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륜의 사진)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아내였던 헬렌 포스터 스노우(님 웨일즈)는 어느 한 조선인 혁명가에게 매력을 느꼈었다. 조선인 혁명가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헬렌은 그를 인터뷰했고, 이후 그녀는 미국에서 책 한권을 출판했다. 그 책이 바로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 a korean communist in the chinese revolution)’.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1940년대 미국에서 출판되기도 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이후 1960년대 일본에서도 출판됐고, 당시 한국의 젊은 기자출신인 리영희는 우연히 도쿄의 한 서점에서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당시 리영희는 감동했고, 이 책은 이후 한국의 운동권에게도 널리 읽히게 된다. 아리랑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으며, 2000년대 국내에서도 개정판이 나왔었다, 그 아리랑의 주인공은 한평생을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으며, 중국 혁명에도 참가했고, 이후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라는 오명을 받아 처형되었으나, 1970,80년대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복권됐다. 그 인물이 바로 김산이다.

 

김산의 전기인 아리랑이나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을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젊은 시절 김산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1919년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의열단에도 가입했었다. 그 시기 김산이 가장 신뢰하던 혁명 동지 한명이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사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세운 인물 중 한사람이며, 1922년 의열단이 주도했던 다나카 기이치(1919년 여운형과 회담했던 그 인물이다.) 암살 기도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바로 김산의 혁명동지인 오성륜이다.

 

오성륜은 1900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났다. 7살이 되던 1907년 부친을 따라 간도 지방 허룽 현으로 이주했고, 1918년 훈춘 현 다황거우의 북일중학교를 졸업했다. 3.1 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 왕칭 현 봉오동에서 교원 생활을 하다 독립군 부대에 들어갔다. 1920년 오성륜은 베이징으로 가서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전광일, 전광, 오진, 오한생, 오성임 등의 가명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성륜은 1922328일 의열단의 김익상, 이종암과 함께 상하이 부두에 내린 다나카 기이치 전 육군대장을 저격한 사건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아쉽게도 그가 쏜 총알이 오발루 뒤에 있던 미국인 여성이 숨졌고, 김익상이 던진 폭탄이 터지지 않아서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독립운동사에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오성륜은 김익상과 함깨 체포되어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로 넘겨졌으며, 2달 뒤인 52일에 수감돼 있던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탈옥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오성륜에게 당시 현상금 500달러를 걸었다.

 

이후 오성륜은 위조 여권으로 독일에 갔다가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동방근로자공산대학을 1926년에 졸업했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마친 오성륜은 192612월 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로 와 광동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입학했고, 거기서 러시아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19279월에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장제스의 쿠데타로 제1차 국공내전이 터지자 혁명동지인 김산과 함께 광동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 참가하여 국민당 군대에 맞선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국민당 군대의 토벌로 홍콩으로 탈출했고, 1929년 중국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오성륜은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했으며, 1935년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2사의 정치부 주임으로 일했다. 193677일 진촨허리 회의에서 항일연군 1, 2군을 합쳐 1로군을 편성했을 때 약 2,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2군의 지휘체계는 군장 왕더타이, 정치위원 웨이정민, 정치부 주임 오성륜이었다. 당시 김일성의 경우 2군 산하 6사의 사장이었다고 한다.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정치부주임 겸 군수처장을 지냈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이 끝나가던 1941년 오성륜은 체포됐고, 일본에게 투항한 그는 친일로 변절했다. 변절한 그는 만주국 치안부로 들어갔고 열하성 경무청 경위부로 일했으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하북성 승덕에서 한교동맹 위원장 겸 조선독립동맹 승덕시 책임자가 되었으나, 연안에 머물다가 화북지역을 해방시키며 진격해온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그를 체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원규 작가에 따르면 오성륜은 그들과의 재회를 기뻐하였으나, 조선의용군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47년에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가 병사했다고도 한다. 정확한 진실은 모르겠으나 그는 1947년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간도 특설대 -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710일 서울대병원에서 100살 먹은 한 노인이 사망했다. 사망일로부터 5일 후 그는 대전에 있는 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죽음과 장례식은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사망 전날에는 서울 시장이었던 박원순씨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이러한 상황은 문재인 정부 하에서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따라서 두 인사의 장례식은 정치적 성향에 다른 이들의 충돌을 우려하여 다른 장소에서 치러졌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 돌파 이후 미군 제1 기병사단과 선두 경쟁을 벌인 끝에 북한의 수도 평양에 먼저 입성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백선엽이다.

