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어느 때 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과연 누가 될까에 관심이 쏠렸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가즈오 이시구로가 수상한 것에 놀라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 번도 작품으로 만난 적이 없는 작가인데다 부커상 수상, 노벨상 수상, 제목에서 느껴지는 여운까지 이 책을 선택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은 감성적인 향수였다. 남아 있는 나날을 의식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았을 때 어떤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달링턴 가()에서 위대한 집사35년을 살아온 스티븐스는 새 주인 패러데이로부터 때로는 휴식도 필요하니 여행을 해 보는 게 어떠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는다. 뜻밖의 호의에도 별다른 확답도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7년 만에 받은 켄턴양의 편지를 받고 여행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오랜 세월 이 저택의 담장 안에서 영국의 진면목을 보는 특권을 누려왔지만, 바깥세상의 구경은 아무래도 마음이 설레는 모양이다. 일만 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면 어쩔 줄 모른다. 수십 년을 몸담고 있던 달링턴 가()의 모습을 먼발치로 바라보는 일은 불안하고도 낯설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분리 불안을 느끼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고급 양복 차림에, 어르신의 포드를 제공받고, ‘달링턴 홀이라는 주소를 기입할 때는 우쭐함을 즐기기도 한다. 처음의 불안감은 서서히 걷히면서 자연의 풍광에 동요된다. 영국의 풍경을 세상에서 가장 깊은 만족을 주는, ‘위대함이라는 단어로 요약하며 감탄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미국인이면서 영국을 대단히 사랑했다던 헨리 제임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 인생은 거대한 옛 영국 정원이고, 시간은 끝없는 영국의 오후라고 행복하게 믿고 있다.’는 말.

 

 아, 이제 영국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풍경에 대한 위대함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 업계에서 어느 날 갑자기 부상하거나 눈 밖에 나기도 하는 직업인의 비애도 볼 수 있다. ‘헤이스 소사이어티의 기준인 일류급집사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또 하나는 품위를 집사의 필수 요건으로 규정지으며 나름대로 직업의 소명의식을 설파하기도 한다. 복종하면서도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저들의 노력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이렇게 최고의 경지를 드러낸 영국의 풍경의 위대함위대한 집사를 견주어 설명하는 자부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집사로서의 일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집사라는 직업인의 세계를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줄 수 있을까 감탄할 지경이다. 독자들이 좀 지루해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절도 있는 당당한 모습은 대충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어쩌면 다른 것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고 일에만 목숨을 거는 상황이다. 안전한 밧줄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어떤 날은 좀 느슨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해야 한다. 저명한 저택에 소속되어 일하며 특권을 누리는 것을 평생의 명예로 여긴다. 이렇게 지나치게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에게는 사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법이다.

 

 솔즈베리를 시작으로 웨이머스까지 6일간의 여행길의 여정이 들어 있다. 오롯이 오감으로 풍광을 느끼는 여행은 아니다. 과거의 추억을 회고하는 여행이라고 할까. 모처럼 새 주인 미국 신사가 베풀어준 여행인데, 일에서 벗어나 마음으로 즐기는 여행이 아닌 자신의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는 여행이라니. 좀 서글프다.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아, 이건 우리 시대의 미생이 아닌가, 라는 느낌이었다. 일에 파묻히고, 완벽주의에 사로잡혀서 오늘의 행복을 자꾸만 뒤로 미룬다. 오늘 조금만 참으면 내일은 좀 더 행복할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참자. 그리고 자기 본연의 기쁨보다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먼저 신경 쓴다. 충성을 넘어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일상이 된다. 평생을 집사로 살아오면서 모범적으로 일을 수행해왔다. 한 치의 어긋남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것을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티븐스는 자신의 일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택이 나는 은 식기를 칭찬하면 그것에 무한한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

 

