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프 브로즈 티토, 그는 현재는 해체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유럽의 대다수 국가를 침략하여 점령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은 전쟁 초기 유럽 정복에 착수했다폴란드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나치독일은 1940년 덴마크와 노르웨이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까지 점령했고덩케르크에서 철수한 영국을 상대로 대규모 항공기 공습을 개시했다그 이후 1941년 나치 독일은 알바니아와 루마니아헝가리불가리아그리스를 침공하여 점령했고그해 4월 6개의 연방이 모인 국가 유고슬라비아(Yugoslavia)를 점령했다유고슬라비아는 아돌프 히틀러의 군대에 굴복한 13번째 국가가 되었다.

(나치의 유고슬라비아 침략, 1941년 4월 나치는 유고슬라비아를 침략했다. 그 결과 유고슬라비아는 나치독일에게 항복한 13번째 나라가 되었다.)


(당시 루프트바페의 폭격을 받은 베오그라드)

 

1941년 4월 6일 루프트바페(독일공군)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수도 베오그라드를 공습했다. ‘보복작전이라고 명명한 공습으로 최소 5,000명에서 17,000명의 사상자가 속출했고나치의 침략 11일 만에 유고슬라비아는 독일군헝가리군불가리아군 그리고 이탈리아군의 수중에 떨어졌다이러자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한 인물은 파시스트의 침략에 맞서 군대를 결성하고 게릴라전을 전개했다그가 바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였다.

(나치독일군에게 항복하는 유고슬라비아 정규군)

 

티토는 1941년 6월 이른바 파르티잔 (Partisan) 즉 빨치산이라 알려진 반나치 게릴라 전투 집단을 결성했다그는 빨치산 부대를 직접 지휘하고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티토가 결성한 빨치산은 초기엔 도끼몽둥이엽총 정도로 무장한 부대로 무장력이 형편없었다그러나 파르티잔 투쟁을 통해 세력을 넓혔고전쟁이 끝날 무렵엔 사실상 정규군 수준으로 성장했다또한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은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이 빨치산은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민족·종교·언어를 초월하여 연합한 집단이었고다수의 여성대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이들은 단순히 사무실과 병원에서 일하는 것만이 아니라 남성대원들과 똑같이 무기 사용법을 훈련받고 똑같이 전투에 참여했다이런 점에서 티토의 파르티잔은 민족과 언어종교 그리고 성별을 초월했다.

(여성 파르티잔 대원,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은 성별과 종교 그리고 인종을 초월했다.)

 

빨치산 설립 초기인 1941년 6월 티토는 무전기를 사용하여 모스크바와 연락할 수 있었지만당시 소련 또한 독일의 침공을 받고 있었기에 티토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결국 티토의 빨치산은 소련의 지원 없이 전쟁 초기 외로운 투쟁을 이어나가야 했다. 1941년 여름이 끝날 무렵 티토는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떠나 빨치산 부대를 찾아가 그들이 해방시킨 산악 지방의 소도시 스톨리체에 본부를 세웠다이 시기 그가 이끄는 빨치산 집단은 그 밖에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 및 몬테네그로에서 나치에 맞서 투쟁을 벌였는데, 1941년 10월 빨치산 여단이 베오그라드 근처에 있는 크라구예바츠 근교의 독일군 탄약창고를 기습하여 26명의 독일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체트니크군, 나치의 침공 이후 이에 저항하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그게 바로 체트니크군이다. 그러나 체트니크군은 친서방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고, 빨치산과의 협력을 거부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나치나 파시스트 조직인 우스타샤와 협력하여 빨치산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자 독일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2,600여 명의 민간인을 기관총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나치 치하 초기 유고슬라비아에선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체트니크라는 왕당파측 저항집단이 있었는데이들은 이 사건 이후 티토의 빨치산과 협력하는 것을 꺼렸다당시 영국과 미국은 언론서 체트니크군의 활약만 다뤘는데이들이 동조하던 체트니크는 11월 1일 독일군을 도와 빨치산을 소탕하는 작전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된다이렇게 하여 티토는 독일군과 세르비아군체트니크군까지 맞서 싸우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탈리아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작전을 펼쳤다. 다른 전선에서도 그랬듯이 이탈리아군은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무능했다.)