 

다부동 전투의 영웅으로 알려진 백선엽은 역사적 비판을 피할 수 없는 행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일제시대 당시 독립군을 토벌하는 만주군 군사조직인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간도특설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인 19393월에 창설된 부대로 1945년까지 만주에서 활동했던 친일파 부대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적잖게 있었다. 간도특설대에 지원했던 조선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바로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에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것은 조선의 독립이라는 가치와는 상반된 친일 행위였다.

 

간도특설대가 만주에서 창설된 궁극적인 목적은 만주 지역에서 항일투쟁의 뿌리 뽑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만주지역은 항일투쟁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19319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만주 지역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해졌다. 1932년 일본은 괴뢰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창설했지만, 만주지역 곳곳에서 일어나는 항일무장투쟁을 완벽히 꺾지는 못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당시의 중국 대륙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간의 내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일본에 저항하기 보단 중국 공산당 세력을 축출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군벌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반감을 사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만주 지역에 있던 중국 공산당 휘하의 군인들은 일본에 맞서 만주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을 도와 일본에 맞서 싸웠다. 따라서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그리고 만주국을 세운 이후에도 항일 무장병력을 상대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러한 토벌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까지 전개됐다.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다 전사했고,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일본은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만주 지역에 배치했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70만 이상이 되었고, 최소 600대 이상의 일본군 항공기도 만주 지역에 배치됐다. 태평양 전쟁과정에서 미군을 상대하기 위해 적잖은 병력이 태평양 전선으로 차출되기도 했으나, 일본 관동군은 명실상부 일본군의 주력을 담당한 병력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세력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병력과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협력하던 조선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만주 항일무장투쟁에서 명성을 쌓아 올린 인물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현재 북한 최고지도자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부터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수많은 전투를 만주에서 전개했다. 민생단 사건으로 죽을 위기에 놓일 뻔했지만, 김일성은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항일경력을 알아본 중국 공산당의 스중헝이 변호해줬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김일성은 그 당시 항일 무장투쟁의 붉은 별이었다. 물론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은 김일성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 또한 독립투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임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김일성과 같은 항일 무장병력을 상대로 토벌작전을 전개한 일본군 안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적잖게 있었다. 이들 중에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소위 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인물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현준,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에 해당된다. 다만 이들의 경우 일본군에 복무했던 시점이 조선인 출신 독립군 부대가 만주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시점이었다. 대신 이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을 상대로 토벌작전을 벌였었다. 이들이 조선인 출신 독립군을 토벌의 진위여부와는 별개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세력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1932년부터 1935년 봄까지 특히 만주의 간도 지역에서 3차에 걸친 대토벌을 벌였고, 그 이후에도 전차와 항공기를 앞세운 토벌 작전을 1940년대 초반까지 전개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마친 김일성은 1940년 홍기하 전투에서 최소 1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소련으로 피신하여 제88특별여단에 배속됐다. 동북항일연군 3로군 참모총장 허형식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다가 194283일 현재 헤이룽장 성 청안에서 전투 중 전사했다. 이처럼 만주의 상황은 항일과 친일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격전지였다.

