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픽 미스터리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이재익 옮김 / 달콤한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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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독자를 넘어서 자신의 책을 출간하고 싶은 꿈이 있다. 작가지망생은 차고 넘치지만, 한 권의 책으로 내는 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자비출판의 방법도 있어서 출판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지만, 순수하게 작품성을 인정받아 책으로 나오기까지는 미미하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책을 소재로 하여 벌어지는 미스터리다. 미스터리라고 해서 공포를 느끼는 이야기는 아니다. 미심쩍은 사건을 다른쪽 시선에서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추적하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도입은 미국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작품 <임신중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남자 주인공인 도서관 사서가 나오는데 그 도서관은 출판사들이 거절한 모든 책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그의 생각은 열혈 독자에 의해 누구도 원하지 않은 책들의 도서관은 실현된 모양이다. 정말일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것을 모티브로 하였을까.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 크로종 시립도서관이 생긴다. 재미있는 구성으로 몰입하며 읽을 수 있다. 대사도 얼마나 맛깔 나는지 읽다가 쿡쿡 웃게 한다. 출판되지 못한, 그러니까 거절당한 원고를 모두 받아준다는 기상천외한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이 도서관의 관장인 구르벡이 그 프로젝트의 기획자다. 이 아이디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불케 하는 여정이 이어진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면서 천 권에 달하는 원고가 쌓인다. 구르벡은 원고에 파묻혀 지내가다가 중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내가 있었는데, 단 몇 주 만에 집을 나가고. 아무도 왜 나갔는지 모르며, 소문만 무성한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구르벡이 이 미스터리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걸까. 궁금증이 폭발하며 다음 장을 넘기느라 바쁘다.

 

 어릴 때부터 꿈꾸던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델핀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매력적인 아가씨다. 작가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 그녀는 젊은 작가 프레드 코스카의 데뷔 소설을 발견하여 강렬한 촉을 느끼면서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이들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하여 프랑스 서쪽의 땅끝 마을 델핀의 고향으로 휴가를 보내러 갔다가, 크로종 도서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뼛속까지 편집자의 임무에 충실한 델핀이 그렇게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흘려 들을 리가 없다. 단짝이 된 프레드와 함께 탐방한 도서관에서 걸작을 발견했다며, 흥분한다. 책 제목은 <사랑의 마지막 순간들>이며, 글쓴이는 앙리 픽. 여기서 가장 백미는 사랑의 마지막 순간을 푸시킨의 임종 순간과 교차시켜 묘사했다는 것.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언급된다. 이 작품을 보니 발레리나 강수진이 떠오른다. 강수진의 은퇴작인 <오네긴>은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 차이코프스키의 서정적인 음악을 더한 <오네긴>으로, 자유분방하고 오만한 오네긴과 순진한 시골 처녀 타티아나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이처럼 실명으로 언급되는 작가와 작품의 이야기도 지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앙리 픽은 평생을 피자 요리사로 살다가 2년 전 죽은 인물로 밝혀진다. 미망인 마들렌 할머니와 딸 조세핀을 만나 인터뷰하며 야단법석이다. 설마 진짜 앙리가 소설을 썼을까 의아해 하다가 달리 방법이 없으니 모두 믿는 분위기로 휩쓸린다. 언론, 방송의 홍보 효과를 얻은 이 사건은 엄청난 파급력으로 당사자들과 주변을 흥분시킨다. 고전문학을 읽다보면 주인공이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친인척의 거대한 재산을 상속받는 상속자가 되는 꿈같은 횡재가 종종 들어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황상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고인(故人)이 소설을 남겼다니, 믿기 어렵지만 작품의 내용에서 자신들의 자취를 찾아낸다. 이건 내 이야기다 라며 짜 맞춘다. 약간의 억지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이런 상황이면 집 나갔던 남편도 돌아온다. 바로 조세핀의 전남편 마르크. 아내를 배신하고 떠난 마르크의 속셈은 뻔하다.

