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박정희 정부가 단행한 월남 파병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과는 달리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을 단행했는데, 이 경제개발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 바로 월남 파병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군대를 파병했던 베트남 전쟁은 국제적으로 너무나도 많은 비난을 받는 전쟁이었고, 미국의 참전명분이 너무나 없는 전쟁이었다. 즉 이러한 전쟁에 박정희는 돈을 벌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월남 파병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어째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일까?
(작전지역에 있는 한국군)
사실 한국 정부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이 요청해서 간 것 보다는 한국이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1961년 11월 11일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박정희는 11월 14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백악관에서 1시간 20분 동안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여기서 박정희는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할 용의가 있다.”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밝혔다. 미국에서 한국의 베트남 파병을 보다 수용하게 된 것은 케네디가 암살 이후 등장한 린든 B. 존슨 정부에서였다. 린든 존슨 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계획하던 1964년 7월 30일 박정희 정부는 국회본회의에서 ‘베트남 공화국 지원을 위한 국군부대의 해외파병 동의안’을 제출시켜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전투부대 파병이 단행된 것이다.
한국은 그 이전부터 이미 남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한 상태였다. 1963년 9월 11일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았던 박정희는 1964년 130명 규모의 의무부대와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보냈고, 같은 해 2천명 규모의 비전투부대인 공병대 중심의 병력을 보냈다. 미국의 존슨 정부가 더 적극적인 개입을 한국에 요청하자 한국 정부는 곧바로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했고, 1965년 10월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 완전히 철수하는 시점까지 총 8년 5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총 30만 명 이상이 참전했고, 상시적으로 5만 이상의 병력을 남베트남에 주둔시켰다. 베트남에 파병된 부대로는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 십자성 부대, 비둘기 부대 그리고 주월사 백구 공군지원단 등이 있었다. 이중에 전투부대는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그리고 백마부대가 있었다.
(파병가기 전 박정희와 악수하는 한국군)
베트남에 전투부대 파병은 미국 측이 파병의 대가로 한국군의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공여를 약속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베트남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보상조치로 14개항으로 이루어진 <브라운 각서>를 마련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추가파병에 따른 비용은 미국정부가 부담한다.
2. 한국군 육군 17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사단의 장비를 현대화 한다.
3. 베트남 주둔 한국군을 위한 물자 용역은 가급적 한국에서 조달한다.
4. 베트남에서 실시되는 각종 건설·구호 등 제반사업에 한국인 업자를 참여시킨다.
5. 미국은 한국에 추가로 AID 차관과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베트남과 동남아시아로의 수출증대를 가능케 할 차관을 추가로 대여한다.
6. 한국이 탄약생산을 늘리는 데 필요한 자재를 제공한다.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 초기 논리적 차원에서 “과거 6.25전쟁 기간 중에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이 한국에 군대를 파견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월남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이에 보답하려는 의무감”을 강조했고, 더 나아가 국가안보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1967년 1월 17일 대전에서의 유세에서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솔직한 이야기를 하자면 만약 우리 한국군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당시의 내 추측으로는 주한미군 2개 사단이 베트남으로 갔을 것이다. 당시 베트남, 미국 정부가 한국군을 보내달라고 했을 때 우리가 보내기 싫으면 안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미군 2개 사단이 갔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박정희 이러한 논리로 한국의 베트남 파병을 옹호하고 추진했다. 이러한 박정희의 행위는 당연히 미소냉전에서 극대화된 반공주의(Anti-Communism)의 논리였다. 이것과는 별개로 한국 정부가 베트남 파병에서 벌어들인 경제적 이득은 막대했다. 수많은 한국의 기업들이 남베트남에 진출하여 돈을 긁어모았고, 직접적인 현금 수입만 2억 360만 달러라는 추정이 있을 정도다. 이른바 월남 특수라는 것이 있었는데 한진그룹이나 현대그룹 같은 재벌이 바로 이 과정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경험은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의 해외 건설 특수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국군 사진, 아이를 들고 있는게 인상적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은 베트남 파병으로 적잖은 돈을 벌었고, 경제발전에 초석을 깔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베트남에 파병되어 한국 정부에게 돈을 마련했던 군인들의 대우는 어떠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우 열악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 파병 기간인 1966년에 6,949만 달러를 벌었고 이후 4년간 총액 6억 2,502만 달러 규모의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것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던 일본보다 더 적은 수익이었으며, 심지어 훨씬 더 적은 인원을 파병했던 호주나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그리고 대만이 벌어들인 수익보다도 적거나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당시 한국이 월남 파병에서 벌었던 총액 10억 달러는 고작 30명을 베트남에 파병했던 대만보다 약간 더 돈을 번 수준이었다. 브라운 각서의 주인공인 주한 미 대사 브라운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베트남에 파병한 한국의 이득은 파병하지 않은 일본보다 적고 대만보다는 약간 많은 정도이다.”
