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초가 되자 전쟁의 잔학성이 많은 미국인들의 양심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문제는 이 때쯤이면 미군 병사 4만 명이 사망하고 25만 명이 부상당했음에도 도무지 끝도 보이지 않는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베트남인 사상자는 이보다 몇 배나 많은 수였다.)

 

린든 존슨은 야만적인 전쟁을 확대시켰지만 승리하는 데는 실패했다. 존슨의 인기도는 사상 최악이었다. 존슨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간에 그 자신과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LBJ(린든 B. 존슨의 머리말을 딴 별칭), LBJ, 오늘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죽였나?”라는 연호가 전국 곳곳의 시위에서 울려 퍼졌다. 1968년 봄, 존슨은 자신이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지 않을 것이며 베트남 측과 파리에서 평화협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68년 가을,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에서 손을 떼겠다고 약속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닉슨은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19722월에 이르면 15만 명도 안 되는 병력만이 남게 됐다. 그러나 폭격은 계속됐다. 닉슨의 정책은 베트남화(Vietnamization)-사이공 정부가 미국의 자금과 공군력을 이용해서 베트남 지상병력으로 전쟁을 계속 이어간다는 정책-’였다. 닉슨은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가장 평판이 나쁜 측면, 즉 이국만리의 땅에서 미군 병사들이 교전을 벌이는 상황만을 종식시켰던 것이다.

 

대중에게 결코 공개하지 않은 캄보디아에 대한 오랜 폭격이 울어진 뒤인 1970년 봄, 닉슨과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이 나라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침공은 미국 내에서 강력한 항의를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실패작이었으며, 하원은 닉슨이 의회의 승인 없이 전쟁을 확대하는데 미군 병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의했다. 이듬해 미국은 미군을 참전시키지 않는 가운데 베트남의 라오스 침공을 지원했다. 이것 또한 실패작이었다. 1971년에 미국은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에 80만 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한편 오랫동안 이어온 사이공 국가수반의 마지막 계승자인 응웬반티우(Nguyen Van Thieu)가 이끄는 사이공의 군사정권은 수천 명의 반대파를 감옥에 가둬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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