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주인공 병수(곽도원)는 딱히 완벽한 정의로움을 구현하는 인물은 아니다. 강력계 경찰인 그는 동료 경찰들과 함께 적당히 뇌물을 받아 챙겨왔고, 아내의 성화로 갑자기 떠나게 된 해외여행에 동료들이 돈을 보태준 것도, 병수가 없는 사이 이루어질 감찰에서 그가 혼자 뒤집어쓰게 하려는 계획이었다.(손현주와 조재윤이 특별출연을 했다.)
그런 병수가 필리핀에서 우연히 만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무릎쓰는 건 조금 안 어울리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감독은 여기에 병수의 친구 용배(김상호)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개연성을 끌어내려고 한다. 온갖 정이 떨어질 것 같지만, 그래도 친구라 또 모른 척 할 수만은 없는 관계...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판단하려 한다. 종종 이런 구분은 사람에게도 적용되는데, 영화 속 병수를 보면(그리고 또 우리 자신을 보면) 한결 같이 선하기만 하고, 한결 같이 악하기만 한 인물이 얼마나 될까 싶은 생각도 든다. 우리 대다수가 어느 정도 선함에, 어느 정도 악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니까.(물론 영화 속에서 그 악함을 별다른 문제가 아닌 것처럼 치부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코미디를 표방한다. 주인공 병수도 약간은 어리숙한 면이 많아 보이긴 하지만, 그 사이드킥으로 등장하는 만철(김대명)이라는 캐릭터는 처음부터 슬랩스틱만을 염두하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시종일과 막히고, 부딪히고, 맞고, 나뒹구는...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대놓고 하는 슬랩스틱은 좀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유독 이런 걸 놓지 못하는 감독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코미디 가운데 조금은 서글픈 필리핀 현지의 상황이 자주 보인다. 영화의 상당 부분을 필리핀 현지에서 촬영하고, 현지 배우들도 여럿 출연하기도 한, 어느 정도 현지조사가 이루어진 영화였던 것인지 다양한 부분에서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보인다.(개인적으로 군에서 전역한 후 반 년 정도 필리핀에 머물렀던 경험이 있다)
1) 먼저 필리핀에서는 총기 소지가 상당히 자유롭다. 당연히 총기 사고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현지 지인에게 들은 말로는 면허를 취득하고 공식적인 총기점에서 구입하려면 약 400달러 정도만 되고, 영화 속처럼 암시장을 통해 얻으려면 1/4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물론 그제 잘 나가는 총인지는 알 수 없는데, 사실 총기 자체가 만들기 그리 복잡한 구조가 아니라서 여기저기서 사제 총기가 제작되고 있기 때문.
한 번은 새벽까지 어디선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다음 날 물어보니 인근에서 장례식이 있었다고 한다. 필리핀에서는 노래방 기계를 가져다가 밤새 노래를 부르는 풍습이 있다고. 만약 누가 시끄럽다고 항의라도 하고, 그게 싸움으로 이어지면.. 곧 집에 가서 대대로 물려오는 총들 들고 와서 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
2) 필리핀 인구는 1억 명이 넘는다. 하지만 경제 발전은 상당히 지체되고 있어서 실업률도 높고, 빈부격차도 심각할 수준이다. 하지만 오랜 스페인의 지배로 가톨릭의 영향력이 많아서 산아제한이나 피임을 터부시하기에 인구증가율은 또 매우 높다. 이런 여러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초래되는 비극적인 현상이 있었으니... 사람 목숨 값이 매우 ‘싸다’는 것.
청부살인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시골 마을 같은 데서는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돈을 받기 전까지 그 자리에서 시신을 치우지도 않기도 하는데(내가 오고가던 길에서 있었던 일이란다), 그 보상금이라는 것도 겨우 3, 40만원에 불과하다는 것. 영화 속에서는 만철이 경호를 위해 조금은 어설픈 2인조를 부르는데, 충분히 가능한 일.
3) 부패한 권력기관 때문에 돈이면 뭐든지 된다는 영화 속 패트릭(김희원)의 대사는 정말로 그렇다. 영화 초반 중요한 소재 중하나인 셋업 범죄이야기는 이미 유명하고, 내가 필리핀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한참 무슨 재판이 텔레비전에 중계될 정도로 이슈였는데, 지방 정부의 권력자와 관련된 엄청난 부패 범죄사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근데 그걸 보는 현지인들은 재판이 제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들 말했다. 이유는 역시 돈이고.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 보내는 예산은 온갖 명목으로 빼돌려지고, 그건 주지사로부터 최하위 행정단위인 ‘바랑가이’의 장까지 적당히 분배되어 지역구 관리를 위해 사용된다.(물론 상당부분은 착복되기 일쑤다) 이러다 보니 어느 동네 장이 바뀌면 그에 딸려 있는 수많은 자리까지 한 번에 바뀌니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선거를 한다.(당연히 또 선거 관련 살인사건도 자주 일어난다.)
영화는 이런 무시무시한 실제 상황을 코미디로 덮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썩 기분 좋게 웃을 수만은 없다. (물론 좀 나쁜 면만 많이 써 놓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필리핀에서 보낸 그 반년이 가장 행복한 기간 중 하나였다.) 여기에 조금은 억지스러운 영화의 결말도 그닥 인상적이지 못했고. 그래도 오랜만에 영상으로 보는 지프니와 길거리 가판대에서 팔던 많은 간식들, 딱 그 분위기의 간판들과 사람들이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