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다. <바람의 화원>을 통해 펙션과 추리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줬던 작가가 이번엔 침니아이랜드와 뉴아일랜드라고 하는 가상의 안개의 도시에서 펼치는 범죄 스릴러를 들고 독자들을 찾아 왔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첫 장을 펼쳤을 때 좀 놀랐다. 이게 과연 내가 알던 그 작가가 쓴 소설이 맞나? 다시한 번 확인하게 만들었다. 과연 이정명 작가의 작품이 맞다. 그런데 꼭 영국의 어느 추리 작가의 작품인 것 같다. 등장인물이 우리나라 고유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작가는 작품의 세계화를 노린 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게도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그렇고 그런 만만한 작품이었다면 겉멋들었다고 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이 그렇듯 단락 단락이 자로 잰듯하며 마치 영화에서 한 프레임 안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다 보여주듯 정교하다.   

제목도 제법 근사해 보인다. 가제본으로 받았을 땐 '나에 대한 너의 거짓말'이었던 것으로 안다. 그것은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이 정식 판본에선 이렇게 <악의 추억>으로 거듭났다. 또한 정식 발매를 하기 전에 독자들을 대상으로 모니터링을 하는 등 작가와 출판사측이 들인 공력이 얼마만했을런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런데 알마 전, 작가는 모 신문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김부남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썼다고 밝혔다. 김부남 사건이라. 한때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언제나 그렇듯 너무도 쉽게 우리의 뇌리속에서 잊혀졌던 이야기를 작가는 용케도 잊지 않고 이 작품 속에서 살려냈구나 싶었다. 당시 그 사건은 어렸을 적 이웃집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성인이 되어 결혼생활에 지장을 겪는 등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인이 결국 사건이 발생한지 십수 년이 지난 후 결국 가해자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라고 한다. 그래. 나도 언젠가 이 이야기의 전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대하고나서야 아니 정확히는 이 인터뷰 기사를 접했을 때야 비로소 기억이 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 것이냐. 주위에 또는 내가 직접 당한 일이 아니고 보니 쉽게 잊혀지고 마는 것이다.  

작가는 '조두순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가해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 또는 거세를 해야한다며 떠들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잠잠하고 희생자들을 너무 쉽게 잊는 것이 안타까워 이 작품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참, 이런 작가가 있다니. 웬지 숙연해진다.  

그런데 정말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왜 그처럼 냄비에 물끊듯 하다가 이내 잠잠해져 버리는 걸까? 김부남 사건이 어디 그때 한때의 사건으로 종결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김부남 사건까지는 아니어도 성폭력 피해자는 그 이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작가의 말마따나 그들은 잠깐 나왔다 잊혀진다. 그렇게 반복해서 우린 현재 나영이 사건까지 왔다. 나영이 사건은 또 언제까지 사람들의 뇌리속에 기억될까? 그런데 이번에 놀라운 건 지금까지 성폭력 가해자가 생각 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고 있다는 거였다. 어떻게 가해자에게 그것 밖에 안 되는 형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법이 가벼우니 조두순 사건에서처럼 거세를 해야한다는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들끊는 것이 아닌가? 실로 인권이 피해자를 옹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해자를 옹호하는 꼴이 되고 있으니 어쩌면 이 나라의 성폭력 피해자들은 이중의 피해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차는 가해자에게, 2차는 국가가. 과연 국가는 이들을 보호할 의지가 있는 것인가?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김부남 사건에서 보듯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것이다. 누구는 그럴지 모르겠다. 이것은 피해자가 직접 행한 악에 대한 심판이라고. 그러므로 죄가 없는거라고. 그 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렇게만 보는 것도 석연치 않다. 악에 대한 심판은 악의 피해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악은 없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어떤 면에선 또 다른 죄악을 낳은 것이란 생각도 든다. 마치 뱀파이어에게 물린 사람이 물린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따라서 다른 사람의 목덜미를 무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말하자면 우린 악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이냐라는 것이다. 악의 고리는 끊어져야 하는데 뭔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큰 수렁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다.  

이정명 작가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궁금해졌다. 과연 김부남이라는 사람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해자를 찔러 죽였을 때 마음이 후련 했을까? 지금은 행복할까? 모르긴해도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다소는 후련했을지도 모르지. 가장 좋은 건 그 일을 안 당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것이 선행이 됐어야하지 않았을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왜 그것을 묵인했던 것일까? 

오늘도 모 소아정신과 의사가 나영이 사건을 보고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범죄 수사에서의 증언이 아니라 치료라고. 맞는 말이다. 피해자는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환자를 두고 몇 번씩 진술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은 고문이다. 이런 수사 방식은 정말 고쳐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놓고 가해자에게 익숙하고 뻔한 형을 내린다면 이것은 필시 짐승같은 검찰에 무능한 국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밖엔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더불어 지적하고 싶은 건 우리나라는 성범죄자들에게 너무 소극적이다. 그들의 신상을 공개할 것이냐 말것이냐, 전자발찌를 착용할 것이냐 말것이냐, 거세를 할 것이냐 말것이냐 이런 것 가지고 인권 침해 소지 논란만 물고 늘어진다. 사실 그것은 어떤 면에선 피해자측에서 보자면 가장 소극적인 안전망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폭력피해자 못지 않게 가해자 역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매스컴이나 여타의 치료기관에서는 그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어떻게 치료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난 이것이 더 화가난다. 진단과 비판만 있을 뿐 행동이 없다. 김부남 사건도 애초에 양쪽의 치료가 이루어졌더라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과연 악의 피해자가 악을 심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끝은 완벽하지 않다. 악은 반드시 선으로만 정복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다. 악으로 악을 심판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착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탄탄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결말을 내고 있다. 등장인물 저마다에 갖는 트라우마는 말하고 있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해결을 보여주지 못하고 또한 이들이 벌이는수사도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보여주지 못한 체 안개의 도시처럼 모호하게 끝을 맺고 있다. 아마도 작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 마무리져야 할런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문제만을 제기하고 끝내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긴 그맘도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일이란 게 문제 제기만 해도 충분한 것이 아닌가? 결론이야 앞으로 성폭력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이냐 또는 이를 보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편 아쉬운 것은 제목대로 '악의 추억'이었다면(독자로서 이 제목에 만족한다) 악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 인간군상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악의 실체와 악의 반대 개념인 선에 관해서어느 정도 언급해야 하지 않았을까? 오늘 날의 세대가 악은 얘기할 줄 알면서 그의 반대 개념인 선에 대해서는 얘기하기를 주춤하는 세대가 되어버린 듯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죄와 벌'을 얘기했던 도스토옙스키가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그렇게 이 작품은 약간의 아쉬움은 남지만 나는 당분간 작가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 더 좋은 작품을 쓰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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