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에 대한 강력한 비판 내지는 비난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수민족 문제 중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문제고 다른 하나는 티베트 자치구 문제다. 티베트 문제는 서구에서 가장 많이 내세우는 달라이 라마와 이를 지지하는 서구 세력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공론화 됐다. 이들이 항상 얘기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항상 다음과 같다. 티베트는 평화로웠지만,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이 점령했고, 수많은 티베트인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나 또한 티베트 문제에 대해 단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서방의 악선전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오늘은 서구가 외면하는 티베트 근현대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티베트 민족의 등장은 기원전 1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냐트리첸포가 40세대에 걸친 왕정의 시조가 됐고, 거의 1000년 후에 중국과 티베트의 전쟁이 8세기 트르디축텐(36대 왕) 통치 기간에 일어나, 티베트가 중국의 여러 지방을 점령하기도 했다. 참고로 티베트의 승리를 기념하는 돌기둥이 20세기 말까지 포탈라 궁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티베트는 네팔이나 인도에 비해 불교가 상대적으로 늦게 전파됐다. 몽골 군대가 티베트에 도달했을 때, 몽골인들은 티베트의 라마교를 종교로 채택했고, 이에 따라 원 왕조와 만주족의 청 왕조 동안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공식 종교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시점에, 모든 티베트인의 10% 가량이 남려 승려였다고 한다. 사회체제는 봉건적이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에 따르면, 티베트는 종교적 중심지로서 자치와 평화를 누렸지만, 1896년 청나라 군대가 침공했다. 처음에는 티베트가 이를 격퇴했으나, 1903년 중국 장군 도살자 팽과 그의 군대가 가는 길마다 사람들을 도륙하면서 티베트의 심장부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잔혹함의 문제가 청나라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17세기 초에서 18세기까지 티베트 불교 종파들은 서로 무력충돌을 벌였고, 즉결처형도 빈번히 일어났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인도로 도망쳤던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신해혁명으로 티베트가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티베트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달라이 라마와 불교도들이 통치하는 봉건사회였다. 적어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말이다. 티베트가 해방되기 10년 전인 1939년 전국에 약 6,00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소년 4명 중 1명이 승려였다는 얘기도 있다. 달라이 라마가 마지막으로 티베트를 통치했던 1959년까지 대부분의 티베트 농경지는 여전히 농노들이 관리했으며, 승려와 라마 개개인이 무역과 사업 그리고 사채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사회였다.

 

그 중 드래풍(Drepung) 사원은 세계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주의 하나로 무려 185개의 영지와 25천명의 농노, 300개의 거대한 목장과 16천명의 목동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찰의 재산은 대부분 상위 계급의 라마승에게 귀속 되었으며 이들 대다수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세속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티베트 군사령관은 4천 평방 킬로미터의 땅과 35백 명의 농노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그는 달라이 라마 내각의 회원이었다.

 

티베트에는 규모는 작았으나 정규 군대가 있었다. 이 군대는 일종의 헌병대로 지주를 위한 질서유지와 도망간 농노를 붙잡는 일을 하였다. 티베트의 어린 소년들은 대게 부모로부터 떨어져 사원에서 승려로 양성됐다. 그 시기 승려 타시 세링은 소작농의 자녀가 사원에서 성폭행 당하는 일은 흔했으며 자신도 9세부터 상습적으로 강간을 당해왔다고 말했을 정도다. 또한, 사원은 빈곤에 시달리는 농부의 아이들을 징집하여 일생 동안 집안의 노예나 춤꾼, 사병으로 일하게 했다.

 

달라이 라마 통치 시기의 티베트에서는 도망친 농노와 절도행위자에 눈알 파내기, 혀 뽑기, 근육, 수족 절단 등의 고문과 사지절단 등의 처벌이 성행했다. 1959년 안나 루이스 스트롱(Anna Louise Strong)은 티베트 권력자들이 사용한 고문기구 전시회에 가본 적이 있었다. 이곳에는 모든 사이즈의 수갑이 있었는데, 아동용도 있었다. 코와 귀를 자르는 기구, 눈을 파내는 기구, 손목을 자르는 기구를 비롯해 무릎, 종아리, 다리 분쇄기, 불도장 집게, 채찍, 심지어 내장을 파내는 특수 기구도 있었다. 이러한 기구들만 보더라도 티베트 봉건 계급의 통치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이와 같던 티베트의 상황은 급반전됐다. 1949년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말이다. 중국 공산당이 처음부터 티베트에 군대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195110월까지는 그러했다. 티베트의 지배계급들은 혁명이 성공한 중국에서 지주의 재산이 몰수되고, 빈농들에게 분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를 포함한 지배층들은 이를 막기 위해 농노들에게 폭력과 협박을 자행했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티베트에서 이들에게 탄압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보냈다. 중국 공산당은 1959년 이후로 노예제와 무급 농노제를 철폐했으며, 과거 티베트 지배계급이 일삼던 채찍질, 사지 절단 등의 극단적인 처벌도 없앴다. 마찬가지로 앞서 말한 온갖 고문 및 가혹행위들이 금지됐다. 중국 공산당은 살인적인 세금제도를 없앴고, 직업 장려정책을 실시했으며, 이 영향으로 실업률과 노숙자가 크게 감소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대중 교육을 실시하여 사찰의 교육 독점을 없앴으며, 라싸 지역에 하수도와 전기시설을 만들었다.