 

 한편, 믿기 어려운 이 사건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한때 악명 높은 문학평론가로 일했던 기자 출신 루슈가 등장한다. 여러 단서를 모으기 위해 조세핀에게, 또 조세핀의 가게로 찾아가는 등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열정적이다. 앙리의 친필 편지를 입수하는 순간 어느 정도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낸 듯하다. 이것은 어떤 반전으로 이어질까.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찡한 감동도 있다. 아버지 생전에는 그다지 친밀감도 느끼지 못했던 조세핀은 과거를 떠올린다. 아홉 살 때 받은 편지를 찾으면서 많은 음반을 뒤적이고 거기서 추억을 되새긴다. 부친 사후(死後)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소설을 쓴 아버지가 위대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물질만능의 태도 또한 여실히 드러난다. 진실의 여부는 안중에 없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평범한 사람들이 예상치 않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면 우쭐하면서도 남의 옷을 입은 듯 마음은 불편하다. 마들렌과 조세핀도 차츰 평정을 되찾으려 한다. 진실을 알아야겠다며. 구르벡의 뒤를 이어 도서관장이 된 마갈리 등 주변 인물들의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심경의 변화도 흥미롭다.

 

 결국 초반에 잠깐 출현했다가 죽은 구르벡은 미스터리를 제공한 셈인가. 그것을 집요하게 파헤치려는 루슈. 루슈와 조세핀의 조합은 의외로 잘 어울린다. 애써 찾은 진실을 외면하고 적절한 선에서 현실과 타협하고 안주하려는 인간의 본성 역시 들어있다. 구르벡은 왜 자신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앙리의 이름을 빌렸을까. 단 몇 주를 함께 살았던 마리나를 사랑했지만, 붙잡지 못한 그 안타까운 마음을 책으로 남겼고,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하는 마음에서였을까.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안고 벌써 후반부에 다다르게 된다.

 

 몇 개의 반전으로 이렇게 마무리되는 건가 싶었는데...

, 이건 또 뭐지?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인간의 이기심이 보인다. 책으로 성공하고 싶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해서 유명세를 타고 싶어 하는 편집자를 비롯한 출판계의 인물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더니, 트릭이 들어 있었다. 여우가 자기 꾀에 넘어간다고 하는 상황과 흡사하다. 영문도 모른 채 이들의 마케팅 전략에 평범한 마들렌 할머니와 딸 조세핀은 휘말렸던 것인가. 책 한 권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기 위해 온 역량을 쏟는 출판사와 평론가 영업대리인들의 역할을 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잊을만하면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사건이 나온다. 이것은 더 큰 사건이다. 실제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을까, 의아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미스터리다.  단지 재미있게 읽고 약간의 교훈과 감동의 여운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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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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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장면은 아기가 죽었다.’는 처참한 상황에 쇼크 상태의 어머니가 절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사건이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 의문을 갖고 하나씩 단서를 찾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거칠다고 할까. 격정, 혐오감이 배어 있다. 보모 루이즈는 아이들에게 공포심을 유발하는 놀이를 하며,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화가 프랑크의 그림은 고통으로 꼼짝하지 못하거나 황홀감에 마비된 여자들의 몸이었고, 그것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루이즈의 남편 자크와 루이즈는 타인의 고통, 공포를 보며 그것을 즐긴다. 이렇게 가학적이고, 분노를 간신히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불안감이 느껴진다. 이는 다름 아닌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누군가를 향해 분노와 혐오로 펄펄 끓고 있기 때문이다.


 폴과 미리암 부부에게 딸 밀라와 아들 아당이 있다. 특히 둘째 아당은 미리암에게 집에서의 안온한 삶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핑계일 만큼 아이들을 돌보는 모성애로 언제까지나 행복할 줄 알았다. 언젠가부터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편안한 행복감이 삐걱거린다. 시어머니와도 마음이 맞지 않아 매 순간 언제든 난투극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일 정도라니. 부모의 지원도 없이 어렵게 학업을 마치고 법관이 되었을 때 그 기쁨, 처음 변호사복을 입었던 순간이 되살아난다. 남편을 시기하고 아이들을 걸림돌로 느끼기 시작한다. “얘들이 날 산 채로 잡아먹는구나.’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어디선가 불행한 일이 불쑥 터질듯해서 내내 불안한 느낌이다.


