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세계 : 알베르 카뮈의 여정
카트린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달 김화영 교수의 강연을 참석한 적이 있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카뮈 전문가다. 그 강연회를 다녀 오고 나서 당장 이 책을 질러버렸다. 그만큼 카뮈에게 매료당한 것도 있고, 김화영 교수의 강의가 워낙 유려해서 혹시라도 놓쳤을지도 모를 내용을 이 책에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것은 김화영 교수가 카뮈를 다룬 가장 최신간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날의 김화영 교수의 강연과 책은 그다지 관련성은 없어 보인다. 그냥 이 책은 그날 김화영 교수의 강연회를 빛내주기 위한 소품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이 책은 일반책 보다 훨씬 크고 양장이다. 문학 앨범인 만큼 글은 별로 없고 사진만 풍성하게 많다. 솔직히 이런 책을 내가 좋아할 리 없다. 무거워 한 번 들을 때마다 손목에 무리가 가고, 편하게 누워서나 기대어 앉아서 볼 수도 없다. 오로지 책상 앞에 정자세로 앉아 봐야한다. 정말 카뮈가 아니라면 이런 책은 나에게 쉽게 용서 받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표지도 그렇긴 하지만 어느 정도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그는 미색은 아니다. 하지만 남자답게 생겼으며 인상이 진지하면서도 좋다. 이런 상을 두고 누구의 말처럼 귄한 상이라고 하는 걸까? 그래서 한때 시몬느 보부아르로부터 사귀자는 청탁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고 한다. 글쎄, 아무래도 그는 한미한 가문의 사내로서 보부아르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그녀는 복수하는 의미에서 카뮈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퍼트리고 사르트르에게로 갔다고 한다. 그런 걸 가지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어찌된다는 고리짝 여혐발언 같은 건 하지말자. 차도녀라면 그 정도 뒤끝은 보여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냐고? 나는 소중하니까.

 

하지만 그런 그도 첫 번째 결혼은 실패했다고 한다. 좋은 여자일 것 같아 결혼했지만 알고 봤더니 마약쟁이었고, 마약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기도 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재혼해 딸 아들 쌍둥이를 두었는데 그 딸이 이 책을 엮은 카트린이다.

 

사르트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람들은 흔히 사르트르와 카뮈를 라이벌로 여기기를 좋아하지만, 카뮈는 늘 그렇게 비교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는 모든 면해서 사르트르가 자신 보다 우위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르트르는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수재중의 수재만 통과한다는 국가시험을 통과해 당당히 교수가 되기도 했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자신이 비교될 수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일견 공평하기도 하다. 그렇게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이 완벽할 것 같은 사르트르도 아쉬운 것이 있었으니 그는 사시였다. 그리고 빼어나게 잘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런데 비해 카뮈는 매력적이었으며 단명했다. 사르트르는 장수했고. 그러고 보니 공평한 것도 아닌가? 게다가 카뮈는 돈과도 별로 인연이 없는 듯하다. 그가 출판이나 강연 등으로 적지 않은 돈이 은행에 있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단다. 그나마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그 상금으로 엑상프로방스에 조그만 시골집을 사서 어머니와 함께 편하게 글을 쓰겠다는 바람도 이루지 못하고 어느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의 어머니도 그 충격으로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카뮈가 사르트르와 비교되는 것을 거부했던 것엔 그의 가정환경도 한몫했을 것이다. 포도농장의 감독이었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 징집돼 일찍 전사하고, 어마니 역시 말을 잘하지 못하며 정신적으로도 온전치가 못했다고 한다. 집안은 늘 가난했고. 그랬다면 그는 불행했을 거라고 사람들은 짐작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가난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지중해가 주는 기후와 햇빛 때문이었다.

김화영 교수는 카뮈를 이해하려면 이 지중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중해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문명의 발상지다. 기독교의 반대되는 지점에 헬레니즘이 있다. 기독교는 병적이고, 사변적이며, 낭만주의를 대표하지만 헬레니즘은 구체적이고 확실한 지향점을 펼쳐 보인다. 그러면서 문학은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순간 귀가 좀 번쩍 뜨였다. 이건 별로 깊게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기도 한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던 기독교가 헬레니즘에선 저렇게 인식되는구나 한 것. 또한 이는 카뮈가 지중해의 햇볕아래서 춤추던 조르바와도 중첩되기도 한다. 아무튼 그는 그 햇빛 아래서 가난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카뮈하면 흔히 <이방인>이나 <페스트>를 떠올리겠지만 난 오래 전부터 <시지프의 신화>를 떠올렸다. 그것은 내가 그 책을 독파해서가 아니다. 실은 독파하는데 실패했다. 사춘기 시절의 일이다. 그 책을 이해하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책에 손을 댔던 건 바로 실존주의 때문이다. 그게 그렇게 멋있게 들릴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그 한 자락을 만났다.

“......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잖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96p) 그 얼마나 멋진 말인가.

 

카뮈는 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훗날 정오의 사상을 구축해 나갔다. 그는 지중해에는 안개의 비극성과는 판이한, 태양의 비극성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 <이방인>을 쓰지 않았을까? 그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인접해 있다. 이를테면 투우사가 아름다운 건 소의 정수리에 창을 꽂아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한 번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그 분명함을 설명했다. 그의 문학은 항상 젊었다. 그것은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문학도 사람과 함께 나이 먹어가는 유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놓은 것이 죽음이라고 <최초의 인간>에서 밝히기도 했단다.

