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베트남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19세기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를 식민지화한 이래로 베트남은 독립투쟁을 전개해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Ho Chi Minh) 휘하의 베트민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상 아래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키자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프랑스를 무찔렀다. 이후 미국이 남북으로 가르고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자, 호치민과 공산당의 지도아래 단결한 베트남은 침략자 미국을 무찌르고 1975년에 통일을 이룩했다.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까지 무찌른 베트남이었지만, 베트남에게 평화가 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베트남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봉건세력에 맞선 투쟁이 전개됐다. 라오스에서는 수파누봉(Prince Souphanouvong)의 지휘아래 라오스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파테트 라오(Pathet Lao)’가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고, 캄보디아에서는 소위 크메르루주(Khmers Rouge)’론 놀(Ron Nol)’의 친미 정권을 전복시키고자 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나기 13일 전 캄보디아에선 폴포트(Pol Pot)’가 이끄는 크메르루주가 론 놀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해 12월 라오스에서는 파테트 라오가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은 폴포트는 사회개조작업이라는 명분하에 캄보디아를 광적인 학살국가로 변모시켰다. 수도 프놈펜에 있던 중앙은행을 폭파하고, 노동자 외에는 도시민들을 모두 농촌으로 보내어 집단농장에서 일하게 했으며, 소위 인텔리겐치아로 의심되는 대부분의 사람을 죽였다. 즉 폴포트는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고 광적인 킬링필드(Killing Field)’를 시작한 것이다. 4년간의 킬링필드로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과거 서방이 얘기하는 300만 학살설이나 250만 내지는 200만 학살설이 과장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80~150만의 캄보디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관계는 과거부터 좋지 않았다. 18세기 베트남이 소위 남진정책(Nam tiến)’을 추진하며 참파를 정복하며 당시 캄보디아의 영토였던 코친차이나 일대도 접수했다. 이런 양국의 갈등은 꽤나 심각했고, 1970년대 캄보디아의 친미 지도자였던 론 놀은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서 활동하던 반베트남 단체인 Fulro를 지원했었다. 1975년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자 폴포트 또한 반베트남 성향을 드러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접수하고 통일을 이룩한 그 다음날인 51일 폴포트의 크메르루주군은 베트남의 푸꾸옥(Phu Quoc)을 기습해 점령했다.

 

킬링필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폴포트는 다시 한번 반베트남 감정을 드러냈다. 폴포트는 병사들에게 적들을 마음대로 죽여라. 하찮은 베트남 놈들을 정글 속 원숭이처럼 깩깩거리며 죽게 하라고 격려하며 베트남에 대한 선제공격을 준비했다. 1977430일 베트남 남서부 안장(An Giang)성의 국경도시 쩌우독(Chau Doc)을 공격해 베트남 시민 수백 명을 죽였고, 그해 9월엔 베트남 국경지역을 포격하고 6개 마을을 점령한 데 이어 6개 사단으로 떠이닌(Tay Ninh)성을 공격해 10km 정도 진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명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들을 또 학살했다. 뿐만 아니라 폴포트는 킬링필드 과정에서 베트남과 연관된 인사들까지 탄압하며 학살했고, 이것은 베트남의 하노이 정부를 분노케 했다.

 

폴포트에게 분노한 베트남 정부는 8개사단을 소집해 19771216일 베트남 인민 공군의 지원 아래 반격을 개시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잘 단련된 베트남 인민해방군의 주력부대는 크메르루주 군대를 박살내고, 19781월 초에는 수도 프놈펜에서 불과 38km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했다. 당시 베트남군은 크메르루주에 대한 협상을 포기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는데,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이를 자신들이 대승을 거둔 것이라고 자찬했다. 이때 크메르루주군은 철수하는 베트남군을 따라가 베트남 최남단 국경 마을인 하띠엔(Ha Tien) 외곽을 점령했는데, 이걸 계기로 하노이 지도부는 크메르루주 정권을 전복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베트남군 철군이후 기고만장해진 크메르루주군은 다시한번 안장성 국경마을들을 공격해 베트남 민간인 3천 명을 학살한 뒤, 베트남군을 피해 퇴각했다. 결국 베트남은 폴포트 정권에 맞서 전면전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베트남 정부는 35만 명을 징집하여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동안 10개 정예사단을 캄보디아 국경에 배치했다. 또한 라오스에 주둔 중이었던 3개 사단도 라오스-캄보디아 국경으로 이동시켰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와의 전면전쟁을 준비하자 캄보디아를 지원하던 중국은 베트남에게 정치적으로 경고를 하며 캄보디아에 대한 무기 공급을 대폭 확대했다.

