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아옌데 - 혁명적 민주주의자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 지음, 정인환 옮김 / 서해문집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지난 2019년 남미에서 가장 긴 영토를 자랑하는 국가 칠레는 대규모 항의시위에 휩싸였다. 수많은 칠레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벌였고, 그 시위는 2020년인 지금도 끝나지 않았으며 계속되고 있다. 칠레는 부의 불평등이 극심한 나라다. 유엔 중남미ㆍ카리브경제위원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상위 1%가 전체 국가 부의 26.5%를 차지하고 있고, 하위 50%가 차지하는 부는 전체의 2.1%에 불과할 정도로 칠레의 빈부격차 문제는 심각하다. 현재 칠레의 최저임금이 한국 돈으로 49만원 정도이지만, 민중의 53%62만원도 안되는 월급을 받고 있고 231만원 이상을 버는 샐러리맨은 칠레 인구 전체의 6.1%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다 대학 등록금은 비싸고 의료보험과 약값도 비싸기에 일반 민중의 부담은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칠레의 상류 계급들과 기업들은 엄청난 이윤축적을 하고 있기에, 칠레 민중들은 이에 분노하여 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빈부격차와 기업의 착취적 이윤창출로 인하여 민중의 불만이 극심한 칠레에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한 사회주의자가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적이 있다. 그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대통령이 된 이후 칠레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했다. 그가 바로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세계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살바도르 아옌데는 참으로 매력적인 생애를 가진 인물이다. 1908년 칠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쿠바 혁명가 체게바라처럼 의대에 입학했고, 군복무와 의대시절의 경험 그리고 각종 반정부 시위를 통해 사회 비판적 의식을 길렀으며,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함으로써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그는 칠레의 보건복지부 장관을 거쳤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부터는 칠레의 상원의원을 지냈다. 칠레 사회당에서 정치경력을 쌓은 그는 3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지만, 1952년과 1964년 대선에선 칠레 좌파계열의 분열과 보수진영의 방해공작으로 패배했었다. 1970년 그는 세계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칠레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그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칠레에서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 개혁 및 정책을 실행했다. 그는 집권 초기에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폭등하던 물가인상률을 30%대에서 15% 이하로 감소시켰다. 전 정부에서 3%도 이루지 못했던 국내총생산 성장률을 약 8% 이상까지 치솟게 했고, 산업 생산과 광산ㆍ농업 생산량도 모두 성장세를 보였다.

 

초기 아옌데의 정책으로 칠레 경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호황을 누렸고, 수많은 이들이 전보다 나은 식품과 소비재를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아옌데 정권은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고, 중소기업에게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가족 보호를 전담할 정부 부처도 신설하기로 했으며,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동네마다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집세는 가계 수입의 10%를 상한선으로 정해, 더 인상할 수 없도록 했다. 아옌데의 개혁정책 뼈대에는 칠레 경제를 3개 부문으로 개편하는 방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사회 부문, 혼합 부문, 민간 부문으로 나눠, 민주적으로 결정된 계획에 따라 긴밀히 연계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조처는 구리, 질산염, 요오드, 철광석, 석탄 산업과 금융, 무역, 그리고 칠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과점 부문들의 국유화정책이었다. 따라서 아옌데는 많은 부분에서 사회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다.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진보적인 조치들을 단행해 나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있었는데 바로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로 반공의식을 가진 미국과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 그리고 사회주의에 불만을 품은 우익 세력들이었다. 1970년 대선에서 인민연합을 겨냥한 흑색선전에 80~100만 달러가량의 자금을 쏟아부었던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 되자 CIA를 이용하여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를 준비했고, 이들에게 부역하는 세력은 칠레에서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대형 슈퍼마켓과 증권거래소, TV 방송국과 철도, 공항 유류 저장 시설로 폭탄이 날아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테러 행위를 일삼는 이들에게 자금을 댄 것은 역시 미국과 CIA였다.