 

또한 그의 사상은 따로 또 같이의 문학이었다. 그것만이 이상적인 예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사랑이 없는 반항은 온전한 반항이 아니라며 사랑과 정의의 함수관계를 그의 책 <결혼, 여름>에서 밝히기도 했다. 그것은 정오의 사상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정의를 실현하려는 요구가 오래가면 그것을 낳아준 사랑을 메마르게 한다.”, 절도를 지향하는 집념을 표현하기도 했다(111p).

 

카뮈는 앙드레 지드와 함께 프랑스 국어사전에 가장 많은 예문을 싣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명쾌하며 감동적인 표현을 하는 작가라고 한다. 그는 늘 사랑 받지 못하는 건 운이 없는 거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건 불행이다.’라고 했단다. 그런 그가 낭만주의자가 아니라니. 모순 아닌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16-08-1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카뮈 사진 보니 눈이 정말 초롱초롱하네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김화영 교수의 강의도 궁금합니다.

stella.K 2016-08-19 13:02   좋아요 0 | URL
오, 고마워요 브랑카님. 이 글에 댓글이 없어서 좀 우울했었는데...ㅋㅋ
강의 정말 좋았어요.
솔직히 그때 제가 거의 뒤에 앉아서 들어서 정말 귀를 쫑긋 세우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거든요. 게다기 교수님이 앉아서 강연을 해서
얼굴도 볼 수 없고 오로지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어요.
전 그러면 거의 듣기를 포기하는데 아무래도 문학에 관심이 많고
더구나 카뮈라 정말 한마디도 허투로 흘려 듣고 싶지 않았어요.
카뮈는 정말 멋진 남자같아요.^^
 
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부터 20여 년 전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 나왔을 때, 앞으로 우리나라 소설가들은 이렇게 소설을 쓰게될 것이라고 했다. 즉 소설을 쓰기 위해 발로 뛰어 다니지 않고 그렇게 책상에 앉아 텍스트를 보고 상상력을 더해 글을 쓸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지돈의 소설집을 보니 그 예견에서 한 발 더 진화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작가는 소설은 40대 이전에나 읽을 수 있는 장르라고 했다. 그에 비해 정지돈의 이 책 어디쯤 고다르는 그 보다 앞당겨 30대라고 했다. 그러니까 소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잘 안 읽는 장르라는 것이다. 난 그 말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소설을 아주 안 읽는 건 아니지만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한때는 소설가를 꿈꿨던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가장 큰 이유는 눈이 나빠져서다. 눈은 앞으로 계속 나빠질 것이고, 다른 안 읽는 책도 많은데 소설에까지 내 시력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TV만 틀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화려한 비주얼과 스토리 좋은 영화나 드라마가 많은데 굳이 소설 하나 가지고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 공감능력은 좋아지는 것 같은데, 순간 판단력이나 집중력은 떨어진다. 그래서 안 그래도 책을 읽으면 잡생각이 비집고 들어 올 때가 많은데 소설을 읽다가 앞뒤 문맥을 내가 지금 잘 이해하고 있는 걸까 자꾸 의심하면서 읽는 건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점점 소설을 안 읽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이유는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면 요즘 소설에 대해 꼭 한 번씩은 말하게 되는데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그다지 긍정적이지마는 않다. 이걸 요즘 소설가들은 알고 있을까? 모르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떤 소설이든 호불호가 있기 마련이지만, 방금 책 읽기를 마친 비소설계의 신예 작가며 후장사실주의의 창시자인 정지돈 역시 그것을 피해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내가 비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읽고 나서다. 이 책은 현재 에세이로 분류되고 있는데, 난 이 책이 에세이라고 보기엔 너무 소설 같고 소설이라고 보기엔 서사가 약해 보이며 개인적이다. 원래 책이라는 게 읽었을 때와 읽고 나서의 느낌이 다르긴 한데, 이석원은 그의 책이 진실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선 여전히 좋긴 하지만 아직 그의 문학성을 논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이석원은 문학성 같은 거 따지고 글을 쓸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독자는 자신이 읽은 책은 어떤 식으로든 분류하길 좋아하는 족속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작가가 문학 판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지 지켜보고 싶어진다(하긴, 그런 분류가 뭐 그리 중요한가? 무엇이 됐건 재밌고 감정이입만 잘 되면 되는 거지). 그런데 같은 비소설로 정지돈은 이석원 보다 한 수 위로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데, 그것은 그가 영화를 전공하고(이론 쪽인 것 같기도 하다), 문예창작을 공부했다는 것이 작용해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솔직히 이 소설집은 누가 봐도 소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지는 이걸 굳이 소설에 끼워 넣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소설의 생명은 서사에 있다고 보는데 이렇게 서사가 없는 작품을 소설에 끼워 넣고 문학상을 줄 수가 있을까? 어쩌면 정지돈이 10년만 일찍 작가가 되었어도 입상 자체가 불가했을지 모른다. 이걸 두고 문학이 권위주의를 벗었다고 말해도 좋은 것일까?