 

당연히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나치 친위대 출신이자 티베트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펴냈으며, 영화화되기도 했던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썼다.

 

중국에 반항했던 티베트인들은 귀족, 유사 귀족 그리고 라마승들이었으며. 이들 귀족과 라마승들은 도로나 다리에서 노동하는 최하층 임무를 맡게 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관광객 도착 전에 도시 청소를 하게 되어 더욱 모멸감을 느꼈다.”

 

중국 공산당은 1961년에 이르러 지주와 라마승들이 소유한 재산을 압수하고 농민들을 수백 개 자치구역으로 재배속했다. 중국은 수십만 에크르에 달하는 토지를 소작인들과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귀족 소유의 가축도 가난한 목동들의 집산농장으로 보내졌다. 가축사육이 개선되었고 새롭고 다양한 야채와 새로운 품종의 밀과 보리가 도입되었다. 배수시설도 좋아졌다. 이 모든 개선을 통해 자연히 농업생산이 증가하였다.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대해 일각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인들을 무차별 탄압하고 학살했으며, 그 숫자가 120만 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100~120만 명이 죽었다는 출처는 어디일까? 아래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달라이 라마의 막내 동생이자 측근이었던 텐진 체걀중국점령으로 인해 12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대대적인 탄압 6년 전인 1953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티베트의 인구는 1274천 명이었다. 다른 인구 조사에서도 티베트의 인구는 약 2백 만 명 정도였다. 만약 중국이 1960년 초에 120만 명의 티베트인을 죽였다면 도시 전체와 대부분 시골지역의 거의 모든 티베트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어야하고, 티베트 땅은 집단 처형장과 공동묘지가 널려 있는 도살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티베트를 공격한 중국 군대는 매우 소규모였으며,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처형만 한다더라도 부족한 숫자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인 100만 명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거짓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 이후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좀 더 유연하게 했고, 피해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1980년 중국정부는 티베트에 보다 높은 수준의 자율과 자치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개혁을 실시하였다. 현재 티베트인들은 토지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잔여 수확물을 팔수도 있고, 곡식 재배와 들소와 양의 사육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허용되었고 국경 통제가 완화되어 티베트인들이 인도와 네팔에 망명한 친척을 만나는 일도 가능해졌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의 정책에 따른 결과였다.

 

냉전 시기 미국의 세계전략은 중국을 포위하여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수백만을 희생시켰다. 미국의 전선은 단순히 한반도와 베트남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티베트에도 있었다. 1950년대 중반 CIA는 수십 명의 반중국 티베트 투사를 무기와 통신 훈련을 위해 태평양의 사이판 섬으로 보내, 그들이 다시 티베트로 침투하도록 도왔다. 이는 미국이 동유럽과 소련에서 했던 행위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협력자인 스테판 반데라의 극우주의 무장 단체가 냉전 시기 소련에 침투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달라이라마와 티베트 봉건 지배계급들은 타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CIA는 달라이 라마의 비행자금을 지원했다. 1998년 미 국무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1960년대를 통틀어 CIA가 티베트 망명 단체에 비밀리에 지원한 액수는 년 170만 달러다. 이런 사실이 공개되자 달라이 라마의 조직은 자체적으로 성명을 내고 자신들이 1960년대에 미국 CIA로부터 수백만 달러를 지원받아 중국의 모택동 혁명을 음해하기 위한 망명자 무장부대를 보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CIA의 지원을 받았던 티베트 분리주의 운동 세력은 10년간 중국 공산당에 맞서 저항을 하다가 1만 명이 죽었다. 달라이 라마가 CIA에서 받던 연봉은 186,000달러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티베트 분리주의 운동이 미국에 의해 지원을 받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에 들어가 한 일은 억압받던 대다수 티베트인들에게 해방을 의미했다. 반면에 미국이 한 일은 민중들을 억압하고 고문하던 봉건세력을 지원한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대다수의 티베트 민중을 해방했으며, 악랄한 반혁명 세력에 맞서 투쟁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서구 제국주의가 티베트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왜곡하고 있는 역사다. 중국 공산당은 분명히 티베트를 해방했으며, 그런 성격은 앞서 언급한 중국 공산당의 티베트 정책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티베트 봉건세력과 미국의 사기극에 속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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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5-11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티베트 봉건세력의 통치가 얼마나 잔인했는지에 대해 기레기들은 침묵하고 있으니,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중국공산당의 폭력적인 티베트 탄압‘만 기억하고 ‘티베트 봉건세력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지요.
그래서 티베트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 관점의 글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안타까운 것은, 언론들이 ‘중국의 폭력적인 티베트 탄압‘에 대해서는 그렇게 목청높여 보도하면서도, 중국 편입 전 티베트를 지배한 봉건세력의 잔혹한 통치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은 ‘보수‘라는 가면을 쓴 친일숭미 뉴라이트매체 조선-중앙-동아일보나 자칭 ‘진보‘라는 경향-한겨레신문, 지상파/종편TV, YTN과 MBN 등 보도채널들 모두가 그런 보도태도를 보이고 있지요.)
 

