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20181024일 필자는 2년간의 소방서 공익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전역했다. 공익 근무를 하던 시기 필자는 미국 여행을 준비했었고, 전역하고 난 지 5일 뒤인 1029일 아침 10시 뉴욕 존F케네디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여행 가서도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필자는 두 권의 책을 가방에 챙겼다. 하나는 <미국민중사>의 저자 하워드 진이 쓴 그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You Can’t be Neutral on a Monving Train>였고, 다른 하나가 바로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이었다. 1달간의 여행 기간 동안 미국 동부와 캐나다 그리고 미서부를 관광하고 다녔던 필자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우선적으로 읽었는데 미국 보스턴에 들린다면 케네디 생가와 더불어 그의 묘지를 방문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실제로 그의 묘를 방문했다.)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끝까지 다 읽게 된 시점은 관광버스를 타고 요세미티 국립 공원에 가는 도중이었다.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끝까지 다 읽은 필자는 버스 안에서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을 폈고, 꾸준히 책을 읽었지만, 그다음 날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40달러로 1040달러를 딴 이후로는 점차 독서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렇게 1달간의 긴 여행을 로스엔젤레스에서 마치고 귀국한 필자는 이현상의 초기 생애 부분까지만 읽은 상태였고, 그 이후론 읽지 않았었다. 물론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필자의 눈엔 다른 책들이 눈에 더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6월 여름 방학을 맞은 필자는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이번에 다시 읽게 되었다. 대략 2주 동안 이현상 평전을 읽었던 필자는 책을 정독하는 기간 동안 다시 한번 분단의 비극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대한민국 극우 반공 세력들이 이를 갈며 증오하고 싫어하는 인물 이현상은 일제에 맞서 노동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에는 미제국주의와 친일파 세력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다 전사한 혁명 전사였기 때문이다.

 

1926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사망했을 당시 일어난 6.10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현상은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과 더불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킴과 동시에 조선을 군국주의화 할 때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혁명 조직을 건설하는데 헌신했고, 그 바람에 일제의 감옥을 들락날락했었다. 1939년 국내에서 창설된 경성콤그룹에서도 활동한 그는 많은 인물들이 친일로 변절할 당시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극소수의 인물에 포함된다. 따라서 이현상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전설이었다.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분노를 느꼈던 파트는 해방 정국이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헌신했던 그가 해방 정국에서 좋은 대접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빨갱이로 몰려 미군정과 친일파 세력들에게 탄압받았기 때문이다. 19465월 정판사 사건 이후 이현상도 친일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으며 모진 고문을 받았었는데, 혁명가 이현상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한 주체가 바로 고문왕이라 불리던 노덕술이었다. 혁명가 이현상이 해방된 조선에서 악질 친일 경찰에게 빨갱이로 몰려 잔혹하기 짝이 없는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현상이 고문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김원봉의 비극은 비단 김원봉 선생에게만 국한되어있지 않은 일이었다.

 