 

19781221일 베트남 2개 사단이 베트남-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군을 공격했다. 4일 뒤인 크리스마스에는 13개의 사단으로 이뤄진 15만 병력과 야포 전투기까지 동원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폴포트에 반대해 베트남에 망명해 있던 크메르루주군 병사들도 베트남과 연합하여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2주 만에 폴포트의 캄보디아군은 병력의 절반을 잃었고, 퇴각을 거듭했으며 197917일에는 프놈펜 또한 베트남군이 접수하게 됐다. 이렇게 캄보디아를 접수한 베트남은 폴포트 정권을 전복시키고 그곳에 친베트남 정부인 훈센 정부를 세워놓고, 1989년에 철군했다. 역사적으로 베트남과 사이가 매우 안좋던 캄보디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이 폴포트 정권으로부터 해방해주자 캄보디아인들은 베트남군을 해방군으로 맞았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맞보았던 미국은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 폴포트 정권을 지원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이후 베트남 정부가 폴포트 정부를 전복시키자 중국의 덩샤오핑은 캄보디아를 침공한 베트남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베트남 북부를 공격하기로 했고, 1979217일 중국은 베트남 국경지대에서 진격을 개시했다. 그 전쟁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20만 명이 국경을 넘어 베트남을 침공했고, 탱크 200대와 항공기 170대도 동원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격은 랑선(Lang Son)과 라오까이(Lao Cai) 그리고 까오방(Cao Bang)에 집중됐다. 당시 베트남의 주전력은 캄보디아에 가 있었기에 중국군의 진격을 막는 베트남군은 미약했다. 6개 사단만이 베트남 북부지역에 주둔해 있었고, 나머지는 민병대로 이루어진 보조병력이었다. 그들은 수도 하노이를 지키기 위해 방어병력을 하노이 외곽에 집중배치해 놓았고, 국경에서의 전투는 10만 명의 민병대에게 맡겼다.

 

과거에 중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듯이 베트남군은 북부의 산악지대를 이용해서 최대한 버티며 중국군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베트남군은 미군이 남베트남군에 제공한 장비들과 소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제공한 최신무기들로 중국군에 맞서 싸웠다. 심지어 베트남군은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로 개전 하루 만에 중국군 탱크 13대를 파괴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미국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베트남군 장교들의 지휘 능력도 중국군을 능가했다. 결국 중국군은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10만 명의 병력을 더 투입했고, 225일 동당과 몽카이의 베트남 국경 마을들을 점령했다. 이렇게 첫 성과를 거둔 중국군의 진격이 잠깐 멈추자 베트남군은 즉각 반격에 나섰고, 베트남군은 중국군이 점령한 동당을 탈환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은 랑선 전역에 한국전쟁 때 파병했던 정예사단 두 개를 투입했고, 격렬한 시가전 끝에 36일 중국군은 도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중국군은 랑선을 점령한 이후 베트남에 교훈을 주는 목적을 당성했다라고 하면서 철군을 선언했고, 베트남도 휴전에 동의했다. 양측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중국군을 막은 베트남의 군대가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였다는 점에서 중국은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국제정세의 양상을 제대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폴포트를 지원했던 중국은 베트남과 전쟁을 했고, 베트남은 캄보디아랑 전쟁을 했다. 중국을 견제하고 싶었던 소련은 베트남을 지원했고,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베트남을 견제하고 싶었던 미국은 폴포트 정권을 지원했다. 이런 의미에서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국제정세의 원리를 아주 명확히 보여준 전쟁이었다.

 

참고자료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책갈피, 2004

천년전쟁, 오정환, 종문화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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