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쥬라기 공원을 본 사람이라면 이 공룡의 존재를 알 것이다. 바로 벨로시렙터(벨로키랍토르)다.


벨로시렙터의 화석이 발견된 것은 20세기 초다. 1923년 몽골의 고비 사막에서 미국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서 파견한 미국인 화석 탐사대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24년 미국의 공룡학자 헨리 F 오즈번 박사에 의해 지금의 이름이 명명되었다.

벨로시렙터는 백악기 후기에 서식하던 종으로 현재의 몽골과 중국 지역에서 서식했다. 크기도 굉장히 작았다. 현재 인간보다 훨씬 작으며, 크기만 봐선 애완용으로도 적당할 것이다. 사실 이 공룡이 유명해진 건 바로 1971년 몽골 고비 사막에서 폴란드 탐사팀에 의해 프로토케라톱스와 싸우다 죽은 화석을 통해서였다.

처음에 발견되었을 당시 프로토케라톱스가 벨로키랍토르의 앞다리를 물고, 벨로키랍토르는 프로토케라톱스의 목에 두 번째 발가락 발톱을 박은 상태 그대로 화석이 되었는데 이는 벨로키랍토르가 프로토케라톱스(초식공룡)를 사냥하던 중 둘이 물고 싸우다가 모래더미나 돌 무더기에 산 채로 파묻혀서 그리 된 것이었다.

그러나 발견된 화석하고는 달리 영화에서는 2m가 넘는 육식 공룡으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본 사람들은 벨로시렙터가 마치 거대한 공룡으로 티라노사우루스와도 대적할만한 존재로 인식하기도 한다.

사실 영화에서 묘사된 벨로시렙터는 백악기 시절에 살았던 유타랍토르나 데이노니쿠스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정도의 크기로 묘사된 것. 한편 쥬라기 공원은 1편에서 공룡들에게 털을 안덮혀서 그런지, 2022년 판에서도 털 덮인 공룡들이 거의 나오질 않는다.

벨로시렙터 또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깃털 공룡인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기존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기서 나온 렙터는 털이 없다.

참고로 쥬라기 공원에 나온 대다수 공룡들은 백악기 시절의 공룡들이며, 쥬라기 시절 공룡들은 거의 없고, 트라이아스기 공룡은 더더욱 없다. 최근 영화에서는 고생대 시절 포식자 디메트로돈이 나왔는데, 공룡은 아니다.

오랜만에 쥬라기 공원 공룡관련 잡썰을 풀어봤다. 무튼 영화에 나온 벨로시렙터는 유타랍토르나 데이노니쿠스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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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룡과 관련된 흥미로운 글이네요!
 

(이 글은 2년 전인 20216월에 포스팅한 글을 보다 보완한 글이다. 추가적으로 알바니아 노동당사(History of the party of Labour of Albania)를 참고했다.)

 

알바니아는 어떤 나라일까? 이 나라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아시아 뿐만 아니라, 북미권 심지어 유럽권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알바니아는 인구가 300만 명도 안 되는 나라로 면적은 28,748로 대한민국 보다도 3.5배나 작은 나라이며, 한반도보다 8배나 작은 나라다. 대략 경상도 수준의 영토가 한 나라라고 생각하면 된다. 알바니아는 중세에서 근대 시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9세기부터는 유럽에서 부흥하던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심지어 이 시기를 알바니아 역사에선 알바니아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엔베르 호자 사진, 엔베르 호자는 1945년부터 1985년까지 알바니아를 통치했던 지도자다. 서구 진영에선 독재자로 비난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알바니아를 가장 번영으로 이끈 탁월한 지도자로 평가한다.)

 

알바니아는 1912년에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알바니아는 1908년부터 독립전쟁을 치렀고, 4년간의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1914628일에 일어나는 이른바 사라예보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와 전쟁을 치렀는데, 이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1920년대 로마에서의 쿠데타로 집권한 파시즘의 창시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과거 로마제국의 영광을 구현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그 나라를 점령했고, 리비아를 식민지 지배 했으며, 1936년 파시스트 프랑코의 쿠데타로 일어난 스페인 내전에 나치 독일과 더불어 병력을 파병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394월 무솔리니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알바니아의 지도, 한국의 경상도 정도의 영토를 가진 나라 알바니아는 인구도 현재 300만 밖에 안되는 나라다. 당시의 알바니아는 인구가 200만이 좀 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는 19391월부터 알바니아 침공에 대한 계획을 지지했고, 323일부터 알바니아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193947일에 알바니아를 공격했으며, 조그 왕이 빨리 도망쳤기에 이탈리아 파시스트 침략자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고 않은 채 알바니아를 점령했다. 이탈리아에게 알바니아는 단순히 점령대상이고, 로마제국의 영토 차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알바니아 민중들에겐 과거 오스만 제국에 저항한 역사에서 경험한 감정을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됐다. 이탈리아 군대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알바니아의 조그(Zog) 왕과 그의 정부는 도망쳤고, 체터스(Chetas)라고 불리는 일부 게릴라 부대들이 이탈리아군에 맞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벌였다.