 

결국 미국은 1973년 우익 출신 군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이용하여 군사 쿠데타를 획책했다. 미국은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도왔고, 수도 산티아고는 피바다가 되었다. 피노체트 휘하의 반혁명 세력들은 아옌데가 있던 대통령궁을 비행기로 폭격하고 탱크를 앞세운 군대를 보내 아옌데 측 군대를 진압했다. 아옌데 또한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받은 AK-47 소총을 들고 반혁명 군대와 총격전을 벌였지만,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됐다. 1973911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아옌데는 반혁명 군대와의 대치속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중 일부를 발췌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동자와 농민과 지식인 모두, 앞으로 파시즘 치하에서 탄압을 당하게 될 겁니다. 파시즘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테러가 횡행하고, 교량이 파괴되고, 철로가 끊기고, 원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이 파괴돼도 이를 막아야 할 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 역시 똑긑은 짓을 저지른 겁니다. 역사가 저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인민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희생돼선 안됩니다. 저들에게 압도당해서도, 살육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저들의 모욕을 참지도 말아주십시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검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236에서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 일부 발췌

 

아옌데가 죽고 난 이후 칠레에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피노체트와 그의 주구들은 점령군 행세를 했다. 쿠데타 이후 불과 몇 달 새 수십만 명이 체포, 구금됐고 상관의 명령에 불복한 병사들은 총살되었으며, 아옌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장교들은 줄줄이 체포돼 고문당했고, 일부는 살해됐다. 칠레 좌파 정당의 평당원이나 노동조합 조합원도 탄압의 대상이 됐다. 많은 이들이 살해됐고, 이들 중 어린이 수십 명도 고문을 당했으며 일부는 살해됐다.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적 보복을 가했다. 군부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더 나은 미래와 이상적 사회를 꿈꾸던 수천 명의 이름 없는 이들도 삶을 마감했다. 피노체트가 아옌데의 유산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교육계에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줄줄이 축출됐다. 또한, 그는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이렇게 피노체트는 친미주의를 유지하며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피노체트부터 시작된 칠레의 정부는 무능했고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칠레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초과이윤을 위한 소수 자본가들의 극심한 민중 착취 체제다.

 

칠레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극심한 불만이 심화되면서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피노체트 정권은 사회주의자 아옌데가 남긴 유산을 지우려 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이 칠레 사회에 폭발적으로 나타나면서 아옌데는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이들에게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칠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의 존재는 미국이라는 악랄한 제국주의 국가가 사회주의 정권을 어떻게 파멸 시킬 수 있는지도 보여주기도 한다. 아옌데의 비극적 죽음과 피노체트의 반동 쿠데타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악랄함과 사악함이 칠레를 어떤 비극으로 몰고 갖는지도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옌데의 존재는 사회주의자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민주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사회주의 사회를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비록 아옌데는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반동 쿠데타로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했지만, 사회주의자가 민중 대다수에게 지지를 받았을 때 가지고 올 변화가 무엇인지 집권 기간 3년을 통해 보여줬다. 그는 칠레 인민들에게 안정적인 노후연금과 질높은 교육, 외세의 기업적 착취 및 인권유린 종결,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질높은 소비재 보급을 추구했고, 실제로 짧은 기간에 그걸 달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미제국주의와 칠레 우익 부르주아 계층의 도움 없이 이룩한 아옌데의 업적이었다. 아옌데가 추구했던 정신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누려야할 당연한 인권이기도 하다.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가 집필한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는 혁명가 아옌데의 감동적인 생애와 민중의 인권과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그의 열정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명저다. 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아옌데의 감동적인 생애와 사회주의적 열정을 느끼게 할 것이다. 글 앞부분에서 상술했듯이 현재 칠레는 1973년 피노체트가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적 내부 모순이 극대화된 사회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인 아옌데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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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부터 이어오던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는 6대 쇼군인 요시노리 시기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1438년부터 커다란 내란이 여러 차례 발생했고, 내란을 시작으로 각지역 다이묘들의 불만은 확산되어 갔다. 요시노리가 암살당한 이후 새로 취임한 쇼군은 불과 2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어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쇼군의 지위에 올랐다. 요시마사가 성년이 되어서도 불안한 정세는 계속되었는데, 이시기 막부의 부패는 극에 달했었다. 이 과정에서 막부와 쇼군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자 귄신 간의 세력 투쟁이 격렬해졌고,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일본에선 각 지방 영주들의 군사적 세력다툼인 전국시대가 시작됐다.

