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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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0여 년 전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 나왔을 때, 앞으로 우리나라 소설가들은 이렇게 소설을 쓰게될 것이라고 했다. 즉 소설을 쓰기 위해 발로 뛰어 다니지 않고 그렇게 책상에 앉아 텍스트를 보고 상상력을 더해 글을 쓸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지돈의 소설집을 보니 그 예견에서 한 발 더 진화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작가는 소설은 40대 이전에나 읽을 수 있는 장르라고 했다. 그에 비해 정지돈의 이 책 어디쯤 고다르는 그 보다 앞당겨 30대라고 했다. 그러니까 소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잘 안 읽는 장르라는 것이다. 난 그 말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소설을 아주 안 읽는 건 아니지만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한때는 소설가를 꿈꿨던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가장 큰 이유는 눈이 나빠져서다. 눈은 앞으로 계속 나빠질 것이고, 다른 안 읽는 책도 많은데 소설에까지 내 시력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TV만 틀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화려한 비주얼과 스토리 좋은 영화나 드라마가 많은데 굳이 소설 하나 가지고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 공감능력은 좋아지는 것 같은데, 순간 판단력이나 집중력은 떨어진다. 그래서 안 그래도 책을 읽으면 잡생각이 비집고 들어 올 때가 많은데 소설을 읽다가 앞뒤 문맥을 내가 지금 잘 이해하고 있는 걸까 자꾸 의심하면서 읽는 건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점점 소설을 안 읽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이유는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면 요즘 소설에 대해 꼭 한 번씩은 말하게 되는데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그다지 긍정적이지마는 않다. 이걸 요즘 소설가들은 알고 있을까? 모르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떤 소설이든 호불호가 있기 마련이지만, 방금 책 읽기를 마친 비소설계의 신예 작가며 후장사실주의의 창시자인 정지돈 역시 그것을 피해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내가 비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읽고 나서다. 이 책은 현재 에세이로 분류되고 있는데, 난 이 책이 에세이라고 보기엔 너무 소설 같고 소설이라고 보기엔 서사가 약해 보이며 개인적이다. 원래 책이라는 게 읽었을 때와 읽고 나서의 느낌이 다르긴 한데, 이석원은 그의 책이 진실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선 여전히 좋긴 하지만 아직 그의 문학성을 논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이석원은 문학성 같은 거 따지고 글을 쓸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독자는 자신이 읽은 책은 어떤 식으로든 분류하길 좋아하는 족속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작가가 문학 판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지 지켜보고 싶어진다(하긴, 그런 분류가 뭐 그리 중요한가? 무엇이 됐건 재밌고 감정이입만 잘 되면 되는 거지). 그런데 같은 비소설로 정지돈은 이석원 보다 한 수 위로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데, 그것은 그가 영화를 전공하고(이론 쪽인 것 같기도 하다), 문예창작을 공부했다는 것이 작용해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솔직히 이 소설집은 누가 봐도 소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지는 이걸 굳이 소설에 끼워 넣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소설의 생명은 서사에 있다고 보는데 이렇게 서사가 없는 작품을 소설에 끼워 넣고 문학상을 줄 수가 있을까? 어쩌면 정지돈이 10년만 일찍 작가가 되었어도 입상 자체가 불가했을지 모른다. 이걸 두고 문학이 권위주의를 벗었다고 말해도 좋은 것일까?

 

정지돈을 소설에 배치해서 하는 말인데, 그 보다 한 세대 앞선 작가들 중엔 독자들로부터 이것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라는 말을 듣기 위해 쓰는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감정이입. 공감 뭐 이런 것을 중요시 여긴 작가들이라면 말이다. 물론 정 작가와 같은 세대 작가들 중 그런 작가는 지금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작가를 좋아한다. 독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작가. 내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은 대신 말해주는 작가. 나는 그런 작가는 자신의 작가됨을 확실히 아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지돈에게는 이런 잣대를 댈 수 없다.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라. 어느 한 작품이라도 이건 내 얘기를 하고 있군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있는지. 뭔가 여태까지 접해 보지 않은 것이라 신선하긴 한데 대체적으로 좀 부산스럽다. 그리고 이런 작품을 소설로 분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문학이 개인의 사적인 경험과 생각들을 중요시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빨리 개인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동시에 자기 동굴 안에서만 놀고 태만해진 것은 아닌지 의구심도 든다. 확실히 세대가 달라지긴 했다는 걸 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전 세대 작가들은 뭔가의 치열함이 있는데 요즘 작가들은 확실히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것 같다. 문학이란 게 과연 뭔지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이렇다 할 서사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었던 건 내가 모르는 예술가들의 삶과 뒷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서다. 난 이게 항상 흥미롭다. 읽으면서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할 정도로 작가의 정보력은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다. 작가가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인데 그 점에 있어서는 그는 가히 합격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글쓰기의 법칙 중 하나가 빙산의 일각이란 법칙이 있다. 알면 안다고 해서 그걸 다 써 먹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굳이 이것을 숨기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알면 아는 대로 자신이 메모한 것들을 압축 정리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설이야 싶은 것이다. 그래서 후장사실주읜지는 모르겠다만.

