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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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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전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박근혜 퇴진 집회 때였다. 박근혜 정권에 분노했던 나는 광화문 거리로 나갔고 거기모인 수많은 민중들과 함께 '박근혜 퇴진'을외쳤었다. 촛불집회에는 수많은 깃발들이 나부꼈지만 내눈에 정말 선명하게 보이는 한 인물이 그려진 깃발이 있었다.(그 깃발은 동국대학교에 속해있는 동아리나 단체였던 것 같다.) 그 깃발에 그려진 주인공은 1967년 볼리비아에서 혁명투쟁을 하다 토벌대에 체포되어 39살의 나이에 사망한 혁명가 체게바라였다.

볼리비아 토벌대는 체게바라가 혁명의 우상이 되는 것을 우려하여 시신을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묻어버렸다. 1968년 5월 혁명시기 프랑스 파리의 젊은이들은 3명의 혁명가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와 구체제에 맞섰다. 하나는 1949년 장제스 국민당을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미국의 침략과 남베트남 괴뢰정권에 맞서 투쟁하고 있던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었고, 또다른 하나가 바로 1958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바티스타 괴뢰 정권을 전복시킨뒤 높은 지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혁명을위해 볼리비아에서 투쟁하다 전사한 위대한 혁명가 체게바라였다.

68혁명을 시작으로 체게바라의 사진과 초상화는 점차 '저항의 상징, 젊음의 상징, 투쟁의 상징'으로 이미지화되었다. 전세계의 파업현장, 시위현장 심지어 체게바라가 죽기를 원했던 미국에서도 투쟁하는 민중들은 체게바라의 사진을 들었다. 제작년 대한민국에서 시작되었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도 마찬가지였다.

도데체 체게바라는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왜 수많은 사람들이 저항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것일까?

1.체게바라 일대기

체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티나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몸이 안좋아 2살때부터 천식을 앓았다. 그의 부모님은 공기 좋은 곳으로 여러번 이사했을 정도로 어린 체게바라와 그의 건강을 잘 보살폈다. 대학생이된 체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51년에 나이 많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 전역을 여행했고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남미여행을 한 체게바라는 여행도중 자본주의 체제아래 고통받는 남미민중의 현실을 깨닫고 1953년 의대를 졸업한 뒤 과테말라 혁명에 참가했다. 과테말라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죽을 위험에 처한 체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로 망명했다. 거기서 평생 동지가 될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고 피델 카스트로에게 감명받아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 전복을 위한 혁명"에 동참하게 되었다.

1956년 피델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 그란마호에 탑승하여 쿠바혁명을 위한 여정에 나섰다. 초반에 상륙했을 당시 바티스타 정규군의 습격을 받아 82명 중 20명만이 살아남았다. 체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일행은 정규군을 피해 밀림으로 숨었고 게릴라 전으로 정규군에 맞섰다. 미국의 앞잡이 바티스타 정권은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폭격기도 동원했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체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은 쿠바내에서 세력을 넓혀나갔다. 혁명군 안에서 체게바라는 지휘관이자 의사역할도 했고 마을 주민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등 민심을 잘 사로잡아나갔고 그들이 이끄는 혁명군은 나중에 가선 바티스타의 정규군 보다 세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혁명을 이끌던 체게바라는 배신자와 적군을 처단하는데 있어서 무자비하다 싶을정도로 살인을 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쿠바땅에 상륙한지 2년만인 1958년 12월 체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는 제 2군을 이끌고 쿠바 제 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하여 수도 아바나를 해방시켰고 1959년 최종적으로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다.

쿠바 혁명 이후 체게바라는 쿠바내에서 산업부 장관을 비롯한 온갖 고위직을 거쳤다. 1961년 체게바라와 카스트로는 미국이 주도한 피그스만 침공을 잘 막아냈다.1960년대 쿠바 외교부 장관을 지낸 체게바라는 1965년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다시 혁명의 길을 찾아 떠났다. 이후 그는 아프리카 콩고에서도 투쟁했고 마지막에는 볼리비아에서 투쟁했다. 볼리비아에서 투쟁하던 중 체포된 체게바라는 결국 토벌대의 어느 한 병사의 총에 맞고 처형됐다. 그의 나이 39이었다.

