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부터 드디어 대학원 석사생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학교 졸업 이후 사실상 백수생활을 할 때하고는 바쁨의 차이가 나게 됩니다. 과제도 많고 할 것도 많지만 그래도 제가 선택한 길이라 후회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으니 만족하고 있죠. 지난 8월 말에 리뷰를 하다가 멈춘 켄 번즈의 PBS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를 오랜만에 리뷰해봅니다. 집에서 쉬면서 5화를 감상했고, 오랜만에 감상하니 감회가 다르네요.

(This Is What We Do 인트로 영상 장면)

 

(이건 전쟁이다! 이건 우리가 하는 짓거리다!, 베트남 전쟁을 잘 표현한 문구 같다.)

 

1967년 중순 미국의 대통령인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여전히 베트남 전쟁에 대해 낙관적인 연설을 했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승리를 향한 성과를 내고 있고, 1965년 미 지상군이 상륙했을 당시 상황보다 상당히 극적인 군사적 효과를 벗었으며, 과거 베트콩의 손아귀에 있던 남베트남이 점차 공산주의의 팽창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1962년에 창설된 남베트남 미군원조사령부 즉 MAC-V는 최소 20만 명 이상의 적군을 사살했다고 주장했고, 적들이 더 이상 병력 보충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식의 보고들을 남발했다. 하지만 이미 1967년 중순 시점까지 미군 또한 75천 명의 사상자가 속출했고, 74일 기준으로 총 14,624명이 전사했다.

(196774일까지 총 14,624명이 죽었다는 걸 알려주는 장면)

 

(전쟁에 대해 논의하는 하노이 지도부, 호치민과 보 응우옌 지압 그리고 레주언은 이 전쟁을 전환시킬 큰거한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치민 초상화와 베트남 금성홍기 깃발)

 

그러나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의 정부는 여전히 대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남베트남 정부인사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여전히 만연했다. 과거 프랑스가 제국주의 전쟁을 치르며 추구한 화해정책(Pacification)은 미국의 전쟁에서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또한 집권 초기 존슨 대통령이 추구했던 사회복지 정책인 이른바 빈곤과의 전쟁(War on poverty)’은 미국 사회에서 점차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전쟁 예산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미국 내의 인종갈등은 점차 커져 갔으며, 그해 여름 미국에선 폭동을 동반한 흑인들의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는데, 미국 정부는 주방위군을 투입해서 진압했고 그 결과 70명의 시위대가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다른 한편 북베트남의 하노이에선 호치민과 보 응우옌 지압 그리고 레주언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새로운 공격 계획을 세웠다. 북베트남 지도부는 이 공격으로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으며, 미군도 결과적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철수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미국은 여전히 이 시점에도 숫자놀이에 빠져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사고문단이었던 제임스 윌뱅크스(James Willbanks)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출처가 불분명한 오래된 얘기가 있는데, 1967년에 미 국방성 건물 지하에 갔더니 메인프레임 컴퓨터가 거길 가득 채우고 있었고, 수량화할 수 있는 모든 걸 오래된 천공카드에 넣어놨다더군요. 군함의 수나 전투기, 탱크, 헬리콥터의 수, 대포, 기관총, 탄약 등 수량화할 수 있는 모든 걸 말이죠.”

(훈련소에서 훈련받는 미군 병사들, 미군 병사들은 훈련을 받으면서 인종주의적인 구호를 일상적으로 들으며 교육 받았다.)

 

(군사 훈련을 받는 병사들, 이들은 훈련을 받으면서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관점에 빠졌다.)

 

말 그대로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일종에 숫자 노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7년 중반에 대략 50만 명에 달하는 미군이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20%만이 전투 현장에 나섰다고 한다. 적잖은 수의 미군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관점을 가지고 베트남에 갔는데, 정작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이들은 아시아인들을 국스(Gooks)’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미국이 아이티와 니카라과를 식민지배 했을 때, 처음 사용한 용어였고,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도 한국인을 그렇게 불렀다. 미 육군이었던 라이언 코시(Rion Causey)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기본적인 교육이란 게 국스와 싸우러 간다고 가르치는 게 다였습니다.(중략) 베트남인은 사람일 테지만 국스는 짐승에 가까운 거였죠.”

(DMZ 근처의 미군 배치도)

 

(DMZ 기지 근처에 배치된 미군 박격포 부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사용하던 AK-47 소총, 1947년 소련 출신의 칼리시니코프가 제작한 AK-47은 이후 혁명세력들이 자주 사용하는 소총이었다. AK-47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M-16보다 성능이 좋았다.)