필자가 이현상에게 존경심을 느끼는 점은 그의 빨치산 투쟁기다. 1948년 여순항쟁부터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까지 이현상은 남조선에서 미제국주의와 친일 세력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했었는데, 그의 경우 절대로 민간인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여순 항쟁 당시 14연대에 속해있던 일부 남로당 출신 장교들이 봉기한 군대에 의해서 처형되었던 것과 항쟁 시기 좌익계열에서 저지른 양민 학살에 대해 이현상 사령관은 이를 철저하게 비판했고 반성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여순 항쟁 시기 좌익에 의해 저지른 학살은 대부분 군경과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 청년단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무차별 학살을 일삼던 우익들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지만, 이현상 사령관은 좌익이 저지른 학살을 결단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러한 이현상 사령관의 노력은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으로 대거 편입된 신빨치산 세력들의 경우 일부는 이를 어기고, 약탈 및 군경과 우익 청년단에 대한 보복을 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현상 사령관은 이를 철저히 금지했고 이현상 사령관 휘하의 직속 부대들은 민간인 학살 및 강간, 약탈 등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 주변에 있는 소를 가져갈 때도 절대 함부로 가져가지 않고, 그 가격에 맞는 돈을 지급하고 가져갔다. 심지어 이현상 휘하의 빨치산들은 포로로 잡힌 국군 포로나 경찰을 함부로 학살하지 않았고, 이들을 그냥 풀어줌으로써, 역으로 감동을 줘 그들이 자발적으로 전향하여 빨치산 투쟁에 임하도록 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들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강간과 학살 약탈을 일삼았다는 대한민국의 소설들은 왜곡되고 조작된 반공 선동이다. 그런 반공 소설에서 묘사한 빨치산의 모습은 당시 빨치산의 모습이 아니라 이를 토벌하는 우익 청년단과 대한민국 군경의 모습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을 하게 된 국군과 유엔군은 북을 향해 진격하는 것과 동시에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도시들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었다. 그 결과 미군의 B-29 폭격기에 무차별 폭격을 받은 북한은 말 그대로 달의 표면으로 변했고,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1.4 후퇴 이후 휴전 협상을 북한과 하는 와중에도 미국은 북한 지역을 폭격했는데, 19537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폭격은 지속됐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보자면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북한이 더 많았지만, 남한 또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시기 미군은 남한 땅 전역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런 무차별 폭격은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남한 땅에서 계속되었다. 특히 지리산에 고립되어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던 빨치산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미군은 이현상을 비롯한 빨치산들의 뿌리를 뽑기 위해 지리산 전역을 폭격했고,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네이팜 폭탄까지 사용했다. 심지어 게릴라들을 죽이기 위해 세균까지 살포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미제국주의의 반인륜적인 범죄로 인하여 빨치산 게릴라들은 재귀열에 걸려 적잖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었다.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 당시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미군은 빨치산 게릴라들을 향해 휘발유를 살포한 뒤, 네이팜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고, 그 결과 유격대원들과 투쟁 인민들 그리고 산짐승과 나무를 가릴 것 없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타버렸으며 인근 지역이 불지옥으로 변해버렸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즉 미군은 이현상과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이런 광기 어린 짓까지 일삼았다. 이는 마치 베트남 전쟁에서 미제국주의 군대가 베트콩 해방 전사들과 남베트남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반인륜적 전쟁범죄와 같았다.

 

미제국주의와 친일파 세력들은 이현상과 빨치산들을 죽이기 위해 이런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거기다 195110월 휴전 회담이 대략 3, 4개월 동안 정체되어 있을 때, 이승만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전방에 있던 백선엽 휘하의 군대를 지리산에 투입하여, 빨치산의 씨를 말리고자 하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현상과 빨치산들은 민중의 해방과 제국주의를 축출하기 위해 총을 들고 싸웠다. 하지만, 국군과 미군의 집요한 토벌 끝에 빨치산 세력은 씨가 말랐고, 한국전쟁이 끝난지 2개월 뒤인 1953917일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은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30년 동안 사회주의 혁명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워온 조선의 체게바라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1967년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투쟁 과정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체게바라는 묘비도 세워지지 않은 채, 땅속에 묻어졌다. 볼리비아의 토벌대가 체게바라의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그의 시신을 땅에 묻은 이유는 그가 우상이 될 거라는 두려움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 또한 화장되어 묘비도 세워지지 않은 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저 이현상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세워진 가묘가 북한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있을 뿐이다.