 미리암이 일을 하기 위해 보모가 필요했고, 루이즈를 집에 들이게 되는데. 다루기 힘든 밀라를 제압하고, 밀라의 생일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아이들을 홀리듯 데리고 논다. 보모로서 역할 외에도 가사도우미 역할까지 훌륭하게 해낸다. 점점 빨리 와서 점점 늦게 간다. 시키지 않은 일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것을 불편해 하면서도 루이즈는 이제 이들 부부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


 ‘삶은 이런저런 책무와 완수해야 할 계약, 잊으면 안 될 약속의 연속이 되었다. …… 그들은 그렇게 일에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이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정신이 없다는 말을 한다. 그들의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잠을 위한 것일 뿐, 무언가를 응시할 자리는 전혀 없다.’(P149~150)


 폴이 너무 바빠서 아이들과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을 미리암이 걱정하자, 그래도 루이즈가 있지 않느냐며 안도한다. 미리암도 변호사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육아와 살림을 맡고 있는 루이즈 덕분에 행복감을 느끼는 분위기다. 폴의 어머니는 돈 욕심과 허영의 노예가 되었다고 통탄하지만. 두터운 신뢰감을 쌓아 가족 같은 존재가 되어 함께 그리스에서 휴가를 즐기게 된 루이즈는 처음 맛보는 아름다운 황홀감에 계속 이들과 같이 살고 싶은 꿈이 생긴다. 하지만, 정신없이 달려가는 삶은 방심한 사이에 어떤 틈을 노리고 독버섯처럼 무성해지는 무언가를 눈치 채지는 못한다. 제 살 속에 파고 든 손톱이 생채기를 내듯이, 루이즈는 어느새 그들의 삶 속에 너무 깊이 박혀 있었다.

 

도자기 인형처럼 예쁘고 차분한 태도와 우연히 들은 루이즈의 노래 소리는 아주 아름다웠다. 오래 지내다 보면 처음에 간과했던 본연의 모습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어느날 갑자기 루이즈에게 국고에서 온 빚독촉 편지, 루이즈의 너무 완벽하고 예민한 행동 등은 이들 관계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또한 화장 사건이라든지, 다 먹고 버린 통닭뼈를 깨끗이 닦아서 장식으로 올려놓은 기이한 행동으로 인해 혐오감은 더욱 커지고 해고 시키려는 결심에 이른다.


 예민한 루이즈가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 할 리가 없다. 남편으로부터 폭력의 상처와 빚을 떠안은 그녀에겐 어떤 것도 위안이 되어주지 못한다. 평생을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해 준 사람이 없었다. 빚을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고 딸 스테파니는 불쌍한 사고뭉치 망나니가 되고. 모든 술책을 동원해서 루이즈를 만나러 온 에르베에게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두 눈은 뚫어져라 그 손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의 손, 자리 잡는 손, 시작하는 손,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원할 손, 본색을 잘 감추고 있는 얌전한 이 손.’(P238) 어쩌면, 이렇게 간결한 문체 속에 예리함을 담고 있는지 경탄할 지경이다. 남자에게 덴 상처가 있는 루이즈의 심상은 꿰뚫어 보고 있다. 루이즈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녀의 몸을 숨길 둥지, 따스한 은신처 하나 마련하는 것이었다. 점점 루이즈의 마음은 강박관념으로 복잡해진다.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말끔히 해결하려면 아기가 절실하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누군가 죽어야 한다.’

이러니 벌을 받을 거야. 사랑할 능력이 없으니 벌을 받을 거야.’(P273)

이렇게 루이즈의 머릿속은 이 후렴구와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 작품이었다. 극한 상황에 처하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다. 극심한 가난과 고통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마저 앗아간다. 안으로, 더 깊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주변을 살필 수 없다. 사실 이야기의 정황상 끔찍한 이 사건을 막을 수도 있었다. 기이한 행동에 대한 의심을 품고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미리암은 특히 루이즈를 너무 믿는 구석이 있었고, 그녀가 누구인지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주위의 평판에만 의지한 잘못도 있다. 결국 그들만의 세계에 다가가지 못한 루이즈...