 

이번에 김효순 선생의 책 간도특설대를 읽으며, 만주에서 전개된 친일파와 항일독립군의 토벌과 반토벌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만주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투쟁했던 그 역사가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저자가 말했듯이, 일제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항일의 기준만으로 평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일제에 맞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대로,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토벌하는데 동참하거나 그런 정책에 동참했던 이들이 자신의 행적을 낯부끄럽게 미화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행적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으로 포장하려는 행위는 당시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하다가 산화한 이들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 백선엽이 근무했던 간도특설대의 존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책에서도 언급된 사실이지만, 1939년에 창설된 간도특설대를 포함하여 일본은 만주지역에서 여러 특수부대들을 창설했다. 당시 일본이 창설한 특수부대 중에는 소련에서 탈출한 이들을 모아 편성한 아사노 부대도 있었다. 이 아사노 부대는 하사관 이하 사병이 모두 러시아인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만주 북부 지역의 소수민족인 오로촌족을 모집하여 만든 오로촌 부대, 몽골인들을 모아 창설한 기병부대인 이소노 부대 등이 있었다. 일본이 이와 같은 부대를 창설한 목적은 궁극적으로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 따라서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1년까지 일본이 만주에서 벌인 군사작전의 궁극적인 목적 중 하나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대소정책은 19414월 소일 중립조약이 체결되고 같은 해 127일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수정되었으나, 이들의 기본적인 성격을 공산주의자 색출 및 토벌이라는 제1차적 반공주의적 목적의 색채가 짙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반공주의적 목적에 따른 정책은 이후 미국이 계승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일본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대일정책은 평화적인 정책에서 반공주의적인 정책으로 수정됐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여 반공주의 정책을 국제적으로 표명했는데, 이에 따라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산업을 부흥시켜 반공주의 라인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미국의 제임스 포레스털 해군장관은 소련을 봉쇄하려면 일본, 독일과 그 밖의 추축국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는데, 포레스털의 주장은 미국의 대일정책 기조가 됐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냉전 초기 미국의 대소련 정책이 과거 일본의 대소련 정책과 이데올로기적으로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이다. 일맥상통하는 것은 바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다. 비극적이게도 만주에서 일어났던 토벌의 비극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도 반복됐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백선엽이 지리산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현상과 그가 이끌던 빨치산을 토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반공주의에 의해 가려진 만주 항일투쟁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며, 김효순 선생의 저서 간도특설대는 이러한 사실을 읽는 이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입상한 소련 극동군 제25군 '환영 소련 련합군'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이로써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던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했다일본이 항복하기 1주일 전 한반도 북부에서는 전투가 치러졌다전투는 일본군이 항복한 이후에도 며칠간 지속된 것으로 알려졌으며이들의 진격 속도는 신속했다이들은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군을 상대로 놀라운 전략전술을 선보였다이들이 바로 소련군(Soviet Red Army)이다독소전쟁 시기 히틀러에 맞서 4년간 전쟁을 치렀던 소련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소련군의 전술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시점에서 발전했으며, 1943년 쿠르스크 전투와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붉은 군대는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룩했다소련군은 1945년 베를린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에서 승리를 이룩했다히틀러의 자살과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유럽에서의 전투가 끝나자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다그 전쟁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전쟁이었다사실 소련은 1941년 당시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은 상태였다그러나 독일이 패전한 이후 소련은 일본군과 일본의 꼭두각시인 만주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1극동전선군과 제2극동전선군 그리고 자바이칼전선군 등 크게 3방향에 병력을 극동에 배치했다이에 따라 극동 소련군 총사령관인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가 이 작전을 총지휘하게 됐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 또한 일본에게 선전포고했다이에 따라 8월 9일부터 소련군은 한반도로 진격하게 됐고그 속도도 매우 신속했다만주진격작전 당시 한반도로 진격한 소련의 붉은 군대는 치스차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25군이었는데25군은 소련 극동태평양 함대와 연합작전을 펼쳐 8월 11일부터 20일까지 웅기와 나진청진 그리고 나남을 점령했다. 8월 13일 북한의 청진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극동태평양 함대의 지원을 받은 소련군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는데이 전투에는 이후 북한의 고위직을 보냈던 정상진도 그 현장에 있었다당시 정상진은 소련의 붉은 군대 소속으로 청진시에서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작전에 참여했다이후 그는 KBS에서 제작한 고려인 다큐에 나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후퇴해온 일본군들이 전부 청진시에 모인 거예요한반도를 통치하던 나남사단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걸 봤습니다그때 내가 울었습니다. ‘너희도 우리 앞에 투항하는 그런 때까 있구나’ 느끼고 상당히 감동했습니다네가 유일한 조선 사람이니까 너에게 형무소 열쇠를 줄 테니 형무소 문을 열라고 했어요그래서 형무소 문을 여니까 나오면서 만세를 부르면서 울면서 소련군 만세를 부르고 조선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참 너무나 감개무량했습니다.”