 

필자가 가장 흥미를 느끼고 책에서 읽었던 부분은 한국전쟁 초기에 이현상과 구빨치산 세력들이 전개했던 투쟁이었다. 여순항쟁 이후부터 1950년까지 대략 2년간 지리산에서 게릴라 투쟁을 해오던 빨치산들은 19506월에 북상을 시작했었다. 북상하던 빨치산들은 19507월 하순에 남하하던 인민군과 접선하였고, 이후 낙동강 전선을 향해 남진했다. 낙동강에 도착한 그들이 수행했던 임무는 인민군 정규 부대들과 더불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 아니었다. “낙동강을 도하하여 후방에서 국군과 미군을 교란하는 것이 이현상과 빨치산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195081일 낙동강을 도하한 빨치산들은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빨치산들은 북한의 T-34 탱크를 잡기 위해 도착한 미군 탱크를 상대로도 전투를 치르기도 했었다. 빨치산들은 9월 말까지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전개했다. 이현상의 빨치산 부대는 낙동강전선을 넘어간 유일한 유격대였고, 책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아군의 인명 손실은 거의 없었으며 최소 수백 명의 미군을 사살하고 100명 이상의 미군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미군 포로들을 함부로 학살하지 않았으며, 백여 대의 군용차량과 십여 군데 군사기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전과(戰果). 이 부분에서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후방교란 작전을 수행했던 한 여성 유격대원에 대한 얘기를 언급하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강에 성공한 100명의 유격대 앞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거대한 무기가 등장했다. 탱크였다. 소총 한 자루에 수류탄 몇 개가 고작인 대원들은 모래땅을 흔들어대며 요란하게 밀려오는 탱크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으나 총알은 불꽃만 날리며 튕겨버리고 수류탄도 소리만 요란할 뿐 두꺼운 철판에 흠집도 내지 못했다. 이때 유일한 여성 소대장으로서 매 동무라고 불리던 부산 출신의 23살 처녀 대원이 부상당한 몸으로 방망이 수류탄을 들고 미군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인민공화국 만세!” 매 동무는 가녀린 음성으로 만세를 부른 뒤 자폭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탱크가 멈춰 섰다.”

 

출처: 이현상 평전 p.350

 

우리가 아는 빨치산 대장 이현상 사령관은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친일파들에 맞서 투쟁했던 혁명가이자, 독립투사였다. 여순항쟁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협정 이후까지 대략 5년간 한반도 이남에서 혁명 투쟁을 전개했던 이현상 사령관이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았던 것은 고작 3개월이다. 그것도 19485월에 난생처음 받았다. 3개월간의 군사 훈련을 토대로 여순항쟁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협정 이후까지 대략 5년간 빨치산을 지휘했던 것이다. 20세기 혁명사에 있어서 게릴라 투쟁의 전설인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쿠바 혁명과 호치민과 베트콩의 민족해방투쟁은 기후 및 환경 자체가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기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현상이 전개했던 지리산과 한반도 이남 지역은 절대 아니었다. 저자 안재성은 책에서 이현상의 빨치상 투쟁이 주어진 조건상 얼마나 악조건이었는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리산이 아무리 크다 해도 반경 50km의 고립된 공간이었다. 미국과 싸우던 베트남 유격대는 하노이로부터 보급을 받았고 독일과 싸우던 러시아 유격대는 트럭으로 물자를 보급받아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름없었다. 중국공산당이나 만주의 항일 유격대는 농사까지 지으며 싸울 여유도 있었다. 그러나 남한 유격대는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아무리 깊은 골이라도 반나절만 걸으면 마일이 나오는, 상대적으로 아무리 깊이 숨어도 국군이 반나절만 밀고 오면 드러나 버리는 손바닥만 한 지역에서 이리저리 토끼몰이를 당하며 죽어가는 처지였다.”

