 아닌 점진적 평화통일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 세대에서 대한민국 공식 통일 방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남북연합 단계나 경협 심화를 통한 경제통합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면 통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많이 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직접 통일운동에 참여하며 행동하고 계신 듯하니 존경스럽습니다.

비록 ‘보수적‘ 민족주의자와 ‘혁명적‘ 민족주의자의 입장 차이는 분명 적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계승하고 남북통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 있어서는 ‘민족주의자‘에게 그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뉴라이트만 아니면 환영한다고 하시니 책 추천 글과 서평 덕분에 명작을 구해 읽게 되어 고마운 마음을 전함과 동시에 주저리주저리 길게 적어봅니다.

NamGiKim 2023-11-14 16:04   좋아요 1 | URL
오 정말 긴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저는 이렇게 건설적이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댓글을 좋아합니다. 졸문인데, 이리도 좋은 평 및 좋은 의견을 댓글로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또한 이 책을 사서 읽고자 하신다니 참으로 기쁩니다. 좋은 독서가 되길 기대합니다. 저 또한 역시 공동체주의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A.B. 에이브람스의 책 끝나지 않은 전쟁 II -미 대결 70년사에 있는 부록 2를 읽고 개인적으로 정리해본 소감입니다.)

 

아마 2016년과 2017년 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박근혜의 국정 교과서 사태로 점차 운동권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시점이었고, 군복무를 소방서 공익으로 시작하던 201610월 말은 박근혜 탄핵 정국으로, 퇴진 집회에 열심히 나가서 싸웠었다. 비록 사회복무요원 출신이었지만, 박근혜 사태는 나에게 있어 거리로 뛰쳐나가게 한 사건이었다. 촛불집회를 참여하며 박근혜의 탄핵을 앞당기던 때였다. 아마 2017년 초였을 것이다. 당시 뉴스에서는 북한의 현 지도자 김정은의 친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암살당했음을 시시하는 보도를 했다.

 

뭐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상당 부분 반북성향이 있었고, 당연히 반김일성·반김정일·반김정은주의자였기에, 독재자 김정은이 자신의 친형을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너무나도 단순무식하게 생각했다. 비록 탄핵정국이었지만, 일반적인 한국인들이 인식하는 북한이란 항상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이미지니 나 또한 그 흐름에서 못벗어났던 것 같다. 지금이야 내가 북한의 역사를 포함하여 팩트체크를 위해 여러 자료들을 찾으면서 그런 반북주의를 많이 희석시켰지만, 그 당시에는 아니었다.

 

김정남이 북한 정권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 2017년 내가 주목했던 북한 관련 보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도널드 트럼프가 북한을 상대로 화염과 분노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대북강경자세로 나왔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북한에 놀러갔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음에도 미국으로 송환된 대학생 오토 웜비어 관련 보도였다. 물론 오토 웜비어(Otto Warmbier)에 대한 국내와 서구의 언론은 북한은 최악의 인권 유린 국가라는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씌우려는 목적이 분명히 있었지만, 당시 나는 그런걸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비교적 최근까지도 오토 웜비어 사건에 대해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미국인 청년이 놀러갔다가 혼수상태로 귀국했으니, 기본적으로 북한에 대해 반북주의를 버리고 보려고 해도, 무작정 옹호하기에는 내심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말하기 제법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지금도 신중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오토 웜비어 사건에 대해 북한이 내린 판결이 전적으로 옳다고만은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오토 웜비어 사건에 대한 한국의 극우 언론과 서구의 언론들의 보도는 또 다른 측면에서 해석되고 분석되야하며 비판적으로 접근되야 한다 생각한다.

 

우선 오토 웜비어에 대해 당시 북한 법정이 내린 판결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한다. 오토 웜비어가 평양에서 체포된 것은 201612일이었다. 당시 오토 웜비어가 체포된 이유는 평양에 있는 양각도 호텔의 출입금지구역에서 포스터를 훔치려 했다가 국가에 대한 적대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달 후 북한 법정은 형법 60조에 따라 유죄 판결을 내렸고, 오토 웜비어에게 내려진 형은 15년 강제 노동형이었다.