 

1467년에 시작된 오닌의 난은 11년간 지속했었다. 오닌의 난으로 인하여 쇼군의 권위와 내려갔고, 많은 다이묘들이 자신의 영지로 내려가 이제는 쇼군의 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닌의 난 후 약 반세기가 지나면서 새로운 세력인 전국 다이묘가 각지에서 할거하게 됐다. 전국 다이묘로 성장한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하나는 과거 일본에서 영향력이 있던 슈고 다이묘에서 전국 다이묘로 변신한 경우고, 다른 하나는 슈고다이 등이 하극상이라는 사회 풍조를 이용하여 슈고 다이묘 등을 타도하고 권력을 탈취한 경우였다. 후자의 경우는 오다 노부나가가 대표적이다.

 

전국 다이묘들은 혈연이 다른 재지영주와 백성을 포함하는 지역 결합을 군사력의 핵심으로 삼았다. 전국 다이묘는 다수의 재지영주를 자신의 유력 가신 밑에 배속시킴으로써 그들에 대한 통제의 효율성을 높였고, 창을 활용한 집단 전투를 도입했으며, 군량미와 무기 운송에 일반 백성들을 동원했다. 또한 그들은 가신들이 보유한 토지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게 했고, 자신들의 나와발이를 원활하게 지배하기 위해 분국법 또는 전국가법이라 부르는 독자적인 성문법을 제정했다. 일본 전국시대의 특징중 하나는 전국 다이묘들이 다스리는 지역이 굉장히 많이 분산되어 있었다는 점인데, 각 지역을 다스리는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지역국가를 형성했었다. 따라서 이 전국시대에는 일본 전역에서 전국 다이묘들 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지속되었다.

 

1543년 일본 전국시대의 형세를 뒤집어 놓을 무기가 일본에 도착했다. 당시 인도의 향신료를 찾아 무역로를 확장하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아시아까지 항로를 개척했고, 그리하여 포르투갈인을 태운 상선이 일본 규슈 다네가시마에 닿은 것을 계기로 일본과 포르투갈 간의 무역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에는 소위 조총이라 불리는 무기가 들어왔고, 일본은 포르투갈인들에게 그 사용법과 제조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총은 일본 곳곳에 파졌고, 포르투갈인들은 조총술을 가르쳐줌과 동시에 일본산 은을 얻음과 동시에 기독교 사상까지 전파했다. 이런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이 준 조총의 위력을 알아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15603만의 군세를 이끌고 교토로 향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오케하지마에서 고작 3천의 군사로 물리친 다이묘로서 두각을 나타낸 오다노부나가는 1567년 미노의 사이토 씨를 멸하여 비옥한 노비 평야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5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수도 교토에 입성함으로써, 천하 통일의 일보를 세웠다. 그는 조총술을 군대에 익혀 적은 군사로도 많은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는데, 3개의 조로 편성한 조총 사격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다.

 

