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다. <바람의 화원>을 통해 펙션과 추리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줬던 작가가 이번엔 침니아이랜드와 뉴아일랜드라고 하는 가상의 안개의 도시에서 펼치는 범죄 스릴러를 들고 독자들을 찾아 왔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첫 장을 펼쳤을 때 좀 놀랐다. 이게 과연 내가 알던 그 작가가 쓴 소설이 맞나? 다시한 번 확인하게 만들었다. 과연 이정명 작가의 작품이 맞다. 그런데 꼭 영국의 어느 추리 작가의 작품인 것 같다. 등장인물이 우리나라 고유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작가는 작품의 세계화를 노린 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게도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그렇고 그런 만만한 작품이었다면 겉멋들었다고 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이 그렇듯 단락 단락이 자로 잰듯하며 마치 영화에서 한 프레임 안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다 보여주듯 정교하다.   

제목도 제법 근사해 보인다. 가제본으로 받았을 땐 '나에 대한 너의 거짓말'이었던 것으로 안다. 그것은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이 정식 판본에선 이렇게 <악의 추억>으로 거듭났다. 또한 정식 발매를 하기 전에 독자들을 대상으로 모니터링을 하는 등 작가와 출판사측이 들인 공력이 얼마만했을런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런데 알마 전, 작가는 모 신문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김부남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썼다고 밝혔다. 김부남 사건이라. 한때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언제나 그렇듯 너무도 쉽게 우리의 뇌리속에서 잊혀졌던 이야기를 작가는 용케도 잊지 않고 이 작품 속에서 살려냈구나 싶었다. 당시 그 사건은 어렸을 적 이웃집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성인이 되어 결혼생활에 지장을 겪는 등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인이 결국 사건이 발생한지 십수 년이 지난 후 결국 가해자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라고 한다. 그래. 나도 언젠가 이 이야기의 전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대하고나서야 아니 정확히는 이 인터뷰 기사를 접했을 때야 비로소 기억이 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 것이냐. 주위에 또는 내가 직접 당한 일이 아니고 보니 쉽게 잊혀지고 마는 것이다.  

작가는 '조두순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가해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 또는 거세를 해야한다며 떠들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잠잠하고 희생자들을 너무 쉽게 잊는 것이 안타까워 이 작품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참, 이런 작가가 있다니. 웬지 숙연해진다.  

그런데 정말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왜 그처럼 냄비에 물끊듯 하다가 이내 잠잠해져 버리는 걸까? 김부남 사건이 어디 그때 한때의 사건으로 종결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김부남 사건까지는 아니어도 성폭력 피해자는 그 이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작가의 말마따나 그들은 잠깐 나왔다 잊혀진다. 그렇게 반복해서 우린 현재 나영이 사건까지 왔다. 나영이 사건은 또 언제까지 사람들의 뇌리속에 기억될까? 그런데 이번에 놀라운 건 지금까지 성폭력 가해자가 생각 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고 있다는 거였다. 어떻게 가해자에게 그것 밖에 안 되는 형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법이 가벼우니 조두순 사건에서처럼 거세를 해야한다는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들끊는 것이 아닌가? 실로 인권이 피해자를 옹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해자를 옹호하는 꼴이 되고 있으니 어쩌면 이 나라의 성폭력 피해자들은 이중의 피해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차는 가해자에게, 2차는 국가가. 과연 국가는 이들을 보호할 의지가 있는 것인가?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김부남 사건에서 보듯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것이다. 누구는 그럴지 모르겠다. 이것은 피해자가 직접 행한 악에 대한 심판이라고. 그러므로 죄가 없는거라고. 그 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렇게만 보는 것도 석연치 않다. 악에 대한 심판은 악의 피해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악은 없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어떤 면에선 또 다른 죄악을 낳은 것이란 생각도 든다. 마치 뱀파이어에게 물린 사람이 물린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따라서 다른 사람의 목덜미를 무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말하자면 우린 악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이냐라는 것이다. 악의 고리는 끊어져야 하는데 뭔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큰 수렁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다.  

이정명 작가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궁금해졌다. 과연 김부남이라는 사람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해자를 찔러 죽였을 때 마음이 후련 했을까? 지금은 행복할까? 모르긴해도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다소는 후련했을지도 모르지. 가장 좋은 건 그 일을 안 당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것이 선행이 됐어야하지 않았을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왜 그것을 묵인했던 것일까? 

