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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그는, 손톱을 기르는 버릇이 있다-노희준 작가 강연회에서

지난 11월 25일, 노희준 작가가 강연회에 다녀왔다.  

그는, 최근 <오렌지 리퍼블릭>(자음과 모음)이란 장편소설을 냈고, 출간을 기념하여 강연회를 갖게된 것이다. 하지만, 강연은 그것과는 상관없는, 소설창작에 관한 강연이었다(그는 실제로 한 인터넷 대학을 비롯해 몇 군데에서 소설 창작을 강의 한다고 한다) .  

사실, 소설 창작은 보통 6개월 또는 1년을 강의해도 다 못하는 것인데, 주어진 짧은 시간에(1시간 반 정도) 강의를 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인다. 그저, 모인 사람들이 공통의 관심사(소설가 지망생인만큼 소설 창작에 관하여)를  가진만큼 그도 한때는 소설가 지망생이었을 테니, 그냥 편하게 차나 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취지가 더 맞을 것이다(그래서 장소도 어느 카페였던 게지).  

고전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인가? 

확실히 요즘의 젊은 작가들은 예전의 작가들과는 그 외모에서 차이가 느껴진다. 예전의 작가들(386세대의 전형을 떠올리겠지만)은 자신이 무슨 옷을 입든 외모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2000년 이후에 등장한 작가들(굳이 나눌 생각은 없지만)은 옷을 훨씬 잘 입는 편이다. 노희준 작가도 아주 럭셔리 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결코 빠지지 않는 옷차림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먼저,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첫 화두를 잡았다.   

작가가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말일 것이다. 그 역시도 누구못지 않게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계기가 재미있다. 그는 위로 형과 누나가 있는데, 그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구나 사춘기 시절, 한 번은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부모님 호출을 받았다고 한다. 학교에서 교내 백일장을 해 참가를 하게 됐는데, 그가 써 낸 원고가 소위 말하는 90년대 이전의 빨간책들에서 인용한 책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할 해프닝이겠지만, 당시로는 부모님이 담임 선생님으르부터 그런 경고를 받았으니, 속이 상한 아버지가 그에게 책을 읽지 못하도록 했고,  그때까지 집안에 있던 모든 책들을 불태우는 이름하여 '분서갱유 사태'를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후에도 책에 대한 관심과 열망을 놓을 수가 없어,  이불 속에서 조그만 불빛에 의지하여 책을 읽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자신이 '왜 책을 못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고 한다.  

그런 것으로 봐, 그는 확실히 여느 사람과는 조금은 다른 사춘기 시절을 보낸 것 같다. 보통 우리네 사춘기란 게 오히려 부모님이 책읽기를 권해도 잘 안 읽는 시기 아니던가? 하긴, 누구라도 작가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열심히 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 사춘기란 청개구리 속성의 시기라, 누가 그렇게 책 읽기를 마다했으면 기를 쓰고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의 그가 있을 수 있는 건, 그의 가족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는, 책은 하나의 우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단언한다.  책 읽는 행위가 스트레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런데 기성 세대들은 툭하면,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는다고 말한다.  특히 고전은 더더욱 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에 대해 그는 이의를 제기한다.  고전 읽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것부터 읽힐 생각을 하고, 안 읽으면 그같은 타박을 하냐고.

특히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너무 강하다고 한다. 그것은 예전에 고전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 책들을 읽고, 나이들어 기득권 세력이 되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보단 고전은 꼭 읽어야 할 사람만 읽고, 책 읽는 일은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 역시 그의 말에 동감이다. 하지만 이즈음 되면 간혹 고전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러니까 어떤 책이든 관심을 갖고 즐겁게 읽고 그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면 되는 일이 아닐까? 그러므로, 꼭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매이지는 말자.     

소설을 잘 쓰려면 자신의 스타일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소설을 잘 쓸 수 있을까? 이것은 작가지망생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에 대해 그는, 먼저 자기 스타일을 찾을 것을 조언한다.  소설의 서사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문장과 서사로 이루어진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토리다.  이중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은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하게되는 건 생각이라는 것인데, 생각은 그 자체를 많이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그 생각을 왜 하는지, 그 생각을 어떻게 객관화시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고 한다.  특히 그는 인간의 감정에 권력이 들어갔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주시해 보라고 한다. 결국 네가 먹는 것이 너다란 말이 있듯이, 그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을 증명해 주는 법이다.  