 

해방 이후 6일 뒤인 8월 21일 소련군 상륙 부대는 군항 원산을 점령했고, 8월 24일과 25일 소련의 공수부대들은 산업 중심지인 함흥과 평양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일본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치스차코프 휘하 제25군의 일부는 일본군과 헌병대 그리고 경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개성에 도달했고, 38도선에 해당되는 지역까지 진격하여 38도선 이북의 전 지역을 접수했다한반도 이북을 해방군으로써 해방시킨 소련군의 소식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담당하고 있던 이남 지역까지 당연히 퍼져나갔고서울에도 소련군이 입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일부 정보에 따르면 소련군이 서울인근까지 잠시 들어왔다 나갔다는 자료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만한반도 이남에 진주하게 된 주체는 바로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이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대회)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은 각 지역에 경무사령부를 설치했으며, 8월 26일 평양에 총 사령부를 설치했다그리고 북한 지역의 6개 도, 85개 군, 7개 시(평양진남포청진함흥신의주해주원산)에 경무사령부를 각각 설치했다이들은 일본군에게 항복을 받고 무기를 접수했으며행정기관경찰서법원은 물론 일본인 소유 대기업철도통신수단은행 등을 관리했다점령군을 표방했던 미군과는 달리 소련군은 자신들 스스로 해방군이라 표현했고군정 초기 조만식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자체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와 협력관계를 구축했다이에 따라 한반도 이북에는 자체적으로 친일파들을 청산하고 지주 계급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진했다따라서 한반도 이북 지역에 있던 친일파들이 처형과 처벌을 피해 월남했다.

(평양에서 시민들이 환영을 받으며 행진하는 소련군)

 

북한에서도 여러 진보적인 사회 개혁들이 추진되었다해방 이후 귀국하여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이 된 김일성은 1946년 3월 23일 ‘20개조 정강을 발표했다여기에는 일본 통치의 잔재 청산언론 출판 집회 및 신앙의 자유 보장남녀평등 보장, 8시간 노동제의무교육제무상의료 그리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따라서 당시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진보적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으며실제로 그러한 성과들이 나타났다. 8시간 노동제동일임금, 77일간의 출산 휴가와 소년노동의 금지 등과 같은 정책에서 당시 북한에서 실행된 사회주의 정책의 진보성이 드러난다.

 