(알바니아 시내에 진입한 이탈리아군)

 

(1939년 알바니아에 진입한 이탈리아군의 경전차, L-3으로 불리는 이 경전차는 사람 한 두명 정도만 탑승할 정도로 작다.)

 

침략자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인에 대한 강제동화정책을 실행했으며, 이탈리아 지배에 대한 알바니아 노동당의 확고한 입장은 암울한 이탈리아 파시스트 지배기, 알바니아를 노예화하던 시절로 정의된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부는 국왕 빅터 이마누엘 3세 내세우고, 셰프켓 베를라시(Shefqet Vëerlaci)를 꼭두각시 정부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초기 알바니아 민중은 파시스트들이 세운 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형태로 저항하기도 했으며, 알바니아 공산주의 조직 또한 이러한 저항에 나섰다. 19391128일 알바니아 공산주의 조직은 반파시즘 성향의 대중시위를 알바니아의 몇몇 주요 도시들에서 이끌었다. 당시 시위대는 알바니아의 자유 만세!’, ‘자유 아니면 죽음을!’ 구호로 외쳤고, 알바니아 공산주의 조직은 이 시위의 격려자이며 지도자였다. 이러한 시위 조직과 활동을 통해 알바니아 공산주의 그룹들은 힘을 강화하고 알바니아의 다른 도시들에서 활동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지역주의를 종결시키기도 했다. 1940년 초에는 수도 티라나에서도 조직되었는데, 여기서 그 조직을 이끄는 인물이 바로 엔베르 호자(Enver Hoxha)였다.

(엔베르 호자와 빨치산, 2차 세계대전 당시 엔베르 호자는 알바니아에서 빨치산 투쟁을 이끌었다.)

 

부르주아 출신 집안에서 자란 호자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교육을 받은 역사학 교수였고,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했을 시점부터 반파시스트 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이었다. 유학생활을 바탕으로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러시아어도 할 줄 알았던 다재다능한 인물이기도 했다. 1939년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들에게 침략 당하자, 알바니아 공산당은 이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19406월에 들어 알바니아 공산당은 파시즘과 트로츠키즘에 맞서 싸웠다.

 

1940년 들어 이탈리아는 독일·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10월에는 그리스를 침공했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졸전을 거듭하는 군대로 유명했고, 그리스군은 도리어 이탈리아군에게 반격을 가하는데 성공했고 이탈리아군은 그리스에서 후퇴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그리스 전쟁은 알바니아인들에게 파괴와 고통을 가져왔고, 알바니아의 반파시스트 조직들은 그리스를 도왔다. 전쟁 당시 무솔리니 정부는 알바니아인들을 강제로 징집했고, 파시스트군에 배치했는데 도리어 알바니아인들이 탈영하거나 싸우기를 거부하는 사례도 많았고, 이탈리아군의 전쟁기계를 뒤에서 파괴하는 공작까지 벌이기도 했다. 또한 호자가 이끌던 공산주의 조직은 1940년에 또 다른 시위를 조직하여 전개하기도 했으며, 여기에는 그리스의 쇼비니즘적인 요소를 반대하는 구호도 포함됐다.

(알바니아 빨치산들의 무장투쟁을 그린 상상화, 알바니아의 빨치산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과 히틀러의 독일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탈리아-그리스 전쟁으올 알바니아는 양측의 전쟁터가 되었고, 적잖은 인명피해와 파괴가 발생했다. 물론 이탈리아는 전쟁을 수행하는 도중 식민지 지배국의 착취를 강화했고, 식민지 대중들까지 탄압하고 착취하고 또 약탈했다. 이렇게 되면서 이탈리아 지배에 대한 알바니아인들의 저항의식은 더더욱 강화됐고,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이 보다 지지를 얻게 된다. 194111월 궁극적으로 수도 티라나에서 알바니아 공산당이 창당되었으며, 여기서 엔베르 호자를 포함한 몇몇 인사들이 지도부로 선출됐다. 그리고 공산당은 알바니아 인민해방군(armed forces of the National Liberation Army: NLA)이 창설되어 제대로 보다 적극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알바니아 공산당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디미트로프 테제(인민전선) 전술에 따라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보다 광범위하게 구축하고자 했고, 히틀러의 소련 침공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음에 따라, 소련이 영국과 미국하고 손을 잡는 것을 전략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탈리아군에 맞선 파르티잔 투쟁을 벌였던 호자는 1942년 말 왕당파 그룹이었던 게헤그(Gheg)의 게릴라 부대를 설득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리스 공산당(KKE)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Tito)하고도 협력하는 관계였었다. 당시 영국의 SOE는 이탈리아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호자와 협력관계를 형성한 게헤그의 부대와 호자의 파르티잔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그들에게 무기와 장비를 공급해주고자 했고, 2개의 타격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었다.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 시절에 있던 빨치산 관련 포스터)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 시절 만들어진 빨치산 관련 포스터,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 탄생 40주년을 맞아 만든 포스터로 보인다.)