그는 이야기 도중, 자신이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그는 예술가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대화가 잘 통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물론 그에게만 국한된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무용이나 성악 같이, 꼭 선생이 있어야만 하고, 구간 반복을 해야하는 형태의 예술가와는 잘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미술이나, 사진을 찍는 등 선생이 굳이 필요없어도 되는 예술가들과는 얘기가 잘 통한다고 한다. 이것은 꼭 사람을 나누겠다는 의도는 아닌 것 같다. 이를테면 자신의 스타일을 아는 또 하나의 척도로 풀이 된다.  

물론,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은 단시일내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안다고 해서 일필휘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는 그에게 물어 봤다. 글을 쓸 때마다 막막함이 들 때가 많은데 그것을 어떻게 극복 하냐고. 사실 그 막막함이란 건 매번 드는 것이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려면 글을 쓰지 말아야 할 것이고, 항상 그것과 함께 가는 것이 소설가의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가?     

누구든, 작가의 꿈을 이루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겪기 마련인 것 같다. 노희준 작가 역시도 나름의 쉽지 않은 과정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대학을 진학하자 동아리를 들어 가야겠는데, 마침 소설 읽기 모임이 있어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있어 보니, 소설 읽기 보다는 소설 쓰기 모임이더란다. 첫 습작품을 써서 보여줬는데, 다 빨간 글씨고 자신이 원래대로 쓴 문장은 간단하게 세어질 정도로 무참하게 깨졌다고 한다. 그래서 오기가나, 다음 번,  또 그 다음 번에도 새로운 작품을 들고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새롭게 무참하게 깨지곤 했다. 누구는 아예, 소설 쓰기를 그만 두라며, 등단에 성공하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하고 까지 했단다. 하지만 그는 결국 등단한다. 농담 삼아, 그 사람의 손가락을 잘랐냐고 했더니, 지금 그 사람들은 어디론가 뿔뿔히 흩어져 만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작가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다.ㅋ  

아무튼 그 과정에서, 이리도 나의 작품을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는 건가  정말 서러웠다고 한다. 나 역시도 그런 경험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 있다보면 정말 사람들이 야속하다 못해 야비하다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작품에 칭찬을 해 준 한 사람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고 했다. 역시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아마도 그는 그 사람 때문에 작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들마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이 다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뭐냐고 했더니, 그는, "네가 사는 세상이 과연 맞니? 옳다고 생각하니?"를 묻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했다. 그래서도 이번 소설 <오렌지 리퍼블릭>을 썼던 것 같다. 이를테면 '너희가 보는 강남. 네가 보는 게 과연 맞는 거라고 생각하니?'하는 거겠지. 단지, 많은 사람이 이 소설을 성장소설로 보는데, 물론 자신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성장소설은 아니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작가로 살아가기   

이 질문에 꼭 희망적인 대답을 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느끼는, 한국에서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민지 솔직한 답을 듣고 싶었다. 그는 창작을 강의하는 만큼 많은 작가지망생들을 만나는데, 그들에게 가급적 작가는 하지 말라고 솔직하게 말해준 단다. 작가도 천차만별이긴 하겠지만, 연봉 백만 원이 채 될까 말까 하는 작가도 있으니 말이다(그들이 느끼는 열등감이란 건 얼마만한 것일까? ). 그것은 작가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우리나라 예술계의 불균형은 생각 보다 심각하다고 한다. 그것에 대해 핏대를 세우고 말하면, 그것만 보지 말고 우리나라 GDP 가지고 말하라고 한단다. 예술이 과연 GDP 가지고 얘기할 수 있는 분야던가? 

그 역시도 그날 그 자리에 앉아 있기까지 만만찮은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작가라는 타이틀은 가졌어도 내는 작품마다 쓴 잔을 마셨고, 심지어는 모처의 문예지로 등단을 했는데, 그 문예지가 폐간되는(지금은 다행히도 복간되었지만) 일도 있었다고 한다. 모든 일이라는 게 다 그렇듯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는 글이 안 써지면 손톱을 기르는 버릇이 있다. 

