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4.19 혁명으로 인하여 12년간 군림하던 이승만(Syng Man Rhee) 독재 정권이 물러났다. 4.19 혁명으로 인하여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허정은 사회개혁을 통해 난국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인민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총선이 치러져 대통령에는 윤보선 총리에는 장면이 당선되었다. 이렇게 제2 공화국이 등장했지만, 사회의 혼란은 여전했고, 이승만 독재 치하에서 억눌려 살던 민중들이 호소하는 집회나 시위도 끊이질 않았다.

 

4.19 이후 파업과 쟁의가 급격히 늘어났다. 쟁의 건수는 19614~5월에만 282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1953~1959년의 연평균 41건의 7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파업은 택시, 은행, 부두, 철도, 통신 등에 걸쳐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노동조합은 1959년의 588개에서 1960년에는 914개로 64%나 증가했다. 기존의 어용 노조를 민주화하기 위한 투쟁도 분출했다. 장면의 민주당 정부는 민중들의 요구에 혁명 과업이 완수됐으니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라고 외쳤고, 그 또한 반공주의와 친미주의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기에, 국가보안법을 개정은커녕 오히려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도입해서 민중운동을 탄압했다. 쉽게 말해 장면 정부 또한 본질적으론 이승만 정부와 더불어 친미 반공에 입각한 정권이었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의 주장에 따르면 서울의 지배 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 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라고 한다. 19612월 주한미군원조사절단 부단장 휴 팔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면 정부가 이대로 4월을 넘기기는 어류울 것이며 공산혁명 혹은 이와 비슷한 극단적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고, 그로부터 3개월 뒤 박정희(Park Jung Hee)를 비롯한 군부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5.16 군사 쿠데타가 그러했다.

 

군부 쿠데타가 처음으로 모의된 것은 1960910일로 김종필을 비롯한 영관급 장교 9명이 서울 총무장에서 모임을 갖고 군의 정풍운동을 벌이는 한편 혁명거사를 모의하고, 같은 해 119월에는 박정희 소장 집에서 다시 회합, 쿠데타 거사를 재확인했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는 19614월까지 혁명조직 및 거사 계획을 완성하고 419일 실행하려 했으나 좌절되었다. 다시 512일로 계획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마침내 1961516일에 쿠데타를 단행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보좌관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미군 대위의 회고록에 나온 내용이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196141, 즉 실제 쿠데타가 있기 45일 전, 나는 한국군 내에 쿠데타 기도가 있음을 상부에 보고했고, 그런데도 정작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나 맥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은, 박정희 쿠데타군을 타도하고 합법적으로 성립된 장면 정권을 지지할 것이라 표방했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그 45일 이전에 이미 박정희 등의 쿠데타 가능성을 보고받고도 그냥 있었고, 5.16 직후인 1961518일 박정희와 하우스만은 비밀리에 만나 광범위한 군사혁명 과업들을 얘기했다라고 한다. 여기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박정희 측과 미국 측이 이미 합의가 되었던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1961516일 박정희 소장과 그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장교 250명과 사병 3500여 명이 중심이 된 반란군은 이날 새벽 3시경 한강 어귀에 진입하여 약간의 총격전 끝에 예정보다 약 1시간 늦게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이들 반란군은 중앙청 및 서울중앙방송국 등 목표지점을 일제히 점거하고, 새벽 5시 첫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밝히는 한편 6개 항의 혁명공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이어 오전 9시에는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령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각료의 체포령에 이어 오후 7시를 기해 장면 정권을 인수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쿠데타는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육사 생도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거리 행진이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즉각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5.16 쿠데타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들은 첫 번째 조항과 두 번째 조항을 가장 우선시했다. 5.16 이후 4.19 혁명은 의거로 격하됐고, 그 자리에 5.16이 혁명의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쿠데타 잔재들은 혁명이라고 우기고 그렇게 표기하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내걸었던 6번째 조항은 절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박정희에 의해 완벽하게 폐기되어 버렸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과거 자신의 남로당 경력에 있어서 두 나라에게 의심받기도 했고, 기대를 받기도 했는데, 그 의심과 기대를 가졌던 두 인물이 바로 북한의 김일성과 미국의 존F케네디(JFK). 쿠바 미사일 위기와 더불어 미소 냉전이 긴장 상태였던 존F케네디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의심했지만,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한 뒤로부터는 그에 대한 의심을 버렸다. 북한의 김일성은 과거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에 기대를 걸어 한때 박상희의 절친이던 황태성이를 밀사로 남파시켜 남북연방제를 추진해보고자 했지만, 박정희는 황태성에게 간첩죄를 적용하여 형장의 이슬로 보내버렸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은 박정희 평전에서 5.16 쿠데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5.16 쿠데타는 대는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좋지 못한 선례를 한국 현대사에 남기게 되었으며, 그 선례는 이후 정치군인들에게 권력에 야심을 갖게 하는 충동을 뿌리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참고 자료

 

박정희 평전, 김삼웅 저, 앤길 출간, 2017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저, 창작과비평사 출간, 1999

한국 현대사 다이제스트 100, 김삼웅 저, 가람기획 출간, 2010

마르크스주의로 본 한국 헌대사, 한규한 저, 책갈피 출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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