 

출처: 이현상 평전 p.502

 

이렇듯 이현상의 빨치산 투쟁은 악조건 속에서 전개된 투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다시 한번 분단의 비극과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비극을 느꼈다. 일제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던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 땅에서 친일파에게 빨갱이로 몰려 결국은 빨치산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은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드라마 서울 1945가 분단의 비극을 낱낱이 보여주듯이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도 이를 보여준다. 이현상 같은 혁명적인 독립운동가가 해방 이후 어떻게 해서 미제국주의와 친일파에 맞서는 빨치산 투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은 환경의 악조건 속에서도 지속되었는지?”를 우리는 이현상 평전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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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4.19 혁명으로 인하여 12년간 군림하던 이승만(Syng Man Rhee) 독재 정권이 물러났다. 4.19 혁명으로 인하여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허정은 사회개혁을 통해 난국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인민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총선이 치러져 대통령에는 윤보선 총리에는 장면이 당선되었다. 이렇게 제2 공화국이 등장했지만, 사회의 혼란은 여전했고, 이승만 독재 치하에서 억눌려 살던 민중들이 호소하는 집회나 시위도 끊이질 않았다.

 

4.19 이후 파업과 쟁의가 급격히 늘어났다. 쟁의 건수는 19614~5월에만 282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1953~1959년의 연평균 41건의 7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파업은 택시, 은행, 부두, 철도, 통신 등에 걸쳐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노동조합은 1959년의 588개에서 1960년에는 914개로 64%나 증가했다. 기존의 어용 노조를 민주화하기 위한 투쟁도 분출했다. 장면의 민주당 정부는 민중들의 요구에 혁명 과업이 완수됐으니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라고 외쳤고, 그 또한 반공주의와 친미주의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기에, 국가보안법을 개정은커녕 오히려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도입해서 민중운동을 탄압했다. 쉽게 말해 장면 정부 또한 본질적으론 이승만 정부와 더불어 친미 반공에 입각한 정권이었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의 주장에 따르면 서울의 지배 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 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라고 한다. 19612월 주한미군원조사절단 부단장 휴 팔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면 정부가 이대로 4월을 넘기기는 어류울 것이며 공산혁명 혹은 이와 비슷한 극단적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고, 그로부터 3개월 뒤 박정희(Park Jung Hee)를 비롯한 군부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5.16 군사 쿠데타가 그러했다.

 

군부 쿠데타가 처음으로 모의된 것은 1960910일로 김종필을 비롯한 영관급 장교 9명이 서울 총무장에서 모임을 갖고 군의 정풍운동을 벌이는 한편 혁명거사를 모의하고, 같은 해 119월에는 박정희 소장 집에서 다시 회합, 쿠데타 거사를 재확인했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는 19614월까지 혁명조직 및 거사 계획을 완성하고 419일 실행하려 했으나 좌절되었다. 다시 512일로 계획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마침내 1961516일에 쿠데타를 단행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보좌관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미군 대위의 회고록에 나온 내용이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196141, 즉 실제 쿠데타가 있기 45일 전, 나는 한국군 내에 쿠데타 기도가 있음을 상부에 보고했고, 그런데도 정작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나 맥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은, 박정희 쿠데타군을 타도하고 합법적으로 성립된 장면 정권을 지지할 것이라 표방했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그 45일 이전에 이미 박정희 등의 쿠데타 가능성을 보고받고도 그냥 있었고, 5.16 직후인 1961518일 박정희와 하우스만은 비밀리에 만나 광범위한 군사혁명 과업들을 얘기했다라고 한다. 여기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박정희 측과 미국 측이 이미 합의가 되었던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1961516일 박정희 소장과 그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장교 250명과 사병 3500여 명이 중심이 된 반란군은 이날 새벽 3시경 한강 어귀에 진입하여 약간의 총격전 끝에 예정보다 약 1시간 늦게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이들 반란군은 중앙청 및 서울중앙방송국 등 목표지점을 일제히 점거하고, 새벽 5시 첫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밝히는 한편 6개 항의 혁명공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이어 오전 9시에는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령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각료의 체포령에 이어 오후 7시를 기해 장면 정권을 인수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쿠데타는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육사 생도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거리 행진이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즉각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5.16 쿠데타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들은 첫 번째 조항과 두 번째 조항을 가장 우선시했다. 5.16 이후 4.19 혁명은 의거로 격하됐고, 그 자리에 5.16이 혁명의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쿠데타 잔재들은 혁명이라고 우기고 그렇게 표기하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내걸었던 6번째 조항은 절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박정희에 의해 완벽하게 폐기되어 버렸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과거 자신의 남로당 경력에 있어서 두 나라에게 의심받기도 했고, 기대를 받기도 했는데, 그 의심과 기대를 가졌던 두 인물이 바로 북한의 김일성과 미국의 존F케네디(JFK). 쿠바 미사일 위기와 더불어 미소 냉전이 긴장 상태였던 존F케네디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의심했지만,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한 뒤로부터는 그에 대한 의심을 버렸다. 북한의 김일성은 과거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에 기대를 걸어 한때 박상희의 절친이던 황태성이를 밀사로 남파시켜 남북연방제를 추진해보고자 했지만, 박정희는 황태성에게 간첩죄를 적용하여 형장의 이슬로 보내버렸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은 박정희 평전에서 5.16 쿠데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5.16 쿠데타는 대는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좋지 못한 선례를 한국 현대사에 남기게 되었으며, 그 선례는 이후 정치군인들에게 권력에 야심을 갖게 하는 충동을 뿌리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참고 자료