오늘도 모 소아정신과 의사가 나영이 사건을 보고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범죄 수사에서의 증언이 아니라 치료라고. 맞는 말이다. 피해자는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환자를 두고 몇 번씩 진술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은 고문이다. 이런 수사 방식은 정말 고쳐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놓고 가해자에게 익숙하고 뻔한 형을 내린다면 이것은 필시 짐승같은 검찰에 무능한 국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밖엔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더불어 지적하고 싶은 건 우리나라는 성범죄자들에게 너무 소극적이다. 그들의 신상을 공개할 것이냐 말것이냐, 전자발찌를 착용할 것이냐 말것이냐, 거세를 할 것이냐 말것이냐 이런 것 가지고 인권 침해 소지 논란만 물고 늘어진다. 사실 그것은 어떤 면에선 피해자측에서 보자면 가장 소극적인 안전망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폭력피해자 못지 않게 가해자 역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매스컴이나 여타의 치료기관에서는 그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어떻게 치료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난 이것이 더 화가난다. 진단과 비판만 있을 뿐 행동이 없다. 김부남 사건도 애초에 양쪽의 치료가 이루어졌더라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과연 악의 피해자가 악을 심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끝은 완벽하지 않다. 악은 반드시 선으로만 정복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다. 악으로 악을 심판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착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탄탄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결말을 내고 있다. 등장인물 저마다에 갖는 트라우마는 말하고 있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해결을 보여주지 못하고 또한 이들이 벌이는수사도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보여주지 못한 체 안개의 도시처럼 모호하게 끝을 맺고 있다. 아마도 작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 마무리져야 할런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문제만을 제기하고 끝내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긴 그맘도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일이란 게 문제 제기만 해도 충분한 것이 아닌가? 결론이야 앞으로 성폭력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이냐 또는 이를 보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편 아쉬운 것은 제목대로 '악의 추억'이었다면(독자로서 이 제목에 만족한다) 악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 인간군상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악의 실체와 악의 반대 개념인 선에 관해서어느 정도 언급해야 하지 않았을까? 오늘 날의 세대가 악은 얘기할 줄 알면서 그의 반대 개념인 선에 대해서는 얘기하기를 주춤하는 세대가 되어버린 듯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죄와 벌'을 얘기했던 도스토옙스키가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그렇게 이 작품은 약간의 아쉬움은 남지만 나는 당분간 작가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 더 좋은 작품을 쓰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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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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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다 읽고나면 드는 생각은 이렇다. 결혼은 꼭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하는 것일까? 

사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에 기대하는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만족할만한 해피 엔딩, 영웅의 탄생, 새로운 또는 재해석된 신화 이야기. 이런 것들에 이 작품은 한참 뒤쳐진 이야기란 말이다.  하다못해 주인공이 많은 적대자들을 물리치고 사랑의 승리를 쟁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마지막장을 덮고도 나름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라. 우리가 그런 이야기에 얼마나 많이 길들여져 왔는지? 뭔가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결말을 보지 있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투덜대고 화내고 욕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네 인생 자체를 얘기하고 있다. 한치도 다를바 없는 인생을. 그러니 어떤 사람은 이 작품을 보면서 동감을 표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너무도 지루하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지루한 것엔 또 두 가지로 갈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인생이 아직 이해가 안 가서 동화되지 못한 것과 또 하나는 너무 동화된 나머지 너무 잔잔하여 한숨짓게 만드는 지루함. 

그래도 난 이 작품이 좋았다. 같은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한 없이 지루하기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성실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마지막엔 묵직한 울림까지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이 별 것 있겠는가? 그렇고 그런 거지. 그런데 그렇고 그렇게 끝내버리면 소설이 될 수가 없다. 그 별 것 아닌 것에 뭔가의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능력있는 작가냐 아니냐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묻게 되는 것은 말했던대로 사랑없는 결혼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작가는 처음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주인공 쿵린은 의사다. 소위 말하는 인텔리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권유와 집안 사정을 뿌리칠 수가 없어 자그맣고 못 생겼으며 게다가 전족까지 한 쉬위를 아내로 맞는다. 애정 없는 결혼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사랑하는 여인 우만나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을 하려한다.  