 

정지돈을 소설에 배치해서 하는 말인데, 그 보다 한 세대 앞선 작가들 중엔 독자들로부터 이것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라는 말을 듣기 위해 쓰는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감정이입. 공감 뭐 이런 것을 중요시 여긴 작가들이라면 말이다. 물론 정 작가와 같은 세대 작가들 중 그런 작가는 지금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작가를 좋아한다. 독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작가. 내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은 대신 말해주는 작가. 나는 그런 작가는 자신의 작가됨을 확실히 아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지돈에게는 이런 잣대를 댈 수 없다.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라. 어느 한 작품이라도 이건 내 얘기를 하고 있군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있는지. 뭔가 여태까지 접해 보지 않은 것이라 신선하긴 한데 대체적으로 좀 부산스럽다. 그리고 이런 작품을 소설로 분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문학이 개인의 사적인 경험과 생각들을 중요시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빨리 개인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동시에 자기 동굴 안에서만 놀고 태만해진 것은 아닌지 의구심도 든다. 확실히 세대가 달라지긴 했다는 걸 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전 세대 작가들은 뭔가의 치열함이 있는데 요즘 작가들은 확실히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것 같다. 문학이란 게 과연 뭔지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이렇다 할 서사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었던 건 내가 모르는 예술가들의 삶과 뒷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서다. 난 이게 항상 흥미롭다. 읽으면서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할 정도로 작가의 정보력은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다. 작가가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인데 그 점에 있어서는 그는 가히 합격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글쓰기의 법칙 중 하나가 빙산의 일각이란 법칙이 있다. 알면 안다고 해서 그걸 다 써 먹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굳이 이것을 숨기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알면 아는 대로 자신이 메모한 것들을 압축 정리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설이야 싶은 것이다. 그래서 후장사실주읜지는 모르겠다만.

 

그 후장사실주의라는 것도 사전에는 없는 말로 내장사실주의를 패러디한 일종의 정 작가가 말의 유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존의 문학계가 서사에만 매달리고 그것만을 문학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반발과 저항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 정신이라면 독자인 나도 일단 환영이다. 그래서 보다 다양하고 새롭고 자유로운 문학 형태가 나온다면 그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후장사실주의에 찬동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단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다. 한국 문학이 서사에만 매달렸다고 언제부터 오해를 받아 온 걸까? 요즘 나온 소설 중에 제대로 된 서사를 갖추고 있는 소설이 과연 있었던가? 겨우 스토리라인만을 갖추고 온갖 폭력과 섹스 묘사 등에 탐닉하며 그것이 일종의 자아의 깨달음인 양 해 오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렇게 서사는 약하면서 묘사에만 치중한 오늘날의 문학을 반성하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다는 걸 볼 때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다소 어패가 있어 보인다. 단지 묘사에 충실한 작품을 서사로 착각하고 그런 작품에 문학상을 주고 문학이라고 봐 온 우리나라 주류 문단계가 잘 못이겠지.

 

하지만 묻고 싶다. 기존의 문학도 그렇고 이 후장사실주의라는 것도 그렇고 도대체 독자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고. 이례적으로 정지돈 같은 작가에게 상을 수여했다는 건 괄목할 만 하긴 한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독자인 나로선 도무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후장사실주의가 (유희로 나왔든 저항의 의미로 나왔든)나왔을 때 그 생경함도 생경함이지만 우려스러움도 없지 않았다. 이건 작가와 독자를 나누는 또 하나의 벽이 되는 건 아닐지. 이건 그저 작가가 듣고 아는 얘기를 전달해 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왜 이게 나에겐 생경한 걸까? 적어도 이걸 소설의 범주에 넣지만 않았어도 그 생경스러움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문학계가 바보가 된 건지 독자인 내가 바보가 된 건지 헷갈린다. 그래놓고 문학계는 한국문학이 다양함을 시도했다고 자위하겠지? 이런 생경함이 독자를 또 한 번 외로움 내지는 냉소주의에 빠뜨린다는 것도 모르고.

 

작가는 뭐하는 사람일까? 자기들만의 성을 짓고 그 안에서 희희낙락, 독야청청 하는 게 과연 작가인가? 그리고 어느 땐가 외로워지면 독자들이 너무 자기네들을 이해 못한다고 역시 작가는 고독해 하며 한숨이나 짓는 게 고작인 건가?

 

아무튼 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작가가 뭔가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취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후장사실주의 그도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없고 보여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아는 척 하지 않고 딱 자기가 아는 것만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 새로움은 좋을지 몰라도 내가 앞에서 말했던 이 소설은 나를 말해주고 있군요.”란 말은 듣지 못할 것이다. 이는 곧 일부 독자에게 새로운 유희는 안겨줬을지 몰라도 소통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게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어떤 작가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글로 독자를 일깨우고 그들을 이끌 수 있다고. 그게 얼마나 무모하고 자신을 고립시키는 말인지 깨달을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이제 작가는 시답잖은 작가정신은 좀 그만 들이댔으면 좋겠다. 고독한 영웅의식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는 독자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이 무엇이고, 표현되지 못한 언어와 감정을 대신 표현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를 외롭게 하고 무슨 고독한 영웅인 척 하는 것인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좀 더 민중적이고 친근해졌으면 좋겠다. 어설픈 작가정신 같은 건 개에게나 줘버리고 차라리 배우정신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나 실험적인 구성인가 보죠 ? 가끔 꽁트를 소설이라고 우기기도 하죠.. 김중혁처럼..
처음에는 눈여겨본 작가인데 계속 그짓하니 실망스럽더군요..
피카소의 데생 실력이 꽤 훌륭하다고 하죠 ? 그 바탕 위에 지금의 화풍이 만들어진 것인데
소설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사와 묘사가 탄탄하고 나서 실험적인 구성을 선보이는 것은 좋은데
몇몇은 대놓고 실험적 구성으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stella.K 2016-07-12 17:53   좋아요 0 | URL
차라리 실험적이면 낫게요? 이건 뭐 어느 잡지에 실릴만한
딱 그만큼의 글을 가지고 소설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소설이
마음이 너그러워진 건지, 정신이 나간건지 그걸 모르겠어요.
읽기는 그럭저럭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래가지고 한국문학의 미래를 얘기할 수 있을까?
한숨이 나오드라구요. 아휴~