2.자본주의의 상품화와 우상화

체게바라는 죽고 난 뒤(위에서 언급했듯이) 68혁명 신좌파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는 죽은 뒤 저항의 상징이
됐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되기도 했다. 수많은 티셔츠와 물품에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의 얼굴은 지금도 혁명의 상징 저항의 상징으로 간주되면서 동시에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화폐를 통해서 소비할 수 있는 소비의 대상 혹은 상품이기도 하다.

드라마틱한 그의 혁명투쟁과 죽음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주고 불의에 저항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난 체게바라가 자신의 자본주의의 상품화가 되기 위해 투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체게바라 그는 자본주의의 체제아래 고통받고 독재정권 하에 억압받고 있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해 그리고 민중의 해방을 위해 혁명투쟁에 나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아주 드라마틱하고 영웅적인 죽음을 맞은 것이라 본다.

물론 난 투쟁에 나서는 이들이 상품화된 체게바라를 소비하는 것에 대해 나쁘게 보진 않는다. 상품화된 체게바라 또한 억압받는 민중의 자신의 권리와 민중의 해방을 추구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2011년 아랍의 봄때도 그랬고 2016,17년 박근혜 퇴진 집회때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3.글을 마치며

내가 이 책을 폈을 당시 박근혜 퇴진 집회가 시작되었을 시점이었다. 2년전(박근혜 퇴진 집회 이전이다.) 나는 혁명가 체게바라의 매력에 빠져 그에 대한 책을 여러권 읽었었고 그 중엔 장 코르미에가 쓴 체게바라 평전도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책을 읽으며 체게바라의 매력에 푹 빠졌었다. 특히 박근혜 퇴진 집회 시기 장 코르미에의 체게바라 평전은 나로하여금 박근혜 퇴진 집회에 나가도록 만든 책이었고 체게바라의 삶은 나에게 크나큰 감동을 줬다. 체게바라의 삶이 나에게 감동을 줬듯이 앞으로도 정의를 꿈꾸고 불의에 맞서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거라 본다.

Viva La Cuba!! Viva La Che Guev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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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이형석 옮김 / 신라출판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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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다. 책 자체는 요약본이지만 군주론의 핵심적인내용을 알기에는 충분했던것 같다.

내가 군주론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외할아버지께서 군주론을 읽어보라고 얘기해주면서 부터였다. 군주론도 철학 책인지라 매우 어려운 책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그리 어려운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이해한 군주론의 핵심을 얘기하자면 군주 자체가 아주 강력한 힘과 능력 그리고 자질이 있어야 하고 국가내의 민심을 잘 사로잡아야 하며 그래야 국가가 유지되고 타국을 정복하고 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성악설을 기반으로 서술되었다는 점과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이 결국 나폴레옹과 히틀러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악용이 되었다는 점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마키아벨리가 무슨 이유에서 군주론을 썻는지 그 시대상을 고려해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은 좋으나 좀 주의해서 읽고 너무 교조적으로 그 사상을 받아들이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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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서기실의 암호 - 태영호 증언
태영호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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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는 관심종자다. 현재 남북관계를 악화시켜 제놈 지갑이나 챙기려는 꼼수다. 그러니 이승만 찬양해대는 답없는 출판사 기파랑이라는 곳에서 책을 출판한 것이고 아직도 90년대 고난의 행군때나 얘기하며 일반국민들에게 왜곡된 정보를 던져주고 있다. 따라서 읽을 가치도 없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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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胤 郞 2018-11-25 0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보는 방향은 되려 비슷할겁니다.
그렇다해도 읽고 깝시다. 그리고 기파랑책 내 인생에 다시 읽을
일 없겠지만 그걸 빼도 이 책은 읽어보는게 맞다고 생각됨

