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마오쩌둥은 1893년 중국 후난 성샹탄에서 농민 마오이창과 그 부인 원(文)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불교신자 집안이었고, 집안 형편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8살이 되던 1900년 그는 마을 서당에 입학하여 유교경전의 기초지식을 익혔다. 14살 때 부모의 명령을 따라 혼인을 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결국 집을 나와 현립 둥산 고등소학교에 입학했다. 그 뒤 장사의 주성 중학에 입학하였고,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마오쩌둥 또한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신해혁명 이후 후난성 공립 고등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1918년 스승이자 후의 장인이 된 양회중 교수를 따라 베이징대학에서 약 2년간 보조 사서로 근무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중국 젊은이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공부하게 됐고 “수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은 사회주의를 중국에서 실현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을 당시, 20대의 마오쩌둥 또한 마르크스나 레닌이 쓴 서적들을 접하며 이에 심취했고, 혁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 중국공산당 창건과 대장정

1921년 중국 공산당 1차 전당 대회에 후난성 대표로 참석했다. 한편 창립 초기 공산당은 쑨원의 뜻에 따라 국민당과 연합(1차 국공합작)을 하고 있었고, 공산당원들은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고 있었다. 마오쩌둥도 공산당적을 가지고 국민당에 가입했고, 국민당 정부의 명령을 받아 후난성의 향촌 조사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은 농민의 혁명 역량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손문의 주도로 제1차 국공합작이 진행되었지만, 1925년 손문이 사망하고 그 밑에 있던 장개석이 1926년 중산함 사건을 시작으로 1927년 4월에는 군대를 동원하여 상하이를 장악한 뒤 공산주의자들을 대량으로 검거하고 숙청하면서, 그해 8월에는 공산당의 주도로 난창봉기가 일어나는 등 제1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제1차 국공 내전 당시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에게 무기나 자원 병력 규모에서 밀렸지만, 16자 전법을 기반으로 하여 유격전으로 국민당군에 맞서 싸웠다. 정강산 투쟁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31년에는 중화소비에트를 만들어 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영토를 정복해 나갔음에도 국민당군은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결국 공산당은 국민당군의 극심한 토벌에 맞서 싸워야 했다. 결국 전력에서 밀리게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간부들은 국민당군의 토벌에 맞서 기상천외한 작전을 구사한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대장정이다. 1934년 10월 마오쩌둥의 홍군은 인류역사상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작전을 전개했다. 대장정 시기 마오쩌둥의 홍군은 설산과 고원 사막 그리고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이 사는 숲을 가로지르며 굶주림, 고통, 자연 그리고 수백 대의 비행기를 동원한 국민당군에 맞서 싸우며 10000km를 1년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장정에 동참했던 부대는 10만 이상에서 2만 이내로 줄었지만, 중국인민의 민심을 사로잡았다. 일본이 만주에서 진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의 국민당은 공산당 토벌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국 1936년 까지였다.

3. 제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

1936년 시안사건이 발생했다. 시안사건 이후 장개석은 다시 공산당과 힘을 합쳤다. 중국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축출하기 위해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된 것이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초반에 국민당의 수도 남경을 점령하면서, 연전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될수록 일본군의 연전연승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됐고 중국인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시작으로 침략자 일본에 맞서 싸웠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주로 연안일대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1940년 마오쩌둥의 홍군은 백단대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결국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항복하면서, 중일전쟁 또한 끝이 났다.

4. 국공내전과 중국 통일

2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미국은 중국의 국공합작을 성사시키고 그들간의 중재를 위해 조지 마셜 장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은 1946년 그해 여름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먼저 배반하면서 결렬됐고, 이는 결국 내전으로 번졌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파상 공세를 통하여 한때는 공산군의 근거지인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미국으로부터 탱크나 비행기를 지원받았던 국민당군은 이번에도 병력면에서 공산당을 압도했다.