 

앞서 설명한 이탈리아-그리스 전쟁으로 알바니아는 전쟁터로 변모했는데, 이 과정에서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테러와 파괴가 뒤따랐다. 1941년에 이르러 알바니아에 주둔한 이탈리아 파시스트 군대의 규모는 10만 명으로 증가했고, 이탈리아군은 반파시즘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극심한 테러와 학살도 자행했다. 물론 이러한 행위로 이탈리아군이 알바니아인들로부터 얻는 것은 반감 뿐이었다. 아래 엔베르 호자의 연설문 중 일부를 보자.

 

알바니아 산하에서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투쟁의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고, 르네상스 부흥기 시절 우리 알바니아의 위대한 애국자들의 노고가 재현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어깨에 총을 멘 소년과 노인들이고, 인민들의 병사들이며 이 저항군을 이루어 함께 뭉치고 있으며, 자유라는 이상에 영감을 받아 증오의 피가 들끓은 피에 굶주린 파시스트 침략자를 공격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농촌 곳곳에서 대문이 활짝 열렸고, 알바니아의 마을 곳곳이 자신들의 아들과 딸로 이루어진 병사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습니다.”

 

1941년부터 1942년 사이 엔베르 호자가 지도자로 있는 빨치산 부대(알바니아 인민해방군)는 알바니아 대부분의 도시 및 마을에서 공산당 위원회의 지도아래 군사작전을 전개할 준비를 했다. 첫 게릴라 부대는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 청년동맹 그리고 지지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처음에는 10명 정도 밖에 안 되었으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규모를 확장했다. 1942년 초만 하더라도 빨치산 부대는 수도 티라나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적잖은 수의 이탈리아 파시스트 군대의 장교와 군 고위간부를 살해했으며, 알바니아 파시스트 스파이와 민족반역자들도 일부 처단했다. 게릴라들이 이탈리아군을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반파시즘 시위가 지역 당의 지도를 받아 일어났고, 이탈리아 파시스트 지배는 점차 약화되어 갔다. 호자의 게릴라 조직은 1942년 말에 체타에 있는 곳만 하더라도 2,000명의 빨치산 병력을 모았다. 알바니아 전역을 통틀어 게릴라의 숫자는 수천 명으로 증가했다.

(알바니아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며 양민을 학살한 이탈리아군,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 또한 일본군의 삼광작전과 같은 전쟁범죄를 알바니아에서 저질렀다.)

 

19429월부터 12월까지 이탈리아군은 남부와 중부 그리고 북부 알바니아를 아우르는 27개 지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군은 농민들이 사는 수백채의 집을 불태우고, 적잖은 수의 여성·노인·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러나 그들은 빨치산을 토벌하는 데 궁극적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1943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이후 영미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왕에 의해 축출되어 감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졌다.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이탈리아군 중 대략 15,000명이 호자가 이끄는 알바니아 인민해방군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대략 1,500명의 이탈리아군이 알바니아 빨치산 부대에 자원입대했다. 알바니아는 이탈리아가 점령한 지역에서 해방되는 것 같았으나, 또 다른 적이 알바니아에 입성했다. 그것은 바로 히틀러가 보낸 나치독일의 군대였다.

(알바니아에 배치되어 보초를 서고 있는 독일군)

 

독일군이 입성하면서 파르티잔 투쟁은 고난을 겪었다. 독일군은 대략 2~3개 사단을 동원하여 수많은 게릴라 부대들은 몰아냈는데, 작전 개시 2주도 안되어 수세에 몰렸다. 독일군은 알바니아 점령에 총 4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독일군이 알바니아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자, 다시 한 번 알바니아 전역이 전쟁터가 됐다.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로 알바니아인민해방군은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나치독일은 알바니아를 점령하는 데 있어서 대략 7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은 알바니아를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빨치산에 대한 강력한 토벌과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물론 엔베르 호자가 이끄는 알바니아 빨치산 또한 나치 독일에 맞서 강력한 공세를 가했다. 19431018일 알바니아 인민해방군의 포가 나치 독일 부역집단의 건물과 독일군 기지에 포격을 가했으며, 알바니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조직들은 수도 티라나에서 반나치 선전물을 뿌렸다. 나치 독일 또한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학살과 방화 그리고 파괴를 알바니아에서 자행했다. 더 나아가 나치는 알바니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인종정책에 따라 학살하고자 했으며, 적잖은 알바니아인이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에서 죽거나 수감됐다.

