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20181024일 필자는 2년간의 소방서 공익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전역했다. 공익 근무를 하던 시기 필자는 미국 여행을 준비했었고, 전역하고 난 지 5일 뒤인 1029일 아침 10시 뉴욕 존F케네디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여행 가서도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필자는 두 권의 책을 가방에 챙겼다. 하나는 <미국민중사>의 저자 하워드 진이 쓴 그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You Can’t be Neutral on a Monving Train>였고, 다른 하나가 바로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이었다. 1달간의 여행 기간 동안 미국 동부와 캐나다 그리고 미서부를 관광하고 다녔던 필자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우선적으로 읽었는데 미국 보스턴에 들린다면 케네디 생가와 더불어 그의 묘지를 방문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실제로 그의 묘를 방문했다.)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끝까지 다 읽게 된 시점은 관광버스를 타고 요세미티 국립 공원에 가는 도중이었다.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끝까지 다 읽은 필자는 버스 안에서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을 폈고, 꾸준히 책을 읽었지만, 그다음 날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40달러로 1040달러를 딴 이후로는 점차 독서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렇게 1달간의 긴 여행을 로스엔젤레스에서 마치고 귀국한 필자는 이현상의 초기 생애 부분까지만 읽은 상태였고, 그 이후론 읽지 않았었다. 물론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필자의 눈엔 다른 책들이 눈에 더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6월 여름 방학을 맞은 필자는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이번에 다시 읽게 되었다. 대략 2주 동안 이현상 평전을 읽었던 필자는 책을 정독하는 기간 동안 다시 한번 분단의 비극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대한민국 극우 반공 세력들이 이를 갈며 증오하고 싫어하는 인물 이현상은 일제에 맞서 노동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에는 미제국주의와 친일파 세력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다 전사한 혁명 전사였기 때문이다.

 

1926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사망했을 당시 일어난 6.10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현상은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과 더불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킴과 동시에 조선을 군국주의화 할 때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혁명 조직을 건설하는데 헌신했고, 그 바람에 일제의 감옥을 들락날락했었다. 1939년 국내에서 창설된 경성콤그룹에서도 활동한 그는 많은 인물들이 친일로 변절할 당시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극소수의 인물에 포함된다. 따라서 이현상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전설이었다.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분노를 느꼈던 파트는 해방 정국이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헌신했던 그가 해방 정국에서 좋은 대접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빨갱이로 몰려 미군정과 친일파 세력들에게 탄압받았기 때문이다. 19465월 정판사 사건 이후 이현상도 친일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으며 모진 고문을 받았었는데, 혁명가 이현상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한 주체가 바로 고문왕이라 불리던 노덕술이었다. 혁명가 이현상이 해방된 조선에서 악질 친일 경찰에게 빨갱이로 몰려 잔혹하기 짝이 없는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현상이 고문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김원봉의 비극은 비단 김원봉 선생에게만 국한되어있지 않은 일이었다.

 