1570년 아자이 나가마사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연합군을 아네가와 전투에서 물리친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 통일을 위한 전쟁을 계속해나갔다. 일본의 쇼군들은 세력이 커지는 오다 노부나가를 견제하기 위해 세력을 연합하여 대항했지만, 1573년 오다노부나가는 그들을 무찌르고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또한 그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량의 총포를 이용한 전법으로 당시 최강의 기마군단을 이글던 다케다 가쓰요리를 물리쳐 전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아즈치 성 건설에 착수하여 1579년에 완성시켰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왜냐하면 그의 심복이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그를 배신해버렸기 때문이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는 덴모쿠 산의 싸움에서 자신의 숙적인 다케다 가쓰요리를 멸하고 모리 씨 정벌에 착수했는데, 아케치 미쓰히데가 그를 배반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목숨을 잃은 뒤, 그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2년 야마자키 전투에서 배신한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대를 섬멸했고, 이어 1583년 노부나가의 고위 장군 시바타 가쓰이에를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패망시키고, 가쓰이에에 협조했던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를 자살로 몰아넣어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1584년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고마키와 나가쿠테 전투를 벌였는데,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에야스와 화해하여 그를 휘하에 두는 데 성공했다. 1585년 히데요시는 기이를 평정한 후, 시코쿠를 정벌했고, 1587년에는 규슈를 정벌했다. 그리고 1590년 히데요시는 호조 우지마사를 멸망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 전국을 통일했다. 이렇게 해서 전국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이룩함에 따라 끝났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왕이 된 이후 일본은 전쟁을 다시한번 치르게 됐는데, 그게 바로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다.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더 나아가 인도까지 정벌할 야심을 가졌었지만, 그의 꿈은 조선 반도에서 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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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베트남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19세기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를 식민지화한 이래로 베트남은 독립투쟁을 전개해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Ho Chi Minh) 휘하의 베트민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상 아래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키자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프랑스를 무찔렀다. 이후 미국이 남북으로 가르고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자, 호치민과 공산당의 지도아래 단결한 베트남은 침략자 미국을 무찌르고 1975년에 통일을 이룩했다.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까지 무찌른 베트남이었지만, 베트남에게 평화가 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베트남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봉건세력에 맞선 투쟁이 전개됐다. 라오스에서는 수파누봉(Prince Souphanouvong)의 지휘아래 라오스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파테트 라오(Pathet Lao)’가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고, 캄보디아에서는 소위 크메르루주(Khmers Rouge)’론 놀(Ron Nol)’의 친미 정권을 전복시키고자 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나기 13일 전 캄보디아에선 폴포트(Pol Pot)’가 이끄는 크메르루주가 론 놀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해 12월 라오스에서는 파테트 라오가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은 폴포트는 사회개조작업이라는 명분하에 캄보디아를 광적인 학살국가로 변모시켰다. 수도 프놈펜에 있던 중앙은행을 폭파하고, 노동자 외에는 도시민들을 모두 농촌으로 보내어 집단농장에서 일하게 했으며, 소위 인텔리겐치아로 의심되는 대부분의 사람을 죽였다. 즉 폴포트는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고 광적인 킬링필드(Killing Field)’를 시작한 것이다. 4년간의 킬링필드로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과거 서방이 얘기하는 300만 학살설이나 250만 내지는 200만 학살설이 과장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80~150만의 캄보디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관계는 과거부터 좋지 않았다. 18세기 베트남이 소위 남진정책(Nam tiến)’을 추진하며 참파를 정복하며 당시 캄보디아의 영토였던 코친차이나 일대도 접수했다. 이런 양국의 갈등은 꽤나 심각했고, 1970년대 캄보디아의 친미 지도자였던 론 놀은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서 활동하던 반베트남 단체인 Fulro를 지원했었다. 1975년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자 폴포트 또한 반베트남 성향을 드러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접수하고 통일을 이룩한 그 다음날인 51일 폴포트의 크메르루주군은 베트남의 푸꾸옥(Phu Quoc)을 기습해 점령했다.

 

킬링필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폴포트는 다시 한번 반베트남 감정을 드러냈다. 폴포트는 병사들에게 적들을 마음대로 죽여라. 하찮은 베트남 놈들을 정글 속 원숭이처럼 깩깩거리며 죽게 하라고 격려하며 베트남에 대한 선제공격을 준비했다. 1977430일 베트남 남서부 안장(An Giang)성의 국경도시 쩌우독(Chau Doc)을 공격해 베트남 시민 수백 명을 죽였고, 그해 9월엔 베트남 국경지역을 포격하고 6개 마을을 점령한 데 이어 6개 사단으로 떠이닌(Tay Ninh)성을 공격해 10km 정도 진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명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들을 또 학살했다. 뿐만 아니라 폴포트는 킬링필드 과정에서 베트남과 연관된 인사들까지 탄압하며 학살했고, 이것은 베트남의 하노이 정부를 분노케 했다.

 

폴포트에게 분노한 베트남 정부는 8개사단을 소집해 19771216일 베트남 인민 공군의 지원 아래 반격을 개시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잘 단련된 베트남 인민해방군의 주력부대는 크메르루주 군대를 박살내고, 19781월 초에는 수도 프놈펜에서 불과 38km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했다. 당시 베트남군은 크메르루주에 대한 협상을 포기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는데,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이를 자신들이 대승을 거둔 것이라고 자찬했다. 이때 크메르루주군은 철수하는 베트남군을 따라가 베트남 최남단 국경 마을인 하띠엔(Ha Tien) 외곽을 점령했는데, 이걸 계기로 하노이 지도부는 크메르루주 정권을 전복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베트남군 철군이후 기고만장해진 크메르루주군은 다시한번 안장성 국경마을들을 공격해 베트남 민간인 3천 명을 학살한 뒤, 베트남군을 피해 퇴각했다. 결국 베트남은 폴포트 정권에 맞서 전면전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베트남 정부는 35만 명을 징집하여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동안 10개 정예사단을 캄보디아 국경에 배치했다. 또한 라오스에 주둔 중이었던 3개 사단도 라오스-캄보디아 국경으로 이동시켰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와의 전면전쟁을 준비하자 캄보디아를 지원하던 중국은 베트남에게 정치적으로 경고를 하며 캄보디아에 대한 무기 공급을 대폭 확대했다.

