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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 10인의 예술가와 학자가 이야기하는, 운명을 바꾼 책
어수웅 지음 / 민음사 / 2016년 4월
평점 :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한 권의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에 새삼 의문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독서를 해 오긴 했지만 과연 책이 나의 삶을 바꿨을까 그걸 잘 모르겠다. 여기 저자의 취재의 대상이 됐던 10명의 명사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책 한 권씩을 자랑한다. 나는 좋게 읽은 책은 많지만 아직 이렇다하게 이 책이다 싶은 책이 떠오르질 않는다. 내가 독서를 지금까지 헛해 온 건가? 읽는 내내 마음 한편이 위축되는 느낌도 받았다.
나에게도 이런 책이 나와 주려면 김대우 감독같이 어느 한 책을 몇 백 번을 반복해서 읽을 수 있어야 할 것도 같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를 500번을 읽었다지 않는가?)나의 책 읽는 수준이란 게 범박하여 (성경을 제외하고) 두 번 읽은 책은 손에 꼽을 정도고, 한 번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저자의 질문은 애초에 나 같은 사람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책은 말자. 그래도 생각해 보면 내 삶을 변화시켰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괜찮은 책을 읽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냥 이 책을 읽은 내 생각이나 쓰련다.
기자라는 직업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 이렇게 움베르토 에코를 취재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알다시피 에코는 작년에 타계했다. 타계했을 때의 나이가 적은 건 아니지만 100세 시대를 생각하면 의외다 싶기도 하다. 그런 분을 기자는 또 언제 취재를 했던 걸까? 갑자기 이 책의 가치가 백배는 올라가는 느낌이다.
기억에 남는 건, 그가 정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요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정보의 옥석을 가릴 줄 알지만,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은 정보에 대한 변별력이 떨어지며 조악한 정보만을 습득할 뿐이라고 했다. 좀 씁쓸한 전망이긴 하나 세계적인 석학이 하는 말이니 그냥 흘려버릴 수만은 없다. 에코는 좋은 정보를 취할 줄 아는 사람은 좋은 공연을 보러 다닐 줄 아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집에서 드라마나 본다나? 마침 이 부분을 읽던 날 저녁 동네 모처에서 어느 독립운동가의 일대기를 그린 창작극을 한다고 해서 보고 오긴 했는데, 좋은 공연이었다면 에코의 말을 따랐겠지만, 그 공연은 드라마를 보는 것 보다 못 했다. 그런 것으로 봐 에코는 드라마 보는 걸 하위문화로 인식하는 것 같다. 나는 드라마 보는 것을 즐겨하는 편이긴 한데, 모든 드라마가 수준이 낮은 건 아니다. 드라마를 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중에서도 좋은 드라마를 볼 줄 아는 변별력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에코의 말은 다 받아들일 건 못되지만 확실히 생각해 보게는 만드는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인터뷰 이들이 자기 인생의 책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삶을 얘기하는 게 더 많다. 그게 참 읽는 이로 하여금 혹하게 만드는 데가 있다. 그중 단연 압권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중혁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 작가의 입담은 가히 알아 줄만하다. 그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자신의 인생의 책으로 꼽았는데, 그는 이 책을 군대에서만도 9번을 읽었단다. 그러다 첫 소설의 테마를 ‘세상의 끝을 향한 남녀의 모험소설’로 잡았는데 내용은 군인을 위한 성애 소설이었던 셈. 수위는 높지 않았지만 반응은 열광적이었고, 그들은 ‘준비된 독자’들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귀여운 악동의 이미지가 있다.
그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처음에는 연애 소설로, 두 번째는 철학 소설로, 그리고 세 번째는 소설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소설 작법에 대한 소설로 읽히지만 역시 또 한 번 읽으면 연애 소설로 읽힌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관점 자체가 아예 없는 무관주의자라고도 했는데, 그런 삶의 자세가 마음에 든다.
사실 나를 이루는 팔 할은 책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긴 할 것이다. 그러므로 책이 사람을 바꾸는가에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가끔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그나마 책이라도 읽으니 그 정도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난 악마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은희경 작가가 그런 말을 한다. 책이 없는 인생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늙어 가는 게 두렵지 않은 것은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책을 보고 인생이 바뀌었다’ 이렇게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생각을 조금씩 바뀌게 해 준다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언젠가 내 주위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홀로 있는 외로움을 견디게 해 줄 유일한 버팀목이 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은희경 작가가 그런 말을 해서 말인데, 이 책의 10명의 명사들도 내 인생의 책을 어느 날 갑자기 발견하고 이 책이라고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정말 한 권의 책이 사람을 바꾸면 얼마나 바꾸겠는가? 지구가 자전을 하고, 공전을 해 하루와 1년을 바꿔가듯 독서도 그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런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고 거기서 떠나지 않고 늘 함께 해 오는 책이 사람 저마다 있을 것이다. 같은 책이더라도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는데 그래서 책은 살아 있는 것 같다.
글이 정말 간결하면서도 유려하다. 모 신문사 문화담당 기자니 오죽 글을 잘 쓰겠는가. 나도 아주 가끔은 취재 글을 쓰기도 하는데 뭘 알아서 쓰는 건 아니고 훗날 다시 보면 형편없다 싶을 때가 많다. 이 책은 취재 글을 쓸 때 어떻게 써야할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