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나‘와 오롯이 대면하는 시간이다. 글을 쓰려고 하는 동안은세상의 소란을 등질 수 있다. TV, 부엌, 시계, 가족, 전화 등 번잡한 일상적 장치와 분리가 가능하다. 컴퓨터와나사이에 들어차는 온기와안락과 고독은 오월의 아침 햇살보다 감미롭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 P9
값진 글을 쓰거나 알찬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다. ‘사노라면‘으로 쓸까 ‘살다 보면‘으로 할까, ‘쩨쩨하다‘가 맞나 째째하다‘인가 사전을 뒤지고 고만고만한 두 단어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로 보낸다. 그러다 보면 그 시간만큼은 전세자금 걱정, 아이들 성적 걱정, 부모님 건강 걱정 등 정체 모를 불안감이 사라진다. 그 점이 참 좋았다. 일상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그런 기회는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글쓰기라는 장치를 통해서 나를 세속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는 것들과잠시나마 결별할 수 있으니, 관성적 생활 패턴에서 한발 물러서는 기회만으로도 글 쓰는 시간은 소중하다. - P10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가 붙어 있었다. 내가 전화번호를 입력하자 선배가 왜 아르바이트를 하느냐, 글 쓰는 일을 해보라고 했다. 선배는그동안 쓴 글 세 편을 보내달라며 사보 편집자로 일하는 지인에게 나를 추천해주었다. 나는 부랴부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보냈고 그쪽에서 연락이 왔다. 첫 취재는 30년 봉사활동을 한 여성의 인터뷰였는데,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는 게 오래전부터 하던 일처럼 편하고 좋았다. 못할까봐 불안하지도 않았고 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름도 자유로운 자유기고가의 삶에 진입했다. - P12
나는 왜 쓰는가구직에서 취직까지 어떤 구체적 계획도 전망도 없이 단지 ‘글 쓰는삶을 고집하면서 내가 느낀 자유, 곧 암담한 상황 속의 홀가분한 마음이 잘 설명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하버드 대학에서 했다는 연설문에서 명료한 표현을 볼 수 있었다. "실패는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거해주었습니다. 저는 실패한 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저의 모든 열정을 가장소중한 한 가지 일에 쏟아붓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했던 실패를 경험했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 P13
나만의 언어 발명하기. 이것이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까닭이다. 모든 경험은 언어에 의해 규정된다. 그런데 재테크나 피부 관리에 관심이 없고 자식 명문대 보내기를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는 나는, 가방에 학원 전단지 파일을 넣고 다니고 휴대전화에 유명 강사의 연락처가 저장된 목동 엄마들과 달리, 등단한 ‘여류 작가도 아니면서 감히읽고 쓰는 나는, 아이들 사교육비보다 내 책값과 내 공부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나는 그냥 한마디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느끼고 꿈꾸고회의하는 감수성 주체로 살아가는 여자 인간은 있어도 없는 존재이자 이 시대에 사라지는 종족이었다. 여기 사람 있다, 는 내게도 유효한외침이었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은 걸까, 정말 나는 나쁜 엄마인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내가나를 설명할 말들을 찾고 싶었다. 나를 이해할 언어를 갖고 싶었다. 뒤척임으로 썼다. 쓸 때라야 나로 살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일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기억했다. - P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