 

19781221일 베트남 2개 사단이 베트남-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군을 공격했다. 4일 뒤인 크리스마스에는 13개의 사단으로 이뤄진 15만 병력과 야포 전투기까지 동원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폴포트에 반대해 베트남에 망명해 있던 크메르루주군 병사들도 베트남과 연합하여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2주 만에 폴포트의 캄보디아군은 병력의 절반을 잃었고, 퇴각을 거듭했으며 197917일에는 프놈펜 또한 베트남군이 접수하게 됐다. 이렇게 캄보디아를 접수한 베트남은 폴포트 정권을 전복시키고 그곳에 친베트남 정부인 훈센 정부를 세워놓고, 1989년에 철군했다. 역사적으로 베트남과 사이가 매우 안좋던 캄보디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이 폴포트 정권으로부터 해방해주자 캄보디아인들은 베트남군을 해방군으로 맞았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맞보았던 미국은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 폴포트 정권을 지원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이후 베트남 정부가 폴포트 정부를 전복시키자 중국의 덩샤오핑은 캄보디아를 침공한 베트남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베트남 북부를 공격하기로 했고, 1979217일 중국은 베트남 국경지대에서 진격을 개시했다. 그 전쟁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20만 명이 국경을 넘어 베트남을 침공했고, 탱크 200대와 항공기 170대도 동원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격은 랑선(Lang Son)과 라오까이(Lao Cai) 그리고 까오방(Cao Bang)에 집중됐다. 당시 베트남의 주전력은 캄보디아에 가 있었기에 중국군의 진격을 막는 베트남군은 미약했다. 6개 사단만이 베트남 북부지역에 주둔해 있었고, 나머지는 민병대로 이루어진 보조병력이었다. 그들은 수도 하노이를 지키기 위해 방어병력을 하노이 외곽에 집중배치해 놓았고, 국경에서의 전투는 10만 명의 민병대에게 맡겼다.

 

과거에 중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듯이 베트남군은 북부의 산악지대를 이용해서 최대한 버티며 중국군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베트남군은 미군이 남베트남군에 제공한 장비들과 소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제공한 최신무기들로 중국군에 맞서 싸웠다. 심지어 베트남군은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로 개전 하루 만에 중국군 탱크 13대를 파괴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미국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베트남군 장교들의 지휘 능력도 중국군을 능가했다. 결국 중국군은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10만 명의 병력을 더 투입했고, 225일 동당과 몽카이의 베트남 국경 마을들을 점령했다. 이렇게 첫 성과를 거둔 중국군의 진격이 잠깐 멈추자 베트남군은 즉각 반격에 나섰고, 베트남군은 중국군이 점령한 동당을 탈환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은 랑선 전역에 한국전쟁 때 파병했던 정예사단 두 개를 투입했고, 격렬한 시가전 끝에 36일 중국군은 도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중국군은 랑선을 점령한 이후 베트남에 교훈을 주는 목적을 당성했다라고 하면서 철군을 선언했고, 베트남도 휴전에 동의했다. 양측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중국군을 막은 베트남의 군대가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였다는 점에서 중국은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국제정세의 양상을 제대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폴포트를 지원했던 중국은 베트남과 전쟁을 했고, 베트남은 캄보디아랑 전쟁을 했다. 중국을 견제하고 싶었던 소련은 베트남을 지원했고,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베트남을 견제하고 싶었던 미국은 폴포트 정권을 지원했다. 이런 의미에서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국제정세의 원리를 아주 명확히 보여준 전쟁이었다.