NamGiKim 2018-11-25 03:13   좋아요 0 | URL
네 말씀 감사합니다.^-^
 
노무현 평전 - 지울 수 없는 얼굴, 꿈을 남기고 간 대통령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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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가족여행으로 외가쪽 친척들과 같이 필리핀 세부로 놀러가 놀고 있었다. 필리핀 세부에 있는 호텔에서 티비를 튼 뒤 채널을 kbs윌드를 틀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뉴스를 보게 됬다.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중학생 시절 대한민국 정치에는 전혀관심이 없었던 나는 노무현 대통령 사망 소식을 접했을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몇일 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선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을 티비로 보여줬지만 난 그 장례식을 보며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고 오히려 그 장례식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영상을 보기보단 딴 짓을 했다. 그래도 부모님(특히 어머니)께서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했기에 그 당시 난 노무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써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인간 노무현의 매력에 반하게 된건 대학교 새내기 때인 2014년이었다. 유튜브에 나와있던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을 봤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을 나로 하여금 노무현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노무현 연설을 통해 인간 노무현의 참모습을 알게된 나는 지금까지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2년전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님께서 쓰신 인물평전에 빠져 있었던 나는 노무현 평전을 읽었고 다시한번 인간 노무현에게 더 큰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1. 노무현 일대기

 

노무현은 1946년 경상남도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1953년에 진영 대창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6학년 때 전교 학생 회장을 맡았을 정도로 우등생이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 노무현은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하지만 형편이 매우 어려워 졸업은 간신히 했지만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청춘시절 노무현은 공부에 필요한 책을 살 돈이 없어 막노동으로 삶을 살아가다 부상당하기도 했지만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사법고시 예비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이후 그는 사법고시 시험에 매달렸지만 군대에 가야했고 그는 군복무를 무사히 마쳤다. 1973년 권양숙이랑 결혼했고 1975년 4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는 4번째 도전에서 이루어진 성과였고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에서 유일하게 고졸 출신 합격자였다.1978년 5월 무렵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이후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과 어울리며 요트를 즐기는 등 여유롭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를 거쳐서, 1985년에는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열기도 했다.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 본부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삼자 개입, 장식 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어 1987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재야 활동을 하던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88년 11월에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 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1989년 초 국회 5공 비리·광주 사태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 여부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이를 번복하고 사퇴서를 거둬들이기도 했다. 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기로 하는 3당 합당 선언을 하였다. 이에 노무현은 3당 합당을 '밀실야합'이라고 규정한 뒤 이에 반대했고 이후 노무현은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고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 등과 함께 민주당 (1990년)을 창당했다.

 

 

1995년 노무현은 통합민주당에 합류했다. 1997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노무현은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 몸담게 되었다. 노무현은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1년 12월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경선 레이스에 참여했다. 초반에는 이인제의 선출이 가장 높게 점쳐졌고, 노무현의 지지율은 정동영, 한화갑 등에게도 밀릴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당 내 '영남후보론'과 이인제의 당적 정체성을 공격하면서 이른바 노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역전승에 성공, 경선을 통과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선거 결과 70.8%의 투표율로 노무현 후보가 48.9%를 얻으면서 46.6%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2.3%(57만여 표) 차이로 근소한 차이로 꺾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03년 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으나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의 파병등 여러가지 문제로 난황을 겪다가 2004년 탄핵위기까지 겪었다. 2005년엔 북미관계가 악회되더니 2006년에는 북한이 핵개발을 했다. 노무현 정권기 국제 정세는 참 어렵게 지나갔다. 거기다 한미FTA 아파트 값 폭등으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도 적잖았다. 2007년 노무현은 임기를 얼마 안남은 상태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너무 늦었었다. 그로부터 2달 뒤 대선에서 이명박이 당선 되었고 대통령이 된 이명박은 전 대통령 노무현을 아주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 결과 진보성향에 가까운 한겨레나 경향신문마져도 그리고 진중권 마저도 노무현을 공격했다.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떠안고 2009년 5우러 23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 노무현 대통령의 긍정적인 점과 한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상고출신의 대통령이자 흑수저 출신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이 정의로운 나라가 되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무엇보다 그가 하는 멋진 연설에는 그의 진심이 담겨져 있다. 그런 진심이 담긴 사람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고 대통령 임기 후 그리고 노대통령 사망이후 그의 고향 봉하마을을 찾는 이들은 매우 많다. 물론 노무현도 대통령 기간동한 저지른 과오도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미국의 침략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했고 집권시기 아파트 값은 폭등했으며 한미FTA체결로 인한 불이익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은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꿈을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노무현은 우리에게 좋은 희망과 꿈을 심어준 대통령으로서 역사에 기리 남을 것이다.