 

(미군의 M-16 소총,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사용한 M-16 소총은 막힘현상 때문에 AK-47 보다 교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사실상 남베트남 농촌과 밀림 전역이 전쟁터였지만, 1967년 중순에는 DMZ 근처도 미군과 북베트남군 그리고 베트콩이 격전을 벌이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그래서 북베트남군의 포격을 자주 받곤 했다.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군의 화기와 북베트남군의 화기다. 놀랍게도 당시 미군이 사용한 M-16 소총은 연발로 발사하다 보면, 적잖은 막힘현상(총알이 발사되다 걸려서 발사가 안되는 것을 뜻함)을 일으켰다. 반면에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이 사용하던 AK-47 소총은 막힘현상을 일으키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총격전에선 북베트남군이 미군보다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약점도 있었다. 북베트남군 병사였던 레반초(Le Van Cho)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미군한텐 약점이 있었어요. 담배를 피우고 흔적을 남기니까 쉽게 추적할 수 있었죠.”

(콘티엔 근처에 배치된 미군 지도)

 

(콘티엔 근처에 투입된 미군 병력들)

 

196772DMZ 근처인 콘티엔 지역에서 교전을 치렀던 미군은 북베트남군과의 교전에서 1개 중대가 거의 전멸 상태에 놓였었다. 물론 이 날은 다큐멘터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 해병대가 베트남에서 겪은 최악의 날 중 하나라 표현될 정도로 처참한 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일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90명의 사망자와 190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들 중 일부는 M-16 소총의 막힘현상 때문에 사망한 사실이 나중에 미 해병대의 탈환과정에서 드러났다. 당시 DMZ 지역 전방에 배치되어 전투를 치른 흑인 출신 미 해병대 병사 로저 해리스(Rogger Harris)는 북베트남군에게 상당히 감명 받았었다고 한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저는 북베트남군 병사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이 느껴졌습니다. 한 북베트남군 병사가 뛰어나와서 50구경 기관총과 90mm 대포가 장착되어 있는 미군 탱크와 맞서는 걸 봤기 때문이죠. 그 병사 혼자서 탱크와 대결하더라고요.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미군 탱크들)

 

(티우와 키, 1967년 이들은 권력투쟁을 벌였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티우가 대통령 키가 총리를 했다.)

 

(레주언, 레주언은 구정 대공세를 누구보다 강력히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남베트남 봉기 계획 지도, 말 그대로 남베트남 전역에서 봉기를 준비한 것이다.)

 

1967년 중순 남베트남 정부에선 티우와 키가 정권을 잡았고, 이들은 당연하게도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남베트남의 정치인으로 있으면서 권력을 남용했다. 한편 북베트남의 레주언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종에 대규모 공세를 준비했다. 레주언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대대적인 봉기를 남베트남 전역에서 일으키면 남베트남 민중들의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날 것으로 믿었다. 이렇게 되면 미군도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를 선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레주언을 포함한 북베트남 지도부는 대공세를 준비했던 것이다.

(미군 타이거 포스의 전쟁범죄에 대해 방송에서 증언하는 미군 출신인 스타우드)

 

(베트남 전쟁 당시 타이거 포스에 있을 때 찍은 스타우드의 사진, 맨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 스타우드다.)

 

(불타고 있는 자유사격지대의 민가)

 

1967년에도 미군이 진행하는 군사작전에는 당연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쟁범죄가 뒤따랐다. 그 시기 미군의 대표적인 전쟁범죄로는 소위 타이거 포스(Tiger Force)의 전쟁범죄를 들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타이거 포스의 전쟁범죄는 이후 1989년 영화 전쟁의 사상자들(Casualties of War)’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미군 병사가 마을에 살던 한 소녀를 납치해서 집단 강간을 몇일간 한 뒤에 그 여성을 살해하고 사실은 은폐한다는 내용으로 타이거 포스가 저지른 전쟁범죄를 영화화 한 것이다. 당시 타이거 포스의 부대원이었던 스타우드는 이후 미국으로 귀국해서 텔레비전을 통해 이 전쟁범죄에 대해 증언했다.

(자유사격지대에서 작전을 수행중인 미군들)

 

1967년 여름 이른바 타이거 포스는 꽝응아이 성에 있는 송베 계곡에 파견됐다. 당시 마을 주민 전체가 이미 집을 떠나 난민촌에서 북적이며 지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농사일을 하기 위해 마을에 돌아와 농사를 짓기도 했다. 당시 송베 계곡은 움직이는 건 뭐든 쏴도 되는 자유사격 지대(Free Fire Zone)’이었고, 미군이 작전을 벌이는 7개월 동안 적잖은 베트남 민간인이 이 자유사격지대에서 사살 당했다. 희생자 중에는 시각장애인 형제 2명과 나이 많은 고승, 여성, 어린이 그리고 노인이었다. 이들은 방공호에 있다가 미군에게 살해당했다.