아이리시스 2016-07-1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비슷한 이유로 한국소설을 끊은 것 같아요. 도서관에서 가끔 빌려와도 앞만 뒤적이다 다시 반납합니다. 그래도 최근에 <종의 기원>을 샀고 <붉은 소파> 선물받았는데.. 안 가진 한강 소설을 사모으려다 시기를 놓쳤습니다. 나만의 신예작가 발굴보다 신경숙,공지영,김인숙,정유정,한강 등 신작나오면 기대없이 들추는 정도로만 한국소설에 관심있어요.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까먹고 있었네요. 그런데 저는 대학때도 그랬던 것 같고.. 그러면 안되지만 너무 재미 없어요. 어쩌면 외국소설만 찾는 게 타언어를 신격화한데서 오는 감정인가 싶어서 반성도 해보는데, 비소설도 일단 해외저자인 경우 관심이 먼저 갑니다. 그렇지만 글을 재밌게 잘 쓰면서 인기도 많으면 좋죠. 수준만 따지기보다는.. 좀 깐깐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게 좋은거지 싶고 돈 많이 버는 작가 부럽고.. 실험도 필요하지만 제가 한국문학계에 갖는 생각이야말로 완전 상업화되어버린 듯해요. 스텔라님 잘 계시죠? 아, 그리고 더 좋은 책, 재밌는 책, 유익한 책만 골라 읽어요. 시간은 부족하고 책은 많은데..

stella.K 2016-07-12 18:30   좋아요 0 | URL
와우, 오랜만이어요. 잘 지내죠?
한국소설 어쩔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에서만 그러는 걸까요?
언젠가 한류 어쩌고 떠들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
해외에서 주목 받는다고 소설계도 한류 바람 분다고 어쩌고 떠들면
어쩌나 걱정되더군요.
솔직히 채식주의자 번역자도 너무 좋아서 번역한 건 아니라잖아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떨거덕 맨부커상을 받고.
영국 사람들은 뭔가 이국적이고 별스러운 것에 너그러운 민족 같아요.ㅋ

기억의집 2016-07-1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인화가 저런 언급할 때만해도 한국소설 많이 읽었어요. 어느순간 한국소설은 안 읽게 되더라구요. 딱 저 이유때문에요. 앉아서 텍스트 찾아서 머리로 짜집기 하는 순간부터요. 한국 소설 안 읽게 되니 일본소설이 눈에 들어오면서 일본소설 읽는데, 일본작가들이 더 현실에 대한 순발력 있다고 해야하나. 분명 그들도 책상에 앉아 머리로 소설 나부랭이 쓸텐데,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읽었을떼,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을 읽었을 때, 남쪽으로 튀어를 읽었는때부터 뭔가 한국소설하고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쪽으로 발걸음이 서서히 움직여 지더니 이젠 한국문학은 들여다보지도 않게 되었어요. 아 진짜..갖다부치기는 후장사실주의... 아하, 스텔라님 말에 동감하며 후장사실주의 운운에 웃고 갑니다. ㅠㅠ

stella.K 2016-07-12 18:12   좋아요 0 | URL
더 웃긴 건, 언젠가 후장사실주의 잡지가 나왔었다네요.
뭐 신형철, 금정연을 비롯해서 정지돈은 물론이고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됐다는데 2호는 언제 나올지 자기네들도 모른데요.
아주 지네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피리 불고 난리도 아닌가 봐요.
그놈의 후장이 뭐길래.
한국문학 정신 좀 차려야 하는데.
저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외국소설이 더 끌려요.
그게 꼭 외국에 대한 동경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국소설 뭐 읽을 게 없잖아요.ㅠ

전 같은 비소설이라면 차라리 이석원이 훨씬 낫다고 봐요.
그건 감정이입이라도 할게 있지
정지돈은 난 이만큼 알고 있어.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냥 웃음만 나와요.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2 18:06   좋아요 0 | URL
공감. 언제부터 소설이 학술적으로 변했습니다. 대중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면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라는 말을 들을까봐.. 저도 한국 소설 잘 안 읽습니다.

기억의집 2016-07-12 18:17   좋아요 0 | URL
뭣이 중한디!!! 를 모른다니깐요. 울 작가들. 왜 우리는 부동산 투기 몰락을 이야기할 때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를,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소비에 대해선 화차를 예로 들어야할까 싶습니다. 몇달전에 장정일이 시사인에 다 박유하편을 들면서 우리 나라 소설가들이 위안부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위안부는 강제가 아니였다고 하더라구요. 이 무슨... 전 우리 엄마한테도 울 외할머니가 일제시대때 잡혀가지 않으려고 숨어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인데.. 단지 작가들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고 위안부는 강제가 아니였다는 논리를 갖다대는데.... 놀랐습니다. 솔직히 이상이나 김동리나 기생치마폭에서 살다 그 세상를 묘사한 게 우리 나라 근대소설 아닙니까! 쪽팔리죠. 장정일식이면, 태평양 전쟁때 징집되어 끌려간 우리 나라 청년들, 수십만명은 다 허구인가요. 소설가들이 소재를 안 삼아서. 맨 머릿속에서만 실험정신 운운하며 후장사실주의 운운하니. 현실의 소재는 유치한가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2 18:24   좋아요 0 | URL
장정일도 어느 순간 꼰대가 되어 있더라고요.
초기의 총명함은 사라지고......


구월의 이틀인가.. 그 소설 읽다가 쓰레기통에 쳐박았습니다.
여전히 혁띠 풀어서 막 때리면서 보수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보고 참.. 후지구나 했습니다. 이러니 한국 소설 안 읽는 것입니ㅏㄷ.