하지만 그 이혼은 쉽지 않다. 여러가지 제도적인 벽과 인습에 부딪혀 번번히 좌절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오랜 기다림으로 이어지고 드디어 결혼 18년이 되면 배우자의 동의 없이도 이혼이 성립되는 그것으로 이혼에 성공하게 된다.  

18년. 그 긴 세월이면 애인에게서 느껴지는 짜릿하고 불 같은 감정도 쇠하여질대로 쇠하여진 세월이다. 결국 관계는 정이고 관성이다. 항상 짜릿함만 가지고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다. 이제는 그 오랜 관계 때문에도 쿵린은 우만나를 버릴수가 없다. 하지만 그 사랑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의 답답한 성격 때문에 우만나와도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눴을 뿐 육체적인 욕망을 불태우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우만나가 강간을 당하고, 더 이상 불태울 욕망이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허락됐을 뿐이다. 또한 조강지처를 버리고 애인을 사랑한 것 때문에 주위로부터 얼마나 많은 수치와 모멸을 감수해야 했나? 그것은 우만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사랑은 이들에게 있어서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네 인생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다. 뭐든 게 시기에 맞게 필요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아면 얼마나 좋겠는가? 항상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문처럼 늘 삐거덕거리는 것이다. 읽다보면 인간 생태를 보는 것 같아 너무 사실적으로 와 닿는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은 옛날 우리나라 6,70년와 흡사하며 성의식 또한 닮은 꼴이다. 즉 이를테면 육체적으로 깨끗하면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 무식하고 힘없고 형님같은 조강지처기 때문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참기만 하는 것 등등.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옛날 중국사회인 만큼 인간의 내밀한 것까지 사화적 간섭과 제제가 심하다는 것 정도. 

그러나 시간은 그렇게 말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는 것 같아도 사람을 한순간 바꿔놓는 위력을 가졌다. 시간은 인간의 생노병사의 법칙을 조금도 비껴가지 않는다. 인간은 나이먹고 늙어짐에 따라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하다못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는 것 앞에서 조차 바뀌는 것이다. 그때기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 아내에 존재를 재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 말미에서 쿵린이 자조하듯 되까리는 사랑에 대한 재인식에 공감이 간다. 또한 더불어 누가 못 생기고 전족을 했으며 배우지도 못하고 이혼 당한 사람이 인생에서도 패배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남자는 병들과 외로워 봐야 조강지처의 소중함을 안다고 했다. 쿵린은 아직 병들지는 않았지만 외로워졌을 때야 비로소 전처를 새롭게 보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쿵린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해서 그 결혼이 평생 불행할건지 아닌지는 살아봐야 한다. 이 작품은 시간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쿵린의 기다림에서 수위의 기다림의 승리를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인생은 허무하다. 하지만 허무한 것 같아도 그 안에 조그만 희망이 있다. 이 작품은 그것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란 많은 미사여구와 현란한 이야기적 장치를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힘없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인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그것에 값하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그것까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진. 그는 참 좋은 필력을 가진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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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
커리드웬 도비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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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은 왜 권력 앞에 굴복하는가를 요리사, 이발사, 화가 그리고 이발사의 형의 약혼녀 ,요리사의 딸, 화가의 아내가 각각 1인칭 화자로 등장해서 고백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왜 권력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권력을 갖고자 원한다면 먼저 그 권력을 가진자의 눈에 띄어야 하고 그에게 봉사해야 한다. 대통령의 요리사, 이발사, 화가라. 언뜻보면 그다지 권력을 탐하는 자처럼 보이지도 않아 보인다. 그들은 직속 참모라기보단 오히려 대통령에게 봉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들에게 권력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도 그들도 사람인 것을. 권력을 탐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DNA구조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권력을 탐하는 인간 그 이면 또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추악하기 보단 인간의 또 다른 약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화가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대통령의 아내와 하룻밤을 보내고, 이발사는 대통령이 자신의 형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그를 면도해 주면서도 면도칼로 그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잠재워야만 했다. 또한 요리사는 자신의 외모를 이용하며 여자들과 하룻밤을 쉽게 보내는 쾌락에 빠져든다. 그러면서 새로 만난 두목의 아내를 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권력에 머리를 조아린 자의 전형이 아닌가? 권력은 가진 자 치고 의로운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주는 물을 마시고 사는데 어찌 그 물이 시원하다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표현했다기 보단 그 권력을 가진 자에게 굴복하는 피권력자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등장인물 하나 하나가 자조하는 듯한 어조다. 자신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인간은 그렇게 쉽게 권력자 앞에 무너지고 자신의 영혼을 그처럼 쉽게 파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자기보호 본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권력 앞에 그렇게 쉽게 머리를 조아린다고 그 권력이 자신을 지켜주는가? 이 책은 그것을 묻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마지막 문장이 뇌리를 맴돈다. "양심의 가책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는, 후회란 좀처럼 오래가지 않는다." 상당히 통찰적이면서도 자조적이다. 

