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 10-26 미국의 위기, 눈뜬 장님 한국 >

미국채가 위험하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미국채가 위기에 빠진 것은 금리인상 때문이다. 미국의 금리인상은 8할이 우크라이나 전쟁때문이다. 미국채를 사지 않으면 미국 재정은 붕괴한다. 이미 적자재정이기 때문에 국채를 발행하지 못하면 국가운영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미국채를 구매할 수 있는 국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중국과 일본이 가장 많이 국채를 샀다. 그러나 이제 중국과 일본이 국채를 매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채를 가장 많이 사모았던 중국은 이제 서서히 그 비중을 줄이고 있다. 중국은 미중간 대결구도가 형성되면서 미국채 매입을 중지하고 비중을 줄여왔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이후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를 압류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중국은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자신들의 외환보유고가 압류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당연히 서서히 팔아서 위험에 대비하고자 할 것이다. 특히 미국이 대만사태를 빌미로 중국의 외환을 동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중국이 달러 의존도를 줄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수록 달러의 기축 통화지위는 약화될 것이다.

일본도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더 이상 미국 채권을 매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 국내 환율이 비정상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환율을 방어하기위해서는 미국채를 구매할 수 있는 여유가 없을 것이다. 있는 것도 팔아서 외환시장에 개입을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대규모로 미국채를 매입할 국가는 별로 없다. 유럽은 거의 빈사상태다. 한국도 여유가 없다. 경상수지 적자 상태라 하루하루가 바쁜 지경이다.

미국은 이런 상황을 스스로 자초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금리인상을 한다고 했지만 현재의 인플레이션은 금리인상으로 잡을 수 없다. 문제의 본질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패권 경쟁으로인한 공급망 왜곡이다. 필자같은 문외한도 처음부터 지적할 정도로 상식적인 문제다. 공급 문제로 발생한 인플레인션을 소비를 억제해서 잡으려 하는 것은 진단과 처방이 모두 잘못된 것이다.

미국의 금융/재정 전문가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불과 얼마전까지 공급문제를 지적한 전문가들도 소수에 불과했다. 미국은 물론 한국의 전문가들도 대부분 금리인상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다고 했고, 금리인상을 대폭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필자 같은 비전문가의 눈에도 수요억제가 아니라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매우 단순한 사태를 지금까지 오로지 금리인상으로 끌고간 이유를 유럽을 약화시켜 미국의 생산능력을 강화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전혀 무리한 해석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미국채 매입을 할 수 있는 국가가 없어서 그런 의도도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미국채를 매수할 수 있는 국가가 없으면 국채가격이 떨어지고 이율은 올라간다. 미국 정부의 금리부담은 점점 더 커지고 재정은 위기에 처한다. 이미 미국 재정적자도 위험한 상황이다. 미국가부채가 이미 31조달러를 넘었다.

아무리 전문적인 영역이라도 일반적인 상식을 위배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원료, 식량의 급격한 가격상승, 중국 견제로 인한 상품의 미국 유입 감소 등에 따른 것이다. 아무리 소비를 억제하더라도 먹어야 하고 집에 들어가 살아야 한다. 차도 타고 다녀야 한다. 생활에 필수적인 서비스와 상품을 소비만 억제한다고 어떻게 줄어들 수 있겠는가?

며칠 남지 않은 11월 FOMC는 미국의 정책과 능력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금리를 높이 올리면 재정이 파탄나고 금리를 제대로 올리지 못하면 경제가 파탄난다. 미국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것이 미국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에 직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외정책의 잘못으로 위기를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노스스트림파이프 파괴, 크림대교 폭파, 카홉카 댐 파괴 및 우크라이나의 더러운 폭탄 사용 우려 같은 문제는 모두 미국이 매우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닌가 한다. 당장 11월8일의 중간선거와 같은 미국내 정치적 문제는 물론이고, 만일 전쟁이 겨울을 지나가면 유럽의 정치 상황이 급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이 겪고 있는 제반 경제적 문제는 러시아로서는 이미 사전에 예측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별 특별한 전문지식이 없는 필자도 전쟁발발과 동시에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러시아가 군사 경제 이중전쟁을 수행할 것이라고 수없이 말했다.

시간은 러시아 편이다. 러시아는 최소한 2025년까지는 지금의 상황을 끌고 갈 생각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러시아 중앙은행의 보고서는 2025년까지 대러시아 제재는 유지될 것이라고 가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2025년이 지나면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도 상황이라도 경제를 회복한다고 전망하고 있다.