파시즘의 창조자 무솔리니를 읽으며

세계사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Axis Power)에 대해 수업시간에 들어봤을 것이다. 1940년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이 군사동맹을 맺고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유럽ㆍ아시아ㆍ아프리카에서 전투가 전개됐고, 이 추축국에 맞서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중국ㆍ소련이 연합국을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추축국은 세계대전을 일으켰지만, 패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보통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그 기원을 중일전쟁이나 스페인 내전에서 찾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서술은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이 단기간에 희생됐다. 무엇보다 히틀러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는 많은 이들에게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로 기록됐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따라서 파시즘에 대한 인식은 보통 나치와 히틀러와 등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즘의 창시자는 나치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아니었다. 바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참으로 신기한 인물이다. 그는 비록 파시즘의 창시자였고, 히틀러의 선배라 한때 떠들었지만, 정작 그의 후배에 비해 전쟁에선 정말 어리석은 짓만 골라했다.

오죽하면 수많은 밀리터리 덕후들이나 역사덕후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을 밈(Meme)화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군이 전쟁에서 졸전만 거듭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1940년 6월 독일이 서부로 진격을 가하여 프랑스를 점령할 당시, 이탈리아군 또한 남부 프랑스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6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고작 13개 마을만 함락했다. 반면 프랑스군의 인명 손실은 37명이었다. 이와같은 이탈리아군의 졸전은 이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제작한 제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에서도 다음과 같이 묘사됐다.

˝무솔리니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힙니다.˝

이게 바로 이탈리아군의 현실이었다. 심지어 무솔리니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친파시즘 국가인 그리스까지 침공했었다. 그러나 역으로 그리스군에 의해 격퇴당했으며, 결과적으로 히틀러가 구원부대를 보내어 점령을 마쳤다. 이런대도 무솔리니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20~30만 명의 지원군을 독일을 위해 보내줬다. 이는 무솔리니가 정말 이탈리아 군대의 현실에 대해 매우 무감각했음을 보여준다.

이번에 무솔리니를 읽으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다. 무솔리니가 한때 사회주의 운동을 열정적으로한 사회운동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무솔리니의 태도는 극단적 국수 민족주의자로 변모했고,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까지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무솔리니는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극단적 반공주의와 이탈리아 민족주의가 핵심이었지만, 놀랍게도 반유대주의는 없었다. 오히려 무솔리니의 정책이 유대인을 우대하는 정책이었다는건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러나 반공주의자 답게 무솔리니는 진지하게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으며, 이들은 지하로 숨을 수 밖에 없었다. 중간에 안토니오 그람시처럼 옥사한 운동가도 제법 많았다. 따라서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근복적으로 억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동적이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무솔리니가 두체로써 집권하게 되는 과정이다. 무솔리니는 1922년 군사적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그의 군사 쿠데타는 너무나도 엉성했다. 이탈리아 국왕이 이를 진압하면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었음에도 무솔리니의 호전적 행위를 방관했다. 그 결과가 바로 21년간 그가 이탈리아 전역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무솔리니의 권력 축출과정도 황당하다. 이탈리아군의 졸전으로 경제위기가 발생하고, 1943년부터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파시스트 세력 내부의 반대파와 국왕이 마음먹고 그의 권력을 빼앗았으며 그를 구금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가택연금된 무솔리니를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를 보냈고, 이탈리아 북부 지역 살로에 친독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다.

