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부터 이어오던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는 6대 쇼군인 요시노리 시기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1438년부터 커다란 내란이 여러 차례 발생했고, 내란을 시작으로 각지역 다이묘들의 불만은 확산되어 갔다. 요시노리가 암살당한 이후 새로 취임한 쇼군은 불과 2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어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쇼군의 지위에 올랐다. 요시마사가 성년이 되어서도 불안한 정세는 계속되었는데, 이시기 막부의 부패는 극에 달했었다. 이 과정에서 막부와 쇼군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자 귄신 간의 세력 투쟁이 격렬해졌고,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일본에선 각 지방 영주들의 군사적 세력다툼인 전국시대가 시작됐다.

 

1467년에 시작된 오닌의 난은 11년간 지속했었다. 오닌의 난으로 인하여 쇼군의 권위와 내려갔고, 많은 다이묘들이 자신의 영지로 내려가 이제는 쇼군의 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닌의 난 후 약 반세기가 지나면서 새로운 세력인 전국 다이묘가 각지에서 할거하게 됐다. 전국 다이묘로 성장한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하나는 과거 일본에서 영향력이 있던 슈고 다이묘에서 전국 다이묘로 변신한 경우고, 다른 하나는 슈고다이 등이 하극상이라는 사회 풍조를 이용하여 슈고 다이묘 등을 타도하고 권력을 탈취한 경우였다. 후자의 경우는 오다 노부나가가 대표적이다.

 

전국 다이묘들은 혈연이 다른 재지영주와 백성을 포함하는 지역 결합을 군사력의 핵심으로 삼았다. 전국 다이묘는 다수의 재지영주를 자신의 유력 가신 밑에 배속시킴으로써 그들에 대한 통제의 효율성을 높였고, 창을 활용한 집단 전투를 도입했으며, 군량미와 무기 운송에 일반 백성들을 동원했다. 또한 그들은 가신들이 보유한 토지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게 했고, 자신들의 나와발이를 원활하게 지배하기 위해 분국법 또는 전국가법이라 부르는 독자적인 성문법을 제정했다. 일본 전국시대의 특징중 하나는 전국 다이묘들이 다스리는 지역이 굉장히 많이 분산되어 있었다는 점인데, 각 지역을 다스리는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지역국가를 형성했었다. 따라서 이 전국시대에는 일본 전역에서 전국 다이묘들 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지속되었다.

 

1543년 일본 전국시대의 형세를 뒤집어 놓을 무기가 일본에 도착했다. 당시 인도의 향신료를 찾아 무역로를 확장하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아시아까지 항로를 개척했고, 그리하여 포르투갈인을 태운 상선이 일본 규슈 다네가시마에 닿은 것을 계기로 일본과 포르투갈 간의 무역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에는 소위 조총이라 불리는 무기가 들어왔고, 일본은 포르투갈인들에게 그 사용법과 제조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총은 일본 곳곳에 파졌고, 포르투갈인들은 조총술을 가르쳐줌과 동시에 일본산 은을 얻음과 동시에 기독교 사상까지 전파했다. 이런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이 준 조총의 위력을 알아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15603만의 군세를 이끌고 교토로 향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오케하지마에서 고작 3천의 군사로 물리친 다이묘로서 두각을 나타낸 오다노부나가는 1567년 미노의 사이토 씨를 멸하여 비옥한 노비 평야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5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수도 교토에 입성함으로써, 천하 통일의 일보를 세웠다. 그는 조총술을 군대에 익혀 적은 군사로도 많은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는데, 3개의 조로 편성한 조총 사격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다.

 

1570년 아자이 나가마사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연합군을 아네가와 전투에서 물리친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 통일을 위한 전쟁을 계속해나갔다. 일본의 쇼군들은 세력이 커지는 오다 노부나가를 견제하기 위해 세력을 연합하여 대항했지만, 1573년 오다노부나가는 그들을 무찌르고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또한 그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량의 총포를 이용한 전법으로 당시 최강의 기마군단을 이글던 다케다 가쓰요리를 물리쳐 전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아즈치 성 건설에 착수하여 1579년에 완성시켰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왜냐하면 그의 심복이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그를 배신해버렸기 때문이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는 덴모쿠 산의 싸움에서 자신의 숙적인 다케다 가쓰요리를 멸하고 모리 씨 정벌에 착수했는데, 아케치 미쓰히데가 그를 배반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목숨을 잃은 뒤, 그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2년 야마자키 전투에서 배신한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대를 섬멸했고, 이어 1583년 노부나가의 고위 장군 시바타 가쓰이에를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패망시키고, 가쓰이에에 협조했던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를 자살로 몰아넣어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1584년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고마키와 나가쿠테 전투를 벌였는데,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에야스와 화해하여 그를 휘하에 두는 데 성공했다. 1585년 히데요시는 기이를 평정한 후, 시코쿠를 정벌했고, 1587년에는 규슈를 정벌했다. 그리고 1590년 히데요시는 호조 우지마사를 멸망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 전국을 통일했다. 이렇게 해서 전국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이룩함에 따라 끝났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왕이 된 이후 일본은 전쟁을 다시한번 치르게 됐는데, 그게 바로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다.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더 나아가 인도까지 정벌할 야심을 가졌었지만, 그의 꿈은 조선 반도에서 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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