 

1942년 1월 독일군은 티토 빨치산에 대한 제1차 공세를 전개할 준비를 완료했다이들은 우스타샤군의 도움을 받아 빨치산을 남쪽의 포차로 내모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포차는 이탈리아측이 점령하고 있었다물론 티토는 초기에 이탈리아측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이탈리아측은 폭격기의 지원을 받는 기계화 부대를 동원하고이쪽 지역에서 몬테네그로인들이 총구를 빨치산쪽으로 돌리면서 퇴색에 직면했다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몸소 몬테네그로로 간 그는 빨치산을 지휘했고겨울이 끝나갈 무렵 파시스트들로부터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재탈환하기에 이른다당시 티토는 스탈린에게 더 많은 물질적 원조를 호소했지만정신적인 지원은 있었지만 물질적인 지원은 없었다.

(빨치산 부대를 사열하는 지도자 티토)

 

이에 따라 티토의 부대는 1942년 5월 치열한 전투 끝에 한 차례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보스니아 경계로 후퇴했다이 과정에서 티토의 군대는 또 다른 시련에 직면하는데 바로 굶주림이었다따라서 티토는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고서부 보스니아의 다른 빨치산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320km에 걸친 4개월의 대장정을 실행했고성공적으로 완료했다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패배한 적군들로부터 필수식량과 탄약을 노획했다.

(1943년 당시 지휘본부에서 찍은 티토의 사진)

 

이러한 티토의 활약으로 빨치산의 영토는 넓어졌고크로아티아 주 경계 지역까지 장악하게 되었다전황이 티토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이다이때도 티토는 스탈린으로부터 지원을 받고자 했지만안타깝게도 없었다이 과정에서 티토는 1942년 11월 유고슬라비아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빨치산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한편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유고에서의 빨치산을 소탕해야 한다 생각했다.

(1944년 동료들과 함께 있는 티토)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에는 독일군 10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이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연합군이 유고슬라비아에 상륙하는 것과 상륙한 연합군이 티토의 빨치산과 협력하는 일이었다만약에 연합군이 유고슬라비아에 상륙하여 게릴라군과 손을 잡게 된다면 히틀러로선 굉장히 큰 골치였다따라서 1943년 1월에 나치는 이른바 백색작전(Operation Weiss)’을 개시했다백색작전은 티토의 빨치산이 4차 공세라 불렸던 작전으로 독일군 2개 사단이탈리아군 4개 사단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파시스트 세력인 우스타샤군 2개 사단이 동원되었다나치의 백색작전 당시 티토는 네레트바 강을 건너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체트니크군을 대파하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백색작전 당시 동원된 추축국의 탱크)

 

1943년 3월 빨치산 공병대가 네레트바 강에 걸쳐 있는 여러 개의 교량을 폭파하고티토가 이끄는 빨치산 제1, 그리고 7사단이 이 작전에 동원되었다이들은 이탈리아군으로부터 탈취한 15대의 전차를 앞세워 20km에 걸쳐 전선에 포진하고 있는 독일군을 공격하기도 했다그러나 독일군은 이에 맞서 흑색 작전이라는 빨치산 토벌 작전을 전개해 2만 명의 빨치산에 대항하여 독일·이탈리아·불가리아군 및 크로아티아 괴뢰 정부군으로 구성된 10만 병력을 동원했다여기서 독일군은 잔인무도한 작전과 학살을 벌였고티토의 빨치산은 다시 한 번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티토 또한 여기서 독일군에 체포되거나 사살될 수 있었지만다행히도 이들은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고보스니아로 들어가 독일군의 추격을 따돌렸다이후 티토는 전술을 바꾸어 빨치산 부대를 작은 규모의 집단으로 세분해서 소규모 지역에 국한하여 작전을 펴게 했으며독일군에게 빨치산을 일거에 전멸시킬 기회를 다시는 더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물론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의 대부분 지역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지만티토의 생존만으로도 큰 승리였고이런 사실을 알게 된 미국과 영국은 체트니크의 미하일로비치가 아니라 티토를 유고슬라비아의 항독 지도자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 초중기 티토의 빨치산은 서방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정보가 들어오더라도 런던에 망명중인 페테르 국왕 정부의 검열을 거치면서 들어왔다그러나 추축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의 사정은 달랐다이들이 나누는 메시지에는 티토의 언급이 많았다이걸 해독한 영국측은 독일군의 제5차 공격이 진행되던 1943년 5월 네 명의 영국군 장교들을 몬테네그로에 잠입시켜티토의 빨치산과 접촉했다이후 영국의 수상 처칠이 여기에 개입했고육군 준장 피츠로이 매클린을 유고슬라비아로 보낸다이렇게 되면서 영국의 처칠은 티토에 대해 보다 정확한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