물론 이때부터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사실상 거의 없고, 독일군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진격해오는 연합군 병사를 상대했다. 사실 독일 입장에선 이러한 병력 투입 자체가 불필요한 병력 손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에는 당연히 무솔리니의 어리석은 행위들 때문이다.

이 책은 1990년 대현출판사에서 출간한 ‘인물로 읽는 세계사‘ 시리즈 중 하나다. 국내에 출간된 유일한 무솔리니 전기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데에는 작년에 당선된 이탈리아 총리 조르자 멜로니에 대한 영상을 보면서다.

현 이탈리아 총리 멜로니는 10대 때부터 정치활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에 참여했던 멜로니는 20살이던 시절 한 프랑스측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무솔리니를 이탈리아를 위해 헌신한 영웅으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영상을 봤다. 도데체 뭘 보고 그런 얘기를 했는지 궁금해서 무솔리니에 대해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무솔리니에 대해 읽으면서 든 생각이 있다. 도데체 현 이탈리아 총리는 뭘보고 무솔리니를 존경한건지하는 생각말이다. 아무리봐도 무솔리니는 참으로 무능력한 인물이다. 특히 전시 지도자로서는 정말 아무런 지도력이 없어보인다. 단순히 파시즘 이데올로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무솔리니가 이데올로기를 급 전향한 점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냥 기회주의자라는 생각 밖에 안든다. 무솔리니의 생애가 궁금하다면, 도서관에서 이 책을 대출해 읽어보길 추천한다. 책이 두껍지도 않고, 사진들이 많이 들어갔으니, 읽는데 부담감 거의 없을 것이다.

다음 번에는 그의 생애를 한번 정리해보도록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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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2-26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무솔리니에 대한 1권의 전기도 있었군요!

NamGiKim 2023-12-26 10:07   좋아요 0 | URL
자서전이 있긴 한데, 전기는 이게 전부인 것 같습니다.
 
1592 격전의 길을 걷다 - 7년의 전쟁, 다시 돌아보는 임진왜란사
안광획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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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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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응오딘지엠(Ngô Đình Diệm)에 대한 재평가 주장을 알게 된 것은 아마 2018년에서 2019년 사이였던 것 같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러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무위키’에 있는 응오딘지엠 문서를 읽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응오딘지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그저 나무위키만의 헛소리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인사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응오딘지엠에 대해 재평가하는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1. 응오딘지엠은 나름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진행한 인물이다.

2. 응오딘지엠이 남베트남의 대통령일 당시 제법 탁월한 지도력을 보였으며, 따라서 응오딘지엠이야말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3. 미국의 잘못된 판단으로 응오딘지엠을 죽었으며, 그 이후로 응오딘지엠 만한 인물은 남베트남에 더 이상 등장하지 못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미국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다큐멘터리를 만들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놀랍게도 미국에 사는 보트피플들은 2022년에 60분 짜리 다큐멘터리 하나를 만들었다. 바로 ‘Liberator of Asia: The True Story of Ngo Dinh Diem’이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번역하자면, ‘아시아의 해방자, 응오딘지엠의 진짜 이야기’다. 말 그대로 응오딘지엠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의 전반적인 생애와 그에 대한 재평가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응오딘지엠을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출현하여 인터뷰를 진행한다. 응오딘지엠의 조카와 응오딘지엠 정권 당시 그에게 충성한 일부 남베트남 고위층 인사·군인·경찰 등이 등장한다. 또한 프랑스나 미국 내에서 응오딘지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부 서구의 학자들도 나온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보고 있으면 응오딘지엠이 억울한 사람인가 하는 정신 나간 착각까지 들 정도다. 


당연한 얘기지만, 다큐멘터리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측면을 다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Hồ Chí Minh)을 포함하여, 북베트남과 베트민 그리고 베트콩에 대한 비난도 빠지지 않고 한다. 물론 이런 비난의 내러티브는 너무나도 전형적이다. 베트민이나 베트콩이 무고한 남베트남에게 테러와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 정부가 바오다이 정권을 축출한 이후 새 국가 건설에 나섰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응오딘지엠 정부가 민족주의 교육을 했고, 군대를 재건했으며 사회도 재건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런 민족주의적이고 자유베트남을 위한 과정이 망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큐멘터리는 북베트남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베트민과 그 지지자들이 남베트남의 정부 관료들을 암살 및 테러했고, 그들을 잔혹하게 처형 및 학살했으며, 심지어 일반적인 남베트남 민간인들도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다큐멘터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에 따라 분단된 베트남은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베트남 민중 최소 80% 이상이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이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그걸 생략한 채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 정부가 억울하다고 말한 것이다.


