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글입니다. 나무위키에 있는 송림 제철소 학살 문서가 완벽히 조작된 거짓말이었군요.)


오늘은 북한의 대표적인 인민항쟁이라고까지 추앙받는 황해제철소 폭동사건의 진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과거 여러 글을 보면서 황해북도 송림시에 위치한 황해제철소에서 노동자들이 북한 당국에 항의하다 탱크에 수십 명이 깔려죽은 사건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사건은 부끄럽지만 탈북자 사회가 만들어낸 대표적 거짓말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사실을 다루는 기자이기 때문에 거짓말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합니다. 물론 북한을 100% 정확하게 안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저부터도 오보가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수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은 하늘땅 차이죠. 이건 양심과 정직을, 결과적으로 인격을 돈에 팔아먹었느냐 아니냐의 차이이죠.

 

탈북자 사회에 이런 말이 돕니다. 처음엔 중국에서 하나님 믿었다고 하니 교회에 와서 간증을 시켰는데, 조금 있다 보니 중국에서 자다가 하나님을 영접해 계시 정도 받아야 간증 불러주고, 그런데 좀 더 지나고 보니 북한 지하교회 신자 정도 했다고 해야 간증 불러주고, 나아가 지하교회 전도사 정도 해야 간증 불러준다는 말이 있죠.

 

아직 북한 지하교회 목사는 안나온 것 같은데, 좀 있으면 나올 것 같기도 합니다. 교회 간증비 얼마를 받겠다고 그러는 것도 문제지만, 같은 탈북자가 들으면 거짓말이 뻔한데도 신자들을 위한 서비스로 사기 치는 사람 불러 시키는 교회도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게 교회만 해당됩니까.

 

그동안 탈북자들의 과장된 증언으로 한국사회에 얼마나 많은 논란 만들어냈습니까. 오늘 말씀드릴 황해제철소 폭동도 2001년 모 월간지에 기고한 탈북민의 증언이 계속 확대 해석되면서 커진 것입니다. 이제부터 일명 송림사건의 진실에 대해 말씀 드릴텐데, 주성하TV는 구독, 좋아요도 좋지만 끝까지 들어주시면 더욱 힘을 얻습니다.

 

황해제철소가 송림시에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황해제철소 폭동사건, 송림사건 등으로 불립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소개됐나면 19988월 배고파서 제철소 압연철판을 간부들이 옥수수로 바꾸어 노동자들에게 배급을 주었는데, 보위사령부가 탱크를 몰고 들이닥쳐 간부들을 무리로 처형하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제철소 정문 앞에 모여 항의하자 탱크로 깔아 죽였다고 알려졌습니다.

 

간부들 처형하는 자리에서 김일성 간호사 하던 여성이 마이크를 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니 당장 그 자리에서 처형시켰다느니, 처형된 사람들을 평토장했는데 다음날 그 자리에 거대한 봉분들 생겨났고 그 위에 수백 개의 헌화가 놓여있었다느니 하는 그럴 듯한 자세한 상황까지 소개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위키백과에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이라고도 나오니 찾아보십시오.

 

저는 아직 유튜브에서 황해제철소 사건을 다루지 않았는데, 바로 저 김일성 간호사와 헌화의 증언이 도저히 상식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개처형장에서 판결문 읽는 사람의 마이크를 빼앗아 판결이 부당하다고 소리를 친다는 것은 제 상식엔 북한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사형수를 평토장했는데 그걸 다시 몰래 봉분으로 만들어 수백 개의 헌화를 한다는 것도 더 말이 되지 않는 얘기죠. 그랬다면 본인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이제는 한국에 온 탈북자들도 많고 송림에서 간부를 하다 온 분들도 있고 해서 저는 당시 사건의 비교적 정확한 실체에 대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파악한 사건 개요에 대해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3년째 이어지던 1998년이 되니 북한의 기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워 사람들이 공장 자재 빼서 팔아먹고, 전선줄 잘라 팔아먹고, 심지어 철도 레일까지 빼서 고철로 팔았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김정일은 보위사령부에 임무를 줍니다. 총소리를 울려 사회 기강을 바로 잡으라고 말입니다.

