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친정집에 다녀왔다.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명절도 내려가지 못 했던터라, 실로 오랜만에 친정집을 찾았고 정신없이 회포를 푸느라 휴대폰을 들여다볼 시간조차 없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 덕분인지 책과 서재를 쉬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간 밀린 빨래를 하고, 설거지 거리를 정리하고 집안 곳곳을 정리하고 나니 몸살이 왔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 누워  그간 읽으려고 벼르고 있던 <해변의 카프카>를 집어 들었다. 아직까지 하루키 사마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내게, 자리 보존하고 누워있는 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워줄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지루한 책이 될지 걱정이 앞섰지만 어쨌든 첫 장을 열었다.

 

 

소설의 첫 시작은 15살 생일날 가출을 결심한 소년이 아버지 돈 40만 엔을 훔쳐 가기로 한다. 40만 엔이라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400만 원이 넘는 금액이니 적은 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큰 액수의 돈을 서랍 속에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라. 왠지 소년의 가출을 미리 짐작한 게 아닐까 하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는데 몇 장 읽다가 "모래 폭풍'이란 단어가 눈에 밟혔다.

 

 

'그리고 그 모래 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로 모래 폭풍이 사라져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거야.'p19

 

 

이 구절을 읽으며 '모래 폭풍'은 성장기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를 뜻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을 한다. 그러다 헤르만 헤세의 '알'에 생각이 미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한 세계의 파괴. 성장기는 그만큼의 고통을 담보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헤르만 헤세를 떠올렸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곧 이 소설도 한 소년의 성장기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가 보다고 짐작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러들어온다. 때는 1944년 전쟁 통으로 먹을 것이 풍성하지 못했던 시절, 버섯을 따로 산으로 갔던 16명의 초등학교 아이들과 인솔 교사는 집단으로 기이한 사건을 경험하고 2시간여 만에 깨어난다. 그러나 나카타라는 아이만은 삼 주 후에 의식을 회복하고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잃게 된다.

 

 

 

소년과 기억을 잃어버린 나카타. 소설은 두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면서 연결점 없는 직선으로 달리는듯했다.  소년의 가명은 다무라 카프카, 그리스 신화와 음악과 책 그리고 그림에 이르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소년의 이야기와,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는 나카타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그 지점에서 갑작스러운 소년과의 연결. 막연한 짐작은 했지만 그 연결 지점에 이르고 보니 마구마구 의문이 생겨난다. 어떻게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 소설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소설의 첫 시작은 책을 읽는 내가 주도했다면, 소설의 말미엔 다무라 카프카와 나카타에게 완전히 압도 당하여 책 속에서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443페이지를 거침없이 읽어내리며 하루키 사마의 힘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재미와 속도 기묘함까지 두루두루 잘 버무려진 이야기. 또 그만큼이 남은 하 권의 책을 집어 들기 전에 잠시 숨을 돌리려 서재에 들렀다. 그동안 하루키 사마의 에세이만 읽었던 내게 소설은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 계기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거침없는 성적인 묘사에 그가 왜 그토록 비난을 받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특히 다무라 카프카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오시마 상은 여자이지만 여자이지 못한 존재. 이 역시 <데미안>에서 어떤 구절. 자웅동체라고 나왔던 어떤 구절이 가물가물 떠오를듯하지만 잘 떠오르진 않는다. 무튼. 이렇게 재미난 책을 알려주신 서재 친구 '고양이라디오님'께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제 하 권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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