 스티븐스에 대한 켄턴양을 향한 마음이 이 책 소개에서는 안타까운 사랑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내가 읽어 본 바로는 그런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굳이 그에 맞는 상황은 켄턴양 쪽이라고 할까. 오히려 스티븐스는 그녀의 마음에 대해 눈치가 없었거나, 모른 척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와 같이 있는 자리에서도 언제나 사무적이고 늘 일이 우선순위였다. 집사로서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과 태도, 거기에 품위까지 연출해야 했으니. 분위기와 그녀의 태도(마음)를 읽어내는 것은 서툴렀다고 할 수밖에. 손님을 핑계대고 급히 서둘러 나가면서 켄턴양에게 매번 등을 보여야 했으니까. 그녀의 못 다한 이야기와 끊이지 않는 한숨은 눈치도 못 챈 것이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있던 격동기의 영국과 세계정세를 보여준다. 달링턴 홀은 숱한 정치가들이 모여드는 회담의 장이었다. 또한 대영제국은 미국의 현실주의에 밀려 저물어가는 상황이었다. 여행길에서 듣는 달링턴 경의 평가는 스티븐스의 마음을 무척 불편하게 한다. 게다가 젊은 카디널 경으로부터 뜻밖의 질책을 들으며 나치 지지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주한다.

 

어르신은 정말 고귀하신 양반이오. 그러나 이 현실에서는 수렁에 빠져 계시오. 그분은 지금 조종당하고 있어요. 나치들이 그분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소, 스티븐스? 바로 이게 적어도 지난 3~4년 사이에 진행되어 온 일의 실상이란 걸 알고 있느냐 그 말이오.”(P276)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제가 볼 때 나리는 지극히 훌륭하고 숭고한 작업을 하고 계실 뿐입니다. 어쨌거나 유럽의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저는 나리의 훌륭한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P279)

 

 그렇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했다. 맹목적인 충성이 기계적으로 몸에 밴 스티븐스는 자신의 본분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 신사 중의 신사라고 믿으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주인에 대해 그런 말을 하다니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고 치부한다. 입으로는 직업적 권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인의 도덕적 진가에 있다고 말했으면서도,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눈과 귀는 아예 닫아버린 것이다. 불편하니까. 그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단지 명령에 복종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뿐이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두 명의 하녀를 해고시키라는 주인의 명령도 아무런 감정 없이 처리한다.

 

 자신의 직업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스티븐스도 회한은 있었다. 하염없는 세월을 일속에 파묻혀 지내다가 노구가 된 스티븐스는 이제 자신을 돌아다본다.

 

사실 나는,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P298)

 

"달링턴 나리는 나쁜 분이 아니셨어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 있는 분이셨어요. ……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P299)

 

"이봐요, 형씨.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소만, 만약 나한테 묻는다면 이런 태도는 정말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알겠어요?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아선 안 됩니다. 우울해지게 마련이거든요. ……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P299~300)

 

 켄턴양을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던 일말의 희망도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그나마 그녀는 스티븐스보다는 현실적인 안목이 있어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임종마저 포기하고 오직 자신의 본분을 충실하게 이행한 것에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다고 자부하는데 이것을 어떤 논리로 설명할 것인가. 무엇을 위한 삶이고, 그 충성심으로 무엇을 보상받기 위함인가. 맹목적인 믿음은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분별할 수 없는 어리석음만을 남긴다. 학교 우등생이 사회에서는 열등생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임했지만,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광채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완벽한 인간이 될 수는 없지만, 옳고 그름을 가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일괄 거래의 한 품목으로 주인에게 양도된 스티븐스는 다시 시작하려 한다. 새 주인의 농담에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쩔쩔 매던 그는 이제 좀 더 융통성을 가지게 되었을까. 많은 날은 갔지만, 조금 남아 있는 날도 소중하다. 마음을 달뜨게 하는 여행은 아니다. 지난날을 회고하는 그의 여정에 동참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나아갈 길을 수정도 하면서 소중한 무언가를 알아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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