 

보위사령부는 먼저 신의주와 혜산 등 중국으로 나가는 주요 밀무역 통로들부터 가서 검열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의주에 가보니 유색금속은 물론 멀쩡한 철강재들까지 고철로 팔려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어디서 오는지 쭉 추적해보니 북한의 양대 제철소로 꼽히는 황해제철소까지 이어졌습니다.

 

황해제철소가 있는 송림의 상황은 고난의 행군 때 말이 아니었습니다. 송림은 당시 인구가 13만 도시였는데, 완전한 공업도시라 전국적으로도 아사자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제철소 당위원회에선 결국 직장 자체로 먹여 살리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각 직장에서 부업을 했는데 철제일용직장 이런 데선 석유곤로나 불고기판을 만들어 팔아먹고 살았습니다. 어떤 곳에선 모터를 팔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철소의 핵심인 강철직장은 그냥 철을 팔아먹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실 전기가 없어 철도 생산 못했습니다. 그래서 강철직장은 직장 바닥에 깔린 밑바닥인 소위 깔판을 떼서 팔았습니다. 제철소 바닥은 시멘트로 할 수가 없어 철을 타일처럼 만들어 깔았는데 그걸 떼서 판 것입니다.

 

신의주에 나갔던 보위사령부에서 중좌 한 명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송림사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건너왔습니다. 신분을 속이고 철을 구입하는 거간꾼으로 가장했습니다.

 

당시 황해제철소에서 팔아먹는 것들은 송림시장 앞에 있는 과거 공기총 쏘는 사격장이 있던 자리에 있는, 일명 해빛회사로 불리는 거간시장에서 거래가 이뤄졌습니다. 해빛회사는 공식 명칭이 아니고 거간꾼들이 낮에 모인다고 현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 보위사 중좌가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자료를 모았습니다. 깔판 사겠다고 하니 걸려든 사람이 성길이라는 이름의 제철소 선전대 대장이었습니다. 이 사람 집에 도청기를 설치해 연관자들까지 다 색출했습니다.

 

그리고 공포감을 주기 위해 19988월 초 새벽 3시 인근 105탱크사단 소속 전차 20여대가 사리원에 진입했습니다. 탱크는 몇 대뿐이고 주로 장갑차들이었습니다. 그 다음 미리 조사해 찍어둔 사람들을 체포해 이중 11명을 처형했습니다.

 

처형자 중 가장 직책이 높은 사람은 송림시 안전부 부부장이었고, 이외 강철직장 보위지도원, 제철소 당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선전대 대장 성길 등이 처형됐습니다.

 

또 도 씨 성을 가진 송림에서 유명한 해결사도 처형됐는데, 그는 친척형제 중 11명이나 개성시 당위원회, 안전부에 있는 나름 북한의 핵심 계층입니다. 송림에서 그는 돈 받아주는 일을 했는데 현지 사람들 속에서 임꺽정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의리는 있었던 가 봅니다. 그 역시 철을 팔아먹고 밀가루를 사오는데 많이 개입했는데 그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들에게 들씌워진 죄명은 반당반혁명종파분자, 간첩 등이었습니다. 처형은 송림시에서 제일 큰 철산광장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진행했고, 사형수들은 철산광장에서 바라 볼 때 꽃핀동에서 사포동으로 넘어가는 길 위에 쭉 세워두고 처형했습니다.

 

김일성의 간호사가 마이크 빼앗고 이런 일도 없었고, 다음날 노동자들이 공장 출구에 수천 명이 모여 시위한 사실도 전혀 없습니다. 물론 그 끔찍한 장면을 보고 불평들은 했지만, 그런 공포 분위기에서 누가 감히 탱크에 대듭니까.

 

송림에 왔던 전차 부대는 10여일 더 있다가 철수했습니다. 사회를 정화시킨다며 송림에 장갑차를 몰고 가 11명을 처형한 것이 송림 사건의 진짜 진실입니다. 제철소 노동자 폭동이었고, 탱크로 수 십 명을 깔아 죽였다는 것은 제가 취재한 결과 허구였습니다.

