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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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표지가 인상적이다. 기다란 액자안에 해변가에서 웬 낮선 남자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고 그 사이를 개 두 마리가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웬지 이 남자는 다소 우울하고 슬픈 곡을 연주하고 있을 것만 같다.  

심플하면서도 뭔가 비대칭스럽다. 그러면서도 책 제목은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여 보인다.  

독일계 보스니아 작가가 쓴 자전적 소설이다. 배경 역시 90년대 일어난 보스니아 내전 때를 다루고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전쟁의 참상을 우울하게 그리고 있을 것만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쩌면 그리도 수다스러운지. 별로 처참하지도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면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 나름으로 보는 눈이 따로 있는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 어렸을 땐 어땠을까? 나 역시 어린 아이답게 세상을 보고 느꼈을 텐데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너무 오래 전에 읽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안네의 일기'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생각이 났다.   

알겠지만 안네의 일기는 전쟁중에도 안네란 소녀의 너무나 맑은 심성으로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는 글을 써서 오히려 처연하게 느껴지는 책이고,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정말 6.25 그 시대에도 전쟁을 모르는 동네 하나쯤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다. 사실 알고 보면 이런 영화나 소설은 찾아보면 더 있을 것도 같다. 영화 '지중해'도 그렇지 않던가?   

폭풍 중의 고요가 있는가 하면 폭풍전야도 있다. 그래서 세상은 때로 신비롭기도 하다.  

왜 전쟁하면 비참할거라고만 생각하는가? 물론 거의 대부분이 비참하다. 무고한 시민이 다치고 죽어나가는데 거기에 무슨 평화나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어렵고 힘든 때를 지날수록 악해질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 선하고 인류애를 발휘하기도 한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신비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인간이고 지옥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난 이 작품이 내가 앞서 말했던 일련의 작품 보다 좋다고 말하기엔 다소 조심스러워진다. 사실 나의 경우 동유럽 그것도 보스니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호기심에 선택했지만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낮선 문체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또 어쩌면 내가 보스니아를 너무 몰라서 일지도 모른다.   

어느 평론가는 작가를 조너선 사프란 포어에 비견하곤 했는데, 포어 역시 내가 읽어보지 못한 작가니 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감당이 안되기는 이 작가와 마찬가지 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너선 사프란 포어를 좋아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신중히 결정하란 말 밖엔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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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쑤퉁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은 이번이 두번짼데 내가 읽은 '나, 제왕의 생애'에서는 환상적 우화를 선보였다면 이 작품은 뭐랄까 인간의 원초적이면서도 원시적인 욕망을 여지없이 까발렸다고나 할까? 유독 쌀에 집착하는 우릉과 그 가족의 내면 풍경을 흡입력있게 묘사한 수작이란 생각이 든다. 또한 '나, 제왕의 생애'처럼 그의 글은 이미지적이어서 영화적 상상력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작가가 지닌 장점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릉과 그 가족의 내면 풍경을 읽는 건 썩 유쾌하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콩가루에 난장판이 어디 있겠는가? 작품은 교활함에, 변태에, 피 범벅은 말할 것도 없고, 무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런 가족이요 가정이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아 보인다. 더구나 작품에서는 이런 가족관계가 우릉 1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대에 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읽다보면 처참하다는 느낌이 들고 읽다보면 그들이 차라리 측은하다는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아무리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가족만큼은 서로를 보듬고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고아로 태어나서 한 번도 타인의 사랑 아니야 친절을 받아보지 못한 우릉은 그저 세상에 대한 원한과 복수로 산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유일한 위로요 소망이었던 건 '쌀'이었다. 아니 그것은 '욕망의 대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작가는 왜 다른 하고 많은 것 중에 주인공의 욕망의 대상을 '쌀'로 정한 것일까?  