 

1943년 7월 영미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섬 시칠리아에 상륙하고이탈리아 본토에 진격하게 되면서 무솔리니는 몰락에 직면했다무솔리니 몰락 이후엔 독일군이 이탈리아에서 전권을 주도했다티토는 무솔리니가 전쟁에서 제거되는 기회를 틈타 이탈리아군이 점령했던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장악하기 시작했고그리하여 몇 달 만에 유고슬라비아의 대부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유고슬라비아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 내 독일군 주둔 병력을 20만 명으로 증강했다그 외에 불가리아세르비아 및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하여 16만 명을 합치면 총 36만 명의 추축국 측 군대가 빨치산을 추격했다.

 

나치 독일은 36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빨치산에 대한 제6차 공격인 번개 작전을 개시했다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독일군은 이 같은 수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과거 이탈리아군이 차지했던 점령 지역을 재탈환하고보스니아로 밀고 들어갔다그 무렵인 1943년 11월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은 테헤란에서 히틀러를 몰락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논의했고서유럽에 대한 제2전선 구축과 더불어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작전에 관해서도 논의했다여기서 연합국은 티토에게 물자를 보내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그리고 1943년 11월 말 티토는 보스니아의 도시 야이체에서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 위원회라고 일컫는 공산주의 정부를 구성하여 왕정에 대체한다고 선언했다이것은 독일군의 제6차 공세인 번개 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와중의 일이었고이 회의에서 티토를 유고슬라비아군 원수로 임명한다는 내용도 선포되었다.

(티토와 처칠, 1944년 당시 티토와 처칠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회담을 가졌다. 생각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전개되었다고 한다.)

 

독일군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당시 독일군은 공군과 기갑부대를 동원하여 티토를 야이체에서 몰아냈다. 1944년 2월 독일군의 공격은 흐지부지되었다이번에도 독일군은 티토를 생포하는 데 실패했다이후 티토는 산악 지대로 나와 본부를 드르바르 시 부근의 한 동굴로 옮겼고여기서 연합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 받게 된다유고의 지원에 비적극적이던 소련도 지원에 나섰다한편 1944년 5월 독일군은 티토가 있던 동굴에 대해 공수 부대 공격을 감행했다이것이 기사의 이동 작전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토는 여기서도 탈출에 성공했다이후 영국은 나치하고 일부 협력하던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와 결별하고티토를 승인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이에 따라 티토는 연합국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완전히 인정받게 되었다.

 

1944년 여름 그는 영국의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하고 회담을 가졌다처칠과는 친근감 있는 분위기에서 회담이 이어진 반면스탈린과의 화담은 아니었다티토는 스탈린의 주장을 일방적인 명령으로 인식했고그 명령에 반대하기도 했다이후 티토가 귀국했을 때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북쪽으로 후퇴했다. 1944년 9월 중순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해방시키고 유고슬라비아 국경으로부터 불과 몇 마일 밖에 주둔하고 있었다그리고 10월 1일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유고슬라비아에 입성했다.

(1944년 10월 베오그라드를 해방시킨 티토의 빨치산과 소련의 붉은 군대)

 

티토 휘하의 다프체비치와 포포비치의 군대는 소련의 지상군 지원과 미군의 공중 지원 아래 베오그라드로 접근했고시가전을 치러 수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켰다. 1944년 10월 20일 독일군 16,000명이 죽고 8,00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1주일간 치열한 시가전 끝에 마지막 독일군 거점이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제프롤레타리아 여단에 의해 함락되었다이에 따라 독일군이 후퇴하자 세르비아인과 체트니크군 및 우스타샤 지지자들도 함께 달아났다이렇게 해서 베오그라드가 해방된 것이다.

(베오그라드 해방 당시를 제현한 그림, 소련의 T-34전차에 탄 병사가 유고슬라비아 깃발과 소련 깃발을 흔드는 것이 인상적이다.)