 

그 후장사실주의라는 것도 사전에는 없는 말로 내장사실주의를 패러디한 일종의 정 작가가 말의 유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존의 문학계가 서사에만 매달리고 그것만을 문학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반발과 저항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 정신이라면 독자인 나도 일단 환영이다. 그래서 보다 다양하고 새롭고 자유로운 문학 형태가 나온다면 그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후장사실주의에 찬동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단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다. 한국 문학이 서사에만 매달렸다고 언제부터 오해를 받아 온 걸까? 요즘 나온 소설 중에 제대로 된 서사를 갖추고 있는 소설이 과연 있었던가? 겨우 스토리라인만을 갖추고 온갖 폭력과 섹스 묘사 등에 탐닉하며 그것이 일종의 자아의 깨달음인 양 해 오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렇게 서사는 약하면서 묘사에만 치중한 오늘날의 문학을 반성하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다는 걸 볼 때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다소 어패가 있어 보인다. 단지 묘사에 충실한 작품을 서사로 착각하고 그런 작품에 문학상을 주고 문학이라고 봐 온 우리나라 주류 문단계가 잘 못이겠지.

 

하지만 묻고 싶다. 기존의 문학도 그렇고 이 후장사실주의라는 것도 그렇고 도대체 독자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고. 이례적으로 정지돈 같은 작가에게 상을 수여했다는 건 괄목할 만 하긴 한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독자인 나로선 도무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후장사실주의가 (유희로 나왔든 저항의 의미로 나왔든)나왔을 때 그 생경함도 생경함이지만 우려스러움도 없지 않았다. 이건 작가와 독자를 나누는 또 하나의 벽이 되는 건 아닐지. 이건 그저 작가가 듣고 아는 얘기를 전달해 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왜 이게 나에겐 생경한 걸까? 적어도 이걸 소설의 범주에 넣지만 않았어도 그 생경스러움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문학계가 바보가 된 건지 독자인 내가 바보가 된 건지 헷갈린다. 그래놓고 문학계는 한국문학이 다양함을 시도했다고 자위하겠지? 이런 생경함이 독자를 또 한 번 외로움 내지는 냉소주의에 빠뜨린다는 것도 모르고.

 

작가는 뭐하는 사람일까? 자기들만의 성을 짓고 그 안에서 희희낙락, 독야청청 하는 게 과연 작가인가? 그리고 어느 땐가 외로워지면 독자들이 너무 자기네들을 이해 못한다고 역시 작가는 고독해 하며 한숨이나 짓는 게 고작인 건가?

 

아무튼 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작가가 뭔가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취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후장사실주의 그도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없고 보여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아는 척 하지 않고 딱 자기가 아는 것만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 새로움은 좋을지 몰라도 내가 앞에서 말했던 이 소설은 나를 말해주고 있군요.”란 말은 듣지 못할 것이다. 이는 곧 일부 독자에게 새로운 유희는 안겨줬을지 몰라도 소통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게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어떤 작가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글로 독자를 일깨우고 그들을 이끌 수 있다고. 그게 얼마나 무모하고 자신을 고립시키는 말인지 깨달을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이제 작가는 시답잖은 작가정신은 좀 그만 들이댔으면 좋겠다. 고독한 영웅의식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는 독자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이 무엇이고, 표현되지 못한 언어와 감정을 대신 표현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를 외롭게 하고 무슨 고독한 영웅인 척 하는 것인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좀 더 민중적이고 친근해졌으면 좋겠다. 어설픈 작가정신 같은 건 개에게나 줘버리고 차라리 배우정신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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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1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나 실험적인 구성인가 보죠 ? 가끔 꽁트를 소설이라고 우기기도 하죠.. 김중혁처럼..
처음에는 눈여겨본 작가인데 계속 그짓하니 실망스럽더군요..
피카소의 데생 실력이 꽤 훌륭하다고 하죠 ? 그 바탕 위에 지금의 화풍이 만들어진 것인데
소설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사와 묘사가 탄탄하고 나서 실험적인 구성을 선보이는 것은 좋은데
몇몇은 대놓고 실험적 구성으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stella.K 2016-07-12 17:53   좋아요 0 | URL
차라리 실험적이면 낫게요? 이건 뭐 어느 잡지에 실릴만한
딱 그만큼의 글을 가지고 소설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소설이
마음이 너그러워진 건지, 정신이 나간건지 그걸 모르겠어요.
읽기는 그럭저럭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래가지고 한국문학의 미래를 얘기할 수 있을까?
한숨이 나오드라구요. 아휴~