작품의 배경은 20세기 초 중국 사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그 무렵이면 먹고 살기 힘들었을 때이다. 그 시절엔 누구나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시대이고, 살기 위해 먹기보단 먹기 위해 살아야 했던 시대이다. 그러므로 쌀에 유독 많은 집착을 보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떤 면에선 저 유명한 펄벅의 <대지>에서의 왕룽을 떠올리게도 한다. 물론 그 작품에서 주인공 왕룽은 땅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는 게 다르다는 것이고, 이 작품에서는 언급한 '대지'보다 더 극악스럽게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 다른 것일 것이다.('대지'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해 보자면, 그 작품은 여성 작가가 썼기 때문에 아무래도 뭔가 여성적 정서가 있어 보인다. 또한 서양인으로서 동양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중국적 작품은 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작품이 갖는 문학적 가치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다는 건 자명하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얘기했을 때 '원초적'이란 표현을 썼다. 그것은 주인공의 욕망을 가감없이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원시적'이라는 표현도 썼다. 그것은 우릉의 가정이 전혀 교육받지 못하고 전혀 문화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교육 받지 못하고 문화적이지 않은 면들은 또한 2대에 걸쳐 있다. 만일 조금이라도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 향유를 누렸더라면 그처럼 극악스러스럽고 비참한 최후를 맞지도 않아 보인다. 게다가 그 비참한 최후란 게 우릉의 최후일뿐 그것은 여전히 계속될 것만 같다.  

인간은 원래 악하다. 그 악한 면을 깨우치지 못하면 무엇이 선이며 악한지도 모르게 된다. 그러나 교육과 문화적 환경은 그것을 어느 만치는 깨우치고 완화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하는 건 교육과 문화적 환경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다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이것을 알리 없는 그들은 나의 불행 전부가 남 탓인 양 전가하며 악다구니를 쓰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악만이 남아있을 것 같지 읺은 관계의 흐름 속에서도 아주 희미하게 남아 인간의 연민과 정을 느껴볼 수 있는 부분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은 치윈이 언니 쯔윈이 자신의 팔찌를 훔쳐 갔을 때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을 것처럼 만나러 가지만 언니의 처량한 신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돌려 받기를 포기했을 때나, 사고로  언니가 죽었을 때 울었다는 점 들은 인간이 마냥 악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가 남자여서 일까?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은 지극히 마초적이기도 하다.  

사실 이 작품은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반면교사라고, 앞서 언급한 교육적이고 도덕적이며 문화적인 측면은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서 끝까지 시종일관 인간의 악한 면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떤 작품은 그래서 괜히 내 영혼까지 악하게 물들 것만 같은 기분 나쁜 작품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어쩌면 그것을 표현하되 위트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읽다보면 그래서 사랑이 중요하며, 도덕이 중요하고, 교육이 중요함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것을 작가가 교훈적으로 보여줄려고 했다면 이 작품은 자칫 지루하고 빤한 것을 보여준다고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쑤퉁은 이야기꾼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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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7-31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전 한권도 못 읽어보았는데

진달래 2009-08-05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쑤퉁... 이름만 들어봤어요.
이 작품도 꼭 기억해둬야겠네요. ^^

stella.K 2009-08-05 10:34   좋아요 0 | URL
이 사람 좋아요. 이 사람의 작품은 읽는대로 모아둘 생각입니다.^^
 
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어디 커피가 러시아에만 있겠는가? 고종. 그 시대에도 이미 세계 각국에서는 커피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즐겼을 것이다.  

우리가 노서아 가비(러시안 커피)를 기억해야 하는 건 아마도 우리나라에선 고종이 그 음료를 최초로 마셨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더 정확히는 그의 부인이었던 명성황후였던 것 같다. 하긴 부창부수랬다고 그나 그녀나가 아닐까?) 그러나 책은 이것이 어떻게 우리나라 특히 고종에게 전해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저 고종은 인현황후의 시해 전부터 황후와 함께 커피 마시기를 즐겨했고 러시아 공사관 시절에도 커피를 끊일 마땅한 시종이 없어 사람을 찾던 중 따냐가 차출된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이 된다.  

사실 따냐는 원래 그녀의 이름은 아닐터. 역관이었던 아버지가 나라의 것을 도적질했다는 이유로 형을 받아 사살되고 그녀는 살기 위하여 조선을 버리고 러시아로 가야했다. 말하자면 따냐는 그때지은 그녀의 러시아 이름이다.   