 

전쟁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엄청난 피해를 봤다. 1942년 1월 나치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유대인들을 독일의 점령지 폴란드의 가스실에서 처치해야 한다고 제안한 반제회의가 있을 때까지 대략 25만 명 이상의 세르비아인유대인 그리고 집시들이 크로아티아에서 죽어나갔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유고슬라비아에서 죽은 사람들은 역사학자들의 간추려 본 바에 의하면 최소 33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많게는 70만 명 이상이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또한 1941년 당시 12,000명이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중 9,000명이 전쟁 기간 동안 죽었고생존자 3,000명도 친구동료남편아내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이었다이처럼 나치의 침략은 참혹했다.

(티토와 스탈린, 1945년 5월 전승기념 퍼레이드에서 참석한 티토는 스탈린을 만났다.)

 

소련군과 티토의 빨치산이 수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키자 독일군은 1944년 겨울 동안 크로아티아 북부에서 버티는 신세가 되었다. 1945년에 접어선 유고슬라비아 땅에서 완전히 후퇴했다. 1945년 초 티토가 이끄는 반파시스 위원회가 최고 입법 기구가 되고행정부는 군주 정부와 공산당 대표가 공동 참여했다티토가 수상을 슈바시치가 외상을 맡게 되었다이 타협안은 영국과 소련의 승인을 얻었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의 인민해방군은 트리에스테로 진격했다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5월 1일 오전 9시 트리에스테에 무사히 입성했다연합군의 선봉이었던 뉴질랜드 대대가 그날 오후 5시에 도착했고, 5월 3일에는 영국군 주력부대가 밀려들어왔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함락시킨지 일주일 후 티토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베오그라드에서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공격이 시작된 지 49개월 3일째가 되는 오늘유럽의 침략자 독일이 항복을 했습니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했다이로써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유고슬라비아는 나치로부터 해방되었고새로운 정부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참고자료

 

인물로 읽는 세계사 티토루프 시스먼대현출판사, 1993

 

티토위대한 지도자의 초상재스퍼 리들리을유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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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영화 포스터)

 

전 세계에 있어서 1968년은 혁명의 해였다그해 1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한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는 전 세계를 혁명과 저항의 길로 인도했다프랑스 파리에선 5월 혁명이라 하여 기존의 보수주의에 맞서는 것과 동시에 체게바라와 마오쩌둥 그리고 호치민의 초상화가 곳곳에 등장했다이것은 단순히 프랑스뿐만이 아니었다미국과 영국서독이탈리아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네덜란드일본 등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베트남 전쟁의 당사자인 미국에선 반전운동과 더불어 대통령 선거 그리고 흑인인권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구정공세로 거짓말이 다 드러난 린든존슨 정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그 이유는 미국 내의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반전운동이 미국 전역에서 확산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바로 흑인인권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이 암살당하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온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또한 암살당했기 때문이다이 과정에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시카고에서 열리게 되었다시카고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자정치적 분파를 막론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모이게 되었다그러나 문제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시카고 시장이 집회를 불허한 것이었다결국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들은 체포되었고평화롭게 진행하고자 했던 시위는 경찰과 주방위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해산됐다.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

 

린든 존슨 대통령이 구정공세의 여파로 물러나게 된 이후 공화당 출신 대통령 닉슨은 반전시위를 주도한 이들을 본보기 삼아 법정에 세우려 했다닉슨 정부와 재판을 담당한 법정은 이미 자신들만의 결론을 낸 상태에서 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8명을 불법시위 주동 및 내란선동으로 구속시키고자 했다그러나 여기에는 문제점이 있었다구속된 이들은 서로가 소속이 달랐다한쪽은 1960년대 문화운동 혹은 혁명을 주장하던 국제청년당 즉 히피(Hippie)계열이었고다른 한쪽은 민주사회를 위한 청년학생 모임(SDS) 계열이었으며 또 다른 한쪽은 급진적인 흑인인권운동을 전개하는 흑표당(Black Panther Party) 계열이었다그러나 이러한 소속 및 정치성향의 차이는 재판을 계획한 측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히피, 이들은 프리섹스, 마약, 너덜너덜한 복장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 1960년대 저항의 상징이기도 하다.)

