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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세상이 너무 뒤숭숭하고 불안하다. 폭사, 궤멸 등 거칠고 원색적인 언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미디어를 강타하는 요즘이다. 4차산업혁명의 꽃이라는 AI를 전쟁에 활용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이기를 사람을 살상하는 데 사용하다니. 섬뜩한 공포감으로 두근두근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느릿느릿 이 시집을 읽어나갈 때만 해도 참 평화로운 세상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이란 공습으로 온 세상은 살얼음판이 된 듯하다. 계엄 후유증으로 힘들었던 날들이 겨우 진정되었나 싶었는데 이제는 힘의 논리로 한 나라를 파괴하고 수많은 초등학생이 죽었는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며 모골이 송연해진다.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다시 시집을 들었다. 예전부터 낯익은 제목인데 박 준 시인의 꽤 오래전에 나온 첫 시집이었다.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고 박 준 시인의 시집은 처음 만났다. 시를 자주 읽지 않아서 그런지 시는 늘 어렵게 느껴진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나 싶기도 하고 이건 무슨 의미일까 하는 시도 있다. 어떤 시인이 시는 읽는 독자의 것이라는 말, 즉 읽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에 용기가 생긴다. 짧은 시도 있고 산문시도 있는데 박준 시인의 시는 그리움과 다정함이 묻어났다. 오래전 추억이 눈앞에 어른거리기도 했다.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어뜨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워 있다‘
(생략)
’미인을 생각하다 잠드는 봄날,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나는 몸을 굴려 모아둔 열(熱)들을 피하다가 언제 받은 적 있는 편지 같은 한기를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던 것이었다
(p41)-<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중에서
봄날 낮잠을 잔 것일까. 미인은 예전의 연인이었을까. 어느 봄날 책을 읽다가 좋은 글귀를 발견했고 미인과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린다. 잘 진행은 되지 않은 모양이다. 대화는 엇나갔던 것 같고 둘의 마음도 그랬나 보다.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미인에게 분명하게 전하지 못하고 뜨뜻미지근하게 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자꾸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미인 때문에 늘 ‘손발이 뜨겁’다고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 받은 편지가 떠올랐고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버린 것이다. 늘 지나고 보면 아쉬운 일 투성이다. 그래도 되새길 추억이 있다는 건 우리를 설레게 하고 살고 싶게 만들지 않는가.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골목은, 왼편 담벼락과 오른편 옹벽처럼 닫혀 있다 막 올려다본 하늘이 골목처럼 어두워지고 있다
(p66)-<모래내 그림자극> 중에서
고등학교 시절 이 시의 묘사와 똑같은 골목을 걷다가 검고 음흉한 사람과 마주치고 소스라치며 달아난 적이 있다. 쫓아올까 봐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 시절엔 그런 사람이 어디든 있었다. 구부러진 골목길이 운치는 있지만 탁 트인 대로를 걷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이 시의 화자는 어두워지는 저녁에 친구들과 그림자극을 하며 놀았던 추억을 묘사한 것 같다. 자신의 몸보다 훨씬 길어 보이는 그림자. 내가 걸으면 계속 따라오는 그림자. 왠지 누가 쫓아오는 것만 같은 그림자.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 무서운 마음을 쫓으려고 노래를 부른다. 울지 않으려고 하나같이 고음(高音)으로 소리내어 노래를 불렀다고 화자는 회상한다. 내가 걷던 그 골목을 문득 걷고 싶어진다. 아마 벌써 사라지고 없겠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머리맡에 있던 초코파이 상자를 품에 안은 일로 그날을 기억합니다
한 여덟 시간 만의 공복이었을까요 상자의 절취선을 뜯어올라가면 으드드득 열두 개의 검은 달이 떴더랬습니다(p102)-<희망소비자가격> 중에서
와, 이런 제목으로 시를 지을 수 있구나. 과자 포장지에 쓰여 있는 희망소비자가격. 어린 시절 무엇이든 귀하던 시절 과자도 귀한 거였다. 아마도 기억에 초코파이를 처음 먹었던 게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까만 동그라미 안쪽에 들어있는 흰색은 크림처럼 녹는 것도 아니고 씹는 느낌도 특이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맛은 좋았지만 생전 처음 먹어보았으니 뭐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미묘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먹은 초코파이는 그 옛날의 맛과 식감이 전혀 아니었다. 처음 먹어본 처음 가져 본 그 무엇인가는 우리를 그 시절로 데려다주고 ’그날‘을 기억하도록 도와준다. 지금도 우리는 그 무엇엔가 의미를 붙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기별이 없는 당신을 생각하면 낮고 좁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울음이 먼저 걸어나오더군요(p105)-<해남으로 보내는 편지> 중에서
시의 첫 행이다. 이 시도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며 쓴 시 같다. 해남으로 떠난 후 오랫동안 연락이 없는 그 사람이 얼마나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까. 그렇다고 먼저 연락할 용기는 없다. 그저 답답하고 서러운 마음뿐이다. 그 마음을 ‘낮고 좁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과 동일시하며 자신도 답답한 마음에 울음이 터진다고 표현한 시인의 통찰에 감탄하게 된다. 시를 읽는 기쁨은 이런 것인가 보다.
문명도 발전도 좋지만 사람들이 조금 느리게 살려고 노력하면 좋겠다. 앞만 보고 가려 하지 말고 옆도 뒤도 살피며 걸었으면 좋겠다. 나 혼자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더불어 살아갈 때 위안을 얻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 존재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꼭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소중한 생명을 살상하는 전쟁은 함부로 벌이지 않을 텐데. 영원히 살 것처럼 함부로 행동하는 이가 너무나 많다. 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간이다. 지금 우리 세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