토지개혁은 1946년 3월 5일부터 진행됐다토지개혁이 시행됨에 따라 총 100만 325정보 가운데 98만 1,390정보가 72만 4,522가구의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됐다당시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에 대해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세기적 숙망을 가장 훌륭히 풀어주는 인민적인 법령이며 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의 농민 문제농업 문제를 가장 철저히 해결하고 농촌경리의 장래 발전을 가장 순조롭게 보장할 수 있게 하는 혁명적인 법령이라고 호평했다이런 토지개혁으로 농촌에서 지주층은 소멸했고소련 군정하에서 만들어진 농민동맹은 108만 3,985명이던 단원의 수가 개혁 후 144만 2,149명으로 증가했다토지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됐으며브루스 커밍스 또한 북한의 토지개혁이 소련이나 중국 베트남에 비해 유혈 없이 성공한 사례라고 주장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 선포 당시 사진,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소련군이 진주한 이후 일부 지역에서 소련군의 폭력행위나 약탈 그리고 민간인 강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예를 들면예전부터 조선의 이스라엘이라 불리던 신의주에서는 반공시위가 일어나 소련 군정이 진압한 사례가 존재하며당시 반공시위에 참여했던 한국의 민주화운동가 함석헌의 경우 이에 대해 증언한 바가 있다부녀자의 강간의 경우 초기에는 분명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이들 중 일부는 월남하여 이승만이 참가하는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1946년 1월에 이르러 소련은 헌병을 들여와 군인들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실시했다이에 따라 민간인들을 폭행하거나 아녀자들을 강간하는 소련군은 NKVD에 의해 총살됐다철저한 통제에 들어감에 따라 약탈 및 강간의 사례는 거의 보고가 되지 않았다소련 헌병들이 들어온 후 사태는 안정되었으며 그때부터 소련 관리들의 행위는 항상 정확했으며” 사병들은 철저한 통제하에 들어갔다소련군은 계속 보급물자를 징발했으나 대신 모든 것에 대해 보상받을 수 있는 영수증을 발행했다일각에서는 소련군이 많은 공장을 북한에서 반출했다 하지만실제로는 몇 안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증거는 없다소련에 의한 만주 공업의 반출을 조사기록한 폴리 위원회(Pauley Commision)는 북한에서의 실제적 반출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미 정보당국은 수개월 동안은 소련에서 중대한 반출을 행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1946년 6월에 이르면 그 이전의 보고가 후퇴하는 일본인들이 저지른 파괴에 근거했을지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거기다 소련 기술자들이 파괴된 공장들을 재건하는 데 최선을 다했으며 1946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생산이 1945년 수준을 능가하게 되었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다.)

 

소련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준 해방군이었다는 사실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물론 일부 안 좋은 사례가 있었던 것도 분명하나대체로 민중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재건을 도왔으며소련 군정 기간 동안 북한 사회에서 여러 진보적인 개혁들이 시행됐다이에 따라 한반도 북부 지역은 당시 미군정이 점령한 한반도 남부 지역보다 민중들이 더 많은 민주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따라서 소련군의 성격은 해방군이었으며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징어 게임에서 ▲■● 씹쌔끼들이 우리는 기회를 준다는 소리할때, 진심으로 씹역겨웠다. ▲■● 범죄자들이 씨부리는 기회란 400억 상금 수령이라는 무슨 벼락 맞는 것 보다 더 받기 힘든 로또를 해서 돈받을 기회를 얻으라는 것과 같은 맥락의 헛소리다. ▲■● 씹쌔끼들이 참가한 456명을 최소 3,4억 이상의 빛을 진 사람들로만 묘사했는데, 탈북자나 외노자는 거기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잖아. 난 이 사실에서 ▲■●가 얼마나 말안되는 같은 소리를 해대는지 알 수 있었음.

 

그리고 빛을 몇억씩 준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 사람들 대다수에게 적어도 먹고 살수는 있게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 기관 자체의 재정이라면 그 정도는 하고도 남을 수준인데? 그러니까 ▲■●의 기회운운은 말 그대로 "부자들 재미를 위해 사회의 가망없는 빈곤층을 희생시켜 즐거움을 느끼자."는 궤변을 돌려말한 것임.

 

▲■●와 이들을 이끄는 검은 가면 그리고 짐승보다 못한 부유층은 사탄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친애하는 중국 유격대 동지들,

 

나는 당신들이 골짜기에 살포한 선전문을 읽고 당신들이 공산당 유격대임을 알았습니다. 당신들은 애국주의자인 동시에 국제주의자입니다. 나는 당신들과 만나서 공동의 원수를 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파시스트 야수들에게 포위되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운반해온 10만 발의 탄알을 귀군에게 드립니다. 그것은 북쪽 소나무 숲 속에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 탄알로 파시스트 군대를 사격하십시오.

 

내 몸은 비록 죽지만 혁명정신만은 영원할 것입니다. 신성한 공산주의 위업을 하루빨리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관동군 간도 치중대 일본 공산당원 이다 스케오

 

1933330

(이다 스케오의 초상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