필자가 이현상에게 존경심을 느끼는 점은 그의 빨치산 투쟁기다. 1948년 여순항쟁부터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까지 이현상은 남조선에서 미제국주의와 친일 세력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했었는데, 그의 경우 절대로 민간인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여순 항쟁 당시 14연대에 속해있던 일부 남로당 출신 장교들이 봉기한 군대에 의해서 처형되었던 것과 항쟁 시기 좌익계열에서 저지른 양민 학살에 대해 이현상 사령관은 이를 철저하게 비판했고 반성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여순 항쟁 시기 좌익에 의해 저지른 학살은 대부분 군경과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 청년단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무차별 학살을 일삼던 우익들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지만, 이현상 사령관은 좌익이 저지른 학살을 결단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러한 이현상 사령관의 노력은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으로 대거 편입된 신빨치산 세력들의 경우 일부는 이를 어기고, 약탈 및 군경과 우익 청년단에 대한 보복을 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현상 사령관은 이를 철저히 금지했고 이현상 사령관 휘하의 직속 부대들은 민간인 학살 및 강간, 약탈 등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 주변에 있는 소를 가져갈 때도 절대 함부로 가져가지 않고, 그 가격에 맞는 돈을 지급하고 가져갔다. 심지어 이현상 휘하의 빨치산들은 포로로 잡힌 국군 포로나 경찰을 함부로 학살하지 않았고, 이들을 그냥 풀어줌으로써, 역으로 감동을 줘 그들이 자발적으로 전향하여 빨치산 투쟁에 임하도록 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들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강간과 학살 약탈을 일삼았다는 대한민국의 소설들은 왜곡되고 조작된 반공 선동이다. 그런 반공 소설에서 묘사한 빨치산의 모습은 당시 빨치산의 모습이 아니라 이를 토벌하는 우익 청년단과 대한민국 군경의 모습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을 하게 된 국군과 유엔군은 북을 향해 진격하는 것과 동시에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도시들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었다. 그 결과 미군의 B-29 폭격기에 무차별 폭격을 받은 북한은 말 그대로 달의 표면으로 변했고,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1.4 후퇴 이후 휴전 협상을 북한과 하는 와중에도 미국은 북한 지역을 폭격했는데, 19537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폭격은 지속됐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보자면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북한이 더 많았지만, 남한 또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시기 미군은 남한 땅 전역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런 무차별 폭격은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남한 땅에서 계속되었다. 특히 지리산에 고립되어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던 빨치산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미군은 이현상을 비롯한 빨치산들의 뿌리를 뽑기 위해 지리산 전역을 폭격했고,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네이팜 폭탄까지 사용했다. 심지어 게릴라들을 죽이기 위해 세균까지 살포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미제국주의의 반인륜적인 범죄로 인하여 빨치산 게릴라들은 재귀열에 걸려 적잖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었다.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 당시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미군은 빨치산 게릴라들을 향해 휘발유를 살포한 뒤, 네이팜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고, 그 결과 유격대원들과 투쟁 인민들 그리고 산짐승과 나무를 가릴 것 없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타버렸으며 인근 지역이 불지옥으로 변해버렸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즉 미군은 이현상과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이런 광기 어린 짓까지 일삼았다. 이는 마치 베트남 전쟁에서 미제국주의 군대가 베트콩 해방 전사들과 남베트남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반인륜적 전쟁범죄와 같았다.

 

미제국주의와 친일파 세력들은 이현상과 빨치산들을 죽이기 위해 이런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거기다 195110월 휴전 회담이 대략 3, 4개월 동안 정체되어 있을 때, 이승만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전방에 있던 백선엽 휘하의 군대를 지리산에 투입하여, 빨치산의 씨를 말리고자 하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현상과 빨치산들은 민중의 해방과 제국주의를 축출하기 위해 총을 들고 싸웠다. 하지만, 국군과 미군의 집요한 토벌 끝에 빨치산 세력은 씨가 말랐고, 한국전쟁이 끝난지 2개월 뒤인 1953917일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은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30년 동안 사회주의 혁명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워온 조선의 체게바라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1967년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투쟁 과정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체게바라는 묘비도 세워지지 않은 채, 땅속에 묻어졌다. 볼리비아의 토벌대가 체게바라의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그의 시신을 땅에 묻은 이유는 그가 우상이 될 거라는 두려움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 또한 화장되어 묘비도 세워지지 않은 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저 이현상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세워진 가묘가 북한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있을 뿐이다.