사람은, 어떤 한 사람이 조금만 유명해지면 그 사람의 버릇을 알고 싶어지는 묘한 심리가 있다. 그는 손톱을 기르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과연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손톱을 기르면 생활하는 데 불편한데, 특히 열필이나 컴퓨터 자판을 치기는 불편할 것이다.  '너 이러고도 계속 버틸래? 빨리 손톱 깍고 글 써!'라는 자기 외침을 듣기 위해서란다. 재밌지만 나름 현명한 방법인 것도 같다.  

또한, 그는 글을 쓰지 않을 때는 음악을 한다고 한다. 역시 작가 박범신 선생의 말이 맞는 것도 같다. 그분은 어느 책에서, 옛날의 작가들은 글 쓰는 것 하나만 잘했는데, 요즘의 작가들은 글만 잘 쓰지 않더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룹 '말도안돼'의 보컬을 맡고 있으며, 홍대 주변의의 클럽에서 공연도 한다고 한다. 이제 그는 돌아오는 30일 날 공연을 하고, 12월 12일엔 공중파 S 본부의 '김정은의 초콜릿'에도 출연한다고 한다.  

그는 확실히 신세대 작가다(물론 이제 곧 40줄을 탈 모양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아직 젊다) . 사고하는 바가 유연하고, 자유롭다는 인상을 받았다.  꺾일 줄 모르는 잡초 같은 폐기도 느껴졌다. 이제 작가로서 겪어야할 나름의 어려움도 잘 극복해 냈으니, 앞으로는 승승장구 내는 작품마다 좋은 소식이 들려지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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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3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노희준은 모르고요,'말도안돼'라는 그룹은 들어본 것도 같습니다.

저도 stella09님처럼 고전은 읽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강박에 매이지는 말자는 주의입니다.

stella.K 2010-12-01 11:5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근데 그 작가 나름 낸 작품이 꽤 되더라구요.
김정은의 초콜릿에 어떻게 나오나 볼 생각이어요.
그 밴드는 작가로 구성돼 있더라구요. 특이하죠?^^

cyrus 2010-12-05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인가? 라는 단락의 글을 의미 깊게 읽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왠만한 이름 있는 고전은 그것도 원전으로 무조건 읽어봐야한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전문가가 아닌 이상 원전에 걸맞게 해석했는지 일일이
알아볼 수도 없을뿐더러 굳이 완독하지 않더라도 저자의 핵심 주제만 알아도 무방한
고전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관심 있는 고전만 읽으려고 하는데,
노희준 씨의 말이 참 공감이 갑니다. 과거의 고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보면
고전 읽기에서 경계해야할 강박관념인거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stella.K 2010-12-06 11:48   좋아요 0 | URL
언제나 관심있게 제 글을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책은 재미있고, 자유롭게 읽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요즘은 고전을 읽어라, 읽어라 해서는 안 읽거든요.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이동하는 것 같아요.
고전을 무턱대고 읽는 것 보단, 독서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마이클 더다의 책이라든지,
로쟈님의 책 같은 거요. 그런 분들의 책을 읽고 맵을 그리며 고전을
읽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요.^^

2010-12-08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stella.K >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재현 저자 강연회에서

지난 10월 28일, 지인 한 분과 함께 정독 도서관에서 <두더지 지식 클럽>의 저자 강연회가 있어 다녀왔다.  
글쎄, 왜 거길 갈 생각을 했을까? 사실 나는 정독도서관 올라가는 그 길을 좋아한다. 거리가 워낙 멀어 일부러 가기는 뭐하고, 이렇게 갈 기회를 만들었으니 오랫만에 거리가 주는 정취가 좋다. 게다가 함께 한 지인이 평소 내가 좋아라 하는 분이라, 시간을 넉넉히 둬서 그분과 함께하는 저녁시간도 내겐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강연회의 부제가 매력적이다. 인문학 사용법을 가르쳐 준다지 않는가? 혹했다. 작고한 이윤기 씨는 그의 책에서, 곳곳의 거리 간판에서 신화의 흔적을 알려준다는데, 저자도 그런 식으로 일반 대중이 쉽게 인문학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지 않을까? 호기심이 발동한 것.  