 이 작품 여성작가의 공쿠르상 수상작은 처음 만나게 된 작품이다.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여성들에게 민감한 육아 문제와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심리와 분위기를 밀도 있게 그리고 있어서 한층 더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또는 각국의 내전으로 인해 유럽으로 유입된 난민들이 기존 사회에 투입되어 불협화음의 상황을 빚게 되는 사회의 단면도 짐작할 수 있다. 또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을 위한 복지의 미비는 생활의 불안정을 야기하고,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현실성도 보인다. 스릴러 같기도 하고 우화 같은 느낌도 드는 이야기, ? 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속도감 있게 몰입할 수 있는, 결코 달콤하지 않은 현실의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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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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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는 전쟁에 관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단순히 아군이 이기는 장면에 환호를 하며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렸지, 그 이상의 생각은 해 보지 못한 것 같다. 이 작품을 만나고 전쟁이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전쟁에 임해서는 어떻게든 적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 적을 죽이는 것에 대해 어떤 일말의 양심적 거리낌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입을 빌려 적을 죽인, 즉 살인을 했다는 자책감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인간적인 성숙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군대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리사들을 주된 배경에 내세워 전장(戰場)에서 겪는 다양한 사건과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많은 것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193991일 하켄크로이츠의 상징인 나치스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프랑스의 항복으로 나치스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탈리아와 일본은 독일과 동맹을 맺으면서 두 번째 세계대전의 구도로 들어간다. 이렇듯 유럽은 나치스 하에서 혼란한 상황이었고 미국은 대공황으로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194112월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을 폭격,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였고 수많은 젊은이들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자는 슬로건하에 너도 나도 지원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 작품은 세계 최대 전쟁인 나치 독일과 연합군의 전쟁사와 허구를 가미하여 탄생한 전쟁 소설이라 하겠다.


 ‘먹는 것이 살아가는 낙이었던 티모시()(‘키드로도 불린다)은 가족의 만류가 있었지만, 할머니의 응원에 힘입어 입대를 결심한다. 얼룩덜룩 자국이 남아 있는 낡은 레시피 공책을 가지고. 배치를 받은 기지에서 조리병 증원 모집 공고를 보고 마음이 동하는데, 사실 군대 내의 조리병은 무시당하거나 미움을 받는 분위기였다. 어쨌든 마음이 간절하다보면 누군가 끌어당긴다. 팀이 밥을 먹는 것을 보고 에드워드(에드)는 조리병을 권유하고, 오등 특기병이 되어 미 육군 제101 공수사단 제 506 낙하산 보병연대 제3대대 G중대 관리부 소속 조리병이 된다. 팀과 에드, 디에고, 라이너스 이들은 절친이 되어간다. 이들의 첫 임무로 19446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투입되어 C-47 수송기에서 강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코탕탱 반도에 낙하하여 보급 물자 확보, 사령부 및 구호소 설치 지원, 대원들의 식사 관리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한 가운데 적의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전쟁터와 기지 내에서 기이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낙하산을 모으는 라이너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600상자나 되는 분말 달걀, 네덜란드 민가에서 벌어지는 얀센 부부의 죽음, 유령을 보았다는 디에고... 기이한 이 사건들을 상부의 손을 빌리지 않고 동료들끼리 해결을 해 나가는 구성이다.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는 사건의 전모에서 군대 조직 내의 비리나 군인의 아픔이 나타난다.


……전쟁터만큼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경계가 모호한, 연옥 같은 장소는 없잖냐. 6월에 강하했을 때부터 우리는 각자 사신을 등에 지고 신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어. 나도, 너도, 적들도 다들 이미 유령이나 다름없다고. 진짜가 걸어 다녀도 이상할 거 없지.”(P349)


 유령의 소리를 듣고 하루하루 두려움에 의기소침하는 디에고. 이 사건에는 병사의 공포심과 고독이 있었다. 오로지 명령에 의해 움직일 뿐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군대다. 다치고 아파서 구호소에 들어가면 일시적으로 전선을 벗어날 수 있지만, 피냄새가 진동하고 아픔에 절규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는 일은 또 다른 고문이다. 전쟁터는 연옥이며 구호소는 연옥에서도 가장 어두운 밑바닥, 지옥과의 경계에 있다는 말이 아픔으로 다가온다. 싸울 수 없게 되니까 상처를 내고, 죽지 않을 만큼만 자해를 해서 본국으로 송환되기 위해서. 유령의 소리는 바로 그런 병사의 자해 소동으로 매듭을 짓는다.


……돌아갈 수 있을까.”