그러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민심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국민당 덕분에 국공내전의 전세는 중국공산당에게 유리해졌고, 국공내전 시기 중국공산당군은 국민당군 50만 이상을 섬멸하는데 성공했고,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한다. 이로써 마오쩌둥은 내전에서 승리한 뒤, 인민공화국을 건국하게 된 것이다.

5. 한국전쟁과 대약진 운동

중국이 건국되기가 무섭게 냉전의 화약고가 한반도에서 터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미국을 따르는 유엔군이 가세하면서 10월 1일에는 한국군이 38선을 넘고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하게 된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는 것을 매우 경계했던 중국은 그해 10월 25일 북한에 지원 병력을 보냈다.

자신들의 참전으로 동맹국 북한을 지키고 유엔군을 38선 밑에까지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전후복구는 늦어졌고, 북한과의 국경지대는 미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의 미군의 폭격을 맞고 전사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중국 또한 수십만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은 경제재건에 돌입했고 초반에는 스탈린식 공업화를 선호했다. 1953년 스탈린 사망이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6년 스탈린 격화운동을 진행했다. 이때부터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고 마오쩌둥은 기존의 스탈린식 경제개발계획을 포기한 뒤 1958년부터 대약진 운동을 전개했다. 대약진 운동은 1962년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3천만 명 이상이 아사했다. 그 이유는 바로 마오의 잘못된 정책에 있었다. 대약진 운동 시기 재사해 운동으로 참새를 학살한 결과 참새가 먹는 해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벼생산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칼텍에서 수학을 전공한 천재과학자 춴쉐썬이 주장한 벼 빽빽이 심기와 같은 짓도 벼 생산량에 크나큰 타격을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책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6. 문화대혁명과 중소분쟁 그리고 사망

1964년 중국은 낙후된 경제에도 불구하고 핵폭탄을 자력으로 만들었다. 1966년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전개했다.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 강화라는 명분아래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결과는 마오쩌둥 개인을 위한 정적 숙청과 독재권력 강화였다. 문화대혁명의 홍위병들은 자신들의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주자파로 몰아 숙청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의 영우 팽덕회와 류사오치를 비롯한 마오쩌둥의 혁명동지들이 숙청당했고 15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다. 문화대혁명은 1969년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이것이 마오쩌둥의 저지른 가장 큰 과오다.

1969년 중국은 소련과의 전쟁위협에 휩싸였다. 1969년 전바오섬(다민스키섬)에서 중국군과 소련군의 유치한 패싸움으로 시작된 갈등은 탱크와 수십만을 동원한 전면전으로 번졌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미국의 중재로 소련은 중국과 협상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꿨고 1969년 9월 호치민의 장례식장에 참석했던 소련의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이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회담을 가지면서 중소 국경 분쟁은 끝이 났다. 소련과의 관계가 좋지 않던 중국은 소련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국과 회담했고 1972년 닉슨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중국은 미국과 수교를 맺은뒤 서방국가들하고도 수교하게 되었다. 1972년부터 마오쩌둥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그러던 1976년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하고 주더가 사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오쩌둥도 1976년 9월 8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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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와 로마 제국 세계 석학들이 뽑은 만화 세계대역사 50사건 11
김창회 지음, 진선규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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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차원에서 읽어 봤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보는게 낫지만, 읽기가 귀찮아 청소년용인 이 책을 읽었다.

초중학생을 위한 책 치고는 내용이 꽤 탄탄했다. 그 많은 내용을 집약적으로 잘 썻다. 만화의 첫 시작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부터 시작한다. 자유를 위해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 부터,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등장과 몰락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율리우스 시저를 읽으면 드는 생각이 있다. 전략가로서는 뛰어난 명장이지만, 지도자로서는 황제를 꿈꾸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독재관을 지내다가 갈리아 내전기 포로로 잡았던 브루투스에 의해 살해당했지만 말이다.

이 책은 시저가 암살당하면서 끝이난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개혁과 정복전쟁에서의 공로 그리고 독재자로서의 모습을 얘기하며 과연 위대한 지도자인지 혹은 독재자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마 이후에 나타날 마키아벨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리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카이사르를 꿈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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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이문영 / 역사비평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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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서평: 유사역사학은 파시즘의 변형된 형태다.