 

참고자료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책갈피, 2004

천년전쟁, 오정환, 종문화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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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드랑 계곡 위치)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전하게 된 미국은 1965년 3월 3500명의 미해병대를 다낭에 상륙시킨 것을 시작으로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 숫자를 증가시켰다. 당시 베트콩과 전투를 치르고 있던 남베트남군(ARVN)은 전투에서 베트콩에게 참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1963년 1월 압박 전투에서 적은 규모의 베트콩에게 대패했던 남베트남군은 1965년 빈지아 전투(Battle of Binh Gia)와 ‘동 쏘 아이 전투(Battle of Dong Xoai)’ 등에서도 패배했고, 1965년 5월 말 소규모의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궤멸시키기까지 했다.

(이아드랑 전투 당시 투입된 헬기 부대)


군대로써 허접한 모습을 보이던 남베트남군을 대신하여 미군 정규부대가 베트콩과 호치민 루트를 통해 증파된 북베트남군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남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미군이 주로 주도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군과 북베트남 정규군(NVA), 베트콩이 대략 4일에 걸쳐 치르게 된 전투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계곡 근처에서 벌어졌던 이아드랑 전투(Battle of Ia Drang)다. 사실 이 지역은 미군이 들어가기 11년 전인 1954년 6월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된 프랑스군이 마지막으로 베트민에게 대패했던 장소였다. 안케 전투(Battle of An Khê)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민에게 최소 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했었고, 이것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치러진 전투였다.

(진격하는 북베트남군)


1965년 9월 미국은 16000명이나 되는 규모를 자랑하는 제1 기병사단과 1600대의 차량 그리고 435대의 헬기를 중부 고원지대 끝부분에 있는 안케기지에 배치해 놓았다. 그 부대는 미군의 최정예 부대로써 1876년 윌리엄 커스터 장군 휘하에서 원주민을 학살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노근리 지역에서 300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던 부대였다. 즉 이런 부대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섬멸하기 위해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최신식 헬기까지 지원하며 투입된 것이었다. 이렇게 미군 최정예 부대가 중부고원지대에 배치되자 북베트남군 수천 명이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를 따라 현지의 베트콩 부대와 합류했다. 그들은 추퐁산(Chu Pong Mountain)에다 기지를 구축했고, 미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M-16 소총을 들고 있는 미군)


1965년 10월 19일 북베트남측 특공대가 12명의 미군 그린베레 대원과 남베트남 병사 14명 그리고 현지 산악부족(Montagnard) 400명이 지키고 있던 플레이미(Plei Mi) 기지를 2일간 공격하여 9명의 그린베레 대원을 전투에서 사살했다. 당시 미군은 ‘은빛 작전(Operation Silver Bayonet)’하여 작전을 3단계로 나누어 진행했는데, 10월 중후반에 북베트남측 특공대의 공격이 있자, 구조작전인 1단계 작전을 진행했고, 10월 말에 1단계 작전이 끝나자 2단계 작전으로 나갔다. 2단계 작전은 헬기의 공중지원을 받는 미군 제1 기병사단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지역을 수색하는 미군 병사)


1965년 11월 14일 미군은 캄보디아 국경지대 근처에 있는 이아드랑 계곡에 대규모 헬기를 동원하여 제1 기병사단 공중 강습 부대를 착륙시켰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자 당시 공중 강습 부대 지휘관이던 할 무어 중령은 산기슭 어긴가에 거대한 북베트남군 기지가 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실제로 응우옌 후 안이 이끄는 부대는 미군이 착륙한 LZ X-Ray 근처 지하에 있었다. 상륙한 할 무어의 군대는 북베트남측의 탈영병 한 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탈영병 한 명은 “현재 산에 3개 대대로 이루어진 1600명의 병사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은 북베트남군 병사 3000명이 그 근처에 있었지만 말이다.

(포위 당한 미군 지도)


그날 오후 미군 강습 부대가 거의 다 착륙하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3000명 이상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954년 프랑스군을 포위하여 섬멸했던 안케 전투에서처럼 미군을 포위했고, 포위 당안 할 무어의 부대는 북베트남군의 포위에 당황했다. 그 다음날인 15일에는 북베트남군과 미군이 정면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선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마주 볼 수 있을 정도였고, 북베트남군은 미군을 섬멸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했다. 전투 과정에서 미군은 전투 헬기의 화력 지원과 포병의 지원을 쏟아부었다. 또한 미군 사령부에 연락하여 항공모함에서 전투기 공습까지 지원받았다.