이 책은 생각보다 좀 어렵다. 그래도 문장은 제법 묵직하다. 만만히 볼 작품은 아닌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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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공주
카밀라 레크베리 지음, 임소연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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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작가가 요즘 흔히 하는대로 영화화 될 것을 생각하고 글을 썼을 것이다.  

무엇보다 추리였던 만큼 혹시나 놓치고 가면 맥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처음엔 꽤나 신경 써서 꼼꼼히 읽어 나갔다. 무엇도다 북유럽 작가가 쓴만큼 기대는 더욱 증폭히 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읽고나서의 허망함이란 북유럽의 한기만큼이나 시리다고나 할까? 어떻게 이런 작품을 아가사 크리스티에 견주겠다는 건지 좀 심하다 싶다.(물론 그 수식어라는 거 다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는 거 진작에 알고 있긴 했지만)  

물론 나야 추리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많이 읽지도 못했다. 하지만 추리라고하면 상당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하며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고, 중간을 지나서는 엄청난 뭔가 엄청난 반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추리 매니아가 아닌 나도 알고 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영화화 될 것을 생각해서 쓴 작품이 여실했던만큼 영화적 문법을 확실히 보여줬어야했다고 본다. 그것은 영상적 이미지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이 책은 480여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쓸데없는 없는 인물 묘사나 상황 묘사로 페이지를 채워 늘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살해된 알렉스가 아니라 경찰관 파트리크와 전기 작가라는(난 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히려 추리 작가나 범죄 소설가라면 설득력이 있는데 왠 뜬금없는) 에리카의 활약상이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역할이라는 게 그다지 볼만한 것이 없다. 너무 정적이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웬 연애질이란 말인가? 뭐 같이 일하다 보면 눈이 맞아 연애도 할 수 있다지만 여기선 그 번지수가 아니다. 그냥 학창시절 못 이룬 사랑을 어찌하다 보니 같은 일을 하게되서 나이들어 이루는 그야말로 독자들은 별로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내용들이다.   

거기다 양념 격으로 심심하면 한번씩 나와주는 에리카의 동생 안나와 제부의 갈등 관계. 집에 관한 추억과 현실적인 문제도 나열만 있다 뿐이지 이걸 가지고 재대로 된 요리도 못하면서 페이지 수만 할애하고 있다. 마무리 짓지 못하는 이야기를 왜 그토록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인지... 

어디 그뿐인가? 에리카와 알렉스는 친구 관계라고는 하지만 아주 친한 친구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 조금 우정있게 지내다 멀어진 친구 사이다. 작가적 호기심은 있을 수 있겠지만 죽은 친구를 위해 글을 쓴다고 한다. 그것도 전기가 아닌 소설로. 그런데 소설 내용은 없고 글 쓰는 건 너무 어렵다고 칭얼대기만 한다.  

어디 그뿐인가? 400쪽 정도에 다다르면 죽은 알렉스의 감추어진 비밀이 그녀의 아버지로 인해 진술 되어지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성폭력은 개인에게 있어서 처참한 상처를 입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독자에겐 새롭지가 않다는 것이다. 독자는 같은 성폭력이어도 뭔가 대단한 비밀이 벗겨지는 것을 원하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아버지에 의해 진술될 것을 앞에 그처럼 장황한 나열이 필요했을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은 딸을 위해 책을 써 달라고 에리카에게 부탁하고 격려까지 한다. 이게 정상적인 정서를 가진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원래 부자는 못된 사람이어서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자신의 가문의 수치스런 역사를 감추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이긴 하다. 그렇다면 통조림 공장을 하며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며 막대한 부를 거머쥔 로렌트 가문에 대해 파트리크와 에리카는 뭘했는가? 그래야 한 사람은 사건을 파헤치고 한 사람은 글감을 찾아야 한다. 둘 다 진실을 찾되 서로 그 기능은 다른.    