 

재판을 시작하기 전부터 재판을 담당한 측은 이 사건을 내란음모와 폭력시위 선동으로 몰기 위해 온갖 조작과 음해를 계획했다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재판 과정에서도 끊이질 않았다이들의 치졸한 행위는 특히나 급진적 성향이 강한 흑표당 대표에게 가장 많았다재판 시작부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도 주지 않고, “변호사가 없는 피고는 발언할 수 없다와 같은 황당무계한 짓도 행한다즉 헌법에 보장된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더 나아가 조작된 경찰 살해사건으로 몰아가기까지 했으며심지어 검사조차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무자비한 폭력을 재판에서 자행하기 까지 한다이것은 바로 재판을 담당한 판사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톰 헤이든, 영화상에 나오는 톰 헤이든은 SDS의 대표이다. 그는 나중에 4,572명의 미군 전사자 명단을 마지막 공판에서 읽어 내려간다.)

 

결국 흑인 인권 운동가인 프레드 햄프턴 흑표당 일리노이 지부장이 경찰에 의해 살해된 것 등을 항의하며 법정에서 고함을 질렀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았고이후 슐츠 검사는 그런 실의 모습이 배심원단이 피고인들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할 것을 우려하여 실을 재판에서 제외시킬 것을 판사에게 요구해 관철시킴으로써재판은 시카고 8의 재판에서 시카고 7의 재판으로 바뀌게 된다이렇게 해서 영화 제목이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8이 아닌 7인 것이다.

(반전운동을 진압하는 경찰과 최루탄 때문에 피하고 있는 반전 시위대)

 

그 외의 다른 인물들에게도 자신들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입증할 기회를 재판 담당판사는 주지 않는다이것은 바로 이 재판 자체가 조작되었기 때문이다사실 이들을 폭동 혹은 내란선동으로 몰고 가려고 했던 사법 측은 이들이 폭동을 선동하고 계획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했다그래서 이들은 정보 및 자료조작과 그들의 녹취된 연설에서의 몇몇 단어들을 꼬투리 잡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판을 이끌어 가려 했다애초에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시위는 경찰과 주방위군이 정부의 명령을 받고 폭력을 부추긴 사건이었기에이들의 조작은 갈수록 더 사악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시카고 재판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 당시 사건 담당 판사였던 율리우스 호프먼은 어떻게든 사건을 조작하려 했다.)

 

몇 개월간의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SDS 래니 데이비스는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의 명단을 매일같이 작성해 나갔다그렇게 해서 총 4,752명의 미군 장병 명단을 확보했고, “전 세계가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메아리 속에서 열린 마지막 공판에서 SDS의 지도부인 헤이든은 최후변론 과정에서 재판 시작부터 그날까지 베트남에서 전사한 4,752명의 미군 명단을 줄줄이 읽어 나간다.

(극증에서 나오는 재판 당시 모습)

 

영화를 보면서 국내에서 개봉했던 영화 ‘1987’과 변호인이 꽤나 오버랩 됐다배경은 다르지만 국가의 조작과 각본에 의해서 전개된 재판이라는 점그리고 안보라는 핑계로 무고한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점이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영화상에선 전 세계가 보고 있다(Whole World is Watching)”라는 명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영화에서 얘기하는 전 세계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시카고에서 열린 재판을 생각할 것이다물론 맞는 말이다이 형식재판은 반전운동을 하던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사건 담당 검사 리처드 슐츠, 그는 반전 시위대를 싫어하는 보수주의자였지만 이 재판 자체가 무리수가 많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본분을 다하면서도 어떤면에선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더 큰 그림을 보자면 이것은 당시 이런 재판을 주도해가며 침략전쟁인 베트남 전쟁을 지속하고 있던 미국 그 자체에 해당되는 얘기이기도 하다영화상에서 억울한 재판을 받는 이들이 정파를 떠나 민주당 전당대회에 모였던 결정적인 이유는 미국이 자행하고 있던 부도덕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그 전쟁을 끝내기 위함이었다이런 점에서 생각해볼때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말은 미국이 저지르고 있던 베트남 전쟁과 그 자체의 범죄와 부도덕함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영화에 나온 히피와 흑표당등과 같은 1960년대에 대해 더 얘기하겠다. 1960년대의 미국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혁명과 저항의 시대였다당시 여성운동을 하던 이들은 보수적인 성적 억압에 맞서 자유연애를 주장했고흑인인권운동을 하던 이들은 말콤X나 마틴 루터 킹의 영향을 받아 더 나은 권리와 평등을 주장했다그 외에도 미소냉전에서 전쟁의 무서움과 부도덕함을 알게 된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미국의 침략전쟁인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다이러한 변화가 미국사회에서 일어났다영화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꽤나 잘 표현했다그리고 무엇보다 실화를 한 작품이기에 현실성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많이 반영된 것도 보였다베트남 전쟁 당시 반전운동과 사회 변혁 그리고 부조리한 권력에 맞서는 것이 왜 필요한지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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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당시 북한에서 발행한 몽양 여운형 우표)

