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동구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는 냉전의 종식을 의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래로 미국과 소련의 대립체제였던 냉전은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거나 자본주의적 대안을 받아들이면서 사라졌는데, 이는 현실 사회주의권 중 하나였던 북한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북한은 온갖 자연재해와 UN의 경제제재 그리고 김일성의 사망을 거치면서 경제가 매우 열악해졌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다.
1990년대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300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통계 및 연구결과에 따르면 아사자의 수치는 43만 명이라고 한다.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 사후 아들 김정일이 북한의 권력을 계승한 이후인 1999년에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명칭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명칭으로 북한의 초대 지도자인 김일성이 항일투쟁 과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항일 유격대를 이끌었던 김일성은 1938년과 1939년 대략 1년간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으며 행진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현재 우리가 아는 북한의 김일성은 일본의 만주침략이 시작되던 시점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 항일투사의 삶을 걸었던 인물이다. 김일성은 1932년 봄에 자신의 첫 번째 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고 한다. 서대숙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시기 김일성은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수백 명의 한인 빨치산들이 1937년과 1940년 사이에 만주 및 북한에서 있었던 일본군과의 수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바 있다.”라고 서술했다. 또한 역사학자 한홍구도 김일성이 매우 명성이 높은 항일투사였으며, 1930년대 시기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이 국내에서 명성을 떨친 것은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해인 1937년 이른바 보천보 전투를 감행하면서 부터였다. 물론 보천보 전투 그 자체는 김일성 본인이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 표현했듯이, 전투성과로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 어려운 시기에 국내로 진격하여 유격전을 전개한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던 전투였다. 이 소식은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 크게 보도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김일성은 항일투사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1945년 10월 소련군정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지원을 받아 평양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김일성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 이유는 전설적인 인물 김일성이 너무나도 젊었기 때문이었다. 즉 이 시점에서만 보더라도 김일성은 분명히 전설적인 항일영웅으로써 명성을 떨쳤던 것이다.
1937년 보천보 전투를 치른 이후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은 간삼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중일전쟁 개전 이후인 1938년 일본군이 이들에 대한 토벌을 강화하면서 김일성과 그의 항일 유격대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37~38년 동북항일연군은 동만주와 남만주 그리고 북만주 각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당시 동북항일연구의 규모는 1,850명이었는데,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이들 중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억압과 회유에 못 이겨 전향서를 쓰기도 했다. 이처럼 중일전쟁 개전 초기는 김일성과 항일 유격대에 있어 아주 힘든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김일성 휘하의 항일 유격대가 얼마나 열심히 항일투쟁을 했는지 짐작을 해볼 만하다.
이와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토벌작전도 날이 갈수록 혹독해졌다. 일제는 집단부락을 건설하여 유격대를 민중들로부터 격리시켰고, 끈질긴 추격 작전으로 유격대원을 고전하게 만들었다. 특히 영하 수십도로 내려가는 겨울이 되면서 투쟁은 더 힘들어졌다. 1938년 12월부터 다음해인 1939년 3월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의 대규모 동계 토벌작전을 피해 힘겨운 행군을 계속해야 했는데, 이 과정이 바로 ‘고난의 행군’인 것이다. 대략 100여 일간 계속된 행군 속에서 김일성 부대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는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추격을 피하며 전투를 치렀다. 적잖은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궁극적으로 김일성 부대는 창바이현 북대정자에 이르러 일본군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쳤다.
와다 하루끼가 집필한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이 고난의 행군에는 다수의 소년대원들도 참가했다고 한다. 즉 김일성의 경호대원 가운데는 소년대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 소년대원과 김일성 사이에는 매우 굳건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며, 부족한 식량을 서로 나눠먹었다는 회상이 많다고 한다. 이때의 경호대원이나 소년대원으로는 10대였던 리을설, 리두익, 김철만, 전문섭, 김익현, 조명선, 오재원, 리종산 그리고 리오송 등이 있다. 이들이 바로 북한 정치에서 만주빨치산파로 남은 사람들이다. 즉 북한 정권 초기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이들은 김일성이 항일투쟁 과정에서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이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관동군과 만주군 그리고 경찰대로 구성된 7만 5,000명의 병력을 동원한 토벌작전을 수행했는데, 여기에는 김일성의 부대를 토벌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북한의 김일성이 1930년대 만주에서 얼마나 가열차게 항일투쟁을 전개했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김일성이 전설적인 항일영웅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근거가 마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추격을 피해 김일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 소련으로 넘어가 88특별여단에 배속되었지만, 당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김일성의 항일전력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다.
참고문헌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역), 일월서각, 1986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와다 하루끼, 이종석(역), 창비, 1992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끼, 남기정(역), 창비, 2014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역), 현실문화, 2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