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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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낸 이 작품이 두 번째 공쿠르 상을 받으며 전 세계에 파문을 던졌다는 이 유명한 작품을 이제야 만나게 되었다. 묵직한 느낌의 제목과 달리 열네 살 소년 모모의 시선으로 담담하고 거침없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술술 읽혔고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 사람들이다. 유태인으로 열다섯 살 때부터 창녀 일을 하다가 오십 세부터는 창녀들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는 로자 아줌마, 권투선수를 하다가 엄마가 되고 싶은 롤라 아줌마, 평생 양탄자 행상을 하며 살아가는 하밀 할아버지, 이웃들의 의사 카츠 선생이 주된 등장 인물이다. 이들은 모모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람이란 다른 사람의 관심으로 멀어질 때 크나큰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는 걸 살면서 종종 목격하곤 한다. 그런 면에서 모모는 어쩌면 축복받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자 아줌마를 세 살 때 알게 되었고 예닐곱 살이 되었을 때, 모모는 자기를 우편환 때문에 키운다는 것을 알게 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엄마의 존재가 궁금해서 물어보면, 로자 아줌마는 배은망덕하다며 욕을 하고 울부짖었다. 바나니아 라는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송금되는 돈이 1년이나 끊겼어도 빈민 구제소로 보내지는 않았다. 로자 아줌마가 그렇게 모진 사람은 아니었다. 아직 어리지만 모세는 눈치가 빨랐고 로자 아줌마의 표정을 읽을 줄 아는 명석한 아이였다. 또래 아이보다 키가 컸으며 아주 잘 생긴 소년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로자 아줌마는 모모를 유달리 관심을 기울였을까.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 층 아파트에는 창녀들이 맡긴 아이들 일곱 명이 북적거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로자 아줌마는 이미 육십 오 세가 되었고, 95kg나 되는 육중한 몸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힘들다고 푸념하는데 그 모습은 모모를 불안하게 만든다. 엄마 얘기를 했다가 혼이 난 모모는 개를 키우게 해달라고 졸라서 훔쳐 온 푸들을 키우다가 마음대로 팔아버리고 받은 500달러를 하수구에 버리는 기행을 하기도 한다. 병색이 완연한 로자 아줌마의 모습을 보고 창녀들이 아이들을 맡기지 않자, 생활고에 빠졌다가 다시 아이들이 오자 아이들의 밑을 닦아주면서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어른스러운 모습에 짠하고도 웃음이 났다. 그러면서도 우산 아르튀르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을 입혀서 어릿광대 놀이를 하는 천진난만한 모모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로자 아줌마는 아이들을 돌보기는커녕 자신의 몸을 건사하기도 힘들어졌다. 답답한 마음에 밖에 나갔다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면 모모는 무서웠다. 아침에 로자 아줌마가 눈을 뜨면 행복했고, 로자 아줌마 없이 혼자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겁이 났다. 나딘의 집에서 본 영화처럼 거꾸로 돌려서 로자 아줌마를 열다섯 살 적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려놓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현실은 모모에게 가혹하기만 하다. 정신이 나갔다가 제정신이 되자, 로자 아줌마는 사랑하는 모모에게 엉덩이로 벌어먹고 사는 일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암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온몸의 장기가 병들었다고 했다. 특히 뇌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죽기 전에 아들을 한번 안아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낯선 남자와 실랑이를 하다가 다른 아이를 가리키며 그의 아들이라고 속인다. 그 말에 이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라고 외치자마자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아들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감옥에서 11년을 살다가 막 나왔는데 눈앞에 아이를 두고도 안아보지도 못하고 죽다니 정말 안타까웠다. 자신조차 죽음을 앞두었으면서도 로자 아줌마는 그를 배려하지 않았다. 모모의 나이를 속이면서까지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그만큼 로자 아줌마에게 모모는 특별한 존재였다.

 



어쩌면 그들의 사랑도 끈끈한 동정과 연민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그녀가 창녀로 살다가 오십 세에는 다른 삶을 살자고 결심하고 창녀들의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살짜리 모모를 만나고 키웠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가운데 모모는 인생을 배워 갔던 것이 아닐까. 세상에 아무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로자 아줌마를 불쌍히 여겼다. 젊고 예쁜 나딘의 친절에 잠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로자 아줌마를 끝까지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

 


7층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하는 날들이 길어지자 모모는 슬프고 두려움에 휩싸인다. 로자 아줌마는 늘 말했듯이 억지로 목숨을 부지하며 병원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카츠 선생은 안락사는 죄악이라며 반대하는데... 수용소의 트라우마로 무섭고 힘들 때마다 쉬곤 했던 그녀만의 별장이었던 지하실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다. 모모는 자꾸만 변해가는 로자 아줌마의 모습을 감추려고 화장을 해주고 향수를 뿌려주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가 없었다. 돈이 없었고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변해버린 로자 아줌마... 결국, 악취를 맡은 이웃 사람들이 문을 뜯고 들어왔다. 죽은 로자 아줌마 옆에 모모는 누워 있었고. 어쩌면 모모에게 전부였을지도 모르는 로자 아줌마.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에서 살아야 할 자격이 있었던 로자 아줌마의 생은 그렇게 끝났다. 그래도 떠나는 길이 외롭지는 않았을 것 같다. 또 모모는 자기 앞의 생을 잘 살아갈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 로자 아줌마, 롤라 아줌마, 카츠 선생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가슴 속에 차곡차곡 채워 두었으니까.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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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6-21 23: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모모 축복 받은 아이

에밀 아자르 한 편의 영화처럼 살다 갔죠 ^^

모나리자 2022-06-22 14:50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어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스콧님~^^

그레이스 2022-06-22 08: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도 못만나고 있네요^^

모나리자 2022-06-22 14:51   좋아요 1 | URL
언젠가 곧 만나시겠죠~
더워졌어요. 건강 조심하세요~그레이스님.^^

새파랑 2022-06-22 1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도 <자기앞의 생>은 별 다섯이군요~!! 저도 에밀 아자르의 최고작은 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나리자 2022-06-22 14:56   좋아요 1 | URL
네, 정말 좋았어요.
공쿠르상을 두번이나 받을 만하죠!!
더운 날씨네요. 오늘도 화이팅 하세요. 새파랑님.^^

바람돌이 2022-06-22 2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낸 책은 저도 이 책만 봤어요. 그런데 뭐 이 책 하나만으로도 대가의 면모가 바로 드러나던걸요.

모나리자 2022-06-22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그런 생각.^^ 한권씩 읽어나가야겠어요. 굿밤 되세요. 바람돌이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