만일 이런 상황이 2025년까지 계속되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 러시아는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 미국 금융과 재정은 파탄이 불가피하고 달러는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유럽은 제3세계 수준으로 위상을 추락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유럽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희생을 바탕으로 어찌어찌 혼자 살아나가는 방법을 찾을 지 모르나 과거의 제국이라는 위상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은 동맹국의 이탈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지 모른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격변의 시기를 경험하는 것 같다. 몇백년 동안 일어날 일을 몇십년만에 보고 있다. 소련이 붕괴하고 또 연이어서 미국도 붕괴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미국이 붕괴하면 한국도 위기에 빠진다. 한국의 기적적인 성장은 미국의 힘에 기댄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미국이 약화되면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된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살아남고 번영하려면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과정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살아 남기 어렵다. 현재의 한국은 급변하는 대외환경에 별관심이 없는 것 같다. 국내에서의 정치싸움에 눈이 팔려서 정말 중요한 것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fPWF5g5vZQEqDShGoUGYUiurRxVPCTEiHWyhB9nkqP6HxsrezAcQfxxF3M5xE7eyl&id=10003343486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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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43-Plus My Lais of the South Korean Mercenaries


(이 글은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의 저서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워싱턴과 제3세계 파시즘)』에 나오는 내용의 번역본을 수정한 것입니다. 원문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얘기하지만, 1980년대 국내 번역본은 한국군을 동맹군 혹은 용병이라 번역을 했더군요. 그래서 수정해서 올려봤습니다.)


한국군은 1965년 존슨 행정부와의 협정에 의하여 남베트남에 도착해서 1973년까지 주둔했었다.(각주 59) 1965년과 1966년의 뉴스 보도는 미국의 동맹군인 한국군을 ‘용맹’하고 ‘강력하다’고 표현했지만, 1970년 1월에는 그들의 강력함이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의도적인 살상에 기반한 것임이 일반인들에게 폭로됐다.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마을에서 무조건 1/10의 민간인을 사살하는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각주 60)


하지만 1972년이 될 때까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규모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당연히 이것 역시도 언론에서는 별 관심이 없을 테지만 그 살상은 ‘조직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각주 61) 베트남어를 하는 두 명의 퀘이커 교도인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는 5년 동안 한국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작전지역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벌였다. 그들의 조사결과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a) 남베트남인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임대군인(rented soldiers)’인 한국군은 미라이 학살과 규모면에서 비슷한 일련의 학살을 자행했다. 100여 명 정도가 죽은 각각 별개로 나눠진 12건의 학살사건이 존스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한국군은 이밖에도 20~30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은 수십 건의 또 다른 학살을 자행했으며, 그 밖에 헤아릴 수도 없는 각각 별개의 살인, 강도, 강간, 고문, 그리고 토지 및 민간인 개인이 소유한 재산의 파과 및 방화를 저질렀다. 한국군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의 숫자는 총 수천 명 단위에 이르는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 존스는 이들 ‘연합군’에게 ‘평정된’ 지역 중 임무지역만을 조사했던 것이었다. 


(b) 이러한 한국군에 의한 학살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징집연령에 해당되는 남자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가담하거나 사이공 정부에 소집되었고 또는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c) 이러한 대량학살은 부분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부분적이라는 것은 한국군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서, 또는 그러한 기습 공격에 대한 경고로서 행해졌다는 것이다.(각주 62) 요컨대 한국군이 장악한 전 지역의 민간인들은 그들에게 잡힌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지뢰가 폭발한다든지 해서 한국군 중에 사망자가 생기는 경우 이들이 빈번이 가장 가까운 마을을 습격하여 20명 혹은 120명에 달하는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 정책은 나치 독일의 정책화 비슷했지만, 남한의 민간인 포로학살은 나치가 2차 세계대전 도중 서유럽에서 자행한 학살들에 비하면, 보다 전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었다.


(d) 이러한 대향학살은 오랜기간 동안 심지어 1972년까지도 행해졌으며 미군당국도 이를 알고 있었다.(각주 63) 미국 관리들이 이런 형태의 ‘평정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보였다거나 혹은 이와 같이 빈번하고도 지속적인 만행에 대하여 어떤 징계조치가 취해졌다는 증거는 전혀없다. 사실상 한국군의 고의적인 민간인 학살은 미국에게 용인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미군 당국자는 이를 호의적으로 보기도 했었다는 신뢰할만한 근거도 있다. 콜롬비아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의 프랭크 볼드윈(Frank Baldwin)은 한국군의 그러한 방침은 “수년 동안 미국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보고했다. 미국 관리들이 볼드윈에게 때로는 유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보통은 찬사와 함께 그러한 볼드윈의 주장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e) 미 국방부는 한국군의 지속적인 남베트남 주둔을 유지하기 위해 1973년 회계연도 예산을 1억 3,400만 달러로 요구하면서(1965~1973년간의 총액은 17억 6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의회에서 한국군이 남베트남의 중요한 지역을 지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관리들이 말하는 오웰주의적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군이 남베트남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안전(각주 65)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닉슨과 웨스트모어랜드 및 평정계획 자체도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다.(각주 66)


이러한 형태의 평정작전을 스락했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되었듯이 미군 및 미군의 각국 연합군-비단 한국군뿐만 아니라(각주 67)-이 모두 남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행위를 즐겼다는 것은 그 같은 만행과 학살이 미군의 노력과 임무에 ‘부합하는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러한 행위는 가난하고 실질적으로는 무방비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완강히 협조를 거부하는 이민족을 평정한다는 과업에 없어서는 안 될 사항이었다.


