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의 만주는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이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시작한 만주사변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만주에 들어왔고, 1932년이 되었을 당시 일본은 만주 전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부터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던 중국 공산당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적극 항전을 주장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결코 적진 않았다. 이들의 저항이 결코 작지 않았기에 일본군은 1932년 간도에서 대유격전을 시작했었고, 일본군의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졌었다.

(민생단 사건 당시 민생단 관련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김일성, 북한에서 만든 상상화인 것 같다.)
일단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에 일본군에 의해 죽은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 대략 2만 5,00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 수치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분명한건 일본군에 의한 무자비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 만주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 북한에서 <피바다>라는 가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간도에서 대유격전을 전개했던 일본군은 당시 만주에서 창설한 친일단체인 민생단을 이용했었다. 민생단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조선인을 앞세워 만든 친일단체였다. 한마디로 일제의 어용단체였던 것이다.
1932년 10월 공산 유격대에 있던 송영감이라는 자가 민생단의 일원인 것이 밝혀졌다. 간첩행위가 들통나 유격대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 그는 일본이 부여했던 임무까지 다 털어놓았다. 이에 따라 동만특위 서기 동장잉은 즉시 송영감 사건의 전말을 옌지·허룽·왕청·훈춘 등 젠다오 4현에 알리고 ‘민생단 색출’을 지시했다. 이것이 바로 민생단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에 따라 젠다오 전역에는 반민생단투쟁이라는 광풍이 불어 닥쳤다. 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희생자가 되었다.

(민생단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 지부의 명령)
반민생단투쟁이 가속화되면서 숙청의 범위는 유격대 근거지 내의 일반 조선인들도 확대되었다. 민생단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다양했다. 그 중에는 너무 터무니 없는 것들도 많았다. 심지어 일본군이 공산당 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민생단 숙청 사업은 멈추지 않았다. 일제의 토벌과 동만특위의 민생단 학살로 근거지의 군중 수는 1933년 2만여 명에서 1934년 봄에는 4,000명에서 5,000명 수준으로 급갑하기에 이르렀다. 반민생단투쟁 당시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감옥에 갔었던 한 조선인 유격대 지휘관이 있었다. 그가 바로 북한의 김일성이다.
1912년에 태어난 김일성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20살의 나이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김일성은 10대 시절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탐독했었던 열혈 사회주의 청년이기도 했었다.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 있던 중국공산당은 구국군으로서 항전했는데, 당시 조선인 당원들도 거기서 활동했다. 1932년 봄 김일성은 안투(安图)에서 구국군 사령부대에 속하는 별동대로서의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 이것이 김일성이 최초로 조직한 항일 유격대였다.

(동북항일연군, 1936년 당시 찍은 동북항일연군 사진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민생단 사건 이후 1935년 코민테른 지령에 따라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1933년 2월은 김일성은 왕칭(왕청)현의 유격근거지 마춘으로 나아가 부대와 함께 이른바 왕칭유격대에 합류했는데, 그는 여기서 왕칭유격대대의 정치위원이 되었다. 여기에는 김일성이 중국인 중학교에 다닌 경력이 힘을 발휘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가 왕칭유격대의 정치위원으로 발탁된 것은 1933년 6월이었다. 또한 3개월 뒤 김일성은 둥닝 전투(둥닝현성 전투라고도 불림)에서 구국군의 스중헝과 스중헝의 부대를 구출하는 전공을 만들었다. 그 이후 김일성은 중국 최고의 지도자들의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김일성 또한 반민생단투쟁의 광풍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김일성 또한 민생단원으로 몰려 정치위원직에서 해임되고 투옥되었었다. 물론 감옥생활은 길지 않았고, 단기간에 풀려날 수 있었다. 김일성이 단기간에 풀려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구국군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반민생단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은 억울한 숙청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사령관 스중헝은 “김일성 같은 위대한 인물”이 “일본의 주구”일 리가 없다고 단언했고, 김일성이 유죄선고를 받으면 자신의 유격대를 이끌고 중국 공산당을 떠나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둥닝전투에서 스중헝을 구출해줬던 김일성은 당연하게도 살아남았고, 박탈당했던 정치위원직을 회복했다.
반민생단투쟁사건으로 조선인 431명이 밀정 혐의를 받고 억울하게 처형됐다. 반민생단투쟁으로 동만주 한인들의 유격투쟁은 크게 위축되었고, 그런 가운데 남만주에서는 1933년 기존의 유격대들을 모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가 건립되었다. 이 부대의 규모는 최소 300명 정도였고, 사장은 중국인 양정우, 참모장은 조선인인 이홍광이었으며, 부대의 1/3은 조선인들이었다. 또 동만주에서도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성립되었으며, 사장은 조선인인 주진이 맡았으며, 병력의 2/3는 조선인이었다. 또한 북만주의 밀산에서도 1934년 밀산유격대와 중국의용군이 통합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이 편성되었다.
1934년 6월 김일성은 동만의 유격대를 통합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저우바오중의 수녕반일동맹군 그리고 구국군과 함께 나자구 전투에 참가할 때 지휘부의 일원으로 복귀했으며, 그해 9월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3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그가 민생단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된 시점이었다. 이후 김일성은 1935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어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35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7차 대회 보고 이후 공산당의 정치노선이 이른바 반파시즘인민전선전술로 바뀌면서 이에 영향을 받았고, 민생단 사건도 최종적으로 종결되기에 이른다. 또한 여기서 김일성은 동만주 당의 지도자 웨이정민이 코민테른 중공당 대표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개성적이고 역량있는 공산당 간부로서 주목받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참고문헌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끼, 남기정(역), 창비, 2014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역), 현실문화,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