그리고 기억집 님 말씀에 공감하는 게 일본작가들은 당대의 문제를 바로바로 흡수해서 내놓습니다. 아웃도 그렇고 이유도 그렇고....

근데 한국 소설가는 만날 아버지의 학대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이야기합니다.
프로이트가 굉장히 좋아할 만한 소설만 양산한다고나 할까요..

stella.K 2016-07-12 18:25   좋아요 0 | URL
헉, 진짜 우리나라 작가들 정신 나간 거 맞군요.
아니 그 똑똑한 장정일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네요.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 민주화 항쟁 때 작가들도 동참해서 글을 썼어요.
그 정신 다 어디로 간 걸까요?
그게 작가정신이지. 뭐가 작가정신이겠어요.
시대를 비추지 못하는 작가도 작가입니까? 진짜 통탄하고 싶군요.ㅠㅠㅠㅠㅠ

루쉰P 2016-07-13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스텔라님 ㅎ 전 아무래도 한국문학은 싫어요 조정래 빼구요 ㅋ 채식주의자도 읽었는데 이게 왜 상 받았는지 원체 이해가 안 가요 ㅎ 전 1850년대 러시아에서 태어나야 했나봐요 그 때 소설만 너무 좋아요 ㅋ

stella.K 2016-07-14 16:50   좋아요 0 | URL
앗, 루쉰님! 제가 먼저 인사해야 하는 건데,
이렇게 먼저 인사도 건네주시고 황송하네요.ㅋ
조정래 작가를 좋아하시는군요.
요즘 신간이 나왔던데 관심이 많으시겠어요.
엊그제 조정래 작가가 나향욱한테 날린 말이있어
저도 갑자기 신간에 급 관심이 가요.ㅎ

마지막 말씀에서 빵 터졌습니다.
1850년대 러시아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이전인가요?
제가 연대에 약해서 말이죠. 대표로 한 권만 소개해주시면 안 될까요?ㅋ

루쉰P 2016-07-15 00:21   좋아요 0 | URL
에이 뭐 스텔라님도 다 아시는 책들이에요 ㅋ 토...톨..톨스토이요...전 좀 덕후 기질이 농후한 가봐요. 한 작가를 여러 번 읽는 경향이 있어요. 폭이 너무 좁아요 ㅋ 고칠려고 하지만 다른 책은 잘 손이 안가요 ㅋㅋㅋ

아무래도 러시아 체질로 바뀐 듯 ㅋ 글구 전 외국 문학이 더 읽혀요. 뭔가 한국 문학은 처절하고 한스럽고 진득진득한 그런 느낌...외국 문학도 그런 류의 소설은 많지만 한국처럼 진득스럽지는 않거든요. 내가 한국 살아서 그런가? 암튼 그러네요 ㅎ

stella.K 2016-07-15 17:23   좋아요 0 | URL
아하! 맞았군요!
그런데 새삼 우리가 러시아 문학에 대해 아는 것도 참 한정적이란
생각이 드네요. 그 두 영감을 비롯해서
푸시킨, 솔제니친 뭐 이 정도가 아닐까요?

왜요, 전 루쉰님 그런 독서법 좋다고 생각해요.
책 욕심이 많으면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기가 쉽지 않잖아요.
전 정말 두 번 이상 읽은 책이 손에 꼽을 정도예요.ㅠ

한국문학에서 한의 정서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죠.
하지만 하도 그지 같은 작품들이 많아서 그럴 바엔
예전의 우리나라 작품이 오히려 괜찮게 돋보이는 것 같아요.
나이들면 그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요.
그래도 우리 문학을 사랑해야겠죠?ㅠㅋ
 
글쓰기 동서대전 - 이덕무에서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한정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좀 놀라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글쓰기에 관한 책은 많이 나왔다. 그리고 모르긴 해도 앞으로 꽤 오랫동안 이 분야의 책은 계속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이 분야의 책은 나름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즉 글쓰기에 대한 노하우를 저자 특유의 감각을 가지고 펼쳐 보인다는 것.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 분야의 책은 여기까지가 한계는 아닐까 싶었다.

 

글쓰기의 방법과 기술에 대해선 너나 할 것 없이 가르치는데 정작 아무도 글쓰기 철학에 관해서 말하는 책이 없다. 물론 글쓰기도 작가나 강사가 달라서 고전을 섞어 가며 깊이 있게 가르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아예 고전에서 글쓰기의 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동서를 아우르며 문장사라고 하는 역사를 꿰뚫기도 한다. 또한 그 범위도 세분화 하면서도 깊고, 넓다(이 책의 목차를 보라). 한마디로 문장사 개론서라고나 할까?

 

이 책을 읽다보면 문장이란 이토록이나 깊고 넓은데 왜 우리는 문장을 그저 실용적인 것에만 한정지으려 하는 것일까 반성도 하게 된다.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내가 깨우친 바를 정리하거나 알리려 하지 않고, 소통이란 미명하에 어떻게 하면 튀어 볼까, 어떻게 하면 관심을 받아 볼까로 한정지어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나름 반성도 해 본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문득 지금 우리나라 몇몇 젊은 작가를 중심으로 지난 날 있어왔던 우리나라 문학의 카르텔과 문학상의 성토가 오버랩 된다. 우리나라 선조들의 글쓰기를 보는 시야가 이토록이나 넓고 방대한데 우리는 어느새 이렇게 제도의 틀에 갇혀 이 어항 안에서만 놀라고 하고 있는 걸까 답답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문장은 사람의 사상을 담는 그릇이다. 문장이 모여 글이 되고, 그것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된다. 누구는 그 한 권의 책으로 입신양명의 길을 열기도 하겠지만, 누구는 자신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도 좌지우지 한다(조선의 문체반정). 오늘 날 문단의 카르텔이 21세기 문체반정은 아닐까를 생각해 보게도 되는 것이다.