노서아 가비는 역관이었던 아버지 덕에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것이었고 러시아에서도 익히 즐겨 마셨던 음료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기꾼이 되었고 역시 사기꾼인 이반을 사랑했다. 이반 역시 노서아 가비를 좋아해 진한 사랑을 나눈 뒤 함께 마시는 노서아 가비란 그들의 사랑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좋은 매개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기 위해 사기꾼이 되었고 그 피가 그들의 내면에 흐르게 된 이상 이들에게 과연 진실한 사랑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온갖 협잡이 끊이지 않는 고종 주변에 그녀를 밀어 넣은 것도 이반이었다.그것은 고정의 커피를 끊여 주면서 무엇이든 정보가 될만한 것은 이반과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흘려주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게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한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에게도 고종의 커피 시중을 든다는 것은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나중엔 고종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주변을 둘러싼 소인배의 짓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거기에 이반도 함께 있었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고종의 커피를 끊여 주면서 한 나라의 군주이기 전에 한 남자의 절대 고독을 엿보게 된다. 그것은 자꾸만 그녀로 하여금 진실에 다가서게 만들고, 고종 역시도 그녀에게만큼은 진실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기꾼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녀의 사기꾼이란 존재적 신분이 이반의 고종에 대한 시해(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섞음)의 위기에서 고종을 살렸고, 그녀는 음모에서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가 까페를 운영하며 사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읽고나면 커피만큼이나 진한 여운이 남는다. 따냐와 이반의 사랑 그리고 그 사이의 고독한 남자 고종의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특히 전편에 흐르는 따냐와 이반의 사랑에 대한 의심과 갈구는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기꾼에게 사랑은 얼마나 치명적인가? 그 사기꾼이 서로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하려 한다는 것은 확실히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서 남는 것은 역시 진실이다. 사랑하는 진실. 사랑하지 않는 진실. 

특히 이반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고독하면서도 냉혈하고 사랑하는 여자 앞에 끝까지 진실하고 싶어했던 이반 그리고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뇌리에 남는다. 이 이야기가 영화화된다고 하는데 과연 누가 이반을 맡을 지 자못 기대가 된다.(웬지 쉽지 않은 배역일 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나 역시 1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커피를 마셔왔다. 커피를 처음 알기 시작할 무렵 나는 커피가 너무 좋아 빨리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길 바랬다. 그러면 또 한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고독한 고종만 같을까? 너무 고독해서 커피를 안 마시면 견딜 수 없었던 고종의 커피에 대한 갈구만 할 것이며, 진한 사랑뒤에 커피를 나눠마신 따냐와 이반이 부럽기도 했다. 

나는 다른 모든 것엔 중독이 된 일이 없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 있어도 중독될만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커피에 관한 한 나는 확실한 중독자다. 그렇다면 커피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인생은 살면 살수록 특별히 놀랄 일도 재미있지도 않아 보인다. 예전엔 커피 마시는 맛에 살았고, 커피 마시는 멋에 살았지만 지금은 커피 마시는 낙에 산다. 이 낙도 없으면 그 많은 나날 어찌 살까 싶기도 하다. 그만큼 커피는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음미하며 마시게 되는 묘한 음료인 것 같다. 

저자는 각 장이 시작될 때마다 커피에 대한 정의를 내리며 시작한다. 저자의 커피에 대한 통찰이 놀랍다. 보통 마셔보지 않고는 이런 명구를 뽑아낼 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그중 기억에 남는 정의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커피는 맛보지 않은 욕심이며 가지 않는 여행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나오는 푸쉬킨의 시의 절묘한 배치란...!   