(이아드랑 전투 둘째날을 묘사한 그림)


이 전투에서 18000발의 포격이 있었고, 무장한 UH-1 헬기는 3000발 이상의 로켓탄을 쏘았으며, 심지어 B-52 폭격기까지 이 전투에 동원되었다. 미군 측의 이런 화력 지원으로 인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상자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측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런 화력 지원으로 인하여 미군 또한 아군 네이팜 폭탄에 희생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1월 17일 북베트남군은 할 무어 중령 휘하의 미군이 지키고 있던 곳을 4번 더 공격했고, 할 무어 중령의 부대는 포병대의 지원과 막강한 헬기의 기관총 사격으로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북베트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냈다.

(이아드랑 전투 당시 미군을 지휘했던 할 무어 중령)


1965년 11월 18일 이아드랑 전투는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 북베트남군 1700명 이상이 사망했던 데에 비해 미군은 308명이 전사했다. 거의 전사자 비율이 6 대 1 수준이었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은 11월 18일 날 다른 대대를 매복시켜 LZ Albany 지역에 있던 미군을 섬멸했다. 공격한 북베트남군이 미군에게 너무 근접해있었기에 포병지원을 부를 수 없었고, 결국 미군은 155명이 사망하며 올버니 지역에서 북베트남군에게 패배했다. 비록 올버니 지역에서는 미군이 패배했지만, 6대1 전사자 비율로 보았을 때는 미군의 승리였기에 미국 정부는 이아드랑 전투에서 자신들이 승리했다 주장했다. 물론 비율만 가지고 보았을 때, 이아드랑 전투는 미군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아드랑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아드랑 전투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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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조선 반도 전역에서 민중들과 민족대표들이 뜻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했다. 그 저항운동에는 수많은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이 참가했고, 그 민중들이 참가한 시위는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났었다. 그것이 바로 3.1 운동이다.

 

1. 식민지 조선의 시대적 상황

  

  

19세기 중후반 서구식 근대화를 거친 일본은 조선 반도를 지배하고자 했었다. 1894년에 일어났었던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던 일본은 1895년에는 조선의 민비인 명성황후를 암살했고, 그 외에도 타이완과 요동 반도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었다. 결국 조선 반도를 놓고 러시아 제국과 이권 다툼을 벌이던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이기고, 조선의 고종황제에게 을사조약을 체결토록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이에 반발하여 몇몇 조선 사람들은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일본에 맞서 싸웠지만, 현대식 무기와 군사기술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그 외에도 애국계몽운동이나 독립협회운동 그리고 신민회 조직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같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결국 1910829일 조선은 을사늑약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을 식민지배하게 된 일본이 펼쳤던 정책은 소위 무단통치였다. 무단통치란 지배자 일본이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 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

 

또한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이라 하여 명목상 근대적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실행했지만, 대한제국 시대부터 이루어진 일본인의 조선토지 소유를 합법화하고, 일본인을 대거 조선에 이민시켜 확보한 토지를 그들에게 불하함으로써 일본인 지주를 양산하고 식민지 지주경영제를 강화하여 한반도를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고자했다. 당연히 이런 일본의 무단통치에 조선인들은 반발과 불만이 많았고, 이런 토대는 조선인들이 일본에게 저항하거나 잘 따르지 않으려 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1 운동의 전개

  

  

이런 과정에서 1914년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연합국 편에서 참전했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은 승전국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918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서구 열강들은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를 놓고 논의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전후질서의 14개조 원칙을 제안했다. 그 안에는 소위 민족자결주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식민지 지배를 받는 약소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당시 중국 상해에 있던 여운형은 미국 대통령 특사인 찰스 크레인을 만나 미국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따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19191월 중국 텐진에 있던 우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프랑스에 보냈다. 여운형과 더불어 신한청년당 단원이었던 장덕수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8일 이광수를 포함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회원인 선우혁은 조선에 들어와 선천, 평양 등지에서 기독교계의 이승훈 양전백 등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또 여운형은 직접 러시아령 니콜리스크에 가서 전러시아조신인대회에 참석하고,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갈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움직이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동학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천도교의 지도자 손병희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은 1918년 말부터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독립운동 혹은 자치운동을 논의했다. 19191월 중순경 그들은 만세시위 형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봤다. 기독교계도 독자전인 운동을 준비했었다. 27일 천도교 측이 평양에 사람을 보내 이승훈을 서울로 불러 독립운동을 협의했고, 225일 천도교와 기독교계는 마침내 연합에 합의하고 학생들에게도 함께 운동을 전개하자고 요청하며 불교계도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운동 지도부는 독립선언에 서명할 33인을 선정하고, 최남선에게 독립선언문의 작성을 맡겼다.

