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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핀란드 여행 - <카모메 식당> 뒷이야기
가타기리 하이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가끔씩 그런날이 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시선이 닿는 모든 사물들에 대한 느낌,
내 몸을 감싸는 옷의 촉감.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커피의 맛과 향.
내 귀를 타고 들어오는 소음들. 어느것 하나 어제와 같지않던 날.
이런날 사람들은 대개 ' 우울증'이라 부르고
이러날 나는 대개 소박한 하루를 보낸다.
내가 보내는 소박한 하루는 다음과 같다.
소박한 음식과 소박한 책을 곁에 두고서
몸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피와 살로 구성될 음식과 문장이 몸에
해를 가하지 않도록 자극되지 않도록 지극히 조심스러운 하루를 보낸다.
음식에는 자극적인 음식과 순한 음식이 있다.
자극적이라고 하면 첨가물이 잔뜩 들어간 가공식품들도 있겠지만,
고추장이 잔뜩 들어간 맵거나 짠 음식 그리고 지나치게 단음식은 피하는 게 좋더라.
먹는 순간의 즐거움은 끝내 극도의 예민함과 흥분, 짜증스러움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날의 음식은 몇 시간의 정성이 필요하다.
마늘과 파와 파뿌리, 양파와 양파껍질, 큼직하게 썰어넣은 무, 내장을 제거한 멸치 한줌
다시마 와 말린 무 몇 조각. 민물새우 한줌을 마지막으로 두시간 정도 푹 우려내면 아기 엉덩이 같은 뽀얀 육수로 탄생한다.
채썬 애호박과 당근, 다진마늘 한스푼, 함초소금 티스푼, 국간장 한스푼 ,
살짝 삶아둔 면을 넣고 육수를 부어 그릇에 담아낸다.
김치와 깍두기로 한 상을 차려낸다.
책에도 자극적인 책과 순한 책이 있다.
이리저리 꼬일데로 꼬인 긴박한 스토리, 함정처럼 파놓은 눈물 웅덩이에 발을 헛디뎌 눈물범벅이 되는, 강렬한 호기심을 동반하는 책은
너무나도 자극적이다. 이런 책은 피하는 게 좋다.
되도록 감정선이 변동되지 않으면서도 즐길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마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듯한 담백한 글이 좋다.
식탁 겸 책상으로 사용하는 (이제는 책상 쪽에 가까운) 식탁에 국수와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책을 펼친다. 카모메 식당으로 익히 알려진 가타기리 하이리가 쓴
<나의 핀란드 여행>이다. 벌써 두 번째 펼쳐든 책이지만 읽을 때마다 멈춰지는 부분은
여전히 멈춰 선다.
하카니에미의 부추는 건조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스러울 만큼 싱싱했다. 비닐봉지에 피단이며 부추를 담아 트램을 탔다. 봉지 속에서 사정없이 부추 향이 났다. 작은 악취 소동이다. 헬싱키 사람들은 이 동아시아 특유의 향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냄새만 맡아도 침이 고이고 힘이 생기는 이 향을.
이런 것만 먹는 내 몸에는 분명히 희한한 냄새가 날 것이다. 예를 들면 나고야에서는 점심때가 되면 온 시내에 생선 된장국 냄새가 난다. 그러나 나고야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 다들 "그 정도는 아니야"하고 부정한다. 나도 내게서 풍기는 냄새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건 아닐까.
부추 냄새를 뿌리면서 헬싱키 거리를 걸었다. 자신을 증명하는 냄새를 들고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P80)
우적우적 깍두기를 씹어먹으며 생각했다. 지금 먹고 있는 이 음식이,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이 나를 말해주는 것일까. 오늘은 소박한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내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일까. 타인에게 있어 나는 어떤 향기가 날까?
처음 <카모메 식당>에서 그녀를 봤을때 껑충 큰 키에 단발머리가 인상적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영화는 핀란드를 배경으로 세명의 여성이 주인공이었지만 어쩐지 단아하고 우아한 인상의 사치에가 유독 눈에 들어왔을뿐. 미안하게도 그녀는 금새 잊혀져 버렸다.
그러다 우연히 읽게 된 책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녀의 작은 팬이 되었다.
" 처음 온 도시에서 처음 보는 탈것을 타는 것은 언제나 설레이는 모험이다. 도쿄에서는 걸핏하면 택시를 타고 싶어 하는 주제에, 낯선 도시에 가면 고집스럽게 그 지역 고유의 교통 수단을 타고 싶어 한다. 나는 동전 수준의 모험을 아주 좋아한다.
타이완에서는 탈것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작은 메모장을 샀다. 미리 종이에 가고 싶은 곳의 지면과 '그곳에 도착하면 알려 주세요'하는 중국어를 한자로 써 두고, 버스를 탈 때 정기권처럼 제시했다. 그곳에 가지 않는 버스라면 타지 말라고 말해 주고, 가는 버스라면 운전사 옆에 앉아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하면 신호를 해 준다. 복잡할 때는 지도를 펴서 열심히 정류장 수를 세었다. 몇 번째에서 내린다는 것만 알면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가끔 정류장에 서지 않고 지나쳐 버리면 몹시 당황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헤매면 헤맬수록 가슴이 설렌다. 지도를 보는 범위가 넓어진다. 예상 밖의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스릴이 넘친다.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또 다른 계획을 생각하면 된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서 우연히 발견한 멋진 장소가 많다.
동행한 친구는 그런 나의 여행법을 싫어해서 도중부터 각자 행동하게 되었다. 여행을 함께 갈 사람을 고르기란 어렵다. 그 후로 작은 모험은 혼자 즐기기로 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도시와 사귀는 법이 있다.(P34)
그녀의 말을 살짝 바꿔 사람에게는 저마다 책과 사귀는 법이 있다.
나에게 있어 그녀의 책은 마음이 소박해지는 날, 소박하게 만나
가만가만 읽고 싶은 책이다.
방안을 감도는 정적과 함께 가만가만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그녀가 신뢰하는 사람에 대한 향기가, 그녀가 즐겨 먹는다는
음식에 대한 애정이, 그녀가 걸었다던 여행길의 추억담이 뭉개구름처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대단한 이야기꾼이며 대단한 여행가이자 대단한 식탐꾼이다.
그녀의 다른 책을 검색해보니 <과테말라의 동생>과 <검표원이여, 오늘 밤도 고마워요>는 원서로만 있다. 하늘의 기회일까? 공부하라는. 하지만 그녀의 책을 읽어보건데 내 실력으로는 어림없는 글솜씨다. 번역서가 필요하다. 그녀의 값진 이야기들이 번역되어 나올때까지 <나의 핀란드 여행>은 읽고 또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