당연하지.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던힐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단언했다. 평소답지 않게 말수가 많았다. “가족이 웃을 수 있는 건 렌즈 저편에 네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이런 사진은 영원히 못 찍게 될 거다. 그러니까 살아야 해.”(p331)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은 사람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종전(終戰)의 기약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은 체념을 부르기도 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힘없고 가난한 사람은 전쟁터로 내몰린다. 약간의 충성심과 치기어린 혈기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돈에 이끌림을 받는다. 제각각 사연을 품은 채로 만난 이들은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내가 죽거나, 네가 죽을 수 있는 곳이 전쟁터다. 부상을 당해서 구호소에서 죽어가기도 한다. 눈을 뜨면 팔, 다리가 붙어 있나 확인해야 했으며, 붙어 있으면 안도감을 느낀다. 겹겹이 쌓여 있는 시체 더미,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배고픔을 함께 겪은 우정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참담하기도 하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동료를 바라보아야 하는 아픔이다. 먼저 보낸 수다쟁이 오하라, 안경잡이 에드. ‘만약이라는 말은 후회와 한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생사를 같이 했던 형제 같은 전우를 잃은 상실감에 목이 메인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혼자 외떨어지는 게 싫어서, 구호소에 가기 싫고 동료들과 함께 총을 들고 싸우는 편이 훨씬 낫다는 말도.

 

닥터 브로콜리는 칠판에 아무렇게나 갈겨썼다. ‘열등 인종(운터멘슈)’. 유대인. 그리고 침략국에서 선별된 사람들이다. 녀석들은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의 생활을 어느 날 갑자기 빼앗고 노예로 부리면서 그들이 재배한 식량을 독차지한다. 침략이란 곧 스스로를 배불리기 위해 피지배자에게 굶주림을 떠넘기는 행위다.(p353)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없어지지 않아.”(후략)(p485)


 고래(古來)에도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살상하고 수백 수천 년 된 문화 유적지를 파괴한다. 자신들의 이념을 강요하려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다. 소중한 생명을 하찮게 생각하는 인간 경시의 현실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무섭게 파고든다. 틀린 주장이었으면 좋겠지만,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오랜 역사에서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작가는 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생긴 정의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의도로 집필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리얼하게 묘사하기 위해 많은 서적, 웹사이트, 영상 작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본문에 등장하는 독일어는 독일인에게 감수를 부탁했으며, 군사 용어나 미군, 독일군의 에피소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 하나의 나의 느낌은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에 속한 일본,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양심적 거리낌이 이 작품을 쓰는 작은 계기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미스터리한 사건을 하나하나 해결해 가는 스토리의 구성은 놀랄 만큼 재미있다. 전쟁터의 젊은 군인의 이야기로 유쾌 발랄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전쟁으로 인해 인간과 인간의 삶은 어떻게 바뀌는지 보여주는 감동의 휴먼 드라마였다. 아직도 남아있는 인종차별 문제를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입대하여 전쟁터의 다양한 사건, 사람들을 보면서 내면이 성숙해가는 성장소설의 단면도 보여준다.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전쟁도 삶의 한 부분이라면 어디서든 있을법한 이야기다. 현실에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이상 깊이 있는 울림을 주는 전쟁터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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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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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 어느 때 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과연 누가 될까에 관심이 쏠렸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가즈오 이시구로가 수상한 것에 놀라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 번도 작품으로 만난 적이 없는 작가인데다 부커상 수상, 노벨상 수상, 제목에서 느껴지는 여운까지 이 책을 선택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은 감성적인 향수였다. 남아 있는 나날을 의식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았을 때 어떤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달링턴 가()에서 위대한 집사35년을 살아온 스티븐스는 새 주인 패러데이로부터 때로는 휴식도 필요하니 여행을 해 보는 게 어떠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는다. 뜻밖의 호의에도 별다른 확답도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7년 만에 받은 켄턴양의 편지를 받고 여행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오랜 세월 이 저택의 담장 안에서 영국의 진면목을 보는 특권을 누려왔지만, 바깥세상의 구경은 아무래도 마음이 설레는 모양이다. 일만 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면 어쩔 줄 모른다. 수십 년을 몸담고 있던 달링턴 가()의 모습을 먼발치로 바라보는 일은 불안하고도 낯설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분리 불안을 느끼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고급 양복 차림에, 어르신의 포드를 제공받고, ‘달링턴 홀이라는 주소를 기입할 때는 우쭐함을 즐기기도 한다. 처음의 불안감은 서서히 걷히면서 자연의 풍광에 동요된다. 영국의 풍경을 세상에서 가장 깊은 만족을 주는, ‘위대함이라는 단어로 요약하며 감탄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미국인이면서 영국을 대단히 사랑했다던 헨리 제임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 인생은 거대한 옛 영국 정원이고, 시간은 끝없는 영국의 오후라고 행복하게 믿고 있다.’는 말.