알렉스를 10살 때 성폭행했다던 유아성도착자라던 닐스 로렌트는 이름만 거론될 뿐 작품을 통털어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안데르센(?)과 그의 어머니 베라. 결국 아들 때문에 알렉스를 죽인 것이 되는데 이 설정이 맞는 설정인 것인지? 복수는 로렌트의 노마님에게 해야하는데 왜 애꿎은 자기 아들과 같은 처지인 알렉스를 죽여야 하는 것인지? 그런 모성이라면 닐스를 어떻게든 찾아내 아작을 내주던가 노마님에게 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닐스 로렌트가 끝까지 가리워진 신비의 인물로 나오는데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암시만 줄뿐 마땅히 독자를 납득할만한 어떠한 설득력도 없다. 그리고 베라가 이후 어떻게 됐는지도 나오지도 않은 채 끝은 되게 모호하게 관련없는 진술로 끝나고 있다. 

이외에도 문제점은 많아 보이지만 더 거론하고 싶지가 않다. 그저 이렇게 결함이 많고 되다만 이야기가 영화화 됐다니 그 영화는 어떨까? 궁금할 뿐이다. 한마디로 뭐하나 시원하게 재대로 건드려 주는 게 없다.  

나 역시도 아가시크리스티의 부활이니 어쩌니 해서 읽기 시작한 책이긴 하지만 이런 터무니 없는 수식어는 좀 뺐으면 한다. 돌아가신 추리의 여왕님 관속에서 다시 일어나실라.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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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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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표지가 인상적이다. 기다란 액자안에 해변가에서 웬 낮선 남자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고 그 사이를 개 두 마리가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웬지 이 남자는 다소 우울하고 슬픈 곡을 연주하고 있을 것만 같다.  

심플하면서도 뭔가 비대칭스럽다. 그러면서도 책 제목은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여 보인다.  

독일계 보스니아 작가가 쓴 자전적 소설이다. 배경 역시 90년대 일어난 보스니아 내전 때를 다루고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전쟁의 참상을 우울하게 그리고 있을 것만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쩌면 그리도 수다스러운지. 별로 처참하지도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면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 나름으로 보는 눈이 따로 있는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 어렸을 땐 어땠을까? 나 역시 어린 아이답게 세상을 보고 느꼈을 텐데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너무 오래 전에 읽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안네의 일기'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생각이 났다.   

알겠지만 안네의 일기는 전쟁중에도 안네란 소녀의 너무나 맑은 심성으로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는 글을 써서 오히려 처연하게 느껴지는 책이고,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정말 6.25 그 시대에도 전쟁을 모르는 동네 하나쯤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다. 사실 알고 보면 이런 영화나 소설은 찾아보면 더 있을 것도 같다. 영화 '지중해'도 그렇지 않던가?   

폭풍 중의 고요가 있는가 하면 폭풍전야도 있다. 그래서 세상은 때로 신비롭기도 하다.  

왜 전쟁하면 비참할거라고만 생각하는가? 물론 거의 대부분이 비참하다. 무고한 시민이 다치고 죽어나가는데 거기에 무슨 평화나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어렵고 힘든 때를 지날수록 악해질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 선하고 인류애를 발휘하기도 한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신비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인간이고 지옥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난 이 작품이 내가 앞서 말했던 일련의 작품 보다 좋다고 말하기엔 다소 조심스러워진다. 사실 나의 경우 동유럽 그것도 보스니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호기심에 선택했지만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낮선 문체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또 어쩌면 내가 보스니아를 너무 몰라서 일지도 모른다.   

어느 평론가는 작가를 조너선 사프란 포어에 비견하곤 했는데, 포어 역시 내가 읽어보지 못한 작가니 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감당이 안되기는 이 작가와 마찬가지 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너선 사프란 포어를 좋아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신중히 결정하란 말 밖엔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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