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때 남편을 잃은 여자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지금의 명동 유네스코회관 맞은쪽 골목 어귀 일본식 적산 가옥 1층에 '은성'이란 술집을 차리고 그곳의 주인이 된다. 그때는 전쟁 직후로 막대한 군수품(일명 PX 물품과 구호물자)이 남대문 도깨비 시장에 흘러들어 활성화되기 시작한 때였다. 멋 부리기 좋아하는 당대 문인들은 그곳에서 양복이나 트렌치코트, 모자 등을 사 걸치고 다방으로 출근해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다가 운 좋으면 원고료를 손에 쥐고 대폿집으로 몰려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 무렵 대폿집은 그 이름만큼이나 사연도 갖가지였다. 이를테면 시인 조병화가 '포엠'이란 시를 썼는데 그가 자주 다니는 이름 없는 대폿집에 헌정해 그곳의 간판이 되었다. 폐허에서 주운 벽돌로 낮게 담을 쌓은 일명 '명월관'이라고 부른 노천 대폿집, 오로지 안주라고는 아지밖에 없어 '아지 스테이션'이라고 불리게 된 '무궁원'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은성'도 그런 대폿집 중 하나다.
이 '은성'엔 변영로, 천상병, 박인환, 전혜린, 이봉구, 윤용하, 김수영, 이전섭, 김환기, 문일영, 김기팔 등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의 주인은 자신의 가게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친구이자 누나이고 어머니가 되었다. 또한 그런 문화 예술인들에게 빈대떡을 부쳐주며 그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 주기도 했다. 문득 과연 장사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싶다. 주머니 사정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사정 보고 하는 것. 영혼을 위한, 영혼에 의한 영혼의 장사라고나 할까. 상처 난 마음에 음식만큼 위로가 되는 게 또 있을까. 그래서 사람은 소울 푸드를 찾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변영로가 아직 학생인 그 집 아들을 불러 술 배울 나이가 되었다며 잔에 막걸리를 따라 준다. 모르긴 해도 주인도 그것을 굳이 마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원래 주도는 아버지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인데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없으니 아들이 주도를 배워야 한다면 그런 문인에게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을까? 담배 하면 공초 오상순이요, 술 하면 수주 변영로라는데 그런 그에게 주도를 배운다면 아들도 똑같은 술꾼이 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도 제 운명이지 담담하게 받아들였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렇게 첫 잔을 받아 든 은성 대폿집의 아들은 마신 후 잔에 남은 찌꺼기를 무심코 바닥에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물론 그 순간만큼은 그게 실수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으레 남에게 건네받은 술잔에 술이 남아 있으면 바닥에 떨어내기도 하지 않는가. 그게 어찌 보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보는 입장에선 내가 주는 잔을 더럽다고 생각해서 떨어 버리는 건 아닌가 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변영로는 그게 이니었다. 그는 은성 주인의 아들의 뺨을 한 대 때리며 "이 여사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먼. 잔에 남은 곡식을 (땅바닥에) 버리다니." 하며 호통을 쳤던 것이다. 쌀 귀한던 시절 곡식을 땅에 버린다는 건 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 같으면 상상이 안 갈 일이다. 곡식 자체도 아니고 그것을 푼 물(?)에 지나지 않는데 그렇다고 남의 집한 아들의 뺨을 때리다니. 하지만 변영로가 권위가 있어서일까 아니면 은성의 모자가 겸손해서일까 아무튼 그 후로 은성의 주인 아들은 절대로 남은 술을 바닥에 버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가 누군가 하면 우리가 잘 아는 국민 아버지 탤런트 최불암 씨다.
그렇다면 이렇게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술찌꺼기를 땅바닥에 버렸던 이유만으로 뺨을 때렸던 변영로는 누구인가. 그는 시 <논개>를 쓴 시인으로 유명하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사실 알고 보면 시인 변영로는 거의 천재에 가까웠다. 1898년에 태어난 그는 1915년 조선중앙 기독교청년회 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고 한다. 1918년 <청춘(靑春)>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무엇보다 1919년에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192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교단에 섰다가 1931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주립 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다니다 중퇴하고 귀국을 한다. 이후 1933년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하다 1934년 잡지 <신가정>의 주간을 지내다 광복 뒤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가 된다.
이처럼 변영로는 굉장한 엘리트였다. (농담이지만) 이런 사람이라면 아무리 귀한 집 자식이라고 맞을만하지 않을까. 더구나 유교 사상이 강한 나라에서. 아무튼 그 얘기는 최불암 씨가 유명해지면서 자주 회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불암 씨도 인터뷰 때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을까. 그때 왜 술찌꺼기를 땅에 버렸는지 (유명한 시인의 뺨을 맞으니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그러면 그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훗날 그의 자서전이나 평전이 나온다면 한 줄 정도는 그 일화에 대한 답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은 그저 얼버무리듯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들을 것만 같다. "글쎄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그냥 제가 나오는 '한국인의 밥상'이나 보시죠. 파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