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초기에 일어난 농민 폭동의 원인은 농민들이 계몽사상에 감염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쌓이고 쌓인 사회경제적 불만과 1775년이래의 경제 불황의 격화에 따른 갖가지 모양의 사회적 대립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계몽사상의 선전은 도시의 울타리를 넘지못하고 있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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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의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1권에 나온 내용입니다. 생각보다 흥미롭게 읽은 구절이라 올려봅니다. 같이 올린 한 장의 사진은 우리는 몸을 깨끗하게 지켜 독일군을 물리쳤다. 이제 기준을 높이자. 깨끗한 미국으로! 성병 근절이라는 구호의 미군 포스터)

 

오랫동안 열망했던 변화를 실현할 기회를 잡은 사람들 중에는 도덕주의적 개혁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특히 전쟁을 성적 타락과 싸우는 기회로 삼았다. 이들은 병사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척하면서 매춘과 성병에 대해 공격적인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전국의 홍등가가 철퇴를 맞았다. 그 결과 창녀들은 지하로 들어가 포주를 비롯한 착취자들의 손에 장악됐다. 미춘 단속은 1918체임벌린 칸 법(Chambelain-Kahn Act)’ 통과 이후 극심해졌다. 이 법에 따르면 군기지 주변을 혼자 돌아다니는 여성은 체포, 감금할 수 있고, 강제로 성병 검사를 시킬 수도 있었다. 강제 검사에 대해 개혁가들은 검사용 반사경을 강제로 들이댄다고 해서 반사경 강간이라고 비난했다. 성병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 여성들은 연방 시설에 격리 수용됐다.

 

전쟁부도 산하 기관으로 병영활동감독위원회(Commission on Training Camp Activities)를 신설해 성병에 걸린 병사들의 애국심을 문제 삼는 방식의 절제 촉구 캠페인으로 성적 활동을 제어하려고 애썼다. 병영활동감독위원회(CTCA)는 훈련소에 독일군의 총탄이 창녀보다 깨끗하다”, “성병 걸린 병사는 반역자다같은 문구를 적은 포스터를 붙였다. 위원회에서 발행한 한 팸플릿은 임질에 걸린 더러운 몸으로 어떻게 국기를 마주볼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병사들의 성병 감염률은 일부 인사들이 우려한 것처럼 급속히 높아지지는 않은 반면, 군기지 인근 거주 여고생의 임신율은 급속히 높아졌다.

 

1차 대전 때 유럽원정군(American Expeditionary Forces/AEF) 사령관을 맡은 존퍼싱 장군은 프랑스에 도착하자 장병들에 대한 감시의 끈을 조였다. 이는 알고 보니 전쟁터에서 독일군을 무찌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병영활동감독위원장 레이먼드 포스딕은 프랑스와 미국의 성에 대한 태도 차이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가 보기에 프랑스는 군대란 성적 쾌락이 없으면 잘 굴러가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성적 쾌락을 용인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도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자칫 사기와 건강 수준이 저하되거나 항명 사태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는 미군에게 당국이 허가한 창녀촌을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프랑스군에는 이미 그런 시설이 있었다. 그런 제안을 담은 클레망소의 서한을 받은 전쟁장관 뉴턴 베이커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맙소사.····· 이거 대통령한테는 보여주지 말게. 안 그러면 참전을 중단하실 거야.”

 

성병에 걸리지 말라는 온갖 경고도 소용이 없었다. 병에 걸린 병사들은 격리됐다. 도덕적 개혁가들은 참전 군인들이 고향에 돌아와 미국 여성들에게 병을 퍼뜨리는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우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개혁가들은 흔히 프랑스식이라고 하는 오럴섹스의 맛을 본 군인들이 순진한 미국 처녀들에게 그런 문화를 퍼뜨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전쟁부 소속 비뇨기과 군의관 조지 워커 대령은 당시의 고민을 이렇게 토로했다. “수만, 수십만 젊은이들이 퇴폐적인 사상에 물들어 미국에 돌아온다. 본인들의 자존감이 저하되는 것은 물론 도덕적 저항력조차 약해질 것은 뻔하다. 그런 상황은 당연히 걱정스럽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6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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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 파리 코뮌 - 민중의 함성
자크 타르디 지음, 홍세화 옮김, 장 보트랭 / 서해문집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51일 노동절이 되면 집회에서 항상 부르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시작은 일어나라!’로 시작하여 끝은 인터내셔널로 끝난다. 바로 인터내셔널가(The Internationale). 이 노래는 대다수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불린 대중음악으로 지금도 각종 시위 현장에서 불리고 있다. 이 곡이 대중적으로 불리게 된건 1888년이었지만, 처음으로 작사된 것은 1871년이었다. 1871! 이 해의 프랑스 파리는 역사가 새로 쓰였다. 바로 2개월간 지속되었던 파리코뮌(La Commune de Paris)이다.