(알바니아에 배치한 독일군 부대, 여러 대의 탱크도 있는 것으로 보아 전차 부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군은 군사작전 기간에 마을의 모든 것을 약탈했고, 모든 것을 폐허 및 잔해로 만들어 벌였다. 수천 명의 알바니아 민간인이 나치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학살당한 사람들 대다수는 여성·노인·어린이었으며, 이들은 총살당했고, 도살당했으며, 산채로 불태워졌고, 구금되거나 절멸수용소에 보내지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알바니아 전역의 도살장과도 같은 곳으로 변모한 것이다. 심지어 나치 독일은 학살한 민간인의 시신을 길거리에 걸어놔 알바니아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자 했다. 만약 나치 독일군이 게릴라를 찾아서 붙잡으면, 이들을 죽인 뒤에 민간인들에게 그 시신을 전시하여 보여줬다.

 

그러나 이것이 알바니아 공산당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약화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바니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군대의 병력은 1943년 말에 대략 2만 명을 넘겼으며, 그 규모에 있어서도 결코 작지 않았다. 이러한 병력의 규모는 알바니아의 반파시즘 투쟁이 굉장히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겨울부터 1944년 초까지 최소 1,000명 이상의 병력이 나치 독일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그럼에도 알바니아 공산당의 군대는 기하급수적으로 조직이 강해졌고, 군대 병력도 보다 늘어났다. 19445월이 되자 알바니아 공산당이 지휘하는 군대의 병력은 35,000명까지 증가했다. 거기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이 보다 광범위한 반격을 게시하자, 독일은 점차 패색이 짙어졌다.

 

1944년 봄 영국의 SOE는 조그주의자(왕당파) 세력인 쿠피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레지스탕스 봉기를 일으키고자 했지만, 당시 이 그룹은 친나치파 문제와 더불어 조직 내의 분열에 휩싸여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호자와 그가 이끄는 빨치산들은 세력을 확장했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엔베르 호자가 이끄는 알바니아 공산당의 병력은 3만 명을 넘어섰다. 이에 따라 연합국은 이들에게 군수품을 포함한 물자를 공중으로 지원했으며, 호자의 빨치산 부대는 이런 지원을 바탕으로 지역을 확장하고, 독일군 호송대와 나아가 수비대를 상대로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시가행진을 하는 알바니아 인민해방군)

 

(티라나라고 써진 표지에 서서 사진을 찍은 알바니아 빨치산)

 

그해 6월 독일군은 제1산악사단을 창설하여 북부의 연합군 교두보를 폐쇄시키는 데 성공하여 빨치산들을 산속으로 쫓아내 버렸지만, 독일 제1산악사단이 유고슬라비아에 배치되자 호자의 빨치산들은 다시 독일군에게 게릴라전을 감행했다. 이후 독일군은 불리해지는 전황에 따라 알바니아에서도 후퇴하게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5개월 뒤인 194411월에 호자가 이끄는 빨치산들은 궁극적으로 알바니아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에 이른다. 이로써 알바니아가 해방된 것이다. 빨치산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5천 명에서 6천 명 이상의 독일군이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수도 티라나에 입성한 알바니아 빨치산과 이를 지휘한 엔베르 호자)

 

(빨치산 지도자로서 연설을 하고 있는 엔베르 호자)

 

(엔베르 호자 관련 포스터, 알바니아가 다민족 국가고 이들을 존중하는 것을 강조한 포스터로 보인다.)

 

19441117일 수도 티라나에 알바니아 공산당의 깃발이 게양됐다. 알바니아 공산당이 전개한 혁명전쟁으로 부역자 출신의 지주들이 숙청됐고, 부르주아지 국가가 철저히 파괴됐다. 또한 전쟁이 끝날 무렵 게릴라 부대는 정규군화 됐고, 대략 7만 명 이상의 병력이 알바니아 공산당의 지휘를 받았다. 이 병력들 중 대략 9~10%는 여성이었고, 80%는 청년들이었으며, 90% 이상은 알바니아의 농민들이었다. 즉 이들이 알바니아와 코소보에서 침략자 나치독일군을 무찌르는데 가장 경절적인 역할을 했으며, 궁극적으로 수도 티라나를 해방했다.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의 깃발)

 

(알바니아의 빨치산 투쟁을 다룬 영문 서적)

 

그로부터 1년 뒤인 1945년 알바니아는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스탈린의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인 총선거를 실시했다. 1945년 알바니아 총선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민주전선으로 출마해 전 의석을 획득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온 선거 감시단은 이것이 공정한 선거였음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물론 이 미국과 영국에서 온 선거 감시단이 선호한 알바니아 후보는 파시스트 협력자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후보에게 표를 던지려는 알바니아인은 아무도 없었다. 선거 감시단의 귀에는 젊은 빨치산의 목소리로 복수를 요구하는 젊은이여, 복수해다오라는 빨치산 노래가 들려왔다. 나치에 조력했던 알바니아인과의 계급 협조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1946년 엔베르 호자를 지도자로 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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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알바니아 혁명사네요.
 