 

송림에 탱크부대가 들어갔다는 소문은 북한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저도 당시 들었습니다. 여론이 안 좋게 돌아가자 김정일이 이후 총성이 너무 큽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이후 송림에서 이런 소문이 퍼졌습니다. “원래 사형수는 12명인데 1명이 눈치를 채고 도망갔다. 나중에 잡혔지만 김정일이 총소리 그만 내라고 해서 이 사람은 총살되진 않았다. 결국 먼저 도망치고 볼 판이다라고 말입니다.

 

송림제철소 사건의 진실을 전하는 것은 탈북자 사회의 치부와 연관되기에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저는 진실을 다루는 기자로써 가짜 정보가 유통되는 것은 보고 있을 수만 없어 오늘 주제로 다뤘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nklogin.com/post/Postmng?ptype=v&contentkey=BFC1630572790&fbclid=IwAR0CbhUqbkw6eMdc0h-5LJinP5LUEZL3i8-1bj4H9c8TAGiMuS7jiFF2uV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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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가로 미 중앙정보국이 심어놓은 우익 정부가 반란에 직면해 있던 라오스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 가운데 한 곳인 단지평원이 폭격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정부나 언론은 이런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지만, 라오스에 살고 있던 미국인인 프레드 브랜프먼(Fred Branfman)은 저서 단지평원의 목소리(Voices from the Plain of Jars)에서 이에 관해 이야기했다.

 

“19655월부터 19699월까지 단지평원에 대한 25,000회가 넘는 출격이 이루어져 75,000톤 이상의 폭탄이 투하됐다. 지상에서는 수천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했으며 수만 명이 지하로 내몰렸고 결국 지상의 사회 전체가 철저하게 무너졌다.”

 

농촌 마을에서 라오스인 가족과 함께 살면서 라오스 말을 할 줄 알았던 브랜프먼은 폭격을 피해 수도 비엔티안(Vientiane)으로 몰려들어온 피난민 수백 명을 인터뷰했다. 브랜프먼은 그들의 말을 기록하고 그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존해 뒀다. 시엥쿠앙(Xieng Khouang. 단지평원이 자리한 주) 출신인 26세의 간호사는 고향에서의 생활에 관해 말해줬다.

 

나는 우리 마을의 흙과 공기, 고지의 평야, 논과 못자리와 하나가 되어 살았지요. 달 밝은 밤이나 낮이나 나와 마을 친구들은 새들이 지저귀는 숲과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추수 때나 모내기철에는 땡볕이든 빗속이든 가리지 않고 함께 땀 흘려 일하면서 가난하고 비참한 환경에 맞서 싸우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농부의 삶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1964년과 1965년에 우리 마을 근처에서 터지는 폭탄으로 지축이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늘을 선회하는 비행기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 중 한 대가 기수를 아래로 돌려 땅을 향해 곤두박질을 치면서 가슴을 찢는 듯한 굉음을 지르고 나면, 사방이 빛과 연기로 뒤덮여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웃 마을 사람들과 어제 있었던 폭격에 관한 소식을 주고받곤 했어요. 집이 몇 채나 부서졌는지,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구덩이! 구덩이였어요! 그 때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는 데 가장 필요했던 건 구덩이였어요. 우리 젊은 사람들은 생계를 잇기 위해 논과 숲에서 곡식을 키우는 데 쏟아야할 땀과 힘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구덩이를 파는 데 다 써버렸습니다.”

 

한 젊은 여성은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친구들이 왜 라오스의 혁명운동, 즉 라오스애국전선에 이끌리게 됐는지를 설명해 줬다.

 

어린 소녀였을 때 저는 과거의 역사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남자들이 약자인 여성을 학대하고 놀렸기 때문이죠. 그런데 라오스 애국전선이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뒤부터 아주 달라졌어요. 라오스애국전선 아래서는 심리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그들은 여자도 남자만큼 용감하다고 가르쳤지요. 예를 들어볼게요. 전에도 학교에 다니긴 했는데, 오빠들은 다니지 말라고 했었어요. 졸업을 해도 고위직 관리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꾸니까, 그런 꿈은 엘리트 집안이나 부자 집안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거니까 학교를 다녀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말이었지요.

 

그런대 라오스애국전선은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은 교육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면서 우리한테도 동등한 권리를 줬고, 누구도 우리를 놀림감으로 삼지 못하게 했지요.