 

1870년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는 잘 훈련되고 규율 있던 프로이센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비스마르크가 요구하는 것들을 들어주어야만 했고, 비스마르크의 군대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그리고 18711월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른바 통일된 독일 제2제국을 선포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프랑스 정규군과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의 모습을 본 파리의 시민들은 이들에게 맞서 스스로 무장하여 봉기했다. 이것이 바로 파리코뮌이었다.

 

2개월간 지속되었던 파리코뮌에서 봉기한 시민과 노동계급은 선거를 통해 시 전역을 통괄하는 민중 주도의 새로운 입법, 행정 정부를 구성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개혁들을 실시해나갔다. 비스마르크 군대로부터 대포와 탄약을 지원받은 프랑스 정규군의 고립 속에서도 코뮌속의 민중은 민주주의와 평등사회 그리고 진보사회를 위해 싸웠다.

 

파리코뮌이 전 세계에 보여준 엄청난 변화였다. 19177월 봉기 이후 핀란드로 망명했을 당시 레닌이 쓴 저서 국가와 혁명을 읽어보면 칼 마르크스가 1871년의 봉기를 지지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이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 혁명운동이 매우 중요한 역사적 시도이자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에서 일정한 진보이며, 수백의 강령과 논의보다 더 중요한 실천적 일보라고 보았다.

 

사회주의 이론가 칼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파리코뮌은 사회주의 역사 그리고 인류 역사에 있어 진보적 전진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코뮌은 프랑스 정규군의 잔혹한 학살극으로 마무리가 됐다. 자주적이고 진보적이었던 노동계급의 코뮌은 권력과 침략군에 굴복한 프랑스 정규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다. 프랑스 정규 군대의 진압에는 최신식 대포가 동원되었다. 또한 7만 명 이상의 진압군대가 동원되었다. 그 결과 코뮌에서 시민과 노동계급 최소 2만 명이 학살당했다.

 

서해문집 출판사에서 출간한 이 책은 현재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설국열차(Snow piercer)의 원작자인 자크 타르디가 쓴 만화책이다. 책에서 중심적으로 전개되는 내용은 한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와 한 개인의 복수를 향한 여정일 수도 있다. 물론 책은 그 과정 속에서의 코뮌과 그 코뮌속의 개개인들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또한 코뮌이 어떠한 열정에 차 있었는지도 생생히 느끼게 해준다. 부패한 관리들, 평등한 세상을 바라는 코뮌의 민중들, 비참한 사회에서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하지만 총을 들고 코뮌에서 싸웠던 파리의 매춘부들 그리고 진압군이었지만 항복하여 코뮌에 합류한 군인들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개된다.

 

1871년의 파리코뮌을 얘기하면 우리에게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이다. 1979년 박정희가 살해된 뒤, 잠시나마 있던 서울의 봄은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대학생들을 광주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면서 다시 군사독재라는 지적 사상적 암흑의 터널로 들어갔던 역사가 우리에겐 있기 때문이다. 비록 파리코뮌보다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1980518일부터 27일까지 대략 10일간 광주 시민들은 무차별 학살과 폭력을 휘두르는 계엄군에 맞서 카빈 소총을 들고 싸웠다.

 

광주항쟁에서 계엄군의 총과 탱크에 맞서 싸웠던 이들 대부분이 민주주의를 원했던 학생들과 노동계급 그리고 시민들이었다는 점에서 1871년 프랑스의 파리코뮌의 혁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1871년 프랑스 시민들의 투쟁이 1980년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총을 들고 저항을 했던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민중들을 떠올렸다. 이랬기에 책의 내용이 더 와 닿을 수 있었다. 1871년의 프랑스 파리 그리고 1980년의 대한민국 광주. 이 투쟁이 연결되어 보이는 것은 아마 앞에서 설명한 그 유사성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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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유행했을때 나온 만화에요. 즐겁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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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역에서 패배했지만 적(프랑스군)은 여전히 상황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그들은 디엔비엔푸를 쉽게 점령한 나머지우리가 그곳을 공격할 만큼 강하지 않다고 여겼다집단전술기지가 매우 강력하게 구축된 데다디엔비엔푸와 아군의 후방지역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베트남 콘툼성, 콘툼성은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다. 이 지역은 이후 미국이 치른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과 미군이 결전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된다.)