(문서 보관소에 파뭍힌 타이거 포스의 전쟁범죄 기록)

 

또한 농부 3명도 농사를 짓다가 미군의 총에 맞고 죽었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전부다 베트콩 사살로 전과 보고됐다. 몇 년 후 다른 병사가 나서서 이 전쟁범죄들에 대해 조사를 했고, 육군 조사 결과 타이거 포스 부대 소속 18명을 살인이나 폭행으로 기소할 만한 근거를 찾았다. 물론 이들 모두 기소되지 않았고, 관련 자료들은 기록 보관소 문서고에 깊이 파묻혔다. 이후 기밀문서로 처리된 내용 중 일부를 아래에 정리해봤다.

 

1. 목을 베어서 민간인 여성을 죽였다

2. 민간인의 귀를 베어냈다

3. 10명의 농부를 살해한 후 발포를 멈췄다

4. 북베트남군 병사의 머리 가죽을 벗겼다

(펜타곤을 가로막고 있는 주 방위군 병사들)

 

(반전시위를 전개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주 방위군)

 

(워싱턴 D.C에서 반전시위를 전개하는 시위대)

 

1967년 중순 이후 미국 내의 반전운동은 규모가 더 확장됐다. 1967년 가을에는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 기념관에서 대규모 반전 시위가 열렸다. 더 나아가 시위대는 미국 국방성 건물까지 위협했다. 반전 시위자들은 자신들을 막고 있는 병사들 중 상당수가 징집된 젊은 병사들임을 알게 됐고, 이들 또한 전쟁의 희생자로 보기도 했다. 물론 시위를 하다 보니 양측의 충돌은 많이 격했다. 시위대는 이 시위를 시점으로 정부 그 자체를 자신들의 적으로서 보기 시작했다. 반전 시위의 성격이 정부에 반대하는 성격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상황이 심각했지만 존슨 대통령은 이에 대해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있다는 편협한 생각에 함몰되어 있었다.

(총검으로 가로막고 있는 병사에게 총에다가 꽃을 꽂는 히피)

 

(베트남 전쟁 당시 전쟁에 참전한 아메리카 원주민)

 

2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인물들 중에는 원주민, 아시아인, 흑인, 히스패닉 등 유색인종들 또한 적잖게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인 패스컬 클리터스 풀로 또한 그 중 한명이었다. 그는 록닌 지역에서 전투 도중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한 원주민은 총 42천 명으로 카이오와족인 풀로 또한 이에 해당한다. 카이오와족은 미국에 사는 어느 인종 집단보다도 복무 비율이 높았다.

(춤을 추고 있는 여성 히피, 196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은 히피가 되기도 했다.)

 

(집단 댄스를 하는 히피들)

 

베트남 전쟁에서의 반전운동은 또 다른 집단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히피(Hippie). 1950년대 비트족으로부터 탄생한 히피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자유섹스 마약,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미국 본토에서는 히피들이 많이 생기고 있었지만, 정작 전선에 배치된 병사들은 이들에 대해 그다지 안 좋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노이 상공에서 격추되는 전투기)

 

(격추된 전투기에서 탈출하는 조종사)

 

(매케인이 격추당해 포로로 붙잡히는 걸 보았던 바오닌)

 

(서호에서 북베트남군에게 포로로 잡힌 존 매케인)

 

(북베트남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있는 매케인)

 

1967년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폭격하던 중 전투기 2대가 격추됐다. 격추된 전투기에서 조종사 한 명이 낙하산을 피고 하노이에 불시착했다. 그는 하노이에 있는 서호에 추락했고, 북베트남군 병사와 시민들에 의해 구출됐다. 그가 유명한 미국 정치인인 존 매케인이다. 존 매케인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항공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매케인은 포로로 붙잡혔고, 힘든 포로생활을 했다. 매케인은 전쟁이 끝난 이후 풀려났지만, 자신이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사망한 민간인들에 대해 단 한 번도 반성한 적이 없었다. 이후 그는 네오콘이 되어 타국의 내정에 간섭을 시도했으며, 2013년 유로마이단 폭동때는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조직인 스보보다의 지도자 타니북을 의도적으로 지원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던 20188월 잘먹고 잘살다가 사망했다.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닥토)

 

(닥토 전투에 참전했던 북베트남군 출신의 응우옌탄손)

 

(다큐멘터리에 나와 닥토 전투에 대해 인터뷰 하는 응우옌탄손)

 

레주언이 계획한 대공세가 있기 전인 196711월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인 콘툼(Kon Tum) 성 근처에 잇는 닥토(Dak To)에서는 미군과 북베트남군의 교전이 벌어졌다. 닥토에서 교전이 벌어지기 이전 캄보디아 국경 근처인 록닌(Loch Ninh)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상태였다. 당시 북베트남 정규군이었던 응우옌탄손은 닥토 전투에 참전했다. 그가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했던 인터뷰의 내용을 들어보자.