내가 환단고기를 처음 알게 됐던 것은 대학교 1학년 때다. 당시 고구려사를 전공한 모 교수님은, ˝한국에도 대마도 회복을 외치는 모 집단이 있다.˝ 혹은 ˝환단고기라는 판타지 위서를 추종하는 집단이 있다.˝라고 주장했었다. 당시 환단고기에 대해 모르던 필자는 ˝무슨 소고기 이름이냐˝하고 그냥 넘겼던 것 같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6년이었다. 당시 페이스북을 굉장히 열심히 했던 필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과 페친을 맺었다. 이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환빠들이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이런 말도안되는 주장들을 진서라며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2017년 대전에 있는 증산도라는 사이비 종교를 알게 됨으로써, 그들이 참으로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시중에 나온 책들 중엔 환단고기와 유사역사학을 비판하는 책들은 찾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수많은 서점에서는 소위 환빠 교주 안경전이 저자인 환단고기와 개벽과 같은 종교화된 서적들이 시중에 나도는 모습을 보았고, 굉장히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난 가끔씩 환빠들을 까는 글들을 SNS를 올렸다. 2018년 소방서 사회복무요원을 마치고 그 기념으로 1달간의 미국여행을 갔다오고 나서였다. 내가 미국여행을 마치고 귀국했을쯤 이 책이 출판되었고, 책의 저자인 이문영 선생을 SNS를 통해 알게 됐다. 그를 통해서 ‘유사역사학 비판‘을 알게됐고, 궁극적으로 환빠들에 대한 위험성과 비판부분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이 내리는 결론은 자명하다. 유사역사학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외세에 대한 알 수 없는 열등감에서 부터 시작된다. 즉 한국 역사는 대륙을 정복하지 못한 역사이기에, 과거의 영토들 왜곡하고 과장해서 ‘민족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정상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세력들을 죄다 ‘이병도 제자‘라는 프레임을 씌워 마녀사냥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 다른 나라의 유사역사학자들이 한 얘기는 그리 큰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서 주어와 목적어만 약간 변형시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캐임브릿지 대학에서 인정한 하버드대 한국사 교수가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비판하면 유사역사학은 입에 개거품을 물고, 성난 침팬지들 처럼 날뛴다.

참으로 재밌는 사실은 그들이 그리도 진실이라 하고 싶은 환단고기를 진실로 규정한다면 그건 역으로 과거에는 위대했으나 중국에게 털려 시간이 갈수록 영토가 줄어든 열등한 역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위대함만을 고수하는 그들에겐 그런건 전혀 상관없다.

과거에도 했던 생각이지만, 이들의 사상은 전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나치와 비슷하다. ˝아리아인의 위대함˝을 외치던 그들의 구호에서 주어만 바꾸면 환빠가 된다. 20세기 역사가 증명하듯이 민족우월주의와 과도한 민족주의에 경도된 나치독일과 일본은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6천 5백만명의 목숨을 빼았았다. 그렇다. 이 처럼 위험한 사상이 바로 유사역사학이다.

몇몇이들은 이들도 종교니까 종교로서 인정하면 된다고 한다. 그것은 이들에 대한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하고서 하는 소리다. 그렇다면 네오나치도 허용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유사역사학은 학문과 사실관계를 자신들 멋대로 조작하여 식민사학과는 무관한 역사학계를 공격하고, 자신들의 추종하는 파시즘을 대중들에게 이식시킨다.

따라서 굉장히 위험하다. 물론 여기에는 역사학문이라는 것을 대중들과 소통하지 못했던 학계의 잘못도 있다. 어쨋든 유사역사학은 굉장히 위험하다. 이를 알고 비판적인 의식을 길러야 한다. 이문영 저자님의 저서 ‘유사역사학 비판‘은 올바른 길을 제시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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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제작년이나 작년쯤이었던것 같다. 개인적으로 베트남전쟁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이 전쟁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국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전 하더라도 필자는 베트남 전쟁을 한국경제에 이바지한 전쟁이라 생각했었다. 그 관점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을때 틀린말은 아니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외화벌이는 분명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득을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 비록 우리는 돈을 벌었지만, 그 나라에 가서 민간인을 학살했고,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늘은 반성하는 차원에서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올려볼까 한다.

