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마오쩌둥은 1893년 중국 후난 성샹탄에서 농민 마오이창과 그 부인 원(文)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불교신자 집안이었고, 집안 형편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8살이 되던 1900년 그는 마을 서당에 입학하여 유교경전의 기초지식을 익혔다. 14살 때 부모의 명령을 따라 혼인을 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결국 집을 나와 현립 둥산 고등소학교에 입학했다. 그 뒤 장사의 주성 중학에 입학하였고, 독서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마오쩌둥 또한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신해혁명 이후 후난성 공립 고등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1918년 스승이자 후의 장인이 된 양회중 교수를 따라 베이징대학에서 약 2년간 보조 사서로 근무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중국 젊은이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공부하게 됐고 “수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은 사회주의를 중국에서 실현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을 당시, 20대의 마오쩌둥 또한 마르크스나 레닌이 쓴 서적들을 접하며 이에 심취했고, 혁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 중국공산당 창건과 대장정

1921년 중국 공산당 1차 전당 대회에 후난성 대표로 참석했다. 한편 창립 초기 공산당은 쑨원의 뜻에 따라 국민당과 연합(1차 국공합작)을 하고 있었고, 공산당원들은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고 있었다. 마오쩌둥도 공산당적을 가지고 국민당에 가입했고, 국민당 정부의 명령을 받아 후난성의 향촌 조사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은 농민의 혁명 역량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손문의 주도로 제1차 국공합작이 진행되었지만, 1925년 손문이 사망하고 그 밑에 있던 장개석이 1926년 중산함 사건을 시작으로 1927년 4월에는 군대를 동원하여 상하이를 장악한 뒤 공산주의자들을 대량으로 검거하고 숙청하면서, 그해 8월에는 공산당의 주도로 난창봉기가 일어나는 등 제1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제1차 국공 내전 당시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에게 무기나 자원 병력 규모에서 밀렸지만, 16자 전법을 기반으로 하여 유격전으로 국민당군에 맞서 싸웠다. 정강산 투쟁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31년에는 중화소비에트를 만들어 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영토를 정복해 나갔음에도 국민당군은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결국 공산당은 국민당군의 극심한 토벌에 맞서 싸워야 했다. 결국 전력에서 밀리게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간부들은 국민당군의 토벌에 맞서 기상천외한 작전을 구사한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대장정이다. 1934년 10월 마오쩌둥의 홍군은 인류역사상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작전을 전개했다. 대장정 시기 마오쩌둥의 홍군은 설산과 고원 사막 그리고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이 사는 숲을 가로지르며 굶주림, 고통, 자연 그리고 수백 대의 비행기를 동원한 국민당군에 맞서 싸우며 10000km를 1년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장정에 동참했던 부대는 10만 이상에서 2만 이내로 줄었지만, 중국인민의 민심을 사로잡았다. 일본이 만주에서 진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의 국민당은 공산당 토벌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국 1936년 까지였다.

3. 제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

1936년 시안사건이 발생했다. 시안사건 이후 장개석은 다시 공산당과 힘을 합쳤다. 중국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축출하기 위해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된 것이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초반에 국민당의 수도 남경을 점령하면서, 연전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될수록 일본군의 연전연승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됐고 중국인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시작으로 침략자 일본에 맞서 싸웠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주로 연안일대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1940년 마오쩌둥의 홍군은 백단대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결국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항복하면서, 중일전쟁 또한 끝이 났다.

4. 국공내전과 중국 통일

2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미국은 중국의 국공합작을 성사시키고 그들간의 중재를 위해 조지 마셜 장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은 1946년 그해 여름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먼저 배반하면서 결렬됐고, 이는 결국 내전으로 번졌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파상 공세를 통하여 한때는 공산군의 근거지인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미국으로부터 탱크나 비행기를 지원받았던 국민당군은 이번에도 병력면에서 공산당을 압도했다.

그러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민심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국민당 덕분에 국공내전의 전세는 중국공산당에게 유리해졌고, 국공내전 시기 중국공산당군은 국민당군 50만 이상을 섬멸하는데 성공했고,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한다. 이로써 마오쩌둥은 내전에서 승리한 뒤, 인민공화국을 건국하게 된 것이다.

5. 한국전쟁과 대약진 운동

중국이 건국되기가 무섭게 냉전의 화약고가 한반도에서 터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미국을 따르는 유엔군이 가세하면서 10월 1일에는 한국군이 38선을 넘고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하게 된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는 것을 매우 경계했던 중국은 그해 10월 25일 북한에 지원 병력을 보냈다.

자신들의 참전으로 동맹국 북한을 지키고 유엔군을 38선 밑에까지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전후복구는 늦어졌고, 북한과의 국경지대는 미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의 미군의 폭격을 맞고 전사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중국 또한 수십만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은 경제재건에 돌입했고 초반에는 스탈린식 공업화를 선호했다. 1953년 스탈린 사망이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6년 스탈린 격화운동을 진행했다. 이때부터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고 마오쩌둥은 기존의 스탈린식 경제개발계획을 포기한 뒤 1958년부터 대약진 운동을 전개했다. 대약진 운동은 1962년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3천만 명 이상이 아사했다. 그 이유는 바로 마오의 잘못된 정책에 있었다. 대약진 운동 시기 재사해 운동으로 참새를 학살한 결과 참새가 먹는 해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벼생산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칼텍에서 수학을 전공한 천재과학자 춴쉐썬이 주장한 벼 빽빽이 심기와 같은 짓도 벼 생산량에 크나큰 타격을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책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6. 문화대혁명과 중소분쟁 그리고 사망

1964년 중국은 낙후된 경제에도 불구하고 핵폭탄을 자력으로 만들었다. 1966년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전개했다. 문화대혁명은 사회주의 강화라는 명분아래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결과는 마오쩌둥 개인을 위한 정적 숙청과 독재권력 강화였다. 문화대혁명의 홍위병들은 자신들의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주자파로 몰아 숙청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의 영우 팽덕회와 류사오치를 비롯한 마오쩌둥의 혁명동지들이 숙청당했고 15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다. 문화대혁명은 1969년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이것이 마오쩌둥의 저지른 가장 큰 과오다.

1969년 중국은 소련과의 전쟁위협에 휩싸였다. 1969년 전바오섬(다민스키섬)에서 중국군과 소련군의 유치한 패싸움으로 시작된 갈등은 탱크와 수십만을 동원한 전면전으로 번졌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미국의 중재로 소련은 중국과 협상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꿨고 1969년 9월 호치민의 장례식장에 참석했던 소련의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이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회담을 가지면서 중소 국경 분쟁은 끝이 났다. 소련과의 관계가 좋지 않던 중국은 소련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국과 회담했고 1972년 닉슨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중국은 미국과 수교를 맺은뒤 서방국가들하고도 수교하게 되었다. 1972년부터 마오쩌둥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그러던 1976년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하고 주더가 사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오쩌둥도 1976년 9월 8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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