 

우리 사령부의 전략은 미군을 유인해서 중부 고원지대 지방에서 격파해 버리는 거였어요.”

(닥토 전투에 투입된 미군 헬기 조종사)

 

(미군 헬기에서 내려 작전을 전개하는 미군 병사들)

 

(네이팜탄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875고지)

 

(부상당한 미군 병사)

 

(875 고지에 있는 미군 병사들)

 

닥토 전투는 1967113일부터 1123일까지 대략 3주간 전개됐다. 당시 미군은 닥토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미군 중에 최정예 부대인 제173 공수여단을 투입했고 다량의 전투 헬기도 투입했다. 닥토 전투 당시 특히 875 고지 지역 전투는 정말 치열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으로부터 공격받은 미군 중대 3개는 사실상 거의 전멸 상태에 놓였고, 전투에 참여한 중대장들을 비롯하여 장교와 사관 대부분이 사망했다. 미 공군은 폭탄과 네이팜 폭탄을 퍼부으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진지를 폭격했고, 이 과정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뿐만 아니라 미군 수십 명도 오폭으로 사망했다.

(닥토 전투에서 속출한 미군 부상자들)

 

(미군의 헬기 및 항공 폭격으로 지형이 바뀐 고지의 모습)

 

(폭격으로 불타버리고 잿더미만 남은 곳을 올라가고 있는 미군들)

 

(닥토 전투에 투입된 어떤 미군 병사의 얼굴 사진)

 

당시 참전했던 맷 해리슨에 따르면 875고지 전투에 참가했던 140명의 중대원 중 26명만 살아 남았는데, 26명 또한 부상을 안당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닥토 전투는 분명 미군이 875 고지를 점령하면서 끝났지만 큰 의미가 없는 미군의 승리였다. 20일 간의 닥토 전투에서 미군은 총 361명이 사망했고 1,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40대 이상의 미군 헬기가 파괴됐고, 미군의 최신식 항공기 록히드 C-130 허큘리스 두 대도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 107명의 미군은 875 고지 전투에서 사망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정확한 사망자 수치는 없지만 대략 1,600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군이 최신식 화력을 동원해서 무수히 많은 네이팜탄과 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바디카운트 전략, 베트콩으로 사살된 이들 중 상당수는 민간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존슨 대통령에게 철군을 주장했던 로버트 맥나마라, 그 또한 이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닥토 전투가 미군의 의미없는 승리로 끝나고 있을 때,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을 포함한 미국의 전쟁 지도부는 여전히 숫자와 통계를 조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미국 국민들에게 승리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반면 전쟁을 확장한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제 슬슬 존슨 대통령에게 비밀 메모를 통해 미군의 철군을 주장했다. 맥나마라는 미군의 항공폭격과 병력 증파를 통해서 베트남인들의 저항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었다. 그는 미군을 단계적으로 빼서 전투를 남베트남군에게 맡기면서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맥나마라의 얘기를 들은 존슨 대통령은 맥나마라를 세계은행 총재 자리로 돌렸다. 이후 맥나마라는 1995년 베트남 전쟁 관련 회고록을 통해 이에 대해 28년 만에 폭로하기에 이른다. 맥나마라 이후 존슨은 클라크 클리퍼드를 국방부 장관에 임명했다.

(196712월 미군 전사자 숫자,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전사자가 2만 명을 돌파했다.)

 

(수렁에 빠진 미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베트남 전쟁 사진)

 

196712월 까지 총 20,057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점차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대규모 공세가 비밀리에 계획되고 있었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호치민 루트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남베트남의 혁명세력을 규합하고 물자를 보급했다. 이제 원숭이의 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달만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름 즐겁게 감상했다. 비록 미군 전쟁범죄 관련해서, 마치 병사들의 개인적인 일탈로만 설명하려는 고문단 출신 인사의 인터뷰나 다소 북베트남측 정부에 대한 다소 악선전적인 내용들은 좀 서구편향적이기는 하나 그래도 잘 만들었다고 본다.

 

5화 리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고 다음에 6화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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