아이리시스 2016-07-1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비슷한 이유로 한국소설을 끊은 것 같아요. 도서관에서 가끔 빌려와도 앞만 뒤적이다 다시 반납합니다. 그래도 최근에 <종의 기원>을 샀고 <붉은 소파> 선물받았는데.. 안 가진 한강 소설을 사모으려다 시기를 놓쳤습니다. 나만의 신예작가 발굴보다 신경숙,공지영,김인숙,정유정,한강 등 신작나오면 기대없이 들추는 정도로만 한국소설에 관심있어요.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까먹고 있었네요. 그런데 저는 대학때도 그랬던 것 같고.. 그러면 안되지만 너무 재미 없어요. 어쩌면 외국소설만 찾는 게 타언어를 신격화한데서 오는 감정인가 싶어서 반성도 해보는데, 비소설도 일단 해외저자인 경우 관심이 먼저 갑니다. 그렇지만 글을 재밌게 잘 쓰면서 인기도 많으면 좋죠. 수준만 따지기보다는.. 좀 깐깐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게 좋은거지 싶고 돈 많이 버는 작가 부럽고.. 실험도 필요하지만 제가 한국문학계에 갖는 생각이야말로 완전 상업화되어버린 듯해요. 스텔라님 잘 계시죠? 아, 그리고 더 좋은 책, 재밌는 책, 유익한 책만 골라 읽어요. 시간은 부족하고 책은 많은데..

stella.K 2016-07-12 18:30   좋아요 0 | URL
와우, 오랜만이어요. 잘 지내죠?
한국소설 어쩔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에서만 그러는 걸까요?
언젠가 한류 어쩌고 떠들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
해외에서 주목 받는다고 소설계도 한류 바람 분다고 어쩌고 떠들면
어쩌나 걱정되더군요.
솔직히 채식주의자 번역자도 너무 좋아서 번역한 건 아니라잖아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떨거덕 맨부커상을 받고.
영국 사람들은 뭔가 이국적이고 별스러운 것에 너그러운 민족 같아요.ㅋ

기억의집 2016-07-1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인화가 저런 언급할 때만해도 한국소설 많이 읽었어요. 어느순간 한국소설은 안 읽게 되더라구요. 딱 저 이유때문에요. 앉아서 텍스트 찾아서 머리로 짜집기 하는 순간부터요. 한국 소설 안 읽게 되니 일본소설이 눈에 들어오면서 일본소설 읽는데, 일본작가들이 더 현실에 대한 순발력 있다고 해야하나. 분명 그들도 책상에 앉아 머리로 소설 나부랭이 쓸텐데,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읽었을떼,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을 읽었을 때, 남쪽으로 튀어를 읽었는때부터 뭔가 한국소설하고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쪽으로 발걸음이 서서히 움직여 지더니 이젠 한국문학은 들여다보지도 않게 되었어요. 아 진짜..갖다부치기는 후장사실주의... 아하, 스텔라님 말에 동감하며 후장사실주의 운운에 웃고 갑니다. ㅠㅠ

stella.K 2016-07-12 18:12   좋아요 0 | URL
더 웃긴 건, 언젠가 후장사실주의 잡지가 나왔었다네요.
뭐 신형철, 금정연을 비롯해서 정지돈은 물론이고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됐다는데 2호는 언제 나올지 자기네들도 모른데요.
아주 지네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피리 불고 난리도 아닌가 봐요.
그놈의 후장이 뭐길래.
한국문학 정신 좀 차려야 하는데.
저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외국소설이 더 끌려요.
그게 꼭 외국에 대한 동경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국소설 뭐 읽을 게 없잖아요.ㅠ

전 같은 비소설이라면 차라리 이석원이 훨씬 낫다고 봐요.
그건 감정이입이라도 할게 있지
정지돈은 난 이만큼 알고 있어.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냥 웃음만 나와요.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2 18:06   좋아요 0 | URL
공감. 언제부터 소설이 학술적으로 변했습니다. 대중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면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라는 말을 들을까봐.. 저도 한국 소설 잘 안 읽습니다.

