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조선 반도 전역에서 민중들과 민족대표들이 뜻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했다. 그 저항운동에는 수많은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이 참가했고, 그 민중들이 참가한 시위는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났었다. 그것이 바로 3.1 운동이다.

 

1. 식민지 조선의 시대적 상황

  

  

19세기 중후반 서구식 근대화를 거친 일본은 조선 반도를 지배하고자 했었다. 1894년에 일어났었던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던 일본은 1895년에는 조선의 민비인 명성황후를 암살했고, 그 외에도 타이완과 요동 반도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었다. 결국 조선 반도를 놓고 러시아 제국과 이권 다툼을 벌이던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이기고, 조선의 고종황제에게 을사조약을 체결토록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이에 반발하여 몇몇 조선 사람들은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일본에 맞서 싸웠지만, 현대식 무기와 군사기술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그 외에도 애국계몽운동이나 독립협회운동 그리고 신민회 조직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같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결국 1910829일 조선은 을사늑약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을 식민지배하게 된 일본이 펼쳤던 정책은 소위 무단통치였다. 무단통치란 지배자 일본이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 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

 

또한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이라 하여 명목상 근대적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실행했지만, 대한제국 시대부터 이루어진 일본인의 조선토지 소유를 합법화하고, 일본인을 대거 조선에 이민시켜 확보한 토지를 그들에게 불하함으로써 일본인 지주를 양산하고 식민지 지주경영제를 강화하여 한반도를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고자했다. 당연히 이런 일본의 무단통치에 조선인들은 반발과 불만이 많았고, 이런 토대는 조선인들이 일본에게 저항하거나 잘 따르지 않으려 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1 운동의 전개

  

  

이런 과정에서 1914년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연합국 편에서 참전했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은 승전국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918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서구 열강들은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를 놓고 논의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전후질서의 14개조 원칙을 제안했다. 그 안에는 소위 민족자결주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식민지 지배를 받는 약소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당시 중국 상해에 있던 여운형은 미국 대통령 특사인 찰스 크레인을 만나 미국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따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19191월 중국 텐진에 있던 우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프랑스에 보냈다. 여운형과 더불어 신한청년당 단원이었던 장덕수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8일 이광수를 포함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회원인 선우혁은 조선에 들어와 선천, 평양 등지에서 기독교계의 이승훈 양전백 등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또 여운형은 직접 러시아령 니콜리스크에 가서 전러시아조신인대회에 참석하고,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갈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움직이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동학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천도교의 지도자 손병희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은 1918년 말부터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독립운동 혹은 자치운동을 논의했다. 19191월 중순경 그들은 만세시위 형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봤다. 기독교계도 독자전인 운동을 준비했었다. 27일 천도교 측이 평양에 사람을 보내 이승훈을 서울로 불러 독립운동을 협의했고, 225일 천도교와 기독교계는 마침내 연합에 합의하고 학생들에게도 함께 운동을 전개하자고 요청하며 불교계도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운동 지도부는 독립선언에 서명할 33인을 선정하고, 최남선에게 독립선언문의 작성을 맡겼다.

 

19193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이 따로 독립선언식을 열었고, 선언식을 마친 뒤 민족대표 29명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자 학생들은 서울 시가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같은 시각 서울 외에도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주요도시에서 동시에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서울의 학생들은 예정대로 35일 서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은 3월 중순이 되어 청년, 학생, 교사나 지식인만이 참가하는 시위가 아닌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이 참가하고 그들에 의해 전국 소도시로 확산되었다. 그 시기에는 중남부 지방, 면 단위 이하의 농촌 지역 심지어 산간벽촌에 이르기까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운동의 양상도 달라져 계급, 계층 간, 종교단체 간 연대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시위 자체의 조직화 지속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의 시위는 다수의 민중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면서 시위도 다소 과격화되기도 했다. 물론 그 과격화나 폭력성이란 말은 일본 경찰의 가혹한 탄압에 대한 정당방위의 성격을 지닌 경우가 대다수였지. 처음부터 공세적인 시위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322일 서울에서 노동자와 청년 학생들이 준비한 노동자대회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해 시위를 전개했다. 이 시위는 이후 서울 시가지 시위의 기폭제가 되어 23일 이후 매일 밤 시내 도처에서 게릴라식 시위가 벌어졌다. 26, 27일에는 전차 종업원, 경성철도 노동자, 만철 경성관리국 노동자들도 파업에 돌입했다.

 

 

이렇게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이 시위를강력하게 진압했다. 31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는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는 협박문을 발표하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사단 23000명이 있었는데, 이걸로는 시위 진압에 부족하다 느낀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4월 들어 일본 본토에서 헌병과 보병부대를 증파시켰다. 3월 중순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도중 군경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크게 늘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일본 측의 잔인함도 극심해졌다. 일례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유관순과 그 동료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었다. 1919415일 수원 제암리에서는 30명의 주민이 일제의 보복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3.1운동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193월 이후 1년간 피살자를 350명 혹은 630, 부상자는 800명 혹은 1900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투옥된 이들은 8000~9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191931일에 시작된 전국적인 만세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끝이 났다.

 

3.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3.1운동은 해방 이후 남북 할거없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남한의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도 소위 애국심을 부추기는 차원에서 3.1운동을 국가적으로 띄었다. 그중 가장 많이 띄운 인물을 뽑자면 아마 유관순을 들 수 있다. 물론 유관순이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인정하고 업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3.1운동 그 차제를 유관순이라는 인물 하나만 가지고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3.1 운동은 소수의 지식인 계층만이 참가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상술했듯이 3.1 운동에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경제적으로 수탈받고 억압받던 노동자 농민 계층도 같이 참여했고, 계층의 구분 없이 조선의 독립 쟁취라는 깃발아래 식민지 조선 전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중 투쟁이었다. 3.1운동으로 투옥된 이들은 8511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농민이었고, 농민은 그 전체의 58.4%였다. 또한 서울에 있던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더불어 노동자 대회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파업에 돌입했던 사실에서 우리는 3.1운동은 민중들의 투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비록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에는 실패했더라도 이런 노동자 농민들이 학생, 지식인들과 연대하여 반일 투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3.1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3.1 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연합하여 일본에 맞서 독립을 외친 일은 이것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분, 계급, 지역, 종교를 넘어 하나로 뭉치게 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3.1 운동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국이 그러했다. 3.1운동에 감명받은 중국의 대학생들은 1919545.4 운동을 전개했다. 더 나아가 3.1운동의 소식은 인도, 베트남,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의 민족운동에도 자극울 주었다. 이처럼 3.1운동이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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