 

저자가 어떻게 글쓰기에 관해 이런 책을 쓸 생각을 했을까?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글쓰기는 책 읽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좋고, 나중에 이 책이 제시한 책을 따라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단지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같은 내용이 반복되기도 하는데 그 점만 가뿐하게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이 책은 충분히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글쓰기에 관한 생각과 고민이 더 깊어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라디오 2016-07-28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 관련책을 찾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stella.K 2016-07-28 14:37   좋아요 1 | URL
아, 이 책은 좋긴한데 좀 묵직해서 읽기가 버거우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고라님 취향은 잘 모르겠으나, 장석주의 <글쓰기는 스타일이다>란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어떨까 싶네요.
편하게 읽혀지면서도 깊이가 있기도 하고.^^

고양이라디오 2016-07-28 16:35   좋아요 0 | URL
묵직하긴 하네요ㅎ
목차보니깐 재밌을 것 같아요. stella.k님이 추천하신 책들 왠지 믿음이 가네요. 두 권 다 읽어볼께요ㅎ

stella.K 2016-07-28 18:36   좋아요 0 | URL
넵. 고맙습니다.^^
 
탐독 - 10인의 예술가와 학자가 이야기하는, 운명을 바꾼 책
어수웅 지음 / 민음사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한 권의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에 새삼 의문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독서를 해 오긴 했지만 과연 책이 나의 삶을 바꿨을까 그걸 잘 모르겠다. 여기 저자의 취재의 대상이 됐던 10명의 명사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책 한 권씩을 자랑한다. 나는 좋게 읽은 책은 많지만 아직 이렇다하게 이 책이다 싶은 책이 떠오르질 않는다. 내가 독서를 지금까지 헛해 온 건가? 읽는 내내 마음 한편이 위축되는 느낌도 받았다

 

나에게도 이런 책이 나와 주려면 김대우 감독같이 어느 한 책을 몇 백 번을 반복해서 읽을 수 있어야 할 것도 같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를 500번을 읽었다지 않는가?)나의 책 읽는 수준이란 게 범박하여 (성경을 제외하고) 두 번 읽은 책은 손에 꼽을 정도고, 한 번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저자의 질문은 애초에 나 같은 사람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책은 말자. 그래도 생각해 보면 내 삶을 변화시켰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괜찮은 책을 읽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냥 이 책을 읽은 내 생각이나 쓰련다.

 

기자라는 직업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 이렇게 움베르토 에코를 취재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알다시피 에코는 작년에 타계했다. 타계했을 때의 나이가 적은 건 아니지만 100세 시대를 생각하면 의외다 싶기도 하다. 그런 분을 기자는 또 언제 취재를 했던 걸까? 갑자기 이 책의 가치가 백배는 올라가는 느낌이다.

 

기억에 남는 건, 그가 정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요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정보의 옥석을 가릴 줄 알지만,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은 정보에 대한 변별력이 떨어지며 조악한 정보만을 습득할 뿐이라고 했다. 좀 씁쓸한 전망이긴 하나 세계적인 석학이 하는 말이니 그냥 흘려버릴 수만은 없다. 에코는 좋은 정보를 취할 줄 아는 사람은 좋은 공연을 보러 다닐 줄 아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집에서 드라마나 본다나? 마침 이 부분을 읽던 날 저녁 동네 모처에서 어느 독립운동가의 일대기를 그린 창작극을 한다고 해서 보고 오긴 했는데, 좋은 공연이었다면 에코의 말을 따랐겠지만, 그 공연은 드라마를 보는 것 보다 못 했다. 그런 것으로 봐 에코는 드라마 보는 걸 하위문화로 인식하는 것 같다. 나는 드라마 보는 것을 즐겨하는 편이긴 한데, 모든 드라마가 수준이 낮은 건 아니다. 드라마를 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중에서도 좋은 드라마를 볼 줄 아는 변별력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에코의 말은 다 받아들일 건 못되지만 확실히 생각해 보게는 만드는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인터뷰 이들이 자기 인생의 책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삶을 얘기하는 게 더 많다. 그게 참 읽는 이로 하여금 혹하게 만드는 데가 있다. 그중 단연 압권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중혁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 작가의 입담은 가히 알아 줄만하다. 그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자신의 인생의 책으로 꼽았는데, 그는 이 책을 군대에서만도 9번을 읽었단다. 그러다 첫 소설의 테마를 세상의 끝을 향한 남녀의 모험소설로 잡았는데 내용은 군인을 위한 성애 소설이었던 셈. 수위는 높지 않았지만 반응은 열광적이었고, 그들은 준비된 독자들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귀여운 악동의 이미지가 있다.

 

그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처음에는 연애 소설로, 두 번째는 철학 소설로, 그리고 세 번째는 소설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소설 작법에 대한 소설로 읽히지만 역시 또 한 번 읽으면 연애 소설로 읽힌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관점 자체가 아예 없는 무관주의자라고도 했는데, 그런 삶의 자세가 마음에 든다.