 

당시 북한 법정은 관련 재판에서 나온 오토 웜비어의 자백과, 북한 측 포스터를 훔치는 것이 들통난 CCTV 영상, 법의학적 증거, 목격자 증언을 인용해, 15년 형을 내렸다. 2016년과 2017년 한국 언론과 서구의 언론은 오토 웜비어가 15년 강제 노동형을 받았다는 점에만 주목하여, 북한을 최악의 인권 유린 국가로 몰아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오토 웜비어가 저지른 유사한 행위가 미국이나 서방의 몇몇 동맹국들에서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는 맥락은 당연히 생략됐다.

 

예를 들어, 201912월 교회 밖에 내건 LGBT 깃발을 손상해 못쓰게 만든 히스패닉계 미국인 남성 아돌포 마르티네즈의 경우, 그 혐의 때문에 오하이오주 교도소에서 16년 형이 선고됐다. 심지어 아돌포 마르티네즈는 웜비어와 달리 외국인도 아니었고, 그 깃발에 접근하고자 제한구역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태국에서는 외국인들을 포함해서 그들의 군주제 상징물에 대한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층 더 가혹한 선고가 반복적으로 내려졌다.

 

미국의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훨씬 더 심각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한 여성기자가 트위터 글로 정부 비판하는 글 썼다고 34년 형을 선고하기까지 한다. 물론 이 나라의 인권상황은 전 세계적으로도 악명높으며, 당연히 북한인권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반면 2015년 간첩과 체제 전복 혐의로 북한 당국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한국계 미국인 김동철 씨의 경우 20185월에 풀려났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2019729일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자신이 실제로 CIA 간첩이었음을 실토했다. 거기다 그는 단순히 북한 체제 비판이 아닌,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CIA에게 넘겨주기까지 했었다. 그런데도 북한 정부는 3년 만에 그를 석방했다.


나는 2016년 당시 친한 탈북자 출신의 페친인 홍강철씨와 함께 오토 웜비어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홍강철씨의 경우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토 웜비어가 미국인이니까, 형량을 비교적 적게 준거지, 만약 한국인이었다면 형량이 더 높게 나왔을 수 있다.”고 언급했고, 그것과 더불어 북한 정부도 국제적인 신경을 쓰고 눈치도 본다. 그러니 언론에 나오는 것만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고도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홍강철씨의 말이 일리가 있다.

 

,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보자면, 북한 정부가 소위 체제에 대한 위협 혹은 반국가적 행위를 한 것으로 판단되는 외국계 인사들에게 무조건 가혹한 판결만 내리는 것은 아니다. 오토 웜비어가 한국 언론과 서구 언론에 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고, 더욱 더 많은 동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혼수상태로 본국 송환되어 사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만큼 미국과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에게 선전하기 좋은 수단은 찾기 힘들다.

 

어찌됐건 오토 웜비어는 사망했고, 병의원인은 불분명했다. 미국 언론은 웜비어가 혼수상태에 빠진 모습을 전 세계에 보도하면서, 그의 죽음이 고문이나 폭행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2017년 당시 나는 오토 웜비어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같은 곳에서 그런 가혹한 인권유린을 경험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은 작년까지만 해도(비록 작년에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 같은 것들이 새빨간 거짓말이라 확신하게 됐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변하지는 않았었다. 적어도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했고, 일정부분 구타도 있었을 거라 적어도 작년까지는 그리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혹은 올해 내 미국인 친구인 Austin Bashore(한국 이름 배진태)와의 대화를 통해, 오토 웜비어가 구타나 폭행을 당했을 거라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게 됐다. 내 미국인 친구의 경우 오토 웜비어와 같은 고향인 오하이오주 출신인데(현재 미국 녹색당 오하이오주 소속이다.), 그 친구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토 웜비어는 미국에 돌아온 직후 의사로부터 종합적인 검진을 받았고, 구타나 폭행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의사 또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지속적으로 구타를 당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친구는 말했다.