심지어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이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 말 그대로 말이 안되는 소리다. 다큐멘터리에 출현한 지엠 정부 시절 장관 출신인 레쩡꽛(Lê Trọng Quát)은 다음과 같음 말을 한다.


“저는 미국이 남베트남에 미군 정규병력을 불러와 배치하고 싶어 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지엠 대통령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엠 대통령은 내가 국방장관직을 맡고 있을 당시 직접 전화를 걸은 뒤 통화 중에 그런 식으로 나에게 직접 말했었죠. 지엠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미군 전투부대가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지엠 대통령은 그런 행위가 베트남 민족주의자의 정당한 대의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습니다. 지엠 대통령은 베트남을 보호하기를 원한다면 베트남인들에 의해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남베트남에 외세의 군대를 주둔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이에 대한 악의적인 선전을 할 것이고, 남베트남이 미국에 종속적인 괴뢰라 선동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지엠 대통령은 이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응오딘지엠 대통령의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당시 남베트남은 명명백백히 미국의 지원과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국가였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의 허가 없이는 국가 정책 하나도 제대로 채택하지 못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이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은 프랑스에 맞서 싸우며 남베트남에서도 수많은 해방구를 건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구는 미국이 지원한 응오딘지엠 정권에 의해 탄압과 학살에 직면했다. 거기다, 남베트남은 정상적인 국가 건설 과정을 거친 것도 아니었다. 응오딘지엠이 1954년 베트남을 돌아왔을 당시, 그는 명백히 바오다이 꼭두각시 정부 밑에 있었다. 물론 그가 바오다이(Bảo Đại)를 축출했지만, 그가 건설한 국가는 과거 프랑스에 부역하던 민족반역자들이 정치인과 고위관료 그리고 군 장성을 하는 나라였다.


따라서 남베트남은 애초부터 정통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 미국이 반공을 내세워 대통령으로 만든 인물이 응오딘지엠이다. 심지어 1971년 미국의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지막으로, 베트남에 대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칠 요소들을 검토하는 차원에서 보자면, “남베트남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창조물(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이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우린 명심해야 한다.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응오딘지엠은 1955년과 1956년에 남베트남에서 자신의 권력을 절대 공고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의 개입이라는 위협이 없었다면, 베트민 군대의 즉각적인 공격을 전혀 받지 않은 채 1956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요구된 선거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전혀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매해 마다 지속적인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응오딘지엠 정권과 독립국가 남베트남 둘 다 확실히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베트남 전쟁을 계획했던 미국의 지도부가 내린 평가가 이러하다. 따라서 남베트남과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창조물이며, 미국의 꼭두각시였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베트민이나 베트콩의 테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의 태도도 문제가 있다. 이들은 베트민이나 베트콩의 테러를 종종 언급하지만, 정작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또 철저하게 외면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코(Gabriel Kolko)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응오딘지엠 정권은 반대파 12,000명을 처형했다. 그리고 베트남 공산당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나온 『베트남 공산당사』를 보면,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응오딘지엠 정권은 68,000명을 학살하고, 40만 명 이상을 체포 및 감옥에 구금했다.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나 에드워드 허만(Edward Herman) 또한 여러 저작에서 응오딘지엠 정권이 집권 기간 동안 16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언급했으며, 역사학자 버나드 폴(Bernard B. Fall)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응오딘지엠 정권은 집권 기간 내내 자국 민간인에 대한 테러와 학살을 자행했다. 당연히 응오딘지엠 정권의 테러리즘은 베트민이나 베트콩 보다 훨씬 더 광범위 했다. 아래 제프리 레이스(Jeffrey Race)가 저서 『War Comes to Long An』에서 쓴 내용을 보자.


“정부의 테러 행위는 혁명운동 측 보다 훨씬 심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베트민 출신에 대한 소탕작전, ‘공산주의 마을’에 대한 포격 및 지상공격, 그리고 ‘공산주의 동조자들’에 대한 검거 등이 그것이다. 1960년에서 1965년까지 롱안(Long An)에서의 혁명운동이 계속 강화되었던 것은 바로 정부측의 이러한 테러전략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이런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자만 남베트남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것처럼 역사를 왜곡한다. 또한 다큐멘터리는 1963년 남베트남 내부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에 대해서도 왜곡된 태도를 보인다. 1963년 6월 11일 분신자살을 한 틱광둑에 대해 폄하한다. 마치 틱광둑(Thích Quảng Đức)이 배후에서 조종 받은 것처럼 말이다. 더 나아가 다큐멘터리는 불교도 시위대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었다는 주장까지 한다. 즉, 공산주의 세력에 선동당한 불교도들이 응오딘지엠 정권을 몰락시켰다는 얘기다. 