각주


(각주 59) 1965년 1월 9일 대략 2,000명이 한국군이 파병됐다. 1965년 4월 20일의 호놀룰루 회담은 그 숫자를 7,250명으로 증가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이때는 바로 남베트남에 북베트남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처음으로 주의를 끈 때였다. 1965년 6월까지도 국방부는 아직 그런 군대가 남베트남 내에 혹은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문헌은 Chomsky, For Reasons of State, p.122를 보라. 한국군은 1967년 2월의 캄보디아 마을 습격에 가담했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Chomsky, At War With Asia, p.122를 보라.


(각주 60) Robert M. Smith, “Vietnam Killings Laid to Koreans,” New York Times (10 January 1970).


(각주 61) 뉴욕타임즈지의 크레이그 휘트니(Craig Whitney)는 다이안(Diane)과 마이클 존스(Michael Jones)로부터 한국군의 학살행위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받았는데 그는 베트남에서의 동맹군의 장래 역할에 초점을 맞춘 한 기사의 끝부분에다 그들이 본 사실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그 기사의 첫 머리에서 휘트니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군은 중부 해안의 방어가 빈약한 지역에 군사적 방패(휘트니는 누구를 위한 방패인가는 말하고 있지 않다)를 제공하고 있었다.” “Korean Troops End Vietnam Combat Role,” New York Times (9 November 1972).


(각주 62)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대부분 그들의 행동이 당시 진행되고 있던 어떠한 군사작전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닥치는 대로 벌인 학살이었다.


(각주 63) 랜드연구소의 “Viet Cong Motivation and Morale Study (1966년)”는 한국군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록상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이 자료는 기밀처리되어 유포가 억제됐다. American Report (28 July 1972)를 보라.


(각주 64) Letter in the New York Times, (25 January) 1970).


(각주 65) ‘안전’이란 미국의 공식 대변인들이 일관되게 베트남에 적용한 또 하나의 오웰주의이며 비슷한 방식으로 이 왕국 전역에 적용되었다. 베트남에 관한 경우 그 말은 사이공의 미국 종속정권이 위협당하지 않는 상태의 지배를 의미했다. 만일 사이공 측이 순전히 무력과 폭력으로 지배를 한다고 하더라도-비록 이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그 부락과 주민은 ‘안전’한 것이었다. 만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무력 없이 지배를 한다 하더라도 그 부락과 주민들은 ‘불안전’한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53년 6월의 한 국가정보 추산은 “베트남 주민에게 안전을 제공”할 수 없었던 프랑스의 무능력을 우울하게 논하고 있는데, 그들 주민은 게릴라에게 프랑스연합군이 와 있음을 경고해 줌으로써, 게릴라들이 방어를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베트민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프랑스로 하여금 베트남 주민들에게 베트민으로부터의 안전을 제공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The Pentagon Papers, Gravel ed., v. I, p. 396.


(각주 66) 자세한 건 “‘Pacification’ by Calculated Frightfulness: The Testimony of Diane and Michael Jones on the Massacres of South Vietnamese Civilians by South Korean Mercenary Troops,” Pacification Monograph Number 2; edited with an Introduction by Edward S. Herman, Philadelphia, 1973을 보라.


(각주 67) 이와 같은 문제는 호주군이 전개한 평정작전에서도 나타났다. 알렉스 카레이(Alex Carey)의 “Australian Atrocities in Vietnam,” Sydney, N.S.W., 1968을 보라.


출처: Noam Chomsky·Edward Herman, 『The Washinton Connection and Third World Fascism (The Political Economy of Human Rights - Volume I)』, Haymarket Books, 2014, p.365~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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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17 : 동남아시아 - 시즌 2 지역.주제편 먼나라 이웃나라 17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먼나라 이웃나라 동남아시아편 감상평

어린시절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킨 책이 있다면, 만화작가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뺄 수가 없다. 초등학교ㆍ중학교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에 대한 의문점 하나가 있었다. 왜 이 책은 주로 서구유럽 위주의 나라만 다뤘던걸까? 나는 이 점이 항상 의문이었다.

그러나 미국편 이후 중국편과 발칸반도 편, 동남아시아, 터키, 오세아니아, 러시아 편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늦게서야 작가가 다양한 국가를 다룬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학원 생활이 바쁘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가 읽고 싶었다. 그래서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동남아시아편과 러시아편을 대출했다.

초등학교 시절이나 중학교 시절에는 몰랐지만, 이원복씨는 상당히 보수우파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대학생 시절 우연히 이원복이 조선일보에 게재한 만화를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의 기분은 ˝이원복 실망이다.˝였다. 그가 우리나라의 친일청산 문제나 과거사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뉴라이트랑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은 뒤로하고 이번에 동남아시아편을 읽었다. 작가는 미얀마ㆍ태국ㆍ라오스ㆍ베트남ㆍ캄보디아ㆍ말레이시아ㆍ인도네시아ㆍ필리핀ㆍ싱가폴ㆍ브루나이ㆍ동티모르 순으로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한다. 이원복 특성상 서문에서 밝히는 소위 대한민국 국뽕적 감상은 여전히 나이브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제법 잘 읽혔다. 내가 잘 모르던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만화를 통해 간략하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법 재미도 있다.