 

 아, 이제 영국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풍경에 대한 위대함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 업계에서 어느 날 갑자기 부상하거나 눈 밖에 나기도 하는 직업인의 비애도 볼 수 있다. ‘헤이스 소사이어티의 기준인 일류급집사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또 하나는 품위를 집사의 필수 요건으로 규정지으며 나름대로 직업의 소명의식을 설파하기도 한다. 복종하면서도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저들의 노력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이렇게 최고의 경지를 드러낸 영국의 풍경의 위대함위대한 집사를 견주어 설명하는 자부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집사로서의 일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집사라는 직업인의 세계를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줄 수 있을까 감탄할 지경이다. 독자들이 좀 지루해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절도 있는 당당한 모습은 대충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어쩌면 다른 것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고 일에만 목숨을 거는 상황이다. 안전한 밧줄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어떤 날은 좀 느슨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해야 한다. 저명한 저택에 소속되어 일하며 특권을 누리는 것을 평생의 명예로 여긴다. 이렇게 지나치게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에게는 사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법이다.

 

 솔즈베리를 시작으로 웨이머스까지 6일간의 여행길의 여정이 들어 있다. 오롯이 오감으로 풍광을 느끼는 여행은 아니다. 과거의 추억을 회고하는 여행이라고 할까. 모처럼 새 주인 미국 신사가 베풀어준 여행인데, 일에서 벗어나 마음으로 즐기는 여행이 아닌 자신의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는 여행이라니. 좀 서글프다.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아, 이건 우리 시대의 미생이 아닌가, 라는 느낌이었다. 일에 파묻히고, 완벽주의에 사로잡혀서 오늘의 행복을 자꾸만 뒤로 미룬다. 오늘 조금만 참으면 내일은 좀 더 행복할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참자. 그리고 자기 본연의 기쁨보다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먼저 신경 쓴다. 충성을 넘어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일상이 된다. 평생을 집사로 살아오면서 모범적으로 일을 수행해왔다. 한 치의 어긋남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것을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티븐스는 자신의 일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택이 나는 은 식기를 칭찬하면 그것에 무한한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

 

 스티븐스에 대한 켄턴양을 향한 마음이 이 책 소개에서는 안타까운 사랑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내가 읽어 본 바로는 그런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굳이 그에 맞는 상황은 켄턴양 쪽이라고 할까. 오히려 스티븐스는 그녀의 마음에 대해 눈치가 없었거나, 모른 척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와 같이 있는 자리에서도 언제나 사무적이고 늘 일이 우선순위였다. 집사로서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과 태도, 거기에 품위까지 연출해야 했으니. 분위기와 그녀의 태도(마음)를 읽어내는 것은 서툴렀다고 할 수밖에. 손님을 핑계대고 급히 서둘러 나가면서 켄턴양에게 매번 등을 보여야 했으니까. 그녀의 못 다한 이야기와 끊이지 않는 한숨은 눈치도 못 챈 것이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있던 격동기의 영국과 세계정세를 보여준다. 달링턴 홀은 숱한 정치가들이 모여드는 회담의 장이었다. 또한 대영제국은 미국의 현실주의에 밀려 저물어가는 상황이었다. 여행길에서 듣는 달링턴 경의 평가는 스티븐스의 마음을 무척 불편하게 한다. 게다가 젊은 카디널 경으로부터 뜻밖의 질책을 들으며 나치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주한다.