 

그리고 낡은 관념도 새루은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령 새로 교사와 의사로 양성된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이었어요. 또 그들은 극빈층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지요. 많은 논을 가진 사람들의 땅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거든요,”

 

17세의 소년은 혁명군대인 라오스의 땅(Pathet Lao(파테트 라오), 라오스애국전선의 군사조직) 병사들이 자기 마을에 온 일에 관해 말해 줬다.

 

몇몇 사람들은 두려워했는데, 대부분 돈 있는 사람들이 그랬죠. 이런 사람들이 라오스의 땅 병사들에게 먹으라고 소를 내줬는데, 병사들은 받지 않았어요. 받는 경우에는 적당한 값을 치렀죠. 실로 이 병사들은 사람들에게 아무 두려움도 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촌장과 군수 선거를 열어서 주민들이 직접 대표를 뽑게 했습니다.”

 

중앙정보국은 자포자기식으로 흐몽 족(Hmong, 라오스 고산지대에 사는 소수민족)을 군사작전에 편입시켜 흐몽 족 수천 명이 목숨을 잃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라오스에서 벌어진 일들 대부분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역시 비밀과 거짓말로 점철된 작전이었다. 19739, 라오스 주재 정부 관리를 지낸 바 있는 제롬 둘리틀(Jerome Doolittle)뉴욕타임스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캄보디아 폭격에 관해 국방부가 최근에 한 거짓말을 들으면서 나는 라오스 비엔티안 주재 미국대사관의 공보담당관으로 있을 때 종종 생기곤 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우리는 왜 거짓말을 했던가?

 

처음 라오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 작은 나라에 우리가 대규모적이고 무자비한 폭격을 하는데 대한 모든 언론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미국은 라오스 왕국 정부의 요청으로 비무장 정찰 비행을 수행하고 있으며, 공격을 받을 경우 응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무장 호위 비행대가 정찰기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내 말을 들은 기자들도 모두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노이 역시 내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국제통제위원회 역시 알고 있었다. 관심 있는 모든 하원의원과 신문 독자들도 알고 있었다.

 

결국 이런 거짓말은 어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그 어떤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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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ll Anything That Moves: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 (Paperback) -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
Nick Turse / Picador USA / 201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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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찾고찾던 책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전쟁범죄가 미라이 학살 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명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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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장제스 총통이 비밀리에 푸른셔츠단이라는 엘리트 조직을 결성했다. 푸른셔츠단의 한 대원은 "처음에는 파시즘을 후진적으로 생각했다"면서 "그러다가 국가를 발전시키는 진보적인 수단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파시즘의 일차적인 목표는 국가 보전이었다. 푸른셔츠단의 기관지는 사설에서 "파시즘이란 파멸 직전의 국가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파시즘은 이탈리아와 독일을 구했다. 이탈리아와 독일 파시스트 정신을 모방해 폭력 투쟁의 길로 나서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장제스 총통은 파시즘 도입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푸른셔츠단 대원들에게 "파시즘이 중국을 구원할 것인가"라고 물은 뒤 "그렇다. 파시즘이야말로 중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장제스는 서구인들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싫어했으며, 히틀러의 지도자 원리를 수용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느라 세월을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장제스는 히틀러의 집권 8개월 뒤 당 간부들에게 "파시즘의 핵심은 현명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라고 말했다. 국가는 지도자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면 재건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자연히 혁명 정신을 갖춘 위대한 인물로서 모든 당원의 본보기로 일한다. 한편 개별 당원들은 지도자와 집단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는데 간접적으로는 사회와 국가, 혁명을 위한 일이다. 우리는 혁명집단에 참여한 순간부터 권리와 생명, 행복까지 집단에 위임하고 이들 모두를 지도자에 바쳤다. 그래야만 진정한 파시스트라 불릴 수 있다."

 

히틀러의 첫 임기 4년간의 치적은 생각이 같은 다른 사람들을 고무했다. 파시즘은 불평불만자나 권리를 빼앗긴 사람뿐 아니라 선의를 가진 책임자들을 파고들었다. 젊은이뿐 아니라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신선한 대안으로 받아들인 지식인 계층들도 끌어들였다. 국가마다 개성을 가진 파시즘이 발호했지만 히틀러나 무솔리니 등의 추종자는 정신적인 단합만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여겼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었다.