여기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왜 불교도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는지 말이다. 당연히 이 책임은 응오딘지엠의 가톨릭 우대정책에 있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불교를 심각하게 탄압했다. 불교도들이 석가탄신일을 기념하지 못하게 막았다. 틱광둑과 같은 고승이 분신자살을 한 것도 전적으로 응오딘지엠 정권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의 재수인 마담 누(본명 쩐레쑤언, Trần Lệ Xuân)는 다큐멘터리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고승의 분신자살을 “중놈이 바비큐가 된 것이다.”라고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폄하했다. 이런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불교도들이 베트콩에 동조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 정부의 가장 큰 모순 중 하나인 토지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당시 응오딘지엠 정권은 과거 프랑스에 부역한 민족반역자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예를 들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들은 악질 지주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빈농들에게 분배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 정권은 그 토지를 다시 빈농들로부터 빼앗아, 프랑스 시절 부역한 민족반역자들에게 되돌려줬다. 그리고 남베트남 정권에서 진행한 토지개혁도 오로지 가톨릭 신자들만 우대했다. 베트남 연구자이자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는 남베트남이 가지고 있던 식민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책에 집필했다.


“이전에 베트민이 장악했던 지역에 사는 농민은 프랑스-베트민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동안 받았던 토지를 전 주인에게 돌려주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런 농민이나 전국의 다른 많은 농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엠 정권은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 정권보다 나을 것이 거의 없었다.”


이게 바로 응오딘지엠 정권이 가진 모순이었다. 계속해서 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B. 영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0/59법과 같은 정부의 테러행위는 남베트남 농촌지역에서 또 다른 문제들을 악화시켰다. 지주들에게 이미 분배가 끝난 땅을 다시 되돌려줌으로써, 농민들은 프랑스 식민지 통치시절 처럼 다시 한 번 무토지 소유자나 빈농이 됐다. 강제노동을 포함한 과거 베트민 시절 폐지된 세금이 다시 부활했고, 각급 관료조직들의 공공연한 부정부패가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지방 민병대를 징집하여 강탈과 자의적인 체포를 일삼았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응오딘지엠의 진실 된 이야기를 추구하는 이 다큐멘터리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응오딘지엠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고자 한다. 다큐멘터리는 응오딘지엠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반공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였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변절하지 않고 반프랑스·반공노선을 추구했다는 점 또한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응오딘지엠 개인이 프랑스와 사이가 안 좋았고, 프랑스에게 전면적으로 부역한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의 일가족들은 당시 프랑스 식민당국의 협력자들이었다. 즉, 응오딘지엠이 비교적 프랑스 부역 문제에서 자유롭더라도, 그의 일가족은 프랑스 식민당국의 협력자들이다. 


다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응오딘지엠의 형인 응오딘코이는 1945년 베트민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 사실을 다큐멘터리는 베트민의 무자비함 혹은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의 폭력성으로 설명한다. 물론 이런 단어 이용부터가 다큐멘터리의 성격이 얼마나 반공주의적 편향에 빠졌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다. 베트민이 응오딘지엠 형 응오딘코이를 산 채로 생매장 한 것은 당연히 응오딘지엠 입장에선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베트민이 응오딘코이를 처형한 것은 그가 프랑스 식민당국에 부역한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의 독립운동 이력도 솔직히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과 비교하자면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호치민과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냈고, 1946년에 시작된 전쟁에서 민중들을 규합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베트민은 프랑스 최정예 부대를 섬멸했다. 프랑스군 2,293명이 전사하고, 6,650명이 부상당했으며 11,721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베트민이 프랑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을 당시, 응오딘지엠이 한 일은 베트남을 떠나 미국의 뉴저지와 벨기에 브뤼셀에 머물면서 반공주의 인맥을 만든 것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응오딘지엠의 쿠데타에 대해 언급하겠다. 응오딘지엠이 미국이 일으킨 쿠데타로 제거 된 이후 남베트남은 응우옌반티우와 응우옌 까오 끼가 집권할 때까지 혼란의 연속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응오딘지엠 정권이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1960년대 초 시작된 베트콩의 무장투쟁에서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나 1963년 1월 2일에 벌어진 압박 전투에선 남베트남군이 심각할 정도로 참패했다. 


2,000명에서 2,5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은 미군 고문단의 지원을 받았고, 장갑차와 항공기 그리고 헬리콥터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200~300명도 채 안 되는 베트콩들에게 패배했다. 남베트남군 80~90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으며, 투입된 헬리콥터 15대 중 14대가 손실됐고, 이 중 5대가 완전히 격추됐다. 반면에 베트콩 측의 사상자는 전사자 18명 부상자 39명이었다. 심지어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의 장갑차 진격도 저지했다. 미국의 지원에도 이런 허접한 군대를 유지했던 정권이 바로 응오딘지엠 정권이다.