 

어르신은 정말 고귀하신 양반이오. 그러나 이 현실에서는 수렁에 빠져 계시오. 그분은 지금 조종당하고 있어요. 나치들이 그분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소, 스티븐스? 바로 이게 적어도 지난 3~4년 사이에 진행되어 온 일의 실상이란 걸 알고 있느냐 그 말이오.”(P276)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제가 볼 때 나리는 지극히 훌륭하고 숭고한 작업을 하고 계실 뿐입니다. 어쨌거나 유럽의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저는 나리의 훌륭한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P279)

 

 그렇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했다. 맹목적인 충성이 기계적으로 몸에 밴 스티븐스는 자신의 본분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 신사 중의 신사라고 믿으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주인에 대해 그런 말을 하다니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고 치부한다. 입으로는 직업적 권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인의 도덕적 진가에 있다고 말했으면서도,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눈과 귀는 아예 닫아버린 것이다. 불편하니까. 그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단지 명령에 복종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뿐이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두 명의 하녀를 해고시키라는 주인의 명령도 아무런 감정 없이 처리한다.

 

 자신의 직업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스티븐스도 회한은 있었다. 하염없는 세월을 일속에 파묻혀 지내다가 노구가 된 스티븐스는 이제 자신을 돌아다본다.

 

사실 나는,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P298)

 

"달링턴 나리는 나쁜 분이 아니셨어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 있는 분이셨어요. ……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P299)

 

"이봐요, 형씨.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소만, 만약 나한테 묻는다면 이런 태도는 정말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알겠어요?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아선 안 됩니다. 우울해지게 마련이거든요. ……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P299~300)

 

 켄턴양을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던 일말의 희망도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그나마 그녀는 스티븐스보다는 현실적인 안목이 있어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임종마저 포기하고 오직 자신의 본분을 충실하게 이행한 것에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다고 자부하는데 이것을 어떤 논리로 설명할 것인가. 무엇을 위한 삶이고, 그 충성심으로 무엇을 보상받기 위함인가. 맹목적인 믿음은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분별할 수 없는 어리석음만을 남긴다. 학교 우등생이 사회에서는 열등생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임했지만,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광채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완벽한 인간이 될 수는 없지만, 옳고 그름을 가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일괄 거래의 한 품목으로 주인에게 양도된 스티븐스는 다시 시작하려 한다. 새 주인의 농담에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쩔쩔 매던 그는 이제 좀 더 융통성을 가지게 되었을까. 많은 날은 갔지만, 조금 남아 있는 날도 소중하다. 마음을 달뜨게 하는 여행은 아니다. 지난날을 회고하는 그의 여정에 동참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나아갈 길을 수정도 하면서 소중한 무언가를 알아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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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인형 살인사건 봉제인형 살인사건
다니엘 콜 지음, 유혜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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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 <봉제인형 살인사건>은 런던 도서전을 통해 영미 현대문학계에 혜성처럼 등단한 신예 작가 다니엘 콜의 작품이다. 추리스릴러 소설의 대가의 반열에 오른 레이첼 애보트나 M.J.알리지 같은 작가들도 그의 등단을 새로운 천재 작가의 탄생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이민자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생활 문화의 대립 등으로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이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크게는 테러로 작게는 아무 연고도 없는 개인을 향한 범죄가 발생하기도 한다. 여타의 문학처럼 추리소설도 오늘의 현실이 반영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소설의 도입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올드 베일리 1번 법정의 중대 형사 재판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피고인은 파키스탄계 영국인으로 혼자 살며 택시를 운전하는 수니파 무슬림이며 이름은 나기브 칼리드다. ‘방화 살인범이라 불리는 그는 런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연쇄 살인범에 등극하였는데, 27일 동안 열 너댓 살 먹은 매춘부 스물일곱 명을 죽였다. 피해자 대부분이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산 채로 불에 타 죽었고, 증거도 불길 따라 사라졌다 한다. 이 세기의 재판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노숙까지 하면서 관심을 보였을 정도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DNA 증거가 신빙성이 없다는 의견이 우세하여 무죄로 판결이 난다. 그 이전에 피고인 나기브 칼리드를 체포하면서 칼리드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등 비난으로 현재 논란의 중심에 있던 수사관 윌리엄 올리버 레이튼 폭스도 참석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머리글자만 따서 일명 울프WOLF’라고 불렀다. 유죄를 확실시 하고 있던 울프에게는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다. 순식간에 법정에서는 격렬한 몸싸움과 함께 난동이 벌어진다.