 

 

一生懸命

그런데 웬걸,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도통 무슨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몇개의 사진이 넘어가고, 뭔가 심오한 얘기가 나오긴 했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 어렵다던 인문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지 않을까란 나의 기대는 물건너 갔다. 하긴, 저자가 얼마나 어렵게 공부한 학문이겠는가. 나라도 그것을 호락호락 가르쳐 줄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리는 완전하진 않지만,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구나가 (대충) 파악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날, 저자는 첫 시작을, 어느 초등학교 교문에 걸려있는 표어를 보여주면서 강연을 시작했었다. 이를테면, 그 표어는 "6학년 목숨걸고 공부하는 기간" 이란 것이었다. 이게 어느 학부모에겐 반가울 수도 있지만, 사실 알고보면 살벌한 표어다. 고3 수험생에게라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제 초등학교 6학년에게 저런 표어를 적용하기엔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비슷한 의미로 유태인 집단수용소 정문엔 이런 구호가 있다고 한다. Arbeit macht frei(Work makes you free)을, 한자성어로는 一生懸命(일생현명: 일어로는 '잇쇼오겐메')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목숨 걸고'란 뜻이란다. 다른 말로하면 필사적으로 열심히란 뜻이겠는데, 문제는 이것이 자발적이면 좋은 일이지만, 정부가 이것을 강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처참한 비극이 일어났는지는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나중에 그 초등학교의 문제의 표어는 철회되었다고 한다. 뭐 이런 심오한 뜻을 깨달아서 철회된 것 같지는 않고, 학부모의 반발로 떨어졌다나 뭐라나.  

하긴,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나라에서 교육을 담당해 왔다. 아니 그보단 학생을 관리해 왔다고 해야할 것이다. 나라가 학생들을 가르고 결국 그것을 위해 一生懸命을 주입시켜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라할 수 있는 일이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이 말은 그 유명한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헌금을 가지고 이것을 누구에게 바치는 것이 좋겠냐는 율법학자의 우문에, 예수님은 현답으로 하신 말씀이다.  

사실, 그날의 저자의 강연은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았다. 뭔가 아는 것도 많고, 준비해 온 것도 많은데 1시간 내에 강연을 하자니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청중이었던 나의 느낌일 뿐이지, 저자는 그것에 대해 난감해하거나 쩔쩔매는 것은 없었다. 그냥 주어진 시간안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었다.(좀 더 신랄하게 말하면 '따라 올테면 따라와 봐' 하는 식이랄까?) 그런데 학문에 파벌이 있어서는 안되겠자만 왠지 저자에게선 좌파적(?)인 느낌이 강했다. 이를테면 학문의 장벽을 허물고 대중에게 다가가려고 하기 보다는, 독야청청하는 쪽이랄까? 오죽했으면 저자는, 출판사에서 만든 자신의 책에 대한 카피나 제목에 대해서 마뜩찮게 말했다. 하다못해 요즘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곤 하는데, 그는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까지 했다.  

물론 그것을 필요로하는 소수의 사람은 있다. 이를테면 정신분석학자나, 종교가나, 점쟁이 정도. 그러나 요즘 학생들, 경영인들, 심지어 홈리스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 말한다. 그저 예수님의 저 말씀처럼, 홈리스들에겐 빵과 일자리를 주고, 경영인들은 돈 잘 벌고 잘 쓰는 방법을 가르치면 그만 아니냐고 반문한다. 확실히 그의 언사가 좀 파격적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저자가 처음하는 말은 아니다. Marx는, "각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서, 각자에게는 그의 필요(욕구)에 따라서"란 말을 했다고 한다.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인문학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인문학이 융성했던 시기가 두 번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플라톤이 살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가장 사치스럽고, 모든 학문이 융성했던 시기. 또한 그 시대는 한가하고, 다소는 게으른 여가, 즉 자유 시간이 충분히 보장된 시대이기도 했다. 저자는 바로 이때가 인문학을 할 때라고 말한다. 즉,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려면 여가가 필요하다.  