 

사실 나를 이루는 팔 할은 책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긴 할 것이다. 그러므로 책이 사람을 바꾸는가에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가끔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그나마 책이라도 읽으니 그 정도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난 악마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은희경 작가가 그런 말을 한다. 책이 없는 인생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늙어 가는 게 두렵지 않은 것은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책을 보고 인생이 바뀌었다이렇게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생각을 조금씩 바뀌게 해 준다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언젠가 내 주위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홀로 있는 외로움을 견디게 해 줄 유일한 버팀목이 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은희경 작가가 그런 말을 해서 말인데, 이 책의 10명의 명사들도 내 인생의 책을 어느 날 갑자기 발견하고 이 책이라고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정말 한 권의 책이 사람을 바꾸면 얼마나 바꾸겠는가? 지구가 자전을 하고, 공전을 해 하루와 1년을 바꿔가듯 독서도 그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런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고 거기서 떠나지 않고 늘 함께 해 오는 책이 사람 저마다 있을 것이다. 같은 책이더라도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는데 그래서 책은 살아 있는 것 같다.

      

글이 정말 간결하면서도 유려하다. 모 신문사 문화담당 기자니 오죽 글을 잘 쓰겠는가. 나도 아주 가끔은 취재 글을 쓰기도 하는데 뭘 알아서 쓰는 건 아니고 훗날 다시 보면 형편없다 싶을 때가 많다. 이 책은 취재 글을 쓸 때 어떻게 써야할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기도 할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16-06-07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저는 김중혁 작가 책 한 권도 안 읽어보고 팟캐스트만 듣는데도 좋아지더라고요. 그 뭐랄까,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담백하고 솔직하고... 글도 그럴까 싶네요. 이 책 읽고 싶어지네요.

stella.K 2016-06-07 20:02   좋아요 0 | URL
저도 김중혁 작가의 책은 많이 안 읽어봤는데 이 작가는 왠지 좋더라구요.
이 책 정말 좋더군요. 강추합니다.^^

cyrus 2016-06-07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있을 때 책이 없으면 허전해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 시간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stella.K 2016-06-07 20:08   좋아요 0 | URL
맞아. 버스를 타면 십중팔구는 다 스맛폰을 보고 있다는 게
또 그것을 당연하게 보고 있다는 게 새삼 놀랍더군.

yureka01 2016-06-07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전 카메라만 있으면 ㅋㅋㅋ

stella.K 2016-06-08 14:51   좋아요 0 | URL
ㅎㅎ 어련하시겠습니까?ㅋㅋㅋ
 
세속 도시의 시인들 - 삶의 진부함에 맞서는 15개의 다른 시선, 다른 태도
김도언 지음, 이흥렬 사진 / 로고폴리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읽은 책이긴 하다. 흔히 작가하면 소설가를 떠올리겠지만, 이 책은 시인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밝힐 것이 있다. 내가 평소 시를 좋아하고, 시에 대한 순수한 관심 때문에 읽은 책은 아니라는 것. 특정 몇몇 시인의 이름이 실려 있어 호기심에 볼 생각을 했다. 그들은 김정환과 류근, 김경주 시인 때문이다.

 

김정환 시인은 오래 전, 한국문학학교란 일종의 창작 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 거기 교장으로 계셔 안면을 튼 적이 있다. 그땐 그분이 그렇게 유명한 시인인 줄은 몰랐다. 시인이라면 그저 김소월이나 박목월 정도 밖에 알지 못하던 내가 그분을 알리 만무했다. 난 그저 창작을 가르쳐 주는 전문 학원도 있다는 게 놀라웠을 뿐이고, 소설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 분에 대해선 더 더욱 알지 못했다. 비교적 작은 키에 다부진 체구를 지닌 시인은 사람과 어울리는데 스스럼이 없었고, 사람 이름을 기억하는데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계셨다.

 

일단 학원에 들어서면 늘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당시에도 음악에 관한 책을 저술 중에 계셨던 것으로 안다. 한 번 정도 그분의 특강을 들었던 것 같고(그것도 담당 선생님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땜빵으로), 거기서 그분의 지난한 삶의 이야기를 띄엄띄엄 들을 수 있었다. 호기심에 다녔던 곳을 수강료를 한 번 더 내고 더 다녀보려고 했는데, 결국 성실히 다니지도 못했다. 그러자 시인은 나에게 전화해 왜 안 나오느냐며 이제라도 열심히 다니라고 격려 겸 선도 부장의 직임을 자처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대답만하고 끝까지 그곳을 다니지 않았다. (역시 나는 학교란 말이 붙으면 못 견디는 체질인가 보다.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그런 인연이 있어 이 분에 대한 근황이 궁금했다.

 

류근 시인이야 김광석의 노래 작사가로 유명하고, 지금도 TV에서 열렬하게 나오고 있으니 궁금한 거야 당연하고, 김경주 시인은 작년,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로 그의 존재감을 인식한 나는, 그가 펼치고 있다던 시극에 관한 이야기를 더 알아 볼 수 있을까 해서 관심이 갔다.

 

그렇다고 이 관심 있어 하는 시인부터 읽었던 것은 아니다. 부러 실린 순서대로 깔끔하게 읽었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이제 나는 시 앞에서는 더 이상 문외한인 것을 자랑하듯 떠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하긴 그게 무슨 벼슬이라고. 오히려, 나는 시인을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없으며, 소설가만큼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애써 관심 밖의 영역으로 미뤄뒀던 것을 후회해야 했다. 언젠가 함민복 시인이 시 한 편에 원고료가 얼마인지를 얘기한 시를 읽어 본 적이 있는데, 시인이 이렇게도 별 볼 일 없는데 시는 왜 쓰는가 그랬던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시인들이 알면 꽤나 섭섭하다 못해 상처를 입었을 것 같다. 누구의 말처럼 자본주의 상흔을 치료할 수 있는 건 문학이고, 작가란 말에 동의했던 내가 정작 돈 벌이가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시를 애써 외면하다니.