 

3.노무현 대통령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난 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명박은 건국절을 수립하는가 하면 온갖 시대역행적인 짓을 일삼았다. 이명박 정권은 미국에게 아부했고 미국과의 관계를 통한 북한 고립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천안함 사건이 일어나고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다. 그 뿐만 아니라 1919년 임시정부의 법통론을 무시하고 1948년을 건국절로 기념함으로써 우리의 현대사를 왜곡하려 했다. 4대강 사업을 통해 그는 온 갖 부를 축적하고 낙동강의 환경을 오염시켰다. 그리고 2012년 이명박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명박 집권 이후 우리는 박근혜 집권이라는 너무나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4년을 보냈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이후 9년이라는 암흑의 세월이 있었지만 국민들은 촛불 혁명으로 박근햬 불통통치를 종식시키고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그리고 현재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을 이어받아 노무현 대통령때보다 더 잘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은지 오늘로써 9년이 되었다.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접했던 중학교2학년 짜리 아이였던 나는 현재 24살의 20대가 되었고 그의 평생 절친인 문재인이 대통령을 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나가고 있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이 정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노무현 대통령은 하늘 위에서 보면서 미소를 짓고 계시지 않을까? 대통령 노무현이 생각나는 하루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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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4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후기 잘 읽고 갑니다^^

NamGiKim 2018-05-24 10: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bookholic 2018-05-24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은 노무현입니다.

NamGiKim 2018-05-24 19:53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작년5월에는 봉하를 갔다왔지만 올해는 못갔습니다. 기회가되면 가야겠습니다.
 
전환시대의 논리 창비신서 4
리영희 지음 / 창비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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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박정희가 유신독재체제를 강화하던 1970년대 이성과 논리을 가지고 펜으로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리영희다. 해방 이후 월남하여 6.25 전쟁 당시 미군 통역장교로 참전한뒤 대한민국 군대에서 약7년간을 복무한 그는 당시의 미군 통역장교 출신들과는 다르게 미국의 팽창정책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그외의 보수정권에 맞서 싸운 몇 안되는 인물이다. 그는 언론사에 근무하는 언론인으로써,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써의 양심을 지킨 인물이다. 유신독재 시기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다 반공법 위반으로 2년간 감옥생활하기도 했다. 1974년 리영희 선생께서 쓴 책이 있었다. 그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전환시대의 논리'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전환시대의 논리는 수많은 사회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준 책이다. 평론가 진중권도 유시민도 그리고 현 대통령 문재인도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었고 전환시대의 논리가 그들과 같은 수많은 민주화운동가와 사회운동가에게 준 사상적 충격과 지식은 참으로 엄청났다.

 

필자가 리영희를 알게 된 것은 2년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찾아보다 리영희라는 이름을 발견하면서 부터다. 리영희의 이력이 궁금하여 위키피디아에 있는 리영희에 대한 문서를 단편적으로 나마 읽어봤고 현대사 인물 평전을 굉장히 많이 쓰신 김삼웅 선생님께서 쓰신 리영희 평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리영희 평전을 읽으면서 필자는 책 전환시대의 논리를 알게되었고 그 책을 읽게되었다. 유시민이나 진중권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받았을 만큼의 충격(혹은 그들이 느꼈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까지는)은 아니더라도 책 전환시대의 논리는 필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것 같다.