나도 인생의 낙을 얘기하리만치 나이가 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살아 온 날들에 비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앞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아직은 더 욕심부려도 되고 인생의 여정도 그만큼 더 남아 있다. 그 길에 여전히 커피도 함께 하겠지. 그때 난 또 커피에 대해 뭐라고 말할 지 나 자신도 궁금해 진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와 함께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저자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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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7-16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는 맛보지 않은 욕심이며 가지 않는 여행이다...
정말요? 저자가 이런 정의를..
지금 장맛비 소리 후두둑 들으며 카페라떼 한 잔 하고 있어요.
매일 마시는 커피인데 어제 속이 안 좋아 한 잔도 안 마시다가
지금 마시니 너무 좋으네요. 이 책 담아갑니다~~~

stella.K 2009-07-16 10:45   좋아요 0 | URL
카페라떼를 좋아하시는군요.
저자도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마시고, 후회한다고 하더라구요.
왜 그런지 아시죠?ㅎㅎ

프레이야 2009-07-16 19:03   좋아요 0 | URL
크아~ 배불러서일까요??ㅎㅎ

stella.K 2009-07-17 10:14   좋아요 0 | URL
이걸 가르쳐 드리고 싶은데 안 갈켜 드릴랍니다.
나중에 책 보시면 아세요.ㅎㅎ
 
스트레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9
기예르모 델 토로 외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사실 호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나름 뱀파이어 이야기는 전에도 접해 본터라, 그 이야기가 가진 서늘한 매혹에 충분히 빠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매혹적인 뿐만아니라 철학적이기까지 해 감탄하면서 본적이 있다. 그후 책으로 사서 읽어 보려고 했는데 읽는데는 실패했다. 영화만큼의 감흥이 없었던 것이다. 

올해들어 뱀파이어 영화들이 다시한번 부활한 느낌이다. 그렇지. 뱀파이어어야 그 존재 자체가 몇 세기를 아우르는 것인데 한번만 만들어지고 마는 이야기라면 섭할 것이다. 이것 자체가 문화적 아이콘이 되어 끊임없이 새롭게 재탄생되는건 당연해 보인다. 그래도 나는 호러를 좋아하지 않으니 여전히 선택은 주춤할 것 같다. 

사실 이 책도 나의 도서 목록에서는 열외의 책이다. 그런데 워낙 평이 좋아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이 작품에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난 왜 매료당하지 못하는 것일까? 

영화 감독이 써서 그랬을까? 각장마다 영상을 보는 듯한 것은 있다. 그런데 워낙 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움직임등을 설명하고 묘사하는데 너무 치중한 나머지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 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본론으로 곧바로 진입하지 못하고 빙빙 도는데 질려버렸다.

저자야 이렇게 쓰고 그대로 찍으면 되겠지만 책을 읽는 독자는 뭐란말인가?  

영화에서 첫 3분 내지 5분 동안 관객을 자로잡지 못하면 안된다는 영화적 법칙이 있다. 영화에서 단 몇초만으로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문자로 읽어야 하는데 이렇게 장황할 필요가 있는건가? 도대체 이 책이 두 권으로 나올 필요가 있을까?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나의 이런 의문이 의미가 없는 것이 이 책은 총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 분량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 이런 의문이 얼마나 우문이랴! 

단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작가가 원래는 영화감독이면서 이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감독이 소설 쓰지 말라는 법이야 없지만 뭔가 모를 한계가 느껴진다. 이 사람은 자기식의 소설을 썼지 소설다운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다. 그나마 2권을 썼을 것으로 보이는 척 호건이 따라붙어 주긴 했지만 1권에서 재미를 못 봤으니 2권을 칭찬해 줄 마음은 그다지 생기지 않는다.(2권을 척 호건이 썼는지 확실하지도 않고)  

게다가 요즘 소설계에서 즐겨 차용하는 영화적 기법에 회의가 느껴진다. 

영화적 기법이란 게 쉽게 말해서 영상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한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더불어 허리우드적 구성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물론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든 재밌게 색다르게 읽이면 좋은 것 아닌가? 하지만 (아직까지)그런 소설에 문학적 향취를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은 아닌가 회의가 느껴진다. 한마디로 "너희들이 문학을 알아?'다. 아, 나는 왜 그놈의 '허리우드적'인 것에 닭살이 느껴질까?  