(케냐의 깃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냉전이 시작되면서 또 다른 운동이 발발했다. 그 운동은 주로 19세기 식민지 지배를 받던 나라들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을 통틀어 제3세계 운동이라고도 표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제3세계 운동에 직면했는데, 영국의 경우에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고, 프랑스의 경우에는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강력한 저항이 발생했다. 특히나 인도차이나의 경우 1946년에 독립전쟁이 발발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가 종결됐고, 알제리에서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독립전쟁이 전개되어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가 종결됐다.


당시 영국도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했다. 인도에서는 간디와 네루가 이끄는 민족운동이, 버마에서는 아웅산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벌어졌으며, 말레이시아에서는 좌파 게릴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했다. 이러한 반영투쟁은 아프리카에서도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또한 영국에 맞서 반영투쟁을 전개했으며, 이집트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국가로 등극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른바 영국령 케냐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는데, 오늘은 케냐의 마우마우단 봉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아프리카 동쪽 중앙 끝자락에 있는 나라인 케냐는 수십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반투어를 사용하는 키쿠유족과 타베타족, 키쿠유족 그리고 마사이족 등 무수히 많은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현재 케냐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단위로 전쟁 및 분쟁을 겪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케냐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됐다. 1884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회담으로 케냐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1890년에는 영국의 동아프리카 회사가 내륙진출을 개시했다. 세계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영국의 이러한 식민지 지배는 20세기 초중반까지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에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당시 아프리카인들은 영국 및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강제로 징집당했다. 징집당한 아프리카인들은 백인 지배자들에 의해 차별과 멸시에 시달렸었다. 물론 영국의 지배를 받는 케냐인들은 당연히 악랄한 착취와 폭압에 직면했었다. 케냐를 지배하던 영국의 입장은 아래의 인용문으로 요약이 된다. 아래의 인용문은 케냐에 파견된 청년장교 마이너차겐 대위가 델라메어 경을 만나서 직접 본 것을 글로 쓴 것이다.


“그는 동아프리카의 장래에 관해, “나는 당신들 모두에게 이 나라가 백인의 나라임을 입증해 보이겠소.”라고 말했다. 나는 공손하게 “이곳 흑인들의 나라입니다. 어떻게 흑인 위에 백인이 군림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했다. 델라메어는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가신 듯 “흑인들은 협력을 통해 혜택을 볼 겁니다.”라고 내뱉었다.”


이 인용문에서 표현된 것과 같이 당시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사람이 아니었다. 1900년대 초 케냐를 지배하던 영국인들은 자기 것도 아닌 땅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아프리카인들은 노예처럼 부려먹고 착취했다. 그리고 이러한 폭압적인 통치는 케냐인들의 경제적인 반란과 봉기를 불러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케냐인들은 정치적 발언을 얻고자 애썼지만, 아프리카인들의 지휘는 전혀 상승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영국인들은 케냐인들에게 기독교적 교리를 강조했지만, 이는 당시 케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점에서 민낯이 드러난다. 이에 따라 1921년 케냐에서는 청년 키구유회(Young Kikuyu Association)라는 조직에 의해 정치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이 단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도둑 맞은 땅”에 관한 불만을 토로했다. 청년 키구유회는 강제적 흑인 노동자 등록제도, 저임금 고착취, 흑인의 커피 재배 금지, 식민지 의회에서의 아프리카인 차별 등을 문제 삼았다.

(조모 케냐타, 케냐의 독립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현재 케냐에서 국부로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영국령 케냐에서는 조모 케냐타라는 독립운동가가 존재했다. 그는 1893년 나이로비 외곽의 어떤 부족 보류지에서 태어났으며, 미션스쿨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나이로비에서 사무원, 신문 편집인 등의 경력을 쌓은 후 1925년에 청년 키구유회를 계승한 키구유 중앙회(KCA)에 가입했으며, 1928년에는 사무총장이 됐다. 1년 후 케냐타는 영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스탈린 집권 하의 소련을 여행했다. 그는 영국으로 가서 런던 경제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뒤에 학위를 받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 케냐로 귀국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영국의 케냐 식민지배는 지속됐다. 키구유 중앙회는 이미 영국 식민지 지배 하에서 불법화된 상태였으며, 케냐타는 독립운동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케냐 아프리카 동맹(Kenya African Union)이라는 정당을 창설하여 1947년에 당수가 됐다. 이에 따라 이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마우마우단 운동(Mau Mau Movement)도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마우마우단은 영국의 지배하에서 여러 활동 및 무장 테러활동 및 봉기활동도 전개했는데, 당연히 영국 당국은 이에 대해 테러라고 비난하기 바빴다. 1950년 들어서 영국 정부는 마우마우단을 사악한 테러 단체로 규정하며 마우마우단 인사들을 기소하기도 했었다. 케냐의 마우마우단은 1950년에 이르러 지하 대중운동 조직으로 변모했으며, 마우마우단 본부는 각 지방에 조직요원을 파견하여 신규단원을 모집했고, 세포조직을 만들었다. 마우마우단이 케냐의 아프리카인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당시 토지문제가 있었다. 아래는 나이로비의 입법회의 의원 마투가 1951년 어떤 회의에서 한 말이다.

