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일.
동양에서 사람이 죽으면 바로 저승으로 떠나지 않고, 이 세계에 49일 동안 머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소위 49제라는 의식을 치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가 편안하게 떠나기를 비는 의식이다. 아마 그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유족들도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가 될 수 있을 테고, 일종의 종결의식을 치렀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바로 그 의식이 있다. 그러나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검은 상복을 입고 죽은 이를 추모하는 엄숙한 의식이 아니라, ‘파티’로 그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남은 가족들이 그 날을 준비하는 이야기다. 조금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죽음을 꼭 우울하고 괴롭게만 마주하라는 법이 어디 있던가.
개인적으로 내가 죽으면 천편일률적인 장례식 같은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특히나 오늘날 기독교인의 장례식에 가보면, 이건 ‘기독교적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솔직히 말하면 이것저것 적당히 섞어서 만들어 놓은 짬뽕 같다.)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장례식이 왜 이렇게 음울할까.
한 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던 내용 중 하나는, 내 장례식에는 카레우동을 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까 싶긴 하지만, 조금은 더 유쾌하게 마지막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영화를 보면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
발자국 책.
영화의 제목에도 나오는 ‘레시피’는 죽은 오토미가 남긴 카드형태의 책을 말한다. 오토미는 오래 전부터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청소년들을 위한 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해왔는데, 아이들이 시설을 졸업해야 하는 때가 되면, 그 아이들에게 ‘발자국 책’이라는 걸 만들어 주었다. 여러 이유로 시설에 보내진 아이들에게 좋은 ‘과거’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 속 ‘파티’도 그런 시설에서 나온 청년 이모(니카이도 후미)가 나타나면서 준비가 시작된다. 무거운 집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소위 갸루 느낌)과 경쾌한 목소리로 등장한 그녀는, 환대하지 않는 가족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오토미로부터 받은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 꿋꿋이 일을 해 나간다.
사실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그녀도 나름의 상처가 있었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과거는 지워버리고만 싶은 시간들이었을 것이다.(이건 시설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 그런 아이들에게 오토미가 만들어준 ‘발자국 책’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과거라는 흙에 뿌리를 박고 거기서 양분을 얻으며 자라니까.
발구름판.
영화 속 이모의 출신 시설은 ‘리본하우스’라고 불린다. 장식으로서의 리본(ribbon)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의 리본(reborn)일 듯하다. 오토미의 49일 파티에 그녀가 돌봐주었던 시설의 청년들을 초청하려는 계획을 밝히자, 오토미와 함께 봉사를 해 온 노부인은 그 아이들을 초청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시설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지우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발구름판 같은 곳이니, 일단 뛰어 오르면 돌아올 필요가 없다는 말과 함께.
넘어져 있는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고, 마침내는 높이 뛸 수 있도록 해 주면서 정작 자신은 발구름판처럼 남아 잊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 이런 발구름판들이 많은 사회는 얼마나 건강해질까. 다음세대가 누려야 할 것까지 악착같이 약탈해 오늘 재물을 축적하는 기성세대들만 보던 눈이 신선해지는 느낌.
우리는 누군가에게 발구름판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새엄마.
영화 속 오토미는 유리코(나가사쿠 히로미)의 새엄마였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소개시켜준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는 일이 어디 쉬웠을까. 함께 가족끼리 공원을 갔던 그 날, 유리코가 일부러 오토미가 싸온 도시락을 바닥에 떨어뜨린 건, 어린 아이의 반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뻔히 보이는 그런 행동에 화대신 미소로 대응해준 오토미는 ‘엄마’였다.
영화 속 유리코는 남편의 외도로 친정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 10년 가까이 아이를 갖지 못했던 유리코는,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는 불륜녀의 전화에 버틸 수 없었다. 그런 유리코는 친자식도 아닌 자신을 정성껏 키워준 오토미의 모습을 돌이켜 보며, 꼭 배 아파 아이를 낳아야만 ‘엄마’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이와 관련해서 한국 사회는 모순적인 사회다. 한쪽에서는 전근대적인 핏줄 운운하며 집착을 하는가 하면, 또 한 편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버려진다. 인연은 꼭 ‘맺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맺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인연을 만들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을 정성을 다해 대하는 것, 그러면 되지 않을까.
일본영화 특유의 일상 속 감동이 잘 느껴지는 영화다. 추천하고 싶은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