하지만 만화의 구성과 내용에도 적잖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원복 작가는 너무 지나치게 서구식 민주주의를 절대선으로서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원복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빈곤은 엄밀히 따지자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지배다. 이원복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일제의 식민지배가 조선을 수탈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각국의 빈곤을 식민지 지배 이후에는 단순히 공산독재나 군부독재 그리고 왕정체제에 돌리기 바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달러 제국주의가 그 나라의 경제와 사회구조를 어떤식으로 잠식해 나가는지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만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이원복 작가의 맹신적 오류는 특히나 필리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이원복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가 얼마나 악독하고 잔혹했는지 말 그대로 외면한다. 1901년 미국이 아기날도 정부를 짓밟고, 식민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리핀인들을 짐승죽이듯이 학살한 역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화 과정에서 대략 100만 명의 필리핀인이 학살당한 것은 완전히 거세당해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에 다시 미군이 들어오자, 필리핀 민중이 미군을 다시 환영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은 실소를 금할수가 없다. 맥아더 정부가 친일한 반역자들을 기반으로 필리핀에 친미정부를 세우고, 후크발라합을 포함한 공산주의 게릴라 세력을 잔혹하게 소탕한 역사는 당연히 거세당해있다.

인도네시아 부분도 비슷하다.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 수카르노에 대해, 독재로 인기를 잃었다고 이원복은 주장한다. 그러나 수카르노가 나쁜놈으로 묘사된건 미국의 CIA가 1955년 반둥회의를 통해 이른바 제3세계 진영의 축으로서, 반미주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수카르노가 친미 독재자 수하르토보다 정당의 다양성을 인정했지만, 이런 사실에 대해 이원복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1965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하르토가 독재정치를 펼치고, 반대파를 억압하고 학살한 부분에 대해 이원복은 마지못해 언급하지만, 그 정부가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정부라는 건 언급조차 안한다. 결국 독재를 해서 물러났지만, 그 독재정부를 미국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원조 및 지원했는지는 언급을 안한 것이다.

이원복 교수의 정치ㆍ경제 논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해볼 수 있다.

1. 사회주의 체제는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다.
2.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항상 대안이다.
3. 그 자본주의라는 틀 안에서 빈부의 문제 및 정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4. 서구의 민주주의가 최선이다.
5. 서구식 자유선거를 안하면 다 독재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틀에 맞춰보려고 하니, 당연히 만화에서도 오류가 생긴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원복 교수의 장점도 있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에 대해서 만큼우 비판적으로 보고, 이들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인권유린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미국 주류사회가 흑역사로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다. 최근들어 인터넷 상에서 미국의 꼭두각시 국가 남베트남을 찬양하는 넷 인플루언서들이 창궐하고 있다. 그에 반해 이원복은 베트남을 다루는 편에서 베트남 전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원복 작가는 베트남 전쟁의 근본적 선상은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 있음을 얘기하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치민에게 정당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총선을 파기한 미국의 행동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또한 남베트남의 친미 독재자 응오딘지엠이 오직 반공주의만을 외치며, 토지개혁을 망친 반면, 호치민이 북베트남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이런 이원복 작가의 시각에 대해, 나무위키는 이상한 논리로 비난하지만, 이원복은 그저 서방의 주류적 시각에서 얘기한 것 밖에 없다. 그 외에도 미얀마나 말레이시아, 싱가폴, 브루나이, 동티모르 등은 내가 많이 모르는 역사를 배우는 느낌이었다. 이원복 작가 특유의 전달력은 정말 강력하다. 이원복만이 가지는 먼나라 이웃나라의 큰 장점이랄까.

오랜만에 이원복 작가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었다. 비록 오류는 많지만, 세계사 지식을 쌓는데 이 책 보다 읽히기 쉬운 책은 없다고 본다. 비록 이원복이 반공주의자여도, 이런 점에선 대단하다고 본다. 조만간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편도 읽을 것이다. 다음에는 러시아편에 대한 리뷰를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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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26월 유럽의회에서 아일랜드계 유럽의회 국회의원인 믹 월레스(Mick wallace)가 한 연설 중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동영상은 https://www.facebook.com/watch/?v=370148711672664 에서 볼 수 있다.)

 

여성의 권리가 인권의 근본입니다.

 

근데 왜 우리는 미국이 인권을 침해하는데 미국에 맞서는 것에 대해 항상 침묵하는거죠?

일각에서는 감히 어떻게 우리가 미국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있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할 권리와 자격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합니까?

 

자 한번 그 진실을 보도록 하죠.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되는데 28,800억 원(202211월 달러 환율 기준)이나 돈이 듭니다.