 

이 얘기를 들은 다음 나는 구타나 폭행같은건 분명히 없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더 많은 정보를 찾기 위해 나무위키에도 접속해봤지만, 기본적으로 북한 하면 이만갑 종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성향을 보이는 곳이라 오토 웜비어에 관한 신뢰할만한 자료를 전혀 찾지 못했었다. 분명한 사실은 신시내티 대학 메디컬센터 신경중환자 치료 프로그램 국장 다니엘 캔터 박사는 웜비어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신경학적 손상의 원인이나 상황에 대한 확실하거나 검증 가능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손상은 통상 심폐 정지의 결과로 보이고, 이는 뇌에 혈액 공급이 일정 기간 불충분한 경우 그 결과로 뇌 조직의 사망을 낳는다.”

 

이와 더불어 캔터 박사는 오토 웜비어의 머리나 두개골에 외상이 전혀 없었다고 덧붙였다. , 원비어는 15개월 정도 신경학적 손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것은 그가 북한 유치장에 들어가기 전에 건강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고도 밝혔다. 물론 웜비어의 부모들은 아들의 죽음이 고문의 결과라 주장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의학적인 검사 결과와는 상반되는 입장이다. 거기다 이는 북한에서 구금된 이전의 미국인 수감자들의 경험과도 모순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미국 시민 매튜 토드 밀러는 20144월에 그 나라에 적대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6년의 노동형이 선고됐다. 구금되어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을 억류한 사람들에게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반복적으로 언급했으며, 그로 인해 서방의 자칭 소식통들은 그가 그런 주장을 하도록 강요받았다고 추정했다. 밀러의 경우 212일간 구금되었다가 조기 석방되었고, 밀러 또한 뜻밖의 좋은 대우에 자신도 놀랐다고 확증했다. 심지어 그는 감옥에서 자신의 아이패드와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도록 허용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또한,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북한에 대한 자신의 변화된 인식을 묘사하면서 감옥에 있었던 시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것은 희한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고문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대신, 지나친 친절이 오히려 놀라웠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이 바뀌었다.”

 

밀러는 또한 북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자신의 공개 사과가 강요된 것이었다는 서방의 보도들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추정을 부인하고 자신은 전적으로 진실했다고 말했다. 석방 전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밀러는 노동교화소에서의 상황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부분 땅을 파고, 돌을 옮기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농사일을 한다.”라면서, 구타나 폭행 같은 것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이런 점을 보자면, 오토 웜비어의 고문이나 폭행을 강변하는 입장은 상당부분 다른 미국측 억류자들과도 대치되는 증언이다. 심지어 고문이나 구타 및 폭행이 없었다는 증언은 2017년 당시 SBS에서 방영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북한에 억류되었던 한 선교사를 통해서도 증언되기까지 했다. 그의 경우 잘못을 하면, 벽을 보게하는 벌을 주기는 했어도 구타나 고문같은건 전혀 없었다고 증언했다.

 

지금까지 오토 웜비어 사건을 다루면서 내 단상 위주로 글을 써봤다. 오토 웜비어 사건의 또 다른 이야기를 알게 되니 나 또한 새로운 것을 배운 기분이 든다. 북한도 엄밀히 말해서 국가다. 그것도 161개국과 정상적인 수교를 맺은 국제사회의 일원이다. 그러한 점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북한에 대해 보다 이성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오토 웜비어 사건도 서구나 국내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것만 믿을 게 아니라, 이러한 이면을 봐야 하며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세가 지식인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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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우디아라비아... 지구상에서 가장 악랄한 인권탄압을 자행하는데도 ‘미국의 동맹‘이라는 이유로 제재나 규탄을 받지 않는 참 이상한 나라죠. 그런데 왜 국제사회는 북한 인권 문제에만 관심을 쏟고, 사우디 인권 상황에는 침묵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