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탁에서 졸릴 눈을 다 뜨지도 못한 신랑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맨...맨..부커.. 받았대"
"아. 맨부커상 받았대? 우아 대단한데"
"근대.. 한강이 뭐야?"
신랑에 말에 갑자기 박장대소한 나.
" 작가 이름이 한강이래. 이름 이쁘지? 아버지가 지어주셨다 들었던거 같아. 이번에 상 받은 책은 '채식주의자' 라는데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래. 나는 '소년이 온다' 라는 5·18 민주화 운동에 관한 책을 읽었거든. 요런 폭력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주로 쓰시는 작가신가봐. " 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웃음이 한편으로는 뜨끔한 생각이 들었다.
신랑이 물었던 '한강'은 서울 한복판에서 흐르는 강을 떠올렸던 거라서 웃음이 났지만, 고작 '소년이 온다'라는 책 한 권 읽어놓고 디게 아는척 하고 있는게 아닌지, 또 맨부커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갑자기 호기심을 보이는거 같아 조금 부끄러운 마음도 들더라.
'소년이 온다'는 창비 '책읽는당' 활동 때문에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마음 아팠다고 들었기에 그간 요리조리 피하고만 있었는데 활동이라는 빠져나갈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 고교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시집을 오기까지 전라남도 광주가 나의 고향이었고 서른해 가까이 살았더랬다.
내가 직접 5·18을 경험한건 아니지만, 나와 함께 살아가던 어른들은 모두 그 시절 그 고통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고교 시절에는 단단하고 굵직해 보이는 외모에 걸맞게 굵직한 목소리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광야에서'를 불러대는 국사 선생님을 이해하진 못했다. 어른들의 세계였고 어른들의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지금에 이르러보니, 나는 신념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다. 이념이 무엇인지, 폭력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은 더이상 어른들의 세계가 아니었다. 지금 이 시기에도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는 평등을 위해 민주화를 위해 소리없는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사람들이 있음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엄마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꼭 그래라이. 그녀가 말한다.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p43)
'소년이 온다' 를 읽으며 두개의 물음표를 품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 싶던 신념은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투쟁을 하며 목숨까지 잃어야했는지. 그렇게 목숨과 맞바꾼 신념이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할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p134) 쇠와 피
그리고 또 한가지. 인간은 정말 근본적으로 잔인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웅크려진 존재 속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이기적인 마음이 숨어있는 것일까. 어느 순간 어느 계기에 의해서 누구나 스스럼 없이 꺼내 표출할 수 있는 것일까 라는 물음에 당도하게 된다. 하지만 확인해 볼 길이 없다. 아니, 확인하고 싶지 않다. 인간의 잔혹성에 대해, 그 물음에 대해 끝끝내 모르는채 살아가고 싶다. 인간의 본성에 닿는 순간, 나 역시도 '채식주의자'의 영애처럼 인간이길 포기하며 살아가고 싶어질지도 모르니.
2016년 5월 10일자 'tv 책을 보다' 프로그램에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가 나왔더랬다. 프로그램이 개편되기 전에도 재밌게 봤지만, 김창완님으로 개편되고 또 함께 책을 읽는 일반인들의 모습도 보여서 요즘 즐겨 시청하는 프로그램인데 마침 한강 작가님이 나와 반가운 마음에 시청했었다.
http://www.kbs.co.kr/1tv/sisa/tvbook/view/vod/index.html?searchStatus=0&articleIndex=1&vosample=¤tUrl=http://www.kbs.co.kr/1tv/sisa/tvbook/view/vod/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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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은 한강작가님과 함께 책을 읽으며 김창완님이 인상적인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하곤 했는데 그중에서 인상적이었던 질문들을 꼽자면 첫번째가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가 연관이 되었나 하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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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번째 이렇게 잔인한 이야기를 쓰실 수 있었냐는 질문에 한강 작가님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 그 질문에 대해 견디며 생각해보고 싶었다는 대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펜을 들어 싸운다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번에 나온 신작은 인간의 투명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어느 것에도 때묻지 않은 투명한 인간에 관한 글이라고 했다. 이 작품 역시 기대가 된다.
나는 우리나라 작가님들이 상을 많이 받지 못한 것을 두고 좋은 작품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건 오만이었고 방종이었다. 소설도 제대로 읽지 못하면서 나는 무얼 생각하고 있었나 하는 반성도 들었다. 부디 앞으로도 눈 밝은 세계독자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우리나라에서 펜을 들어 싸우는 여러 작가님들의 이야기들이 널리널리 퍼지기를. 오늘 하루는 '한강'작가님 덕분에 정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더불어 팟빵 '빨간 책방 83, 84회'는 한강님이 출연하여 '소년이 온다'와 '서랍을 저녁에 넣어두었다'로 이야기나누며 단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 음성도 들을 수 있다.
http://www.podbbang.com/ch/3709?e=21462343 (83회)
http://www.podbbang.com/ch/3709?e=21462342 (84회)
ps. 오늘 밤 11시 40분 'tv책을 보다'에서는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님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 방영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