 

박정희 평전, 김삼웅 저, 앤길 출간, 2017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저, 창작과비평사 출간, 1999

한국 현대사 다이제스트 100, 김삼웅 저, 가람기획 출간, 2010

마르크스주의로 본 한국 헌대사, 한규한 저, 책갈피 출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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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1936년 프랑스 국경지대에 있는 라인란트 지역을 점령했고,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했으며, 1939년 초 주데텐란트(Sudetenland) 지역에 독일계 주민이 많이 산다는 이유를 들어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이처럼 아돌프 히틀러가 정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나,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을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그저 묵인하고 있었다. 또한,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과 더불어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 프랑코 세력을 지원했다.  

193810, 독일 외교부는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항구 도시인 단치히(Danzig)를 돌려 달라고 폴란드 정부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단치히 요구는 표면적인 행위일 뿐 실제로는 폴란드 전체를 먹고 싶어 했다. 따라서 나치 독일의 군부는 이미 폴란드를 침공할 작전 계획인 백색 작전을 수립해 놓았다.

 

위에서 상술한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이후 폴란드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다. 히틀러가 폴란드까지 점령하려 한다는 계획을 안 영국과 프랑스는 19394월과 5월 차례로 폴란드와 군사방위상호원조협정을 체결하였다. 즉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시 이번만큼은 영국과 프랑스도 군사적으로 강경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독일은 더 이상 10만 이내의 군대만 소유한 국가가 아니었다.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대략 51개 사단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중 9개 사단은 3호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삼륜 오토바이를 갖춘 기갑사단이었으며, 4000대 이상의 항공기를 보유한 군사 강국이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항공기 보유 숫자를 합친 거보다 2배 이상이나 되는 규모였다. 따라서 히틀러의 독일은 더 이상 영국과 프랑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19398월 세상을 놀라게 할 조약이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체결되었다. 소련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고 불리는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경험했던 양면전의 위험성을 사전에 없앤 것이다.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스탈린까지 손을 본 히틀러는 폴란드로 진격하라는 제1호 작전 명령을 내렸고, 대규모의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진격했다. 

193991일 새벽 445,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침공 당시 독일군은 160만 명의 병력과, 3600대의 탱크, 6000대의 화포와 2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했다. 폴란드 침공에 나선 히틀러의 군대는 동프로이센과 체코에 배치된 북방 집단군단과 체코슬로바키아에 배치된 남방 집단군단으로 나누어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양쪽에서 협공했다. 당시 독일은 전격전(Blitz Krieg)이라고 하여 전차와 항공기 그리고 기계화된 보병을 이용한 작전을 구사했다. 이 전술은 상대측의 허점을 찔러 파고드는 형대의 공격 전술로서 굉장히 치명적이었고, 무엇보다 기동력이 추가된 신속한 공격이었기에, 단기간에 걸처 상대측의 군대를 궤멸시킬 수 있었다  

