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자들은 징병명부 등록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소집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일찍이 19645월부터 우리는 가지 않겠다라는 구호가 널리 알려졌다. 징병 등록을 한 젊은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공공장소에서 자신들의 징병카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인 데이비드 오브라이언(David O’Brien)은 사우스보스턴에서 자신의 징병카드를 불태웠다.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고, 대법원은 자신의 행동은 헌법으로 보호받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된다는 그의 주장을 기각했다. 196710월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조직적인 징병카드 반납운동(turn-ins)’이 벌어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만도 300장의 징병카드가 정부에 반려됐다. 같은 달에 국방부 앞에서 거대한 시위가 있기 직전에 수합된 징병카드 한 부대가 법무부에 제출됐다.

 

1965년 중반까지 380명이 징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소됐고, 1968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 숫자가 3,305명에 달했다. 1969년 말에는 전국적으로 징병거부자가 33,960명에 이르렀다. 19695월 캘리포니아 주 북부 전역의 징병대상자들이 출두하는 곳인 오클랜드 병무청은 4,400명에게 징병 소집장을 보냈으나 2,400명이 응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1970년 일사분기에는 선발징병제도가 부활된 이래 최초로 할당수를 채우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보스턴 대학 역사학과 대학원생인 필립 서피나(Philip Supina)196851일에 애리조나 주 투산(Tucson)의 병무청에 편지를 보냈다.

 

징병을 위한 사전 신체검사 출두명령서를 동봉해 보냅니다. 나는 그런 신체검사나 징집명령, 아니 베트남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미국의 행위 자체에 어떤 식으로든 협조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서피나는 스페인의 철학자 미겔 우나무노(Miguel Unamuno)가 스페인 내전 중에 한 말을 인용하면서 편지를 마쳤다. “때로는 침묵이 거짓말이다.” 서피나는 유죄를 평결받고 실형 4년을 선고받았다.

 

전쟁 초기에 대다수 미국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두 사건이 있었다. 1965112일 늦은 오후, 수천 명의 직원들이 몰려나오던 국방부 건물 앞에서 32세의 평화주의자로 세 아이의 아버지인 노먼 모리슨(Norman Morrison)이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3층 사무실 창문 바로 밑에 서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임으로써 전쟁에 저항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같은 해 디트로이트에서는 앨리스 허즈(Alice Herz)라는 82세의 여성이 인도차이나의 참사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했다.

 

놀라운 감정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던 1965년 초에는 보스턴 공원에 100명이 모여 분노를 표출했다. 19691015일에는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보스턴 공원에 모인 사람이 10만 명에 이르렀다. 그날 전국 곳곳의 도시와 마을에서 약 200만 명이 집회를 가졌는데, 이곳들 대부분은 한번도 반전집회가 열린 적이 없는 곳이었다.

 

1965년 여름 몇 백 명의 사람들이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행진을 벌였다. 맨 앞줄에 있던 역사학자 스토튼 린드,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의 조직가 밥 모지즈, 노련한 평화주의자 데이비드 델린저(David Dellinger)등은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붉은 페인트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970년에 열린 워싱턴 평화집회에는 수십만 명이 참여했다. 1971년에는 2만 명이 시민불복종을 행동에 옮기기 위해 워싱턴으로 집결, 베트남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살육에 대한 혐오감을 표명하기 위해 워싱턴의 교통을 마비시키려고 했다. 이 때 연행된 1,400명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자원자 수백 명도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칠레에서는 평화봉사단원 92명이 단장의 지시를 무시하고 전쟁을 비난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평화봉사단원을 지낸 800명도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시인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은 백악관 행사에 초대받았지만 참석을 거절했다. 아서 밀러(Arthur Miller) 역시 초대받았지만 참석하지 않고 총성이 울리면 예술은 죽는다라는 전보만 보냈다. 백악관 잔디받에서 열린 오찬에 초청된 가수 어사 키트(Eartha Kitt)는 영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모든 참석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대통령상 수상자로 백악관의 초청을 받은 한 십대는 수상식 자리에서 전쟁을 비판했다. 할리우드의 미술가들은 선셋 대로에 18미터 높이의 항의의 탑(Tower of Protest)을 세웠다. 뉴욕에서 열린 전국출판대상(National Book Award) 수상식에 참석한 50명의 작가와 출판인들은 험프리 부통령이 연설하는 도중에 그가 전쟁에서 행한 역할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런던에서는 미국 젊은이 두 명이 미국 대사가 주최한 독립기념일 만찬장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건배를 외쳤다. “베트남에서 죽은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그들은 경비원들에게 쫓겨났다. 태평양에서는 두 명의 젊은 수병이 타이의 공군기지에서 폭탄을 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미군 군수품 수송선 한 대를 납치했다. 두 수병은 배가 캄보디아 해역에 다다를 때까지 잠들지 않으려고 각성제를 먹으면서 나흘 동안 수송선과 승무원들을 지휘했다. 1972년 말, AP통신은 펜실베이니아 주 요크로부터 이렇게 보도했다.

 

오늘 주 경찰이 반전운동가 5명을 체포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되는 폭탄 외피를 생산하는 공장 근처의 철도시설을 파괴했다고 한다.”

 

행동주의에 익숙하지 않은 중간계급과 전문직 종사자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19705, 뉴욕타임스는 워싱턴발로 제도권변호사 1,000, 반전시위에 동참이라는 머리기사를 내보냈다. 대기업들 역시 전쟁이 자신들의 장기적인 기업 이익을 저해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는 전쟁을 지속하는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가 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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