(마우마우단의 게릴라 무장 병력)


“토지는 아프리카인에게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인은 장사를 해서 살 수도 없고 임금을 받아 살 수도 없다. 우리는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둑맞은 땅을 되찾아야 한다.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땅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1952년에 들어서 마우마우단은 보다 무장력을 갖춘 조직이 됐다. 당시 기준으로 최소 400~800정의 근대식 총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해 초부터는 아프리카인 공무원들의 주택과 일부 백인 농민들의 밭을 불태우는 행위도 착수했다. 백인 지배자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케냐에서 마우마우단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영국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영국군 병력을 이집트로부터 공수했으며, 순양함 1척까지 케냐 몸바사 항에 진입시켰다. 그리고 마우마우단의 지도자 케냐타와 그의 추종자 182명을 체포했다. 당시 영국의 베어링 총독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는데, 이 비상사태 선포문에는 영국의 지배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반증한다.


“평화와 질서가 유지된다면, 케냐의 앞에는 모든 종족의 생활수준이 향상될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다. 지금껏 이 나라의 경제발전, 특히 가난한 주민들을 돕기 위한 계획이 작성되고 있었다. 예컨대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주택건설 아프리카인의 교육 확대, 그리고 아프리카인 공무원의 처우개선 등이 촉진될 밝은 희망이 있었다. 만일 무질서한 상태가 계속된다면, 이 모든 것이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우마우단은 여전히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비상사태 선포 2주 후에 마우마우단은 백인농장주 1명과 아프리카인 하인 2명을 살해했다. 그리고 11월 말에는 백인 해군 퇴역장교 1명을 죽였으며, 그의 부인에게 중상을 입혔다. 결국 지도부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영국 식민지 당국은 봉기를 분쇄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마우마우단은 세력을 확장하여 영국의 공군력까지 동원되기에 이르렀다. 마우마우단은 점차 게릴라조직으로 변모하여 1954년에는 키쿠유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53년 말까지 영국이 지원하는 병력 규모가 1만 명을 넘어섰고, 경찰력도 7,000명에서 1만 5,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자경단 수가 2만에 달했다. 1953년 말까지 영국 정부는 마우마우단 단원 3,000명 이상을 사살하고 1,000명 이상을 생포했다고 발표했지만, 마우마우단의 세력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마우마우단원으로 의심되는 케냐인을 체포 및 수색하는 영국군)


당시 영국은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일부 부족들을 내세웠고, 이들을 토대로 경찰력을 구성하기도 했다. 1955년 1월 영국측은 대략 1개 사단을 동원하여 마우마우단을 소탕하기 위한 해머작전을 게시했다. 대략 2개월 동안 400명 이상의 마우마우단을 살해 및 생포했다. 1955년 말경부터는 이른바 특수부대를 보내 마우마우단 지역 게릴라 2,000명을 추적하였으며, 이 추적 작전은 당시 마우마우단 게릴라를 지휘한 키마티가 생포됨으로써 1956년 10월에 종결됐다. 키마티는 나중에 처형됐다. 키마티가 생포되며 마우마우단의 저항은 사실상 종결됐다. 전쟁 기간 영국과 친영 정부군 측은 마우마우단 1만 1,000명 이상을 살해하고, 2만 5,000을 생포했다. 당시 영국 측 피해는 대다수가 현지 케냐인들이었지만, 수백 명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의 학살은 극심했다. 당시 영국은 군대를 투입해 마우마우단 관련자는 물론 그 주축을 이루는 키쿠유족을 학살했다. 케냐 국가인권위원회의 자료를 보면, 영국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무력 개입한 1952년 이후 10년 동안 9만여 명의 케냐인이 영국 군대에 의해 숨졌고, 16만여 명이 수용시설에 감금됐다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신사의 나라 영국이 얼마나 끔찍한 학살을 벌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전쟁 기간 동안 마우마우단에 의해 살해된 영국 협력자들은 1,800명이 죽고, 백인 정착민 32명이 사망했다. 당시 영국은 무시무시한 강제 수용소를 운영했다. 남색, 거세, 전기충격, 물고문, 심리적 고통 가하기, 개를 이용한 고문 등이 영국 식민지 지배 하의 수용소에서 행해졌다. 따라서 1950년대 영국의 케냐 지배는 여전히 폭력과 인권유린이 판을 쳤던 것이다.

(마우마우단 운동을 기념하는 기념물, 현재 케냐에 있다.)