 

출처: 아들프 히틀러 결정판 1 p.687~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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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륜의 사진)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아내였던 헬렌 포스터 스노우(님 웨일즈)는 어느 한 조선인 혁명가에게 매력을 느꼈었다. 조선인 혁명가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헬렌은 그를 인터뷰했고, 이후 그녀는 미국에서 책 한권을 출판했다. 그 책이 바로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 a korean communist in the chinese revolution)’.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1940년대 미국에서 출판되기도 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이후 1960년대 일본에서도 출판됐고, 당시 한국의 젊은 기자출신인 리영희는 우연히 도쿄의 한 서점에서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당시 리영희는 감동했고, 이 책은 이후 한국의 운동권에게도 널리 읽히게 된다. 아리랑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으며, 2000년대 국내에서도 개정판이 나왔었다, 그 아리랑의 주인공은 한평생을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으며, 중국 혁명에도 참가했고, 이후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라는 오명을 받아 처형되었으나, 1970,80년대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복권됐다. 그 인물이 바로 김산이다.

 

김산의 전기인 아리랑이나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을 읽어본 이라면 알겠지만, 젊은 시절 김산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1919년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의열단에도 가입했었다. 그 시기 김산이 가장 신뢰하던 혁명 동지 한명이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사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세운 인물 중 한사람이며, 1922년 의열단이 주도했던 다나카 기이치(1919년 여운형과 회담했던 그 인물이다.) 암살 기도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바로 김산의 혁명동지인 오성륜이다.

 

오성륜은 1900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났다. 7살이 되던 1907년 부친을 따라 간도 지방 허룽 현으로 이주했고, 1918년 훈춘 현 다황거우의 북일중학교를 졸업했다. 3.1 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 왕칭 현 봉오동에서 교원 생활을 하다 독립군 부대에 들어갔다. 1920년 오성륜은 베이징으로 가서 약산 김원봉이 설립한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전광일, 전광, 오진, 오한생, 오성임 등의 가명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성륜은 1922328일 의열단의 김익상, 이종암과 함께 상하이 부두에 내린 다나카 기이치 전 육군대장을 저격한 사건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아쉽게도 그가 쏜 총알이 오발루 뒤에 있던 미국인 여성이 숨졌고, 김익상이 던진 폭탄이 터지지 않아서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독립운동사에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오성륜은 김익상과 함깨 체포되어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로 넘겨졌으며, 2달 뒤인 52일에 수감돼 있던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탈옥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오성륜에게 당시 현상금 500달러를 걸었다.

 

이후 오성륜은 위조 여권으로 독일에 갔다가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동방근로자공산대학을 1926년에 졸업했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마친 오성륜은 192612월 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로 와 광동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입학했고, 거기서 러시아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19279월에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장제스의 쿠데타로 제1차 국공내전이 터지자 혁명동지인 김산과 함께 광동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 참가하여 국민당 군대에 맞선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국민당 군대의 토벌로 홍콩으로 탈출했고, 1929년 중국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오성륜은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했으며, 1935년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2사의 정치부 주임으로 일했다. 193677일 진촨허리 회의에서 항일연군 1, 2군을 합쳐 1로군을 편성했을 때 약 2,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2군의 지휘체계는 군장 왕더타이, 정치위원 웨이정민, 정치부 주임 오성륜이었다. 당시 김일성의 경우 2군 산하 6사의 사장이었다고 한다. 1938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정치부주임 겸 군수처장을 지냈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이 끝나가던 1941년 오성륜은 체포됐고, 일본에게 투항한 그는 친일로 변절했다. 변절한 그는 만주국 치안부로 들어갔고 열하성 경무청 경위부로 일했으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하북성 승덕에서 한교동맹 위원장 겸 조선독립동맹 승덕시 책임자가 되었으나, 연안에 머물다가 화북지역을 해방시키며 진격해온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그를 체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원규 작가에 따르면 오성륜은 그들과의 재회를 기뻐하였으나, 조선의용군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47년에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가 병사했다고도 한다. 정확한 진실은 모르겠으나 그는 1947년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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