편집이 문제인 것인지 각장의 처리도 매끄럽거나 일정하지 않으면서 그장 말미에 똥폼잡는 표현들(번역자에게 미안하지만 저자를 생각하면 좀 웃음이 난다. 어차피 태평양 건너의 사람인데 이런 일개의 독자가 비웃었다고 꿈쩍이나 하겠냐만)이란...! 

사람들은 이 책에 열광하고 빨리 영화화 되길 기다리겠지만 난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다. 기존의 고전적 이미지의 뱀파이어의 고혹적인 매력을 안다면 말이다. 고전적 뱀파이어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우라가 느껴진다. 그런데 여기선 기계적이며 물리적인 장치가 지나치게 많이 등장한다.   

모르긴 해도 이 이야기는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것이며 영화화되도 별점 두개 반 많아야 세 개 이상 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아님 말구!) 

영화에서 초반 3분 내지 5분에 관객을 사로잡을 수 없다면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고 보듯, 책 역시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특히 이런 허리우드적 소설일수록. 전체 분량 4분의 1 또는 3분의 1에서 독자를 사로잡지 못했다면 더 이상의 기대를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평점이 좋은 책에 혼자 냉소하자니 뻘쭘하다. 그냥 나와는 인연이 없는 책이라고 덮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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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타리에이 베소스 지음, 정윤희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우리가 북유럽의 소설을 접할 기회가 흔하던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겐 흔치 않은 독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작품은 지극히 목가적이고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친환경적이라고나 할까?(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쁘려나?) 그렇지 않아도 책 표지가 아름답다. 등장인물도 단출하고 기계적인 느낌이 하나도 없다. 또한 읽으면서도 작가의 충실한 묘사에 마치 사진을 찍듯 영화를 보듯한 느낌이다.  

특히 육체의 나이는 37세지만 정신 연령은 5살에 멈춘 마티스의 정서와 느낌, 경험 등을 작가는 이 작품에 오롯이 담아냈다. 이야기는 이미 오랜 세월 누나와 단 둘이 살았고 언제까지나 그대로 살게 될 것만 같은 그의 집에 벌목꾼 예르겐이 함께 살게 되면서 겪는 마티스의 체험과 감정을 솔직 담백하게 그려냈다.  

사실 백수로서의 삶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런 지루한 삶에도 잔잔하지만 소소한 사건 하나씩은 일어나 줘야하지 않는가? 그래서 숲속에서 소녀들도 만나고 뱃사공으로도 살아 본다. 그것은 마티스에게나 소녀들에게나 다 같이 좋은 경험이되었다. 하지만 낮선 사람과의 동거는 어떨까? 

마티스는 지적 장애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그의 정서를 우리가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적인 면에서 장애는 없다고는 하나 어린 아이와 같은 자아 또는 그 정서를 어느만큼은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허리우드가 배출해 낸 이야기 방식에 길이 들여져서일까? 읽는내내 그래도 마티스가 뭔가 일을 내지 않을까? 그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 있어 무슨 사건 하나를 해결하고 이런 장애아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신화를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하는 것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그런 독자의 바램을 일부러 피해간 듯해 보이기도 하다. 그냥 지적 장애를 가진 마티스의 느낌, 그의 생각만을 따라 갔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인간 삶의 보편성과 만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애석하게도 언제까지나 지루하게 펼쳐지는 이야기에 그다지 매료되지는 못하였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앞뒤가 안 맞는다거나 수준 낮은 소설이라고 얕잡이 볼 것도 아니다. 솔직히 이렇게 쓰기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한마디로 허리우드 영화가 아닌 예술 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허리우드식 영화나 이야기는 가만히 눈으로만 따라가줘도 몰입도가 자연 상승하지만 예술 영화는 괜히 심각해진다. 여기서 뭔가를 찾아야만 할 것 같고 의미를 유추해내야만 할 것 같다. 뭐 그러다 철학도 하게 되겠지. ㅋ  

어쨌든 난 작가의 충실한 묘사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그 내용은 좀 버거웠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감정이입이 문제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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