 

19193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이 따로 독립선언식을 열었고, 선언식을 마친 뒤 민족대표 29명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자 학생들은 서울 시가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같은 시각 서울 외에도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주요도시에서 동시에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서울의 학생들은 예정대로 35일 서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은 3월 중순이 되어 청년, 학생, 교사나 지식인만이 참가하는 시위가 아닌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이 참가하고 그들에 의해 전국 소도시로 확산되었다. 그 시기에는 중남부 지방, 면 단위 이하의 농촌 지역 심지어 산간벽촌에 이르기까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운동의 양상도 달라져 계급, 계층 간, 종교단체 간 연대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시위 자체의 조직화 지속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의 시위는 다수의 민중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면서 시위도 다소 과격화되기도 했다. 물론 그 과격화나 폭력성이란 말은 일본 경찰의 가혹한 탄압에 대한 정당방위의 성격을 지닌 경우가 대다수였지. 처음부터 공세적인 시위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322일 서울에서 노동자와 청년 학생들이 준비한 노동자대회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해 시위를 전개했다. 이 시위는 이후 서울 시가지 시위의 기폭제가 되어 23일 이후 매일 밤 시내 도처에서 게릴라식 시위가 벌어졌다. 26, 27일에는 전차 종업원, 경성철도 노동자, 만철 경성관리국 노동자들도 파업에 돌입했다.

 

 

이렇게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이 시위를강력하게 진압했다. 31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는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는 협박문을 발표하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사단 23000명이 있었는데, 이걸로는 시위 진압에 부족하다 느낀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4월 들어 일본 본토에서 헌병과 보병부대를 증파시켰다. 3월 중순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도중 군경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크게 늘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일본 측의 잔인함도 극심해졌다. 일례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유관순과 그 동료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었다. 1919415일 수원 제암리에서는 30명의 주민이 일제의 보복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3.1운동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193월 이후 1년간 피살자를 350명 혹은 630, 부상자는 800명 혹은 1900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투옥된 이들은 8000~9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191931일에 시작된 전국적인 만세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끝이 났다.

 

3.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3.1운동은 해방 이후 남북 할거없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남한의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도 소위 애국심을 부추기는 차원에서 3.1운동을 국가적으로 띄었다. 그중 가장 많이 띄운 인물을 뽑자면 아마 유관순을 들 수 있다. 물론 유관순이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인정하고 업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3.1운동 그 차제를 유관순이라는 인물 하나만 가지고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3.1 운동은 소수의 지식인 계층만이 참가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상술했듯이 3.1 운동에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경제적으로 수탈받고 억압받던 노동자 농민 계층도 같이 참여했고, 계층의 구분 없이 조선의 독립 쟁취라는 깃발아래 식민지 조선 전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중 투쟁이었다. 3.1운동으로 투옥된 이들은 8511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농민이었고, 농민은 그 전체의 58.4%였다. 또한 서울에 있던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더불어 노동자 대회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파업에 돌입했던 사실에서 우리는 3.1운동은 민중들의 투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비록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에는 실패했더라도 이런 노동자 농민들이 학생, 지식인들과 연대하여 반일 투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3.1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3.1 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연합하여 일본에 맞서 독립을 외친 일은 이것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분, 계급, 지역, 종교를 넘어 하나로 뭉치게 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3.1 운동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국이 그러했다. 3.1운동에 감명받은 중국의 대학생들은 1919545.4 운동을 전개했다. 더 나아가 3.1운동의 소식은 인도, 베트남,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의 민족운동에도 자극울 주었다. 이처럼 3.1운동이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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