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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여행 - 내가 꿈꾸는 강인함
정여울 글.사진, 이승원 사진 / 추수밭(청림출판)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요 근래에 알레르기성 결막염으로 병원에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물었다. 성인은 이렇게 시력이 떨어질 일이 없는데 왜 이렇게 떨어지는거냐고. 지난번보다 조금 더 시력이 떨어진 모양이였다. 의사선생님은 시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컴퓨터와 휴대폰 사용때문이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아니라는 대답을 하면서도 차마 책때문이라는 말은 내뱉지 못했다. 무슨 고시공부를 하는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책을 보느라 시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비웃을까? 걱정스런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으면서도 나는 차마 손에서 책을 완전히 놓아버리진 못했다. 처음엔 그저 재미있어서 시작된 독서가 이젠 습관이 되어버렸고,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나는 나를 지탱해주는 습관이 독서와 글쓰기임을 얼마 전에 알았다. 아무리 힘들 때도, 아무리 아플 때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습관이 몸에 젖어버렸다. 예전에는 그것이 '좋아서하는것' 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단계를 넘어 글 읽기와 글쓰기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만약 여러 가지 이유로 글을 쓸 수 없다면, 글을 쓸 수 없을 체력과 영감이 소진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독자로서의 삶은 버릴 수 없을것만 같다. 열렬한 독자로서 누릴 수 있는 삶의 희열까지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살아있는 느낌'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p182"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독자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정여울 저자의 말처럼 나 역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 좋은 독자로서의 삶을 평생 포기할 수 없을것만 같다. 삶은 내가 나를 데리고 가는 '그림자 여행'이라던 그녀의 속삭임처럼, 삶을 이끌어가는 내가 선택하지 못한 수 많은 일에 대한 불안감이 소망으로 변절되어 더 많은 집착과 간절한 소망들로 뒤바뀔지라도.
' 오직 달빛에 의지해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오래전 칠흑 같은 밤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는 오로지 캄캄한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꽃들의 사생활을 목격했다. 달빛 아래 고요히 드러난 처연한 낙화의 풍경은 할로겐 조명 아래 다이아몬드 보다 더 눈부셨다. 그때 나는 눈을 아프게 하는 압도적인 불빛이 아니라, 사물이 지닌 본래의 빛깔을 끌어내는 '어둠속의 빛'을 보는 법을 배웠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어엿한 빛깔이 있었다"p175
' 가장 알찬 여행 준비 중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고향을 고른 뒤, 그의 작품을 차분히 읽는 것이다. 어떤 여행 준비보다 값진 마음에 워밍업이다. 프라하에 가기전 카프카를 읽고, 런던에 가기 전 디킨스를 읽고, 파리에 가기전 위고를 읽을 수 있다면, 우리의 여행은 더욱 풍요롭고 따스해질 것이다. p171'
그녀가 읽은 책들, 그녀가 걸었던 산책길들, 그녀가 여행하며 느낀 낯선 공기들의 나라를 나도 꿈꾸게 되는 간절한 소망들. 그런 소망 앞에 밤길이 두려워 산책을 나서지 못하고, 낯선 공기가 두려워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내게 그녀의 그림자는 너무 아름답고 찬란하고 멋져보였다. 그 자유로운 그림자 속에서 스스로 옥죄고 있던 걱정과 불안들로 점철된 내 그림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내가 하지 못할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는 기준은 온전히 내가 정하는 것임에도 마치 다른 기준이 있는냥 핑계대고 숨어버리는 못난 내 모습들.
그러니 소망한다. 나를 옥죄는 나로부터 벗어나 무한한 세계를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작가의 집을 찾아가고, 좋아하는 밤산책을 다녀오고, 좋아하는 책들을 마음껏 읽고 마음껏 느끼게 될 수 있기를.
실은 정여울 저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던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 작은 편견 때문에 이렇게 좋은 이야기들을 놓칠뻔한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한 마음이 든다. 인생 도처에 고수가 있다던 유홍준 교수님의 말씀처럼, 그녀역시 그녀가 살아내는 삶에 있어 누구보다 훌륭하고 멋진 고수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 작가 너무 좋아~' 라는 외침을 자제하자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좋아지고 닮고싶은 작가가 너무나도 많은고로 너무 헤퍼보이는 독자는 되지 말자고, 소리없이 묵묵히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듬직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열렬한 독자가 되어보자고 생각해본다. 무튼 그녀가 꿈꾸는 노년의 모습까지도 닮아가고 싶은 나는 그녀의 이야기로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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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모습이 내 30년 후였으면' 하고 꿈꾸게 만드는 얼굴들이 있다. 자기 안의 세계에 깊이 침잠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는 노인들을 보면, 무턱대고 닮고 싶어진다. 나도 저렇게 고요하게 늙어가고 싶다. 나도 저렇게 당당하게 늙어가고 싶다. 책을 읽는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떤 고결함과 위엄이 뿜어져 나온다. 세상 누구도 그녀만의 책 읽는 시간을 방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깨달았다. 강인함이란 곧 고결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p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