전 세계 죄수 인구의 25%가 미국에 있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의 군사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1,1528,000억원의 군비를 매년 지출합니다.

 

미국은 275년 전 건국된 이후부터 대략 250년 동안 전쟁을 치러왔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너무나도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건강보험은 하나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의 학생들에게 2,4449,700억원의 빚을 탕감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밥 한끼조차 제대로 못먹는 1,700만명의 어린이들을 위한 정부의 복지 프로그램 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딴 것들이 당신들이 말하는 건강하게 작동하고 운영되는 민주주의입니까?

 

당신들(유럽의회)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도대체 뭔가요?

 

심지어 대선 당시 진보적인 후보 버니 샌더스는 민주당 후보로 공천받는 것조차 허락되지도 않았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라는 발음조차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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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언급했듯 미국은 공화당(레이건, 부시 부자, 도날드 트럼프) 정권이건 민주당(클린턴,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 정권이건 자국민들에게 보편적인 건강보험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 어마어마한 빚더미를 덜어주지 않았고, 식사조차 못하는 가난한 어린이들에 대한 복지를 외면하고 오로지 군수마피아들과 독점재벌가들의 배만 불려줬죠. (이게 ‘세계 1위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민낯입니다. 이 사실을 국짐과 윤석렬-김거니-한똥훈 검찰파쑈독재세력, 친일숭미에 찌든 뉴라이트 사학자들, 기레기들만 모르죠.)
 

9월부터 드디어 대학원 석사생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학교 졸업 이후 사실상 백수생활을 할 때하고는 바쁨의 차이가 나게 됩니다. 과제도 많고 할 것도 많지만 그래도 제가 선택한 길이라 후회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으니 만족하고 있죠. 지난 8월 말에 리뷰를 하다가 멈춘 켄 번즈의 PBS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를 오랜만에 리뷰해봅니다. 집에서 쉬면서 5화를 감상했고, 오랜만에 감상하니 감회가 다르네요.

(This Is What We Do 인트로 영상 장면)

 

(이건 전쟁이다! 이건 우리가 하는 짓거리다!, 베트남 전쟁을 잘 표현한 문구 같다.)

 

1967년 중순 미국의 대통령인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여전히 베트남 전쟁에 대해 낙관적인 연설을 했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승리를 향한 성과를 내고 있고, 1965년 미 지상군이 상륙했을 당시 상황보다 상당히 극적인 군사적 효과를 벗었으며, 과거 베트콩의 손아귀에 있던 남베트남이 점차 공산주의의 팽창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1962년에 창설된 남베트남 미군원조사령부 즉 MAC-V는 최소 20만 명 이상의 적군을 사살했다고 주장했고, 적들이 더 이상 병력 보충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식의 보고들을 남발했다. 하지만 이미 1967년 중순 시점까지 미군 또한 75천 명의 사상자가 속출했고, 74일 기준으로 총 14,624명이 전사했다.

(196774일까지 총 14,624명이 죽었다는 걸 알려주는 장면)

 

(전쟁에 대해 논의하는 하노이 지도부, 호치민과 보 응우옌 지압 그리고 레주언은 이 전쟁을 전환시킬 큰거한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치민 초상화와 베트남 금성홍기 깃발)

 

그러나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의 정부는 여전히 대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남베트남 정부인사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여전히 만연했다. 과거 프랑스가 제국주의 전쟁을 치르며 추구한 화해정책(Pacification)은 미국의 전쟁에서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또한 집권 초기 존슨 대통령이 추구했던 사회복지 정책인 이른바 빈곤과의 전쟁(War on poverty)’은 미국 사회에서 점차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전쟁 예산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미국 내의 인종갈등은 점차 커져 갔으며, 그해 여름 미국에선 폭동을 동반한 흑인들의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는데, 미국 정부는 주방위군을 투입해서 진압했고 그 결과 70명의 시위대가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다른 한편 북베트남의 하노이에선 호치민과 보 응우옌 지압 그리고 레주언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새로운 공격 계획을 세웠다. 북베트남 지도부는 이 공격으로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으며, 미군도 결과적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철수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미국은 여전히 이 시점에도 숫자놀이에 빠져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사고문단이었던 제임스 윌뱅크스(James Willbanks)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출처가 불분명한 오래된 얘기가 있는데, 1967년에 미 국방성 건물 지하에 갔더니 메인프레임 컴퓨터가 거길 가득 채우고 있었고, 수량화할 수 있는 모든 걸 오래된 천공카드에 넣어놨다더군요. 군함의 수나 전투기, 탱크, 헬리콥터의 수, 대포, 기관총, 탄약 등 수량화할 수 있는 모든 걸 말이죠.”

(훈련소에서 훈련받는 미군 병사들, 미군 병사들은 훈련을 받으면서 인종주의적인 구호를 일상적으로 들으며 교육 받았다.)

 

(군사 훈련을 받는 병사들, 이들은 훈련을 받으면서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관점에 빠졌다.)