 

1. 중국혁명

 

박정희가 통치하는 한국은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는 백색파쇼국가였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았기에 공산주의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국가는 언제든지 나치스식 반공법을 적용하여 소위 빨갱이로 간주된 사람을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었다. 70년대 박정희 시대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1.4후퇴를 한지 30년도 안된 시점이었기에 6.25 컴플렉스가 지금보다 사회에 만연했었고 1920년부터 1949년까지의 중국 민중혁명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시대였다. 그런 암흑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자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중국혁명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서술했다. 리영희는 중국 혁명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맞서 싸웠던 마오쩌둥의 중국혁명을 있는 그대로 서술했다. 제1차 국공내전은 1920년대 장개석의 배신으로 시작되었다. 1931년 일본군의 만추침략에도 공산당 토벌에만 집착하여 중국의 영토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넘긴 장개석의 행동을 이 책에선 규탄 한다. 그리고 국민당군의 토벌에 맞서 유격적을 전개하고 대장정에 성공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혁명전쟁을 높게 평가했다. 1937년 시작 된 중일전쟁에서의 팔로군의 항일투쟁을 재조명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시작된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의 부패상을 책에 서술했다. 즉 이 책에선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를 매우 높게 평가한 것이다. 마오쩌둥하면 "북괴를 도와 자유통일을 방해한 존재"로만 인식하던 시기 리영희가 평가한 중국혁명과 마오쩌둥은 책을 읽은 젊은이들에게 사상적 전환을 시켜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2. 한,미 관계와 일본의 부상

 

저자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한,미 관계와 일본의 부상에 대해 다뤘다. 저자 리영희는 단순히 한미관계에 있어서"혈맹"만을 강조하는 단순도식화적인 논리를 거부하고 국가 대 국가의 관점에서 한미관계를 전망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한반도 상황을 미,일,중,소 4개국을 빼놓고 볼 수 없다 결론내렸다. 리영희는 경제력을 토대로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일본의 상황을 경계했다. 당시 리영희가 걱정하고 경계했던 일본의 자위대 창설과 군국주의 부활 및 미일동맹등은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것들이다. 즉 리영희는 그 당시부터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논하고 걱정했으며 젊은이들에게 깨우쳐주고자 노력했다.

 

3. 기자 풍토

 

언론인으로써 양심을 지키며 군사독재와 보수정권에 싸워온 리영희는 기자 혹은 언론인이 가져야할 덕목과 의무에 대해 마지막 장에서 서술했다. 1960,70년대 반공주의가 극에달하던 한국의 언론은 군사정권의 나팔수였다. 국가가 원하는 내용만 보도 했고 그에 조금이라도 반대되는 내용만 있으면 검열하기 쉽상이었다. 그랬기에 과거 대한민국의 언론을 박정희를 매우 미화했고 그에 반대되는 내용을 쓰지 못하게 했으며 사실상 파시즘에 가까웠다. 과거 군사독재의 나팔수였던 대한민국 언론계의 실태를  저자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 첫 장에서 대니얼 엘스버그의 베트남 전 폭로를 얘기하며 언론의 자유와 진실의 승리를 얘기했다. 즉 리영희는 기자(혹은 언론인)이라면 불의에 맞서 진실을 폭로하고 양심을 지켜야 하는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했고 책에서도 그렇게 서술했다. 과거 이명박근혜 정권시기 이명박근혜 정권에 빌붙어 자신들에게 유리한 언론만을 보도하게 하던 사람들을 생각해봤을때 다음과 같은 리영희의 주장은 너무나도 공감이 갔다.