60분 짜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소름끼쳤던 사실이 있다. 바로 2022년 남베트남 보트피플들이 만든 이 반공주의 다큐멘터리가 현재 한국의 극우주의자들이 만드는 이승만 미화물과 논리적으로 너무나도 일치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비약을 저지르며 반공주의 국가의 국가 폭력을 너무 쉽게 옹호하는 것도 똑같다. 한국의 극우주의자들이 무능하고 고집불통인 학살자 이승만을 미화한다면, 미국에 사는 보트피플들은 똑같은 논리로 학살자 응오딘지엠을 미화한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말 그대로 반공주의로 점철된 응오딘지엠 미화물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보트피플 중에 응오딘지엠 전기를 쓴 사람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나중에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비판적인 서평을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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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The Battle of Algiers (알제리 전투) (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1966)
Criterion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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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이 영화 리뷰는 영화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세계의 이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옮겨가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투쟁이 강화되자, 이스라엘을 포함한 서구와 국내 언론들은 팔레스타인의 잔혹성만 부각시키기 바쁜 상황이다. 하마스의 잔혹성을 얘기하며, 닭장 속에 아이를 가뒀다는 뉴스나 영유아를 집단 살해했다.”는 이른바 가짜뉴스들이 끊임없이 생산 및 보도됐다. 물론 이런 뉴스가 가짜임이 밝혀져도 정정보도는 신문에 제대로 실리지 않는다. , 팔레스타인을 비난하는 가짜뉴스는 신문지 정면에 실려도, 정정보도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안보는 곳에 개재하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무자비한 학살을 벌이고 있는 명분 중 하나가 하마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를 소탕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논리에 따르면, 하마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들은 테러리스트이며,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삼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고 있고, 민간인이 사는 지역과 마을·병원·학교 등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심지어 백린탄과 같이 국제법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무기도 서슴없이 사용한다.

 

팔레스타인이 이들에게 저항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이 자국의 독립과 주권 그리고 영토를 침범하여 식민 지배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인 정착을 빌미로 인종청소를 자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투쟁은 수십 년에 걸친 투쟁이며 자국의 독립과 주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다. 현재는 비교적 잊혔지만, 팔레스타인과 비슷한 사례가 북아프리카에서도 있었다. 바로 알제리다. 알제리는 무려 132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나라로 1962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여기서 알제리의 근현대사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알제리는 1830년 프랑스 군대가 상륙하면서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됐다.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 초기 알제리에서도 무장 독립투쟁이 일어났으며, 프랑스는 이들을 진압하는데 2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870년대 들어 프랑스는 알제리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프랑스의 지배 하에서 알제리인들의 반불봉기는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일부 산악지대와 지방에선 1910년대까지 항쟁이 지속됐다. 알제리는 20세기에 발생한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에 의해 동원됐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당시에도 수많은 알제리인들이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파시즘에 맞서 싸웠다.

 

알제리인들이 프랑스군에 들어가 나치에 맞서 싸웠던 이유는 프랑스가 알제리의 독립을 약속했기 때문이었지만, 프랑스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194558일 나치 독일이 항복하던 날 알제리인들은 세티프와 구엘마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프랑스는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1달간의 진압 기간 동안 최소 6,000명에서 최대 45,000명에 달하는 알제리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게 바로 세티프 구엘마 학살이다. 프랑스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알제리의 독립운동은 잠시 지하로 숨었지만, 1947년부터 알제리의 비밀 군사조직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1946년에서 1954년까지 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는데, 놀랍게도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독립동맹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게 됐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영향으로 알제리에선 1954년부터 프랑스에 맞선 독립전쟁이 발발했으며, 이 독립투쟁을 주도한 단체가 바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었다.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은 마을 단위의 게릴라전과 도심에서의 지하조직을 통한 프랑스인 거주지 및 경찰소 그리고 군 기지에 대한 테러 전술을 구사했다. 사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이러한 전술로 맞선 것은 100년 이상 지속된 프랑스 제국주의의 폭력성 때문이었다. 프랑스 제국주의는 알제리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최신식 전투기와 탱크 그리고 장갑차와 헬리콥터를 투입했으며, 최졍예 부대인 공수부대도 투입했다. 1956년 말까지 대략 40만 명 이상의 프랑스군이 알제리에 주둔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알제리 독립 전쟁은 인도차이나 전쟁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패전으로 종결됐다. 전쟁은 1962년 에비앙 협정을 통해 전쟁이 종결되면서 알제리의 승리로 끝났고, 알제리는 132년 만에 독립을 쟁취했다.