당시 전투부대로 파병된 군인들의 월급을 보면 그러한 모순점들은 아죽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한국군 사단장인 소장이 미국으로부터 받는 월급여가 354달러인 반면, 필리핀군과 태국군의 소대장인 소위는 각각 매월 442달러, 389달러를 받았다. 심지어 일반 사병들의 경우는 남베트남군의 월급여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고, 한홍구 교수는 주장한다. 주월한국군 1인당 유지비가 연간 5천 달러인 반면, 미군 1인당 유지비는 1만 3천 달러였다. 앞에서 언급한 사병들의 월급을 비교하자면, 1967년 기준으로 미군 상사의 월 보수액이 402.25달러, 필리핀이 284.8달러, 태국이 266.39달러인데 반해 파월 한국군 상사는 102,5달러에 불과했다. 하사의 경우 미국이 333달러, 필리핀이 279달러 그리고 태국이 257달러인데 반해 한국군은 82달러밖에 안 됐다. 즉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월급은 미군의 1/5, 필리핀이나 태국군의 1/3밖에 되지 못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총에 태극기를 달고 있는 한국군)
이처럼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 군인의 대우는 참으로 형편없었다. 한 마디로 착취에 시달린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거기다 참전한 이들 중 적잖은 수가 미군이 무차별적으로 살포한 고엽제에 노출되어 지금까지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거기다 이런 참전 과정속에서 한국군은 베트남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대략 9,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고, 5,000명에서 10,000명 이상의 라이따이한이 태어났다. 특히나 민간인 학살은 워낙 잔인해서 학살당했던 곳에 증오비나 위령비가 세워질 정도였다.
주월한국군사령관이던 채명신 장군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정책을 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나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설정해놓은 자유사격지대에서는 그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상관이 없었다. 즉 민간인 학살은 이런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1966년 5월 25일 주월한국군사령부가 발간한 전훈집에는 “부락은 모든 적활동의 근거지”이며, “게릴라의 보급, 인적자원 및 정보수집의 근원은 부락에 놓여 있으며 베트콩 하부구조의 기반은 부락과 주민이다”라고 강조했다. 쉽게 말해 민간인 학살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한국 군대가 만들어 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민간인 학살 현장에 참여했던 베트남전 참전용사 류진성씨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내놓았다.
“전통적으로 ‘킬러 컴퍼니(Killer Company)’라는 부대가 있습니다. 살인 중대! 그 살인 중대가 지나가는 곳에는 지나가면 생명체는 없습니다. 그게 킬러 컴퍼니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야수들의 놀이터가 바로 전쟁터입니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에서 발발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이러한 구조와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거기다 박정희가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이미 미국이 명분에서조차 호치민에게 진 전쟁이었다. 그 이유는 <전환시대의 논리>저자 리영희가 말하듯이, 베트남 전쟁은 1세기에 걸친 항불전쟁 즉 독립전쟁의 연장선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과 한국군이 적으로 규정한 베트콩들은 사실 자신들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이 독립투쟁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이었다. 즉 남베트남 정권은 펜타곤 페이퍼가 설명한 것과 같이 미국의 창조물이었고, 초대 대통령 응오딘지엠 또한 미국의 꼭두각시였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국제적으로 비난받을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고, 그런 전쟁에 한국은 돈을 벌기 위해 참전한 것이다.
(1965년 퀴논에 도착한 한국의 맹호부대)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경제부흥의 기회를 얻었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베트남 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의 기회를 얻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결국 월남파병의 경제성장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에 저항하던 베트남 인민의 피와 한국 피지배계급의 피를 먹고 탄생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경험에서 한국 사회가 전쟁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전 세계적인 혁명의 물결에서 한국은 역으로 반공주의가 강화되었고, 반전운동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집필하여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렸던 기자 리영희 또한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정도다. 결국 이러한 비극이 2003년 한국의 이라크 파병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참고문헌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창작과비평사, 1999
『대한민국사 2 아리랑 김산에서 월남 김 상사까지』, 한홍구, 한겨레신문사, 2003
『박정희 평전』, 전인권, 이학사, 2006
『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 김삼웅, 가람기획, 2010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레출판, 2015
『박정희 평전』, 김삼웅, 앤길, 2017
『마르크스주의로 본 한국 현대사』, 한규한, 책갈피, 2018
「Ghosts of the Vietnam War - BBC News」. 2020.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