 

말 그대로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일종에 숫자 노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7년 중반에 대략 50만 명에 달하는 미군이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20%만이 전투 현장에 나섰다고 한다. 적잖은 수의 미군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관점을 가지고 베트남에 갔는데, 정작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이들은 아시아인들을 국스(Gooks)’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미국이 아이티와 니카라과를 식민지배 했을 때, 처음 사용한 용어였고,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도 한국인을 그렇게 불렀다. 미 육군이었던 라이언 코시(Rion Causey)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기본적인 교육이란 게 국스와 싸우러 간다고 가르치는 게 다였습니다.(중략) 베트남인은 사람일 테지만 국스는 짐승에 가까운 거였죠.”

(DMZ 근처의 미군 배치도)

 

(DMZ 기지 근처에 배치된 미군 박격포 부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사용하던 AK-47 소총, 1947년 소련 출신의 칼리시니코프가 제작한 AK-47은 이후 혁명세력들이 자주 사용하는 소총이었다. AK-47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M-16보다 성능이 좋았다.)

 

(미군의 M-16 소총,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사용한 M-16 소총은 막힘현상 때문에 AK-47 보다 교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사실상 남베트남 농촌과 밀림 전역이 전쟁터였지만, 1967년 중순에는 DMZ 근처도 미군과 북베트남군 그리고 베트콩이 격전을 벌이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그래서 북베트남군의 포격을 자주 받곤 했다.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군의 화기와 북베트남군의 화기다. 놀랍게도 당시 미군이 사용한 M-16 소총은 연발로 발사하다 보면, 적잖은 막힘현상(총알이 발사되다 걸려서 발사가 안되는 것을 뜻함)을 일으켰다. 반면에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이 사용하던 AK-47 소총은 막힘현상을 일으키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총격전에선 북베트남군이 미군보다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약점도 있었다. 북베트남군 병사였던 레반초(Le Van Cho)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미군한텐 약점이 있었어요. 담배를 피우고 흔적을 남기니까 쉽게 추적할 수 있었죠.”

(콘티엔 근처에 배치된 미군 지도)

 

(콘티엔 근처에 투입된 미군 병력들)

 

196772DMZ 근처인 콘티엔 지역에서 교전을 치렀던 미군은 북베트남군과의 교전에서 1개 중대가 거의 전멸 상태에 놓였었다. 물론 이 날은 다큐멘터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 해병대가 베트남에서 겪은 최악의 날 중 하나라 표현될 정도로 처참한 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일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90명의 사망자와 190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들 중 일부는 M-16 소총의 막힘현상 때문에 사망한 사실이 나중에 미 해병대의 탈환과정에서 드러났다. 당시 DMZ 지역 전방에 배치되어 전투를 치른 흑인 출신 미 해병대 병사 로저 해리스(Rogger Harris)는 북베트남군에게 상당히 감명 받았었다고 한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저는 북베트남군 병사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이 느껴졌습니다. 한 북베트남군 병사가 뛰어나와서 50구경 기관총과 90mm 대포가 장착되어 있는 미군 탱크와 맞서는 걸 봤기 때문이죠. 그 병사 혼자서 탱크와 대결하더라고요.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미군 탱크들)

 

(티우와 키, 1967년 이들은 권력투쟁을 벌였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티우가 대통령 키가 총리를 했다.)

 

(레주언, 레주언은 구정 대공세를 누구보다 강력히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남베트남 봉기 계획 지도, 말 그대로 남베트남 전역에서 봉기를 준비한 것이다.)

 

1967년 중순 남베트남 정부에선 티우와 키가 정권을 잡았고, 이들은 당연하게도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남베트남의 정치인으로 있으면서 권력을 남용했다. 한편 북베트남의 레주언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종에 대규모 공세를 준비했다. 레주언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대대적인 봉기를 남베트남 전역에서 일으키면 남베트남 민중들의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날 것으로 믿었다. 이렇게 되면 미군도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를 선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레주언을 포함한 북베트남 지도부는 대공세를 준비했던 것이다.

(미군 타이거 포스의 전쟁범죄에 대해 방송에서 증언하는 미군 출신인 스타우드)

 

(베트남 전쟁 당시 타이거 포스에 있을 때 찍은 스타우드의 사진, 맨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 스타우드다.)

 

(불타고 있는 자유사격지대의 민가)

 

1967년에도 미군이 진행하는 군사작전에는 당연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쟁범죄가 뒤따랐다. 그 시기 미군의 대표적인 전쟁범죄로는 소위 타이거 포스(Tiger Force)의 전쟁범죄를 들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타이거 포스의 전쟁범죄는 이후 1989년 영화 전쟁의 사상자들(Casualties of War)’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미군 병사가 마을에 살던 한 소녀를 납치해서 집단 강간을 몇일간 한 뒤에 그 여성을 살해하고 사실은 은폐한다는 내용으로 타이거 포스가 저지른 전쟁범죄를 영화화 한 것이다. 당시 타이거 포스의 부대원이었던 스타우드는 이후 미국으로 귀국해서 텔레비전을 통해 이 전쟁범죄에 대해 증언했다.