 

영화 알제리 전투(La Bataille d'Alger)’1954년에서 1962년 사이 8년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맞선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무장 독립투쟁과 프랑스군의 정치적 폭력 행위 등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영화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알리를 포함하여, 이들의 입장에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을 묘사했으며, 이들이 어떠한 감정 및 생각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프랑스의 공수부대가 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어느 거주지에서 소탕작전을 벌이는 것에서 시작되며, 포위당한 은신처에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알리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상념에 잠긴 채 치열했던 지난 3년간의 투쟁을 회상하는 장면을 통해 독립전쟁의 서막을 다룬다.

 

영화를 보다보면,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프랑스 지배에 맞서 테러를 제법 많이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은 민간인들 사이에서 프랑스 경찰들을 살해하고, 이들로부터 무기를 노획하기도 하며, 불심검문에 협조하는 척 하며 프랑스 경찰관들을 살해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프랑스인에 의해 알제리 민가가 폭탄 테러를 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인 지역에 가서 폭탄 테러를 감행하는 것도 여러모로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이다.

 

물론 폭탄 테러로 인해 민간인들의 희생당하는 장면 또한 영화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만,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이 왜 그러한 전술을 사용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제법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프랑스 측이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알제리민족해방전선 대원들과 지도부들을 체포 및 소탕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공수부대원들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습격하여 민간인들을 강제로 소개시키며, 의심되는 이들에게 물고문·전기고문과 같은 잔혹한 고문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마치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자행한 행위가 연상되기까지 한다.

 

심지어 이러한 잔혹행위를 합리화하는 프랑스 공수부대 대령의 논리는 현재 이스라엘의 논리와 전혀 차이가 없다. 영화상에서 등장하는 프랑스 공수부대 대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참전하여, 이탈리아와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싸운 군인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마다가스카르와 인도차이나에서도 복무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의 고문행위를 다음과 같이 합리화한다.

 

우린 미치광이도 가학을 즐기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를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자들은 레지스탕스 운동 당시 우리의 활약을 잊었습니다. 우리를 나치라고 부르는 자들은 우리 중에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는 군인이고 군인의 임무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제 기자 여러분들에게 한번 묻겠어요. 프랑스가 알제리에 남아야 하나요? 그래도 남아야 한다고 대답한다면, 그로 인한 결과도 감수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프랑스 공수부대 대령의 태도는 현재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을 운운하며, 자신들의 학살과 광범위한 테러리즘을 합리화하는 논리와 완벽히 일치한다. 그 점에서 상당히 소름끼치는 영화 대사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영화 알제리 전투1966년 이탈리아에서 개봉한 영화로 이탈리아의 좌파 영화인들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당시 베트남을 침략하던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1960년에 발생한 알제리에서의 대규모 반정부 민중시위를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데, 나로 하여금 정말 진한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더더욱 화가 났던 점은 프랑스에 맞서 정당한 독립을 요구하는 알제리인들에게 프랑스 당국은 경찰과 군대 심지어 탱크까지 투입하여 이를 진압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영화상에서도 프랑스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이탈하여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넘어오는 알제리인들에게 기관단총을 발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가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독립 염원이 강해지고 있는 적절한 시점에 훌륭한 영화 한 편을 감상했다. 무려 제작된 지 57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명작이다. 영화를 보면서 현재 팔레스타인 민중의 투쟁이 상당히 많이 오버랩 됐다. 이들이 간혹 테러라는 전술을 이용하는 것 또한 당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심정과 일치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스라엘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하는 짓은 과거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했던 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 영화에서는 다음과 같은 명대사가 나오는데, 이 대사야말로 과거의 알제리 독립 전쟁 그리고 현재의 팔레스타인 독립 전쟁의 본질을 보여주는 대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영화에 나온 그 명대사를 인용하면서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기자: 벤 미디 씨. 여자에게 바구니에 폭탄을 실어 운반해서 무고한 생명을 수없이 죽인 것은 너무 비겁한 행위가 아닌가요?

 

벤 미디네이팜탄으로 민간인이 거주하는 마을을 공격해서 수천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것이야 말로 훨씬 더 비겁한 짓이 아닌가요? 만약 우리에게 비행기가 있었다면 우리도 수월할 겁니다. 당신들이 폭격기를 주면 우리는 그 폭탄 바구니를 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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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지고 보면: 알제리에서의 反프랑스 독립항쟁, 팔레스타인의 反이스라엘 독립항쟁, 그리고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투쟁은 ‘외세에 맞서 자주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