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송곳'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상대방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인물로 '이수인'이 나온다. 상부에서 동료들의 '해고'를 지시받고 서슴없이 '부당해고'라고 외칠 수 있는,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위해 자신의 안위 따위는 잊어버린 사람. 이 사람을 보고있자니 그리스의 학자 소크라테스가 떠올랐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국가의 유죄판결 앞에서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서 비난을 퍼붓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그의 확신은 급한 성격이나 우직한 용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철학이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끝까지 이성적으로 남을 수 있는 신념을, 즉 비난에 직면할 때면 흔히 보이기 쉬운 병적인 흥분이 아닌 확신을 부여했다'p15
일상을 살아가면서 의문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옷을 구입하기 위해 매장을 가면 점원은 어김없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요즘 사람들 많이 찾는 옷이예요. 이거 구입해보세요. 잘 어울리시네요'라거나, 지겨울 정도로 울려대는 보험사 전화기에는 이런 안내 음성이 흘러나온다 ' 요즘 이 보험을 가장 많이 가입하고 계세요. 지금 안하시면 나중에 후회하세요'라고. 많은 사람들이 선택이 마치 '옳은'일인듯 그 선택을 따라 구입을 유도하는 사람들에게 의문을 갖기 보다는 차라리 '안도'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내 의견에 대한 어떤 '확신'이 없기 때문에.
또는 옳다는 확신은 있지만, 감수할 용기가 부족할때 이수인처럼 확신을 밀고 나가는 일은 쉽지 않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옳다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야할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혼자서만 비난을 감수해야할지, 아니면 동료들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야할지 내적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한번은 비난을 감수해본 적도 있는데 결코 좋지 않은 경험들이었다. 매일같이 한 공간에서 마주하는 사람들과 뜻을 거슬러 살아야 한다는건 마치 소크라테스가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에게 낙인찍혀 '신들을 숭배하지 않았고, 아테네의 사회적 기틀을 망가뜨리며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받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위해 독배를 들이킨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알랭 드 보통은 이 시대야 말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이 필요함을 이야기 한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과정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자신의 신념을 타인이 동조해주길 원하기때문이며, 그들이 내릴 평가의 잣대가 두렵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 그러나 우리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적의를 두려워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에 못지 않게, 사회적 관습이라는 것은 당연히 그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치부해버리는 각자의 내적 인식에 의해서도 의문을 품으려는 의지는 곧잘 꺾여버린다. 심지어 그 근거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관습들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의해서 지켜져 내려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좀처럼 의문을 품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가 어떤 신념을 정착 시키는 과정에서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을 수도 있고, 또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나 혼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못하는것 같다'p21
' 각자의 성격이나 성취에 대해서 불쾌한 평가를 들었다고 해서 금방 눈물이 핑 돌기라도 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 우리 스스로 옳다고 믿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찬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심리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배경에는 승진과 생존과 같은 실질적인 이유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으로 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나 자신이 정도에서 벗어났음을 말해주는 명백한 신호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p44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평가의 잣대를 두려워하기 보다도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점은 '타인이 내세운 이유들이 얼마나 정당하고 훌륭한가'에 있음이며 이는 서슴없이 독배를 들이킨 소크라테스의 신념에서 배워야할 점임을 이야기 한다. 그런 신념의 바탕은 소크라테스가 내세운 변증법을 통해 밝혀낼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자신의 '의견'이 옳고 그름에 있어 판단하는 기준은 온전히 '논리적 법칙'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상대방의 의견에 좌지우지 되거나, 동조를 구할 수 없어 초초해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음을 이야기 한다. 다만 무조건 자신이 의견이 옳거나 다수의 의견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을 논리적 법칙으로 세세히 따져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일과 그런 견해에 대한 무한한 확신과 믿음이야 말로 소크라테스가 이 시대에 전해주는 의미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타인이 내 의견에 동의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말자, 또한 타인의 생각이 모두 옳은일은 아니기에 그들의 비난을 너무 두려워하지도 말자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과연 악처가일까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왜 소크라테스의 책을 '변명'이라 이름 지었는가 하는것이다. 먼저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의 나이차이는 무려 30살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세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소크라테스는 어떤 금전적인 활동도 하지 않았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맨발로 다니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후세에 전해지길 그의 몰골은 거리를 떠도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런 사람곁에 있는 크산티페의 삶은 어떠했을까? 더욱이 여성으로써 사회활동에 제약이 따르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크산티페가 할 수 있는 사회활동은 없었으리라 짐작해보게 된다. 그런 답답한 현실과 남편으로써 무능을 어찌 웃음으로 감내할 수 있었겠는가. 거기에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세명의 아들을 매일같이 바라봐야하는 입장에서 말이다. 그런면에서 크산티페에게 붙여진 '악처가'라는 타이틀은 정말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에 이르러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가 환생한다면 과연 크산티페를 손가락질 할 수 있었을까?
두번째로 갖는 의문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의 제목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신을 숭배하지 않았고, 사회적 기틀을 깨트렸으며,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이는 소크라테스를 눈에 가싯거리로 여기던 기득권층의 모함에 불과했고 그런 평가가 우세하다. 그런데 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변론한 이야기를 '변명'이라고 했을까. 변명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까닭을 말함'이다. 물론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힘'이라는 뜻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변명'이라는 단어는 전자에 가까운 해석으로 듣는다. 어떤 잘못에 대해 '너 그런 변명 하지마' 라고 표현하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변론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힘'이라는 뜻도 있지만, '소송 당사자가 법정에서 하는 진술'이라는 뜻도 포함된다. 그런 의미로 살펴보자면 '변명'보다는 '변론'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데 왜 변명일까 하는 생각. 이 부분은 아직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계속 고민해볼 생각이다.
작년에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으며 책이 갖은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적이 있는데, 알랭 드 보통의 도움을 받아 소크라테스가 전하는 의미를 이해하고 또 '철학'이 주는 위안과 중요성을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 외에도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소펜하우어, 니체가 소개되는데 철학가들의 사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그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책을 통해 알랭 드 보통을 처음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지만, 번역의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게 조금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