 

그런데 시를 외면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김요일이란 시인은, 시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 중에 가장 쓸모없는 것이며. 맹장 같은 거라고 했다. 시인도 이럴진대 속된 나는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이 책을 엮었던 저자 김도언은 이런 말을 한다. 시인은 실패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건 시인에게 요구되는 핵심적인 요건일 거라고. 모든 시인이 시를 써서 성공만을 지향한다면, 시는 빛나는 목소리를 잃고 하수구에 쳐 박힐 거라고 했다. 왜냐하면 타락한 시대의 성공만큼 비루한 것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시는, 가장 실패한 방식으로 타락한 시대를 증거하면서 자기 회복과 갱신의 가능성을 실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과연 저자의 말이 폐부를 찌른다. 우린 왜 모든지 성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도 성공을 위한 성공을. 그 성공을 위한 성공이 훗날에도 성공으로 남을 수 있을지, 현재의 실패가 언제까지나 실패로만 남아 있을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실패를 위한 성공이 훗날 어떠한 길을 도모하며 발전해 갈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시인에 대한 이중의 잣대가 있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시인은 낭만적일 것이라는 것과 가난하다는 것. 이런 시인을 사랑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특히 시인의 나이가 젊으면 젊을수록 그들을 보는 눈은 가혹할 정도다. 권혁웅 시인은 인터뷰에서, 문학을 기술로 생각해서 문창과가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문창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 하는 소리다. 글을 써서 성공하겠다는 세속적 욕망이 있다면 여기에 있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문창과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글을 안 쓰면 죽을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곳은 단순히 직업 훈련소나 소개소가 아니며, 그는 그런 그들에게 삶과 사회, 역사를 정확하고 날카롭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한 대학의 문창과 교수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마땅히 격려 받아야 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왜 사람들을 자신의 잣대로만 보려하고 규정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시인들의 세계도 인간 세계여서 독야청청하고, 신선의 세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세계도 권력이 존재하기도 하고, 나태와 태만이 존재하기도 한다. 어느 시인은 청탁을 받을 때만 쓴다고 하는데, 시인이 그렇게 항상 목적이 있을 때만 시를 써서 되겠냐고 류근 시인은 질책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안 쓰면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이라며 그렇게 청탁이 있을 때만 시를 쓰려 한다면, 그들이 실패에 성공하지 않고 성공에 성공하려고 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래서 그런 것과 상관없이 아웃사이더로 시를 쓰는 시인도 있다는 걸 나는 이 책에서 발견하고 눈이 번쩍하기도 했다(그가 누군지는 직접 읽어보고 확인해 보시라). 그런 건강한 아웃사이더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앞서, 김요일 시인은 그렇게 시는 가장 쓸모없고, 맹장 같음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시를 쓰는 건 병이라고 했다. 아주 고약한 병. , 왜 그리도 자학에 가까운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도 어느 부분에선 맞는 얘기다. 미치지 않고 서야 미칠 수 있겠냐고 하는 것처럼, 시인은 시로서 이 세상을 말해야 한다. 또한 권혁웅 시인의 말처럼, 삶과 사회, 역사를 정확하고 날카롭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누구보다도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김이듬 시인도 그렇게 말했다. 시인은 똑같이 보통 사람의 삶을 사는 건강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그렇다고 누굴 밟아 세속적인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밥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시인은 그런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도록 계속 노력하는 사람이다.

 

뭐가 됐든 인간의 하는 일은 쉬운 것은 없다. 시인의 시 쓰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시인들 역시 누가 뭐라고 하던 시를 열심히 써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다. 새삼 드는 생각은 내가 시인들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하는 거였는데, 또 생각해 보면 시인들이 뭐 연예인도 아니고 일반인들에게 어디 쉽게 드러나는 사람이던가 싶기도 하다. 이런 인터뷰집이나 만들 때야 비로소 시인들의 삶과 고뇌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뿐. 이야기는 조금씩 달라도 뭔가 공통적인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다. 문학이나 시의 위상에 관한 이야기는 비슷한 공통분모가 있었다. 더불어 인터뷰이들을 통해 단편적이나마 우리나라 시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어 좋았다. 이 책 안 읽는 시대에 끊임없이 시를 쓰고, 그 시를 또 끊임없이 출판하는 출판사들이 새삼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 좀 읽어야겠다.

 

조금 아쉬운 점을 지적하자면, 전체적으로 난 이 책이 나쁘진 않았는데, 저자의 생각을 최대한 절제하거나 온전히 인터뷰 내용만 실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자의 생각이나 해석이 인터뷰 중간 중간에 끼어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좀 방해가 된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다고 저자의 문체가 쉬웠던 것도 아니다. 가끔 어려운 용어도 나오던데 그걸 우리말로 순화하거나, 뜻풀이를 해줘더라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불친절하다는 느낌이었다.(그런데 저자의 사진을 보니 꽤 미남이다. 이런 저자를 두고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해야하는 나는 어디 가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ㅠ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6-01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2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6-06-02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도언 저자의 책을 두 권 읽었는데 이런 책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소설가지만 시를 쓰기도 하는 작가라서 이런 책을 낼 수 있었던 것 같군요.

시에 반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30편쯤 시를 외우기도 했어요.
지금도 시의 매력은 알지만 이젠 시집을 읽게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사 놓고 보지 않은 시집을 봐야겠어요. 시 공부 좀 해야겠어요...

stella.K 2016-06-02 18:57   좋아요 0 | URL
김도언의 책 어떻던가요?
작가가 잘 생겼더군요. 배우 김주혁 같더라구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