 이 상황은 앞으로 어떤 사건이 어떤 흐름으로 진행이 될지 나름대로 추측을 하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추리소설을 접하다 보면 예전보다 범행의 수법이 날로 잔혹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전에는 범행의 대상을 독방에 가두어 놓고 고통을 주면서 유도를 하거나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잔혹한 범행을 하고도 모자라서 봉제인형을 만들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한 상황이다. 런던의 허름한 아파트의 천장에 매달려 있는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두 개의 팔다리, 몸통, 머리가 각각 주인이 다르다. 여섯 명을 살해하여 마치 인형을 만들듯이 꿰맸다하여 봉제인형 살인 사건이라 불린다. 그것도 여자의 몸통에 남자의 팔이나 다리를 붙이기도 하고 얼굴은 남자, 이렇게 죄 섞어 놓았다.


 그런데, 봉제인형의 얼굴은, 위에서 언급했던 세기의 연쇄살인범 나기브 칼리브가 아닌가. 교도소에 있어서야 하는 사람이 봉제인형의 얼굴이 되었다니, 경악할 노릇이다. 더구나 그렇게 여섯 명이나 희생되었는데도 범죄 현장에서는 피 한 방울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하고 수사는 미궁에 빠져있는데, 울프 형사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그것은 다른 예비 희생자 여섯 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다. 런던 경시청은 또 다시 긴박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유력한 용의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못한 채 시시각각 날짜는 다가온다. 마치 사업계획서처럼 범행의 대상자와 날짜, 요일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서 더욱 공포심을 조장한다. 어떤 원한으로 인하여 그런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으며, 여유만만한 도전장을 보낸 것일까, 점점 궁금해지는데...


 사건 하나에 여섯 명의 희생자가 걸려 있으니 더욱 정신이 없다. 오른 팔 주인, 왼팔 주인 등 여섯 명의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 언제나 사회를 놀라게 하는 흉악한 범죄가 발생하면 세간의 이목은 방송, 언론으로 집중하게 마련이다. 또한 수사계와 마찰 또한 빈번함을 알 수 있다. 방송계는 특종을 놓치지 않으려고 혈안이 되고, 수사팀은 하루빨리 범인을 잡기 위해서 분주하다. 둘 다 모두 제 일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 셈이다. 하지만, 조금만 속을 들여다보면 조직의 이기주의가 팽배하다. 먼저 성과를 내고 주목받아서 인정받으려는 욕심이 뻔히 보인다. 그들의 경쟁은 수사에 방해가 되기도 하거나 범인을 도와주게 되는 결과도 짐작할 수 있어서 양쪽의 긴장감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과연 이 사건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수사팀장 울프는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여섯 명의 명단 중 맨 마지막 순번에 울프 형사도 끼어있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함정은 아닌지 궁금하다. 용의자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는 가운데 여섯 명의 명단 중 1번인 턴블 시장(市長)을 보호하려고 경시청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조사실에 데려다 놓았는데, 오히려 그 곳에서 죽는다. 시장(市長)은 천식이 있어서 천식 호흡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인화성 물질이 묻은 것을 모르고 담배를 피우다가 어이없게 불에 타 죽는다. 그 다음 순번의 지명자도 어이없는 죽음으로 반전을 거듭한다.


파우스트 거래라는 용어가 나온다. 악마라고 자처하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 복수를 위한 살인을 의뢰하고, 악마는 의뢰자가 원하는 복수를 대신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진짜 범인과 다른 한 명의 누군가 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말한다. 상상도 못했던 상황을 알아버렸으니...

애드먼즈는 재산범죄수사팀에 있던 경관이다. 별로 존재감 없는 신입이었는데, 원래 신입사원의 열정이 넘치듯이 서서히 성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며칠 씩 집에도 못 들어가고 열성적으로 조사하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는데, 애드먼즈의 주장은 무시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여기서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하여 여념이 없는 모습과 어느 국가, 사회에 만연한 관료주의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자신이 맡은 의뢰인을 무죄판결을 받게 하고 성공보수를 챙기기 위해 비양심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는 변호사들의 현주소는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사회인가 싶다. 섬뜩한 범죄 이야기를 다루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 사회에 진정한 정의가 작동하고 있는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긴장감을 가지고 상상에 상상을 거듭하면서 몰입할 수 있는 스토리의 구성도 나름의 흥미를 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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