 

4. 베트남 전쟁

 

필자가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며 가장 주의깊게 그리고 가장 집중해서 읽은 파트는 바로 베트남 전쟁 파트였다. 개인적으로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필자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기전 리영희 선생이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단편적으로 나마 알고 있었고 1980년대 리영희 선생께서 쓴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을 작년에 읽었었다. 박정희 정권시기 베트남 전쟁에 5만 이상의 군대를 파병했고 언론은 베트남 전쟁을 "북베트남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 혹은 자유월남을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미화했다. 저자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자본주의vs공산주의의 전쟁이 아닌 민족해방세력vs민족반역세력의 전쟁으로 해석했다.

베트남 전쟁의 기원을 19세기 프랑스의 식민지시기부터 시작해서 태평양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까지의 흐름을 책에서 설명했다.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응오딘지엠의 부패상과 독재정치와 그리고 남베트남 정권 출신들이 과거 프랑스 식민지시기 민족을 배반하고 사리사욕을 채운 친프랑스민족반역자였다는 사실또한 이 책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리영희의 말대로 베트남 전쟁은 민족해방세력 대 민족반역세력의 전쟁이었고 미국과 한국은 민족반역자 정권을 도왔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리영희 선생의 관점은 현재기준으로 생각해봐도 명확한 사실에 근거한 관점이다. 베트남 전쟁을 자유월남을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선전하던 시기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이 책에서 진실을 알았을때 받았을 충격언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5. 전환시대 논리의 한계

 

어느 책이든 간에 한계가 있다. 리영희 선생께서 쓴 전환시대의 논리 또한 마찬가지다. 필자는 책을 읽으면서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다룬 중국관련 부분에서 리영희 선생이 1960년대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심각하게 미화환 부분을 적잖게 봤다. 마오의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은 말 그대로 광기에 휩싸였다. 문화대혁명 시기 수많은 중국의 문화재들의 파괴됐고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을 광신적으로 추종하는 홍위병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하고 구타탕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그런식으로 총150만명 이상이 숙청됐다. 무엇보다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했던 이유는 1958년 추진했던 대약진 운동이라는 크나큰 과를 덮어버리기 위해 벌인 마오쩌둥의 학살극이었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께선 문화대혁명 시기 신세대를 자처한 뒤 숙청을 자행했던 홍위병들을 마치 구체제를 타파하고 위대한 사회를 건설하는 역군으로 묘사했고 문화대혁명을 굉장히 자유롭고 치열한 사상적 논쟁을 통하여 국가를 각성하는 위대한 사회적 변혁운동으로 묘사했다. 이부분은 명확히 리영희 선생의 과오다. 리영희 선생의 문화대혁명 미화에 대해 굳이 변론을 하자면 68혁명시기 새로운 사회를 추구했던 신좌파세력들은 모순론과 같은 마오쩌둥이 쓴 책을 읽고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을 굉장히 미화했던 적이 있다. 거기다 마오쩌둥의 중국은 언론을 통제하고 굉장히 만흔 은폐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의 진실이 서방세계에 제대로 알려질 수가 없었다. 68혁명이라는 흐름을 탔던 리영희 선생 또한 마찬가지로 진실을 잘 몰랐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을 미화했던 것일수도 있다. 물론 그런 시대적 상황이 그렇다 할지라도 흑역사는 흑역사다. 그래도 리영희 선생께선 후에 자신이 문화대혁명을 지나치게 미화했던 과오를 인정했다. 따라서 당시 문화대혁명을 지나치게 미화한 리영희 선생의 행적을 한가지 측면에서만 보면서 그를  맹목적으로 비난만 하는 것 또한 잘못된 관점이고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6. 글을 마치며

 

전환시대의 논리는 꼭 한번쯤은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다. 정말 괜찮은 철학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필자는 리영희 선생의 쓴 전환시대의 논리를 군사독재에 저항한 위대한 철학책이라 정의하고 싶다. 지성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니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할 책이다. 사회의 변혁과 이상적인 사회를 원하고 갈망하는 진보라면 마르크스나 레닌 그외의 사회주의 서적을 읽는 것도 의미있지만 대한민국 운동권 세대에게 사상적 영향을 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또한 마찬가지로 읽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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