 

1. 경제 성장이라는 단어에 감춰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는 군복을 벗은 뒤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시절 초기에는 한국의 경제력이 매우 열악했다. 한국전쟁 이후 천리마 운동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북조선보다 훨씬 못살았고, 이승만과 친일파 정권의 극에 달한 부정부패는 한국 경제를 더더욱 망쳐놓았다. 따라서 박정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제를 성장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정권 기간동안 경제개발을 주도했다. 그러던 시기 박정희는 미국에게 요청을 받았다. 바로 베트남 파병이다. 외화를 벌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박정희는 전세계가 비판하는 그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많은 군대를 파병했고, 전쟁 기간동안 연 5만 이상의 군대를 베트남에서 유지시켰다.

(베트남으로 파병 되는 한국군 병사들. 악수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베트남 전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다.)

 

박정희가 파병한 그 전쟁은 결국 미국이 철수하기에 이르렀고, 한국군 또한 1973년 3월에 완벽히 철수했다. 그리고 1975년 전쟁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다. 유신독재를 감행하며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성전"으로 미화했고, 대한뉴스같은 선전매체들은 베트남 전쟁을 왜곡했다. 거기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을 핑계삼아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여 다시한번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 당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얘기하던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선생이 옥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일반인들에게 베트남 전이 진실이 알려질 리가 없었다.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에서 청룡부대에 의해 벌어진 학살이다. 퐁니 퐁넛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군이 벌인 퐁니 퐁넛 학살로 인하여 7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 당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여자나 아이였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어요. …… 우리 작은 절 안에는 그들 모두를 위해 향을 피울 공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ㅡ 미안해요 베트남 p.157

(퐁니 퐁넛 학살을 담은 사진)

 

10일 뒤인 2월 22일 청룡부대는 꽝남 성에 있는 또다른 마을인 하미 마을에서 135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135명을 학살한 한국군은 그 시체를 암매장해버렸다. 학살당한 민간인들 중에는 1살이나 2살 짜리도 있었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어요. 7 - 8시 경에 호이안쪽에서 군대가 들어왔지요. 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어요. 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보다 하고 한 군데로 모였지, 한국군들이 우리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도망을 가지 그렇게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모이지 않았을 거야.”

 

ㅡ 팜티호아, 하미 마을 학살 생존자의 증언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

 

퐁니 퐁넛과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66년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베트남 떠이션 현에 있는 고자이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이고, 다른 하나는 꽝응아이 성에 있는 빈호아라는 곳에서 일어난 학살이다. 맹호부대에 의해 일어났다고 알려진 고자이 학살 사건으로 인하여 총 380명의 민간인이 학살 당했고, 청룡부대에 의해 일어났다고 알려진 빈호아 학살로 총 43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빈호아 학살 한국군 증오비)

(고자이 학살 위령비)

 

"한국군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땅굴에 숨었지. 그들이 땅굴 속으로 최루탄을 던져넣었어. 눈물콧물이 뒤범벅이 되고 ‘컥’하니 숨이 막혀왔어.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땅굴 밖으로 기어오르면 한명씩 총을 쏘아 죽였지."

 

ㅡ 고자이 학살 생존자 판티부이 할머니의 증언

 

“1966년 12월3일(음력 10.22) 빈호아 사, 롱빈마을의 쩌우레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부대 1개 대대가 이곳 9개 마을에서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3일에서 6일까지 모두 430명이 집단학살을 당했지요. 응옥흥마을에서는 80살 노인인 후인의 목을 잘라서 논에 걸어놓기도 했어요. 희생자들 중에는 임산부도 7명이 있었고, 2명의 여성이 강간당하기도 했지요. 또 2명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고, 1명은 배가 갈라져 창자가 꺼내졌습니다.”