 

무릇 인생길에는 곧을 정()자도 있고 갈지()자도 있다고들 말한다그러나 나는 여태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아왔으니 행운아였던가 싶다내 나이 고희에 이르러 새삼스레 지나온 나날들을 돌이켜보았다특히 나의 인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해서 감회 깊이 추억하게 되었다민족 수난의 시기에 태어나 망국의 설움을 안고 파란만장의 풍운을 헤쳐온 나의 아버지 여운형(呂運亨)은 이 나라의 근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수많은 반일 애국 열사의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해방 후 여러 차례 38도선을 넘어 평양에 와서 김일성(金日成주석을 만나보았다나와 동생 원구는 1946년부터 김 주석 댁에 살면서 공부하였고또 다른 동생 영구도 평양에 와서 대학을 다니다가 한국전쟁 때 죽었다난구 언니와 아저씨(이만규)는 1948년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때 평양에 왔고어머니와 동생 봉구는 전쟁 때 이북으로 왔다결국 우리 가족은 시기와 경로는 달라도 모두 이북에 모여 김주석의 각별한 관심을 받으며 살았다그래서 나는 나와 우리 가족을 감히 김 주석과 한 식솔로 여기는 데 버릇이 들었다.

 

그런데 1994년에 갑자기 김 주석이 별세하였다내 머리에 흰서리 내리도록 주석님 앞에서 응석을 부리며 살아온 지난날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고 내가 오늘까지 곡절도 풍파도 모르고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라온 것이 누구의 덕이었는가를 날이 갈수록 더 깊이 깨닫게 된다그리고 떠나가신 지 반세기가 되었으나 오늘도 영생의 광망(光芒속에 살고 계신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오늘의 시점에서 재조명해 보게 된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현재는 미래를 예언한다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한 생이 보다 값있고 아름답기를 바란다사람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놓고 아버지의 지나간 인생 행로를 파헤쳐 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선뜻 펜을 들었다그러나 정작 쓰자고 보니 어려운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워낙 졸문인데다 수집된 자료가 너무 부족했다.

(1970년대 당시 북한의 김일성과 몽양 여운형 선생 가족분들)

 

아버지가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한창 벌이던 젊은 시절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고 철이 들어서는 아버지와 함께한 기간이 너무 짧았다내가 알고 있는 자료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생활 외에 아버지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친지들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가 전부다그것도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은 것이 유실되고 삭막해졌다아직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더듬고 되살리고 모아서 쓰다 보니 아쉬운 것도 많고 공백도 많다나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 대하여 밝히고 싶다.

 

첫째나의 아버지가 일찍이 독립운동에 발벗고 나섰던 초기부터 풍파 사나운 이국 땅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어떻게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구김새 없이 수행해 나갈 수 있었는가.

 

둘째일제통치의 가장 엄혹하던 시기에 숱한 선각자들과 유명인사들이 독립운동을 외면하고 포기하며 일제에게 아부굴종할 때 아버지만은 독야청청하면서 마지막까지 민족적 지조를 견지하여 나갔는데과연 그러한 힘의 원천그 강의한 신념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셋째지난 시기에 나온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글들에서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되고 축소된 것들을 바로잡고 보충하고자 하였다.

 

자식인 내가 인생 황혼기에 아버지의 인생 행로를 더듬어 보게 되는 것은 자못 감회가 깊은 일이다나는 아버지가 길지 않은 인생 길에서 남들보다 곡절도 풍파도 괴로움도 많이 격었지만 뜻을 바로 세우고 끝까지 깨끗하게 열렬하게 산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비록 미숙하나마 이 글이 아버지 여운형의 지향과 포부의지와 염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미흡한 점에 대하여 독자들의 사려 깊은 양해를 빌면서.