비록 케냐타와 그의 참모들은 구금되었고, 이후 석방되어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지만, 1961년에 이르러 정부는 케냐타를 완전히 복권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3년 케냐는 공화국이 됐고, 케냐타가 케냐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다수의 케냐인들은 케냐타가 주도한 마우마우단 운동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마우마우단 운동이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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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사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하나도 안 나오죠.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
이해영 지음 / 사계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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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페이스북 친구인 이해영 교수의 신간을 완독했다. 내가 이해영 교수를 처음 본 것은 남북역사문화협회에서의 강연에서였다. 당시 이해영 교수의 강연은 그 시점까지 내가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내용이었다. 사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에 의한 여론조작이나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즘 그리고 편향된 서구의 반러주의적 분노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시 언론들(현재도 마찬가지다.)은 그저 러시아의 침공은 부당하고, 우크라이나는 잘 싸우고 있으며, 러시아군은 오합지졸이다.”는 식의 보도를 앵무새마냥 반복했기에, 나 또한 러시아군이 초기 침공에서 실패하여 잘못하면 밀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지 못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해영 교수의 강연은 그러한 언론의 여론조작과 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을 바로잡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 이후 나는 이해영 교수와 페이스북을 통해 페친이 되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한 자료들을 이해영 교수의 페이스북 게시물들을 통해 얻었다. 현재 내가 얻고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정보망은 이해영 교수의 페이스북과 한설 장군의 페이스북, 유튜브에 있는 박상후의 문명개화와 벨라루스 교민이 운영하는 러시아 학당 그리고 재미교포 Scott LeeSCOTT 인간과 자유 등이 있다.

 

비록 유튜브나 페이스북 관련 SNS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 언론들의 보도들이 항상 군사적 피해는 러시아’, ‘민간인의 피해는 우크라이나라는 노골적으로 편향되다 보니 러우전쟁 관련 국내 보도들을 전혀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료를 얻게 됐다. 본질적으로 유튜브의 영상이나 페이스북의 글들은 사실 전문성을 담보하지는 못하기에 한계가 있지만, 언론이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그와 반대되는 입장을 얘기하는 자료를 보는 것이 최선이다. 따라서 나는 아이러니 하게도 러우전쟁 관련 정보를 페이스북 페이지와 유튜브 영상을 통해 얻게 됐다.

 

올해 2월 페친인 이해영 교수가 책을 출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기뻤다. 전쟁 초기부터 최근까지 국내 출판사들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젤렌스키를 미화하는 서적들을 출판했었고, 우크라이나를 절대적으로 피해자화했다. 2021년부터 영화 감독 올리버 스톤이 만든 다큐멘터리인 ‘Ukraine On Fire’를 본 나는 우크라이나를 미화 및 옹호하는 관점이 지극히 서구적 편향임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러우전쟁 과정에서 출판된 책들이 그 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음을 당연히 예감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젤렌스키의 연설을 모아서 출판한 어떤 책을 보며, 경악과 충격을 감추질 못했었다.

 

그런 과정에서 이해영 교수의 책이 출판됐다. 워낙 바쁘게 살다보니 책을 읽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러우전쟁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해영 교수가 이 책에서 얘기한 것들 대다수가 내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 예를 들어 이해영 교수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미국 바이든 정부가 게시한 대러 경제제재에 대해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현재 국내 언론(좌우 할 것 없이)들은 서구 사회가 진행하는 대러시아 경제제재가 효과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대러제재는 전 세계 국가 13%만 참여하고 있을 뿐, 87%는 거부했다. 따라서 대러제재만 놓고 보자면, 현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오히려 대러제재를 통해 고립을 자초했다.

 

현재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는 소위 제3세계라는 경제적 출구가 있다. 대러제재에 비판적인 국가들 중에선 중국과 인도가 있다. 전 세계 인구가 80억이라고 할 때, 중국과 인도의 전 세계적 인구 비율은 20%를 넘는다. 전 세계 인구 비율 20%가 넘는 중국과 인도는 이 대러제재에 참가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러시아를 돕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거기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미국의 대러제재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미국과 서구 중심의 대러제재는 결과적으로 미국과 서구 유럽 중심의 오만한 행위이자, 경제적으로 아무런 효과가 없는 자살행위다. , 한국의 윤석열 정부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망각한 채, 이런 자살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이해영 교수가 쓴 책에서 가장 신선하게 다가온 내용은 바로 초기 러시아군의 기만전술이다.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20222월에 시작된 러시아의 전면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은 사실 푸틴 정부의 기만전술이었다. 푸틴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까지 단번에 진격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크라이나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러시아 침략군이 격퇴 당했다는 서구 및 국내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나는 러시아군이 진행한 전격전(BlitzKrieg)이 실패한 줄 알았고, 우크라이나군이 제법 반격을 잘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해영 교수가 책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서방 언론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단기간에 점령해서 전쟁을 끝내는 것이 목표라고 선동했다. 사실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었지만, 가설을 사실로 둔갑시킨 것이다. 심지어 미국 CIA의 국장은 전쟁 초기 키예프 2일 점령설을 만들어 냈으며,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군의 전과를 미화 및 과장했다. 그러나 그 당시부터 현재까지의 러시아의 목적은 특수군사작전에 따른 돈바스 지역이었다.