 

필자가 가장 흥미를 느끼고 책에서 읽었던 부분은 한국전쟁 초기에 이현상과 구빨치산 세력들이 전개했던 투쟁이었다. 여순항쟁 이후부터 1950년까지 대략 2년간 지리산에서 게릴라 투쟁을 해오던 빨치산들은 19506월에 북상을 시작했었다. 북상하던 빨치산들은 19507월 하순에 남하하던 인민군과 접선하였고, 이후 낙동강 전선을 향해 남진했다. 낙동강에 도착한 그들이 수행했던 임무는 인민군 정규 부대들과 더불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 아니었다. “낙동강을 도하하여 후방에서 국군과 미군을 교란하는 것이 이현상과 빨치산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195081일 낙동강을 도하한 빨치산들은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빨치산들은 북한의 T-34 탱크를 잡기 위해 도착한 미군 탱크를 상대로도 전투를 치르기도 했었다. 빨치산들은 9월 말까지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전개했다. 이현상의 빨치산 부대는 낙동강전선을 넘어간 유일한 유격대였고, 책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아군의 인명 손실은 거의 없었으며 최소 수백 명의 미군을 사살하고 100명 이상의 미군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미군 포로들을 함부로 학살하지 않았으며, 백여 대의 군용차량과 십여 군데 군사기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전과(戰果). 이 부분에서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후방교란 작전을 수행했던 한 여성 유격대원에 대한 얘기를 언급하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강에 성공한 100명의 유격대 앞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거대한 무기가 등장했다. 탱크였다. 소총 한 자루에 수류탄 몇 개가 고작인 대원들은 모래땅을 흔들어대며 요란하게 밀려오는 탱크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으나 총알은 불꽃만 날리며 튕겨버리고 수류탄도 소리만 요란할 뿐 두꺼운 철판에 흠집도 내지 못했다. 이때 유일한 여성 소대장으로서 매 동무라고 불리던 부산 출신의 23살 처녀 대원이 부상당한 몸으로 방망이 수류탄을 들고 미군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인민공화국 만세!” 매 동무는 가녀린 음성으로 만세를 부른 뒤 자폭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탱크가 멈춰 섰다.”

 

출처: 이현상 평전 p.350

 

우리가 아는 빨치산 대장 이현상 사령관은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친일파들에 맞서 투쟁했던 혁명가이자, 독립투사였다. 여순항쟁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협정 이후까지 대략 5년간 한반도 이남에서 혁명 투쟁을 전개했던 이현상 사령관이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았던 것은 고작 3개월이다. 그것도 19485월에 난생처음 받았다. 3개월간의 군사 훈련을 토대로 여순항쟁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협정 이후까지 대략 5년간 빨치산을 지휘했던 것이다. 20세기 혁명사에 있어서 게릴라 투쟁의 전설인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쿠바 혁명과 호치민과 베트콩의 민족해방투쟁은 기후 및 환경 자체가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기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현상이 전개했던 지리산과 한반도 이남 지역은 절대 아니었다. 저자 안재성은 책에서 이현상의 빨치상 투쟁이 주어진 조건상 얼마나 악조건이었는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리산이 아무리 크다 해도 반경 50km의 고립된 공간이었다. 미국과 싸우던 베트남 유격대는 하노이로부터 보급을 받았고 독일과 싸우던 러시아 유격대는 트럭으로 물자를 보급받아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름없었다. 중국공산당이나 만주의 항일 유격대는 농사까지 지으며 싸울 여유도 있었다. 그러나 남한 유격대는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아무리 깊은 골이라도 반나절만 걸으면 마일이 나오는, 상대적으로 아무리 깊이 숨어도 국군이 반나절만 밀고 오면 드러나 버리는 손바닥만 한 지역에서 이리저리 토끼몰이를 당하며 죽어가는 처지였다.”

 

출처: 이현상 평전 p.502

 

이렇듯 이현상의 빨치산 투쟁은 악조건 속에서 전개된 투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다시 한번 분단의 비극과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비극을 느꼈다. 일제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던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 땅에서 친일파에게 빨갱이로 몰려 결국은 빨치산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은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드라마 서울 1945가 분단의 비극을 낱낱이 보여주듯이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도 이를 보여준다. 이현상 같은 혁명적인 독립운동가가 해방 이후 어떻게 해서 미제국주의와 친일파에 맞서는 빨치산 투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은 환경의 악조건 속에서도 지속되었는지?”를 우리는 이현상 평전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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