 

평양에서

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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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전투 : 3부작 '역사의 멈춰진 미래로부터' (3disc)
지니어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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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칠레 전투 감상평 : 노동자 민중 권력의 투쟁사를 보며

라틴 아메리카의 근현대사는 한국 근현대사 처럼 여러모로 다이나믹하다. 슬픈일도 많았고, 믿기 힘들일도 많았으며, 희망찬 일도 있었다. 1967년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투쟁을 하다 그린베레가 이끄는 토벌대에 체포되어 목숨을 잃은 체게바라는 68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당시 서구의 젊은이들은 마오쩌둥과 호치민 그리고 체게바라의 초상화를 들고 거리로 나왔었다.

체게바라의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주의 확장이 멈추는 것 처럼 보였다. 1959년에 혁명이 성공한 쿠바는 여전히 미국의 정치공작과 경제제재에 시달렸고,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CIA의 개입은 더 극심해졌다. 그러던 1970년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칠레는 세계적으로 놀랄 일이 일어났다. 바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영화 칠레 전투는 총 3부작으로 되어있다. 영화는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당선되는 시기부터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집권기 3년 동안 노동자 민중이 어떠한 힘을 발휘했는지도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옌데 정권은 소위 민주적인 의회제도를 기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해 나가고자 했다. 특히나 미국 독점기업이 독차지하고 있던 칠레 구리광산에 대한 국유화 및 교육과 의료 그리고 주거등의 무상복지 정책 실현이 그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회주의자가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사례는 그 당시 기준으로 없었다. 영화 초반에는 당시 칠레의 선거 분위기를 다루고 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들은 김칫국부터 마시며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최종적인 개표결과 좌파의 승리였다.

아옌데 집권 3년 칠레는 참으로 많은 조직들이 활동했다. 당장 좌파만 보더라도 마오주의 성향 단체부터, 사회당, 공산당 그외의 좌파단체가 우후죽순 처럼 퍼져있었다. 우익도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들부터, 아예 나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파시스트들 그리고 아옌데와 우익 사이에서 물타기를 하는 기독민주당 등이 있었다. 즉 이것은 다양한 세력들이 칠레에 있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아옌데 정부를 반대했던 우익들의 논리는 확실했다. 사회주의자가 정권을 잡으면서 나라가 혼란 스러워졌고, 사회가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혼란과 사회의 마비를 초래하는 이유의 대다수는 바로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우익들에게 있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바와 같이 사회주의 정권 초기부터 칠레에선 CIA의 지원을 받은 정치공작과 테러리즘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972년에 있던 어용운수노조의 대대적인 파업도 그것의 연장선상이었다.

우익들과 어용노조는 이런 혼란을 야기시킴으로써 아옌데 정부를 압박했지만, 민중과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이에 동참하지 않았다. 왜일까?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한 사회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왜 아옌데를 선택한 것일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아옌데 정부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착취받고 억압받아온 민중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칠레의 일반인민들은 아옌데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이들 대다수는 ˝아옌데가 집권한 이후 경제가 어려워도 우리를 위한 정책을 했고, 그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이것이 바로 민중이 아옌데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이 민중권력은 결국 무너졌다. 그 이유는 바로 닉슨 정부가 계획한 쿠데타 때문이었다. 닉슨과 키신저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군부 세력은 9월 11일에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대통령궁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탱크의 지원을 받는 군대로 포위했다. 이 과정에서 아옌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닉슨 정부가 쿠데타라는 극단적 수단까지 동원해가며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견딜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이유가 어찌됐든 그들이 칠레에서 저지른 짓은 명백한 테러리즘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인 3부는 제목처럼 칠레 ‘민중의 힘‘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민중가요인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처럼 단결한 민중의 힘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위대했다. 이들의 단결한 힘은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 전까지 제국주의와 우익들의 온갖 공작과 음해 그리고 테러리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수호했다. 영화 보는 내내 이러한 모습들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특히 민중에게 단결을 호소하는 아옌데의 연설은 감동 그 자체다.