 

ㅡ 1999년 한겨레21의 구수정 통신원과 인터뷰를 한 마을 부주석의 증언

이외에도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총 5개 성에서 9000여 명이 사망했고, 꽝남성에서만 4000여 명이 죽었다. 즉 이 글에 언급된 것 외에도 학살이 존재했다는 얘기다.

 

2. 학살 부정측에 대하여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전면 부정하는 월남전 참전 용사들)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 된 것은 1990년대 베트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구수정 박사가 공론화를 하면서 부터였다. 그래서 그 이후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비롯하여 베트남 전쟁을 찬양하는 극우계열 인물들과 세력들은 학살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히 위에 언급한 고자이 학살 사건을 예로 들며 "그 마을 벽화에 그려진 고양이과 동물은 호랑이가 아닌 흑표범이다. 즉 남베트남군 레인져 부대의 흑표범 마크지 맹호부대의 호랑이 마크가 아니다."라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면 마치 정말 그러한듯 하다. 실제로 찾아보면 비슷해 보이는 측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 피해자들은 분명히 한국군의 했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즉 이 부분은 정확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보도연맹 학살. 1950년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은 잠재적인 빨갱이일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최소 30만 이상의 민간인을 3개월 동안 대량 학살했다.)

 

학살 부정측은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의 대민사업을 예시로 들며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매우 강조한다. 따라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은 거짓이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얘기하는 것과 달리 한국군은 그리 이성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한국군의 뿌리는 태평양 전쟁 시기 친일했던 장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 '잠재적인 빨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심증만 가지고, 최소 30만이나 되는 자국 민간인을 단기간에 학살했던 전력이 있다. 많게 보면 100만까지도 잡는다. 즉 한국군은 자국민 수십만을 학살했던 전력이 있기에, 절대 깨끗한 집단이 아니다. 자국민을 수십만 학살했던 집단이 과연 타국에서 도덕성이 지켜진다는 믿음은 그저 학살을 무조건 부정하고 싶어하는 그들만의 상상이다.

(미라이 학살.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의 부대는 미라이라는 마을에서 총 504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하루 만에 학살했다. 이 사건은 군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지만, 양심있는 기자의 폭로를 통해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들이 부정하기 위해 드는 것들은 많지만 마지막으로 하가지만 더 들겠다. 학살 부정측은 미국의 미라이 학살을 들며 한동안 여론화 되지 못했던 한국군 학살을 부정한다. 그들 주장에 따르면 "한국군의 그리 학살했으면 미군처럼 이미지가 낭떠러지로 떨어져야 했을 것"이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의 미라이 학살 사건 또한 파뭍힐 사건이었다. 파뭍힐 뻔하던 사건이 양심적인 기자에 의해서 공론화 된 케이스다. 즉 그 사건도 얼마든지 한국군의 학살처럼 장지간 동안 묻힐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사건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만든 베트남 전 관련 서적들을 보면 한국군에 대한 언급이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동원했던 알제리측 부대가 그리 유명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서방세계는 명성이라곤 별로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고, 동맹인 미국 또한 한국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즉 그들은 이점을 놓치고 있다.

 

3. 결론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붙히자면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극우반동세력의 모략을 잠재우는 방법은 공동 진상조사다. 현재 승전국 위치에 있는 베트남 입장에서도 입을 닫고 있는 상황이라 진상조사는 좀 힘들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당장의 해결이 힘들지라도 최소한 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지해야 한다고 본다.

(이라크 전쟁. 2003년 미국이 공격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당시 한국의 한나라당은 베트남 전쟁을 운운하며 이라크 파병을 적극 주장하였다.)