기억의집 2016-07-12 18:17   좋아요 0 | URL
뭣이 중한디!!! 를 모른다니깐요. 울 작가들. 왜 우리는 부동산 투기 몰락을 이야기할 때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를,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소비에 대해선 화차를 예로 들어야할까 싶습니다. 몇달전에 장정일이 시사인에 다 박유하편을 들면서 우리 나라 소설가들이 위안부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위안부는 강제가 아니였다고 하더라구요. 이 무슨... 전 우리 엄마한테도 울 외할머니가 일제시대때 잡혀가지 않으려고 숨어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인데.. 단지 작가들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고 위안부는 강제가 아니였다는 논리를 갖다대는데.... 놀랐습니다. 솔직히 이상이나 김동리나 기생치마폭에서 살다 그 세상를 묘사한 게 우리 나라 근대소설 아닙니까! 쪽팔리죠. 장정일식이면, 태평양 전쟁때 징집되어 끌려간 우리 나라 청년들, 수십만명은 다 허구인가요. 소설가들이 소재를 안 삼아서. 맨 머릿속에서만 실험정신 운운하며 후장사실주의 운운하니. 현실의 소재는 유치한가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2 18:24   좋아요 0 | URL
장정일도 어느 순간 꼰대가 되어 있더라고요.
초기의 총명함은 사라지고......


구월의 이틀인가.. 그 소설 읽다가 쓰레기통에 쳐박았습니다.
여전히 혁띠 풀어서 막 때리면서 보수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보고 참.. 후지구나 했습니다. 이러니 한국 소설 안 읽는 것입니ㅏㄷ.


그리고 기억집 님 말씀에 공감하는 게 일본작가들은 당대의 문제를 바로바로 흡수해서 내놓습니다. 아웃도 그렇고 이유도 그렇고....

근데 한국 소설가는 만날 아버지의 학대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이야기합니다.
프로이트가 굉장히 좋아할 만한 소설만 양산한다고나 할까요..

stella.K 2016-07-12 18:25   좋아요 0 | URL
헉, 진짜 우리나라 작가들 정신 나간 거 맞군요.
아니 그 똑똑한 장정일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네요.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 민주화 항쟁 때 작가들도 동참해서 글을 썼어요.
그 정신 다 어디로 간 걸까요?
그게 작가정신이지. 뭐가 작가정신이겠어요.
시대를 비추지 못하는 작가도 작가입니까? 진짜 통탄하고 싶군요.ㅠㅠㅠㅠㅠ

루쉰P 2016-07-13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스텔라님 ㅎ 전 아무래도 한국문학은 싫어요 조정래 빼구요 ㅋ 채식주의자도 읽었는데 이게 왜 상 받았는지 원체 이해가 안 가요 ㅎ 전 1850년대 러시아에서 태어나야 했나봐요 그 때 소설만 너무 좋아요 ㅋ

stella.K 2016-07-14 16:50   좋아요 0 | URL
앗, 루쉰님! 제가 먼저 인사해야 하는 건데,
이렇게 먼저 인사도 건네주시고 황송하네요.ㅋ
조정래 작가를 좋아하시는군요.
요즘 신간이 나왔던데 관심이 많으시겠어요.
엊그제 조정래 작가가 나향욱한테 날린 말이있어
저도 갑자기 신간에 급 관심이 가요.ㅎ

마지막 말씀에서 빵 터졌습니다.
1850년대 러시아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이전인가요?
제가 연대에 약해서 말이죠. 대표로 한 권만 소개해주시면 안 될까요?ㅋ

루쉰P 2016-07-15 00:21   좋아요 0 | URL
에이 뭐 스텔라님도 다 아시는 책들이에요 ㅋ 토...톨..톨스토이요...전 좀 덕후 기질이 농후한 가봐요. 한 작가를 여러 번 읽는 경향이 있어요. 폭이 너무 좁아요 ㅋ 고칠려고 하지만 다른 책은 잘 손이 안가요 ㅋㅋㅋ

아무래도 러시아 체질로 바뀐 듯 ㅋ 글구 전 외국 문학이 더 읽혀요. 뭔가 한국 문학은 처절하고 한스럽고 진득진득한 그런 느낌...외국 문학도 그런 류의 소설은 많지만 한국처럼 진득스럽지는 않거든요. 내가 한국 살아서 그런가? 암튼 그러네요 ㅎ

stella.K 2016-07-15 17:23   좋아요 0 | URL
아하! 맞았군요!
그런데 새삼 우리가 러시아 문학에 대해 아는 것도 참 한정적이란
생각이 드네요. 그 두 영감을 비롯해서
푸시킨, 솔제니친 뭐 이 정도가 아닐까요?

왜요, 전 루쉰님 그런 독서법 좋다고 생각해요.
책 욕심이 많으면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기가 쉽지 않잖아요.
전 정말 두 번 이상 읽은 책이 손에 꼽을 정도예요.ㅠ

한국문학에서 한의 정서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죠.
하지만 하도 그지 같은 작품들이 많아서 그럴 바엔
예전의 우리나라 작품이 오히려 괜찮게 돋보이는 것 같아요.
나이들면 그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요.
그래도 우리 문학을 사랑해야겠죠?ㅠ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