영화에서 아옌데 정권을 지키려는 민중들의 모습은 절대적으로 능동적이다. 아옌데 또한 민중들에게 능동적 참여를 호소하여 제국주의와 우익들의 거짓과 왜곡에 맞서 투쟁한다. 사회주의가 왜 옳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았을 때 민중이 가지는 힘과 위력이 어떤 것인지,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단결했을 때 어떠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영화상에서 보여주는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최근들어 칠레에서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2019년부터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힘을 얻었고, 올해 10월에는 신자유주의의 잔재와도 같은 피노체트 헌법을 폐지했다. 또한 아옌데의 유산이 다시 재조명 받고 있다. 영화 칠레 전투는 우리에게 있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역사를 생생히 기록한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통해 단결한 민중의 힘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무너진 경험이 있었더라도 말이다. 정말 감동적인 영화를 봤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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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 만주에 있던 소련군은 대규모의 진공 작전을 전개했다. 몇 개월 전부터 전쟁준비를 마친 소련군은 곳곳에서 명실상부 일본군 주력부대나 다름없던 관동군을 손쉽게 궤멸시켰고, 만주와 중국 일부, 몽골, 남사할린, 쿠릴열도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했다. 이러한 진격은 작전을 개시한지 불과 10일도 안 되는 사이에 전개됐다. 당시 만주에서 군사작전을 지휘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는 1895930일 러시아 볼가 강 유역에 있는 이바노프 주 노바야골리티하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성당 성가대의 지휘자로, 나중에 러시아정교회 신부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수입이 좋지 않았던 바실렙스키의 가족은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농장에서 일해야 했고, 바실렙스키도 마찬가지였다. 1909년 여름 신학교를 졸업한 바실렙스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또다른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학생운동과 자본가의 착취에 반대하는 파업 시위 같은 각종 활동에 참가했고, 이런 경험은 바실렙스키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9152월 모스크바로 가서 훗날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로 이름이 바뀌는 알렉세예비치 군사 학교에 들어간다. 거기서 4개월 동안 속성 훈련을 받았고, 졸업 후 곧바도 예비군에 배치되어 준위 계급장들 달았다. 1916년 그는 전선에 투입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과 전투를 치렀고, 러시아 제국 군대가 연이어 패배하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그러던 19171110월 혁명과 부대 안에 있던 볼셰비키 세력의 영향을 받은 바실렙스키는 계급장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194월 적백내전이 격화되자 징집되어 붉은 군대의 군관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소련 붉은 군대와 그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붉은 군대에 들어가게 된 바실렙스키는 이른바 소련-폴란드 전쟁에서 전투를 치렀고, 부대내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군단장, 참모 등을 거쳐 소장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바실렙스키는 군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93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소련-핀란드 전쟁 즉 겨울전쟁에서 총참모부의 작전부 부부장 신분으로 겨울전쟁 작전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겨울전쟁 이후 바실렙스키는 히틀러와 독일이 가장 위험한 적이 될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있었는데, 그의 예상은 1941년에 실현되었다.

 

19416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바실렙스키는 작전부장과 참모부총장에 임명된다. 그해 10월 초 그는 모스코프스키 지역으로 가서 후퇴한 부대를 모아 방어 전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작전 참모팀의 책임자였던 그는 뛰어난 성과를 올려 중장으로 승진하기에 이른다. 19425월 소련 참모총장이 된 바실렙스키는 전쟁 중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데 힘썼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도 참가하여 194322일 독일군 수십만 명을 포위하기도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바실렙스키는 각 부대의 지휘관들과 함께 돈바스 전투, 쿠르스크 전투, 크림 전투 그리고 벨라루스 전투 등을 지휘햇다.

 

벨라루스 전투는 소련이 겪은 전투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으며, 준비 과정에서 이른바 바그라티온이라는 명칭을 가진 바그라티온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을 통해 소련군은 군사 본부가 더욱 효과적으로 각 부대를 제어할 수 있게 하고, 새로 편성된 부대의 사령관을 맡을 인재오 추천했다. 이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벨라루스 전체가 독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19454월 바실렙스키는 극동 작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그해 7월엔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에 있던 작전에서 바실렙스키는 15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을 지휘하여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을 궤멸시키기에 이른다. 결국 일본은 1945815일 소련의 만주 진격에 따라 전의를 잃고 항복을 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바실렙스키는 참모총장, 국방부 제1부부장, 국방부 총감 등의 직위를 거쳤고 소련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렇게 남은 여생을 보내던 바실렙스키는 197725일 사망하여, 소련군에서 세웠던 공로에 따라 모스크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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