(자유사격지대에서 작전을 수행중인 미군들)

 

1967년 여름 이른바 타이거 포스는 꽝응아이 성에 있는 송베 계곡에 파견됐다. 당시 마을 주민 전체가 이미 집을 떠나 난민촌에서 북적이며 지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농사일을 하기 위해 마을에 돌아와 농사를 짓기도 했다. 당시 송베 계곡은 움직이는 건 뭐든 쏴도 되는 자유사격 지대(Free Fire Zone)’이었고, 미군이 작전을 벌이는 7개월 동안 적잖은 베트남 민간인이 이 자유사격지대에서 사살 당했다. 희생자 중에는 시각장애인 형제 2명과 나이 많은 고승, 여성, 어린이 그리고 노인이었다. 이들은 방공호에 있다가 미군에게 살해당했다.

(문서 보관소에 파뭍힌 타이거 포스의 전쟁범죄 기록)

 

또한 농부 3명도 농사를 짓다가 미군의 총에 맞고 죽었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전부다 베트콩 사살로 전과 보고됐다. 몇 년 후 다른 병사가 나서서 이 전쟁범죄들에 대해 조사를 했고, 육군 조사 결과 타이거 포스 부대 소속 18명을 살인이나 폭행으로 기소할 만한 근거를 찾았다. 물론 이들 모두 기소되지 않았고, 관련 자료들은 기록 보관소 문서고에 깊이 파묻혔다. 이후 기밀문서로 처리된 내용 중 일부를 아래에 정리해봤다.

 

1. 목을 베어서 민간인 여성을 죽였다

2. 민간인의 귀를 베어냈다

3. 10명의 농부를 살해한 후 발포를 멈췄다

4. 북베트남군 병사의 머리 가죽을 벗겼다

(펜타곤을 가로막고 있는 주 방위군 병사들)

 

(반전시위를 전개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주 방위군)

 

(워싱턴 D.C에서 반전시위를 전개하는 시위대)

 

1967년 중순 이후 미국 내의 반전운동은 규모가 더 확장됐다. 1967년 가을에는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 기념관에서 대규모 반전 시위가 열렸다. 더 나아가 시위대는 미국 국방성 건물까지 위협했다. 반전 시위자들은 자신들을 막고 있는 병사들 중 상당수가 징집된 젊은 병사들임을 알게 됐고, 이들 또한 전쟁의 희생자로 보기도 했다. 물론 시위를 하다 보니 양측의 충돌은 많이 격했다. 시위대는 이 시위를 시점으로 정부 그 자체를 자신들의 적으로서 보기 시작했다. 반전 시위의 성격이 정부에 반대하는 성격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상황이 심각했지만 존슨 대통령은 이에 대해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있다는 편협한 생각에 함몰되어 있었다.

(총검으로 가로막고 있는 병사에게 총에다가 꽃을 꽂는 히피)

 

(베트남 전쟁 당시 전쟁에 참전한 아메리카 원주민)

 

2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인물들 중에는 원주민, 아시아인, 흑인, 히스패닉 등 유색인종들 또한 적잖게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인 패스컬 클리터스 풀로 또한 그 중 한명이었다. 그는 록닌 지역에서 전투 도중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한 원주민은 총 42천 명으로 카이오와족인 풀로 또한 이에 해당한다. 카이오와족은 미국에 사는 어느 인종 집단보다도 복무 비율이 높았다.

(춤을 추고 있는 여성 히피, 196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은 히피가 되기도 했다.)

 

(집단 댄스를 하는 히피들)

 

베트남 전쟁에서의 반전운동은 또 다른 집단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히피(Hippie). 1950년대 비트족으로부터 탄생한 히피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자유섹스 마약,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미국 본토에서는 히피들이 많이 생기고 있었지만, 정작 전선에 배치된 병사들은 이들에 대해 그다지 안 좋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노이 상공에서 격추되는 전투기)

 

(격추된 전투기에서 탈출하는 조종사)

 

(매케인이 격추당해 포로로 붙잡히는 걸 보았던 바오닌)

 

(서호에서 북베트남군에게 포로로 잡힌 존 매케인)

 

(북베트남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있는 매케인)

 

1967년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폭격하던 중 전투기 2대가 격추됐다. 격추된 전투기에서 조종사 한 명이 낙하산을 피고 하노이에 불시착했다. 그는 하노이에 있는 서호에 추락했고, 북베트남군 병사와 시민들에 의해 구출됐다. 그가 유명한 미국 정치인인 존 매케인이다. 존 매케인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항공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매케인은 포로로 붙잡혔고, 힘든 포로생활을 했다. 매케인은 전쟁이 끝난 이후 풀려났지만, 자신이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사망한 민간인들에 대해 단 한 번도 반성한 적이 없었다. 이후 그는 네오콘이 되어 타국의 내정에 간섭을 시도했으며, 2013년 유로마이단 폭동때는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조직인 스보보다의 지도자 타니북을 의도적으로 지원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던 20188월 잘먹고 잘살다가 사망했다.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닥토)