 

적은 우리가 여러 전선에 걸쳐 공격을 진행중이므로디엔비엔푸에 대한 공격을 주저할 것이고보급의 어려움을 안고 있으므로 조만간 북서지방으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우리가 일련의 문제를 감수하고 그들을 공격하더라도우리 정규군의 일부를 격멸하고 뚜언자오(Tuần Giáo)와 손라(Son La)를 점령하여 최종적으로 나산(Nà Sản)에 복귀하는 기존의 계획을 이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안케 전투 당시 베트민군과 교전을 하고 있는 프랑스군과 장갑차)

 

적이 15개 대대를 동원해 1954년 1월 20일부터 제5연합구역 내에 위치한 푸옌(Phú Yên) 남부에 공세를 전개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었다아틀랑트 작전으로 명명된 이공세는 나바르 계획의 전략적 공세로중부의 남쪽지역에 있는 모든 해방구의 점령이 목적이었다적이 우리 해방구를 공격했음에도불구하고5연합구역의 우리 군대는 가장 결연하게 그들의 계획을 이행했다적에 대항하고 우리 후방지역을 엄호하기 위해 후방에 극소수의 부대만 남겨놓고주력은 적이 상대적으로 노출된 전략적 요충지역인 떠이응우옌(Tây Nguyên)을 점령했다.

(전투에서 손실된 프랑스군 탱크, 손실된 탱크가 M4 셔먼인걸로 봐선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것으로 보인다.)

 

공세는 1954년 1월 26일에 시작되었다다음날우리는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지방인 망덴(Măng Đen)구역을 확보했다뒤이어 닥또(Dacto) 초소를 무너뜨리고콘툼성의 모든 북부지역을 해방시켰다. 2월 5우리는 콘툼시를 해방시키고 적을 떠이응우옌 북부에서 밀어내어 9번 국도까지 전진했으며한편으로는 플레이쿠(Pleiku)시를 공격했다적은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제5연합구역에 대한 공세를 멈춰야 했다그리고 떠이응우옌의 남부에 위치한 일련의 요새와 플레이쿠시에 병력을 증원하여 우리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프랑스 부대들이 중부 라오스와 빙찌티엔에서 철수했다.

(당시 전투에 투입되었던 베트민군)


콘툼의 승리는 동춘 전역에서 거둔 우리 인민과 군의 또 다른 위대한 성공이었다우리는 제5연합구역에서 적의 꽝남성꽝응아이성에 대한 위협을 불식시켰으며떠이응우옌 북부에 16에 달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해방시켰다우리 해방구는 꽝남과 꽝응아이 해변에서 베트남-라오스 국경선까지 확장되어해방된 라오스의 볼라벤 고원지대와 연결되었다이번 승리는 당중앙위원회 지도 원칙의 가치를 전적으로 입증시켜주었다적은 점점 더 수세로 몰려갔다적은 중부 라오스 중원을 위해 북부 삼각주의 병력을 전환시키고이후에도 라오스 방면과 빙찌티엔에서 떠이응우옌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안케 전투 승전 기념 행사, 2015년 베트남에서 열린 행사 같다.)

 

적은 제5연합구역을 공격점령할 목적으로 전투력을 집중시켰으나이제 우리 공세에 맞서기 위해 계획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적은 병력을 집중시키기를 원했으나계속 분산을 강요받았다플레이쿠와 떠이응우옌 남부에 있는 일련의 요새들은 프랑스 부대들이 몰려드는 4번째 지역이 되었다떠이응우옌에 대한 아군의 공격은 승세를 타고 1954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우리의 대성공 중에는 한국에서 막 돌아온 제100기동연대를 각개격파한 안케의 승리도 포함되었다우리는 안케를 해방시키고 많은 차량무기와 탄약을 노획했다.

 

출처 디엔비엔푸 p.439~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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