거기다 폴란드군은 전쟁 이론이나 기술 무기에 있어서 독일을 상대하기 역부족이었다. 폴란드 측은 가지고 있는 탱크도 거의 없었고, 비행기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쓸 법한 구식 전투기들뿐이었으며, 아직도 말을 타고 돌격하는 기병이 폴란드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군사 작전을 개시하는 독일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고, 독일의 융커스 급강하 폭격기들은 전격전에 있어서 진격하는 전차와 기계화된 보병을 수월하게 지원할 수 있었다. 99일부터 전개되었던 브주라 전투(Battle of Bzura)에선 폴란드 기병이 독일군의 전차를 향해 돌격하였다가 대량 학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914일 독일군은 폴란드군의 저항을 분쇄시키고 수도 바르샤바에 접근했다. 거기다 916일 동쪽에서 소련이 진격해오면서 폴란드 정부는 결국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결국, 폴란드 측은 928일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폴란드 침공 시기 독일군은 대략 1만 명 이상이 전사했던 대에 비해 폴란드군은 7만 명 이상이 죽었고, 70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폴란드 침공이 독일의 승리로 끝나면서 폴란드라는 국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는지 21년 만에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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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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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반 쪼이(Nguyễn Văn Trỗi)

응우옌 반 쪼이는 1940년 2월 1일 꽝남(Quang Nam)성 디엔 반(Điện Ban)현에서 태어났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지만, 제네바 협약에 따라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베트남이 분단된 이후 수많은 북베트남 사람들이 월남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때 응우옌 반 쪼이도 부모를 따라 사이공으로 이주했고, 그는 전구제조 공장에서 전기공으로 근무했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부정부패와 가족정치 불교도 탄압으로 인하여 민심을 제대로 못잡았고, 1960년 남베트남에서는 자생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창설되어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싸우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월남한 응우옌 반 쪼이는 전구제조 공장에서 전기공으로 근무하다가 무장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1964년 초 남부 롱 안(Long An) 성(省) 게릴라 기지에서 정치 학습과 게릴라 전술을 배웠다. 결혼한 지 1주일도 안 된 응우옌 반 쪼이는 1964년 5월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방부장관이 베트남을 방문하자 탄손누트 공항에서 사이공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꽁 리(Cong Ly)‘ 다리에 폭발물을 설치했다가 그만 들켜버려 체포되었다. 남베트남 경찰에게 체포된 응우옌 반 쪼이는 체포된 후 6개월이라는 기간동안 남베트남 경찰의 온갖 잔인한 고문과 구타 그리고 회유를 받았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다. 군사재판에서 그는 공개 총살형을 선고 받았고, 1964년 10월 15일 결국 응우옌 반 쪼이는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총살형이 집행되기 이전 응우옌 반 쪼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저널리스트로서 당연히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비행기와 폭탄으로 우리나라의 인민을 대량으로 살육하고 있는 것은 미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국을 정복하는데 필요한 모든 계획을 세웠던 자는 바로 저 로버트 맥나마라입니다. 내가 반대했던 것은 바로 미국입니다. 이 땅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범한 맥나마라를 나는 처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 마지막 소원이 있다. 내 조국의 하늘을 보고 싶다. 눈가리개를 벗겨 달라....˝
˝내 이 말을 꼭 기억해 달라.
타도 미제국주의!
베트남 만세!
호치민 만세!˝

출처: 왜 호찌민인가? p33~34

1975년 통일한 베트남 정부는 그의 혁명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그가 로버트 맥나마라를 죽이고자 거사를 단행했던 꽁 리 거리를 응우옌 반 쪼이거리로 명명했다. 그리고 1988년에는 한국에서도 혁명가 응우옌 반 쪼이에 대한 책이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했었다. 미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 혁명가 응우옌 반 쪼이가 참으로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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