나는 이때야 비로소 왜 저자가 초두에 초등학교 표어와 일련의 몇 장의 사진을 보여줬는지 알 것 같았다. 문제는,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과연 인문학을 할 만한 여건과 환경이 되어 있는가를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저자는 말하기를, 인문학을 하려면 적어도 자기의 방. 또는 자기만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점점 원룸, PC, 개인 블로그, 스마트폰 등이 중요하게 부각이 되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그러면서, 정신분석학자나 종교가들이나 보는 어려운 인문학 책을 보기 보다 소설을 읽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 훨씬 낫다고까지 충고한다.   

저자의 말을 들으니, 또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사실 인문학이라는 게 뭔가?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이 아닌가? 그러나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고,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급선무인 것마는 사실이다. 당장 내 배가 고프고, 일자리가 없어 돈을 벌지 못하는데 정신적인 양식부터 공급해 주겠다면 그건 또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이렇게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이 빵의 문제를 급선무로 해결해 줘야할 사람과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사람. 이 둘로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다 같이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자는 인문학을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했다. 물론 그것은 맞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문학을 평가절하할 것은 뭐가 있는가? 저자는 일생을 바쳐 그 어려운 공부를 했으면서 말이다. 

처음과 나중의 달랐던 강연회 

저자는 그러면서 수를 쓰려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인문학을 해야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진짜 인문학을 할 사람이라고. 솔직히 사람은 빵의 욕구가 채워지면, 그땐 또 다른 곳으로 눈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중엔 건전한 것도 있지만 불건전한 것도 있다.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느니 인문학에 입문하면 좋지 않은가? 

아무튼, 그날은 뭔가 딱히 정리된 느낌은 없지만 뭔가의 생각할 꺼리는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다소 나에겐 벅찬 느낌이긴 하지만, 처음 나의 얄팍한 기대 보다 묵직한 뭔가를 얻은 느낌이었다. 같이 간 지인 역시 나와 같은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처음엔 저자의 책에 그다지 관심을 안 보이더니,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현장에서 책을 선물했다. 좋은 강연을 한 저자에게 감사한다.                     
                

  (같이 간 지인이 찍은 골목 사진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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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05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더지 지식클럽'이 '책을 읽을 자유'보다 더 어려울 것 같던데요~^^
전 골목사진 한컷으로 만족할래요~

stella.K 2010-11-05 13:56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고마워요. 무플이 될 뻔한 페이퍼에 댓글도 달아주고,추천도 해주고. 흐흑~
사실 책도 어려울 것 같고 저자도 만만치 않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읽을 것 같지는 않더라구요.^^

다이조부 2010-11-05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고종석이 추천했더군요. 그 아저씨를 신뢰하는 1인이어서 저는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지만 읽을 예정입니다.

stella.K 2010-11-06 12:28   좋아요 0 | URL
어, 정말요? 저도 고종석 좋아하는데...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겠군요.
이 저자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만만하고 당당함이란...!

cyrus 2010-11-09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사회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얼마나 삶에 가치가
되는지 모호하기도 하고, 막상 학문을 실천하는 것도
어려운거 같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요즘 매스컴에 나오는 인문학
강의 광고들을 보면, 너무 실용적으로 치우친 감도 있고요.(ex. 영화 인문학,
와인 인문학,,,) 또 다른 강사인데 주제가 비슷비슷한 내용도 있는거 같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에 실용성을 빼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게 문제죠.
인문학의 위기가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소리가 아닌거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진이 참 아릅답네요. 도심 속에 빛나는 전통가옥이
이쁩니다.

stella.K 2010-11-09 12:2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인문학이 순수하게 인문학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
하지만 변화에 능한 종만이 살아남는다잖아요.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사람 사는 골목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습니다.^^

다이조부 2010-11-09 14:36   좋아요 0 | URL

과문해서 와인인문학은 처음 들어봅니다. ㅋ

근데 영화인문학 관련 책은 종종 읽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주 오래전 책인데 김영민이 쓴 철학과현실사 에서 나온 영화인문학

책이 상당히 재미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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