 

(닥토 전투에 참전했던 북베트남군 출신의 응우옌탄손)

 

(다큐멘터리에 나와 닥토 전투에 대해 인터뷰 하는 응우옌탄손)

 

레주언이 계획한 대공세가 있기 전인 196711월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인 콘툼(Kon Tum) 성 근처에 잇는 닥토(Dak To)에서는 미군과 북베트남군의 교전이 벌어졌다. 닥토에서 교전이 벌어지기 이전 캄보디아 국경 근처인 록닌(Loch Ninh)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상태였다. 당시 북베트남 정규군이었던 응우옌탄손은 닥토 전투에 참전했다. 그가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했던 인터뷰의 내용을 들어보자.

 

우리 사령부의 전략은 미군을 유인해서 중부 고원지대 지방에서 격파해 버리는 거였어요.”

(닥토 전투에 투입된 미군 헬기 조종사)

 

(미군 헬기에서 내려 작전을 전개하는 미군 병사들)

 

(네이팜탄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875고지)

 

(부상당한 미군 병사)

 

(875 고지에 있는 미군 병사들)

 

닥토 전투는 1967113일부터 1123일까지 대략 3주간 전개됐다. 당시 미군은 닥토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미군 중에 최정예 부대인 제173 공수여단을 투입했고 다량의 전투 헬기도 투입했다. 닥토 전투 당시 특히 875 고지 지역 전투는 정말 치열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으로부터 공격받은 미군 중대 3개는 사실상 거의 전멸 상태에 놓였고, 전투에 참여한 중대장들을 비롯하여 장교와 사관 대부분이 사망했다. 미 공군은 폭탄과 네이팜 폭탄을 퍼부으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진지를 폭격했고, 이 과정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뿐만 아니라 미군 수십 명도 오폭으로 사망했다.

(닥토 전투에서 속출한 미군 부상자들)

 

(미군의 헬기 및 항공 폭격으로 지형이 바뀐 고지의 모습)

 

(폭격으로 불타버리고 잿더미만 남은 곳을 올라가고 있는 미군들)

 

(닥토 전투에 투입된 어떤 미군 병사의 얼굴 사진)

 

당시 참전했던 맷 해리슨에 따르면 875고지 전투에 참가했던 140명의 중대원 중 26명만 살아 남았는데, 26명 또한 부상을 안당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닥토 전투는 분명 미군이 875 고지를 점령하면서 끝났지만 큰 의미가 없는 미군의 승리였다. 20일 간의 닥토 전투에서 미군은 총 361명이 사망했고 1,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40대 이상의 미군 헬기가 파괴됐고, 미군의 최신식 항공기 록히드 C-130 허큘리스 두 대도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 107명의 미군은 875 고지 전투에서 사망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정확한 사망자 수치는 없지만 대략 1,600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군이 최신식 화력을 동원해서 무수히 많은 네이팜탄과 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바디카운트 전략, 베트콩으로 사살된 이들 중 상당수는 민간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존슨 대통령에게 철군을 주장했던 로버트 맥나마라, 그 또한 이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닥토 전투가 미군의 의미없는 승리로 끝나고 있을 때,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을 포함한 미국의 전쟁 지도부는 여전히 숫자와 통계를 조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미국 국민들에게 승리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반면 전쟁을 확장한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제 슬슬 존슨 대통령에게 비밀 메모를 통해 미군의 철군을 주장했다. 맥나마라는 미군의 항공폭격과 병력 증파를 통해서 베트남인들의 저항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었다. 그는 미군을 단계적으로 빼서 전투를 남베트남군에게 맡기면서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맥나마라의 얘기를 들은 존슨 대통령은 맥나마라를 세계은행 총재 자리로 돌렸다. 이후 맥나마라는 1995년 베트남 전쟁 관련 회고록을 통해 이에 대해 28년 만에 폭로하기에 이른다. 맥나마라 이후 존슨은 클라크 클리퍼드를 국방부 장관에 임명했다.

(196712월 미군 전사자 숫자,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전사자가 2만 명을 돌파했다.)

 

(수렁에 빠진 미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베트남 전쟁 사진)

 

196712월 까지 총 20,057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점차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대규모 공세가 비밀리에 계획되고 있었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호치민 루트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남베트남의 혁명세력을 규합하고 물자를 보급했다. 이제 원숭이의 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달만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름 즐겁게 감상했다. 비록 미군 전쟁범죄 관련해서, 마치 병사들의 개인적인 일탈로만 설명하려는 고문단 출신 인사의 인터뷰나 다소 북베트남측 정부에 대한 다소 악선전적인 내용들은 좀 서구편향적이기는 하나 그래도 잘 만들었다고 본다.

 

5화 리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고 다음에 6화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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