 

극우세력들이 학살에 대해 부정하려고 하지만, 필자는 분명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을거라 믿는다. 왜나하면 필자는 내 나라의 군대가 아주 쓰레기 같은 똥별 똥군기 집합체들로 인하여 민간인 수십만을 학살했던 사실을 역사를 공부하며 배웠기 때문이다. 즉 필자는 한국군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극우세력이 뭐라하든 구수정 선생을 비롯한 진보 계열 학자들이 주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필자는 학살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 보지만, 베트남 전 참전 자체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본다. 베트남 전쟁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구정 공세 이후 대규모의 반전운동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랬던 전쟁이기에 미국사람들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는 미국이 만든 수많은 베트남 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베트남에서의 잘못을 반성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일어난 '미안해요 베트남'운동 )

 

그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돈을 벌었다다. 즉 긍정적인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난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세력들은 "경제 성장을 할 수 있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이다"라며 전투부대 파병을 주장했었다. 한나라당 세력들의 무책임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 한국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을 아주 잘 보여준 거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부터가 잘못됐다. 이제는 진실을 알아야 하고, 반성의식을 가져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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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1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1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기님 명절연휴 잘 보내시고 늘 건필하시길^^

NamGiKim 2019-02-01 22:23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벨루치님도 즐거운 명절 잘 보내시길^-^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가 들어섰다. 이러한 냉전의 대립은 좌우익간의 내전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이런 좌우익 대립은 어느 유럽의 한 국가에서도 나타났다. 그 나라가 바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역사로 잘 알려진 그리스다.

 

2차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 나치독일은 그리스를 점령했다. 나치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하자, 이에 반발한 그리스인들은 나치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 인민해방전선을 창설했다. 이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고, 나치독일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8월 그리스는 나치로부터 해방됐다. 당시 동유럽 전역에서 진격해오던 소련군을 막기 위해 대다수의 독일군 병력들이 철수했고, 그해 10월 그리스에는 영국군이 상륙했다. 영국군은 수도 아테네에 입성했다. 당시 그리스는 영국군을 해방군으로 보지 않았다.

 

나치독일이 떠난 이후 그리스에는 연합정부가 세워졌지만, 영국은 군사개입을 통해 대중적인 민족해방전선을 제지했다. 거기다 그 연합정부는 우익 군주독재국가의 형태를 뗬다. 따라서 반체제인사들이 투옥되고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제거되자 체제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해방 운동이 성장했고, 이는 충돌로 이어졌다. 이게 1차내전의 시작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수도 아테네와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를 제외한 그리스 전지역을 장악했지만, 영국과 우익독재세력들은 이를 진압했다. 그리고 1945년 2월 얄타회담 시기 그리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했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1946년 3월 총선이 치러졌고, 아주 간신히 국왕파가 승리했다. 이는 다시 좌우갈등으로 번졌고 결국 내전이 일어났다.

 

1946년 사회주의 세력은 게릴라전을 다시 재개했다. 1946년 후반이 되자 사회주의자들은 인구 700만의 나라에서 17000명 이상의 군대를 모았고, 5만 명 이상의 지지자와, 약 25만 명의 동조자를 끌어 모았다. 당시 사회주의 세력의 봉기에 대처하기 힘들었던 영국은 그리스 내전에 미국을 끌어들였고, 미국은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1947년에 전투는 더욱 격렬해져 그리스 국군과 우익세력들은 북 이필로스, 그리스령 마케도니아와 텟살리아에서 대규모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내전에 개입한 미국은 1947년의 마지막 5개월 동안 아테네 우익 정부에 대포와 급강하 폭격기, 네이팜탄 등이 포함된 7만 4000톤의 군사 장비를 보내줬다. 미국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이끄는 250명의 장교단이 전투 현장에서 그리스 군대를 조언해주며 도왔다. 밴 플리트는 게릴라들을 고립시키고 그들의 지지기반을 제거하기 위해 농촌 지역의 그리스인 수천 명을 강제로 소개하는 정책에 착수했고, 이는 게릴라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런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국군은 1948년 작전지역을 펠로폰네소스 반도, 아티카까지 확대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 국군은 마을들을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벌였고,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했다. 결국 그리스 내전은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우익독재 세력이 승리했고, 1949년 사회주의 계열 게릴라들은 괴멸됐다. 이후 그리스는 미국 기업들의 자본이 밀려들어왔고, 1974년 민주화가 되기 이전 까지 우익군사독재시기를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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