 

따라서 개전 초기 푸틴이 키예프를 포함한 서우크라이나쪽으로 진격한 것은 과거부터 러시아가 목표한 돈바스로의 진격을 강화하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서우크라이나로 진격했던 러시아군은 계획적으로 철수를 마무리 했으며, 동부 쪽으로의 진격을 강화했다. , 푸틴 정부의 기만전술에 따른 서부에서의 철군을 가지고, 서방의 언론들은 온갖 과장되고 편파적인 오보와 가짜뉴스들을 끊임 없이 재생산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러한 위선적 행위를 멈추질 않고 있다.

 

거기다 이번 전쟁이 시작되면서, 국내 언론들은 아주 중요한 맥락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1주일 전인 216일 우크라이나군은 의도적으로 돈바스에 대한 대규모 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 보다 일찍 우크라이나 주력군이 친러 반군이 관할하는 지역의 경계선에 집결해 있었으며, 우크라이나와 NATO는 러시아로 하여금 이러한 전쟁을 자극하는 행위들을 끊임없이 해왔다. , 이러한 큰 그림에서 보았을 때, 서구가 이 전쟁을 조장한 다음 우크라이나에서의 유혈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즘에 대해서도 얘기하겠다. 책에서도 잘 설명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즘은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제2차 세계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스테판 반데라를 포함한 나치 협력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러시아인, 유대인, 폴란드인 등 나치가 열등인종으로 지목한 사람들을 무차별 인종청소 및 학살을 자행했다. 1943년 우크라이나 나치들이 저지른 이른바 볼린 학살로 20만 명의 폴란드인(특히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을 아주 잔인하게 학살했다. 당시 학살을 주도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민병대(UPA)의 우두머리가 바로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였으며, 반데라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민족 영웅 혹은 국민 영웅으로 미화되고 있다. 이해영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943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나치독일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이용했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나치를 등에 업고 볼린에서 약 20만 명의 폴란드인-특히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20만 명은 유대인과 러시아인을 제외한 숫자이다. 학살을 주도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민병대(UPA)의 우두머리가 스테판 반데라다. 아조프연대가 추앙하는, 그래서 깃발에 새기고 다니는 자이다. 이 자는 반러 정권이 집권한 뒤 국가 영웅으로 추서되었다. 학살 주범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서우크라이나에 자리 잡았다. 이들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의 원조이다. 동우크라이나 돈바스 주민과 서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반데라주의자(Banderite)의 반목의 기원에는 1943년 대학살이 있다. 우크라이나 반데라주의자를 그저 민족주의자로 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전에 젤렌스키는 한국 국회 연설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를 박해한다고 말했다. 젤렌스키는 우리 국민을 우롱했다. 러시아군이 목표한 '탈나치화' 대상은 네오나치 반데라주의자이지 단순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네오나치들은 우크라이나 국내 정치에서 일종의 딥스테이트(Deep State)와 비슷한 인종 파시스트(ethni fascist)이다. 그리고 나치즘과 나아가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즘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바로 인종이다.”

 

출처: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 질서 p.106~108

 

2013년 유로마이단 운동 당시 미국의 네오콘들과 민주당 매파들은 당시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 세력들을 등에 업고, 이 시위를 조장했다.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당시 유로마이단을 이끈 스보보다당은 네오나치 조직이었고, 이들은 우크라이나 총선에서 최소 10%를 득표한 세력이었다. 유로마이단 이후 전개된 돈바스 내전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군대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명백히 근거가 있다. 2022년 러우전쟁 초기 마리우폴 포위전 이후, 아조프 연대 본부에서는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비롯한 나치 상징물이 다수 나왔으며, 그 가운데 미국 육규본부가 2008년에 편찬한 야전교범과 미군만 사용하는 저격용 탄환도 발견됐다. 이를 통해, 미국의 네오콘 세력과 민주당 매파 세력들이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 세력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국내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으며, 현재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현재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한계레와 경향신문 같은 좌우를 막론한 언론들이, 서구 언론을 말 그대로 복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한 국내 언론들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내용들뿐이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이번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본질을 아주 명확히 알려주는 책이 나왔다. 나는 그 책을 이해영 교수가 쓴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질서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대다수 국민들이 모르고 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사실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명확히 정리한 책이다.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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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우익 일색이죠. (즉 다시 말해 극우적이고 우편향된 양당제로, 공화-민주 양당 모두 친기업정책과 군사력강화에 매몰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세트] 한국전쟁의 기원 1 + 2-1 + 2-2 - 전3권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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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왔다. 너무나도 기대가 되는 책이다. 특히나 사학전공자다 보니 너무 기쁘다. 원서는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대사 공부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책이다. 전권을 다 사서 꼭 완독할 생각이다. 많은이들이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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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백제인 2023-04-26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월서각에서